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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6-01)


주님의 마지막을 준비한 사람들

마태복음 26장 1-16절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할 때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지만, 안팎으로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도 실낱같은 희망의 전조가 보입니다.

 

  • 마태복음 26장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과 전하신 말씀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수난을 다시 한번 예고하고 나서(26:1-2),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1-16). 이름 없는 한 여자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반면(6-16) 내부의 유다는 예수님을 팝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1-5)

예수님의 죽음은 제2의 출애굽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새 이스라엘로 부르고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성취하는 데속적 죽음임을 알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취하신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죽음으로 나아가길 결심하는 동안,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의논합니다. 하지만, 백성 가운데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명절에 실행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월절에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릴 것을 말씀하십니다(1-2). 유월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출애굽기 12-13장).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유월절에 계획된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죄에서) 해방을 얻게 될 것을 내포합니다(참조 1:21, 20:28, 26:28).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로 불리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였습니다(3).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4). 결국, 예수님을 체포할 것입니다(47-56). 유대 지도자들은 폭동을 염려해서 명절이 지난 뒤에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습니다(5). 명절은 유월절'을 말합니다. 유월절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군중은 이미 예수님을 환영했기(21:1-17) 때문에 유월절에 예수님을 처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향유를 부은 여자(6-13)

구제도 아름답고 절약도 권장할 만한 미덕이지만, 예수님을 인정하여 섬기고 경배하는 일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거룩한 낭비’보다 더 효과적인 씀씀이는 없습니다. 한 여인은 매우 귀한 향유로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붓습니다. 제자들은 비난하지만, 예수님을 인정하고 섬기고 경배하는 일보다 앞설 순 없습니다.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6-13)

 

예수님과 제자 일행은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베다니로 가서 나환자 시몬의 집에 머뭅니다. 한 여자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열어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붓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1-19절에서 중심을 차지합니다. 제자들은 여인의 행동을 보고 화를 내면서 왜 값비싼 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줄 수 있는데도 낭비하는지 꾸짖습니다(8). 제자들은 예수님의 운명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여자가 기름을 붓는 사건이 구원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꿰뚫어 버시고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예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10). 가난한 자들은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시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예고하실 뿐 아니라 마땅히 모든 사랑과 희생을 받을 수 있는 신적 존재로 자신의 신분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준비한 행위라고 하십니다(12). 유대인들에게 장사를 지내는 것은 가장 큰 덕목이었으며,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같은 자선과 장례 또는 매장에 헌신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후자가 유대 문화에서는 더 칭찬을 받는 행위였습니다. 랍비 전통에서 죽은 자를 매장하는 일은 기부나 나그네를 섬기는 것이나 환자를 방문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윤리였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행위는 제자들이 말한 것과 같은 가난한 자를 위한 기부를 능가하는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해지는(24:14) 곳마다 여자가 행한 것을 기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13).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파송 받는 제자들을 통해 가능해집니다(28:19-20). 여기서 ‘이 복음’(τό ευαγγέλιον τούτο)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자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 곧 죽음을 위한 것이 기에, 이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복음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온 것이며(이사야 52:7), 이 나라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없이는 올 수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우주적 통치를 오게 만든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24:14의 그 나라의 이 복음(τούτο το ευαγγέλιον της βασιλείας)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사역의 초점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의 죽으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이 없었다면 하늘나라의 도래는 성취될 수 없었고 아들을 통한 구원(1:23) 역사의 절정도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돌봄과 관심은 끊어지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사역도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것과 같은 윤리적인 행위가 객관적으로 옳다고 해서 본문의 여자와 같이 예수님을 위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명의 여자처럼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행하는 헌신은 좋은 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셋째, 복음은 인격이 없는 기계가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격자들의 헌신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실현된 복음이 확장될 때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인간의 삶이 함께 전해집니다. 복음이 이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행위와 함께 전해지기 때문에 복음은 감동적이며 또 다른 목격자들을 양산합니다. 특히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을 복음을 전달받은 사람들은 잊지 말아야 하며 그런 행위를 진정으로 좋은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넷째, 본문에 여자의 이름이 없다는 점은 여자의 이름이 아니라 여자의 행위가 복음과 함께 전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 한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예수님이 전해지고, 복음을 가능하게 만든 예수님의 죽음이 전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만국에 전해지는 것은 복음이며 복음의 핵심은 여자의 행위, 곧 예수님의 죽음이 최고의 가치로 전해집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름이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이른 예수님의 생애보다 더 가치 있게 기억되는 것은 진정한 복음 아닙니다.

다섯째, 본 단락의 중심에는 여자의 행위가 나오며 이후 수난과 부활 내러티브에서 여자들은 예수님의 목격자들로서 언제나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여성은 주변부의 목격자가 아니며, 남자의 사역을 돕는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도 아닙니다. 마태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여성은 예수님의 목격자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데서 소외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파는 유다(14-16)

가장 값진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선택한 여인과 달리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가장 귀한 예수님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민란의 위험을 피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할 방법을 알려줄 것을 약속함으로써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포기한 계획에 불씨를 살려주었습니다.

 

14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14-16)

 

14-16절은 1-5절과 연결됩니다. 열두 제자 중 한 명(1)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으며(3-5), 그들과 예수님을 놓고 흥정을 벌입니다(14-16). 예수님로부터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듣고(12-13), 예수님의 나라가 자신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을 향한다는 사실을 감지합니다.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자가 예수님의 운명을 예측한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마태는 7:1-10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을 구약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해석할 것입니다. 마태는 은 삼십을 예수님의 몸값으로 받은 사건을 강조함으로써 유다의 탐심을 분명히 부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중한 것을 예수님의 목숨을 위해 드리는 여자와 대조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따르는 자의 전형이며, 이런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버릴 뿐 아니라 버리는 순간에도 이득을 챙기려 합니다. 교회는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유다의 행동과 같은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수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해서, 그가 잘못된 메시아 사상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가시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은을 취하지 말도록 명령하신 점을 고려하면(10:9),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것은 그가 거짓 사도인 것과 이런 열매로 그가 나쁜 나무였음을 입증합니다.


무명의 여인이 보여준 향유 부음 사건은 문학적으로 공권력의 파행과 가룟 유다의 배신 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두 어리석은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와중에 생명의 누룩이 퍼지고 있습니다. 여인처럼 영적으로 깨달았다면 자기 수준에서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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