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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3)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지내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27-43절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그 마지막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성육신하셔서 오신 순간부터 그분의 모든 공생애 삶과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최고봉은 바로 십자가로 점점 다가가신 이 고난의 길입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형판결을 받은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끌려가서(27-31), 십자가에 처형당하고(27-31) 십자가에 처형당하고(32-38) 세 부류의 동족에게 수치를 겪는(39-44) 모습을 묘사합니다. 고통과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의 형벌과 십자가 아래 인간들의 조롱 속에서도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하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다로(27-31)

고난은 순종을 훈련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결정 때문에 무력에 의해 수모를 겪는 길입니다. 제자의 길은 스승보다 배제의 정도가 적을 수 있어도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 전체로 증언한 복음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하는 신앙을 회피해서는 안 된비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 인내하심으로 온전한 순종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27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31)

 

총독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저로 데려갔고 온 부대가 예수님 주변에 집결했습니다(27). 로마인들은 할 수 있는 한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자주색 웃을 입혔습니다(28). 왕을 상징하는 표시는 옷, 왕관, 홀입니다. 자주색 옷이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로마 군인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주홍색 망토를 입힙니다. 군인들은 황금빛이 나는 왕관 대신 가시덤불을 잘라 머리에 씌웁니다(29). 왕이 잡는 홑을 오른손에 둡니다. 군인들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만세,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조롱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는 자주색 옷을 입고(31) 홀을 들고 앉은 채 만세 ‘왕이여!’라는 백성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조롱하다’는 31, 41절에서 반복됩니다. 조롱과 수치는 예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이미 예상하신 것입니다(20:19). 군인들은 예수께 침을 뱉었고 홀을 빼앗아 가시를 쓴 그의 머리를 때립니다(30). 유대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손에 조롱당하십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그들이 입힌 옷을 벗기고 예수님의 옷을 입힙니다(31). 그리고 십자가 처형 장소로 끌고 갑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을 통과해서 처형 장소로 향했는데, 이는 대중을 공포감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그런 범죄를 행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시범 효과를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은 유대인의 왕이 이방 군인들에게 조롱당하고 매를 맞는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성육신하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는 경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당하십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군대에 의해 버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길을 가십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힘을 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치를 감내하며 한 걸음씩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이사야 50:6).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53장에 묘사된 고난의 종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함(32-38)

신체적인 핍박은 정신을 파괴하고 비정상으로 만듭니다. 왜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고통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자유와 해방의 복음입니다. 학대받는 자를 외면한 채 복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십자가에 세워진 장면을 소개합니다.

 

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거기 앉아 지키더라 37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32-38)

 

본문에서 ‘그들이 나갔을 때’는 예루살렘 도성을 나간 장면을 뜻합니다(32). 십자가 처형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시행됐기 때문에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관저를 벗어나 십자가 처형장으로 향합니다. 사형수는 십자가의 가로대를 직접 운반해야 했습니다. 수직 부분은 이미 처형장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이은 심문, 대중 앞에 노출된 재판, 조롱과 매질 등으로 처형장으로 이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가는 도중에 사망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출신 시몬에게 강제로 지고 가도록 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에 이르렀습니다(33). 당시에 군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허락했습니다(34). ‘콜레’는 간, 쓸개, 쓴 쑥과 같이 쓴맛을 내는 물질을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몰약의 맛과 쓸개 맛은 같은 것으로, 마태는 군인들이 쓴맛을 내는 풀을 포도주에 넣은 것을 설명합니다. 군인들이 마취 효과를 위해 쓸개를 탄 포도주를 준 것이 아닙니다. 시편 69:21-22에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이 자신을 모욕하려고 쓸개를 음식물로 주는 것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마태는 쓴 물질을 시편 69편의 ‘쓸개’로 명명해서 예수님을 시편에 나온 고통당하는 의인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쓴 잔(26:39-42)을 선택하시고 인간이 준 쓴 약을 마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았습니다(35).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으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입니다. 수치스럽게 만들려고 죄수를 십자가에서 벌거벗긴 것은 로마의 십자가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시편 22:18이 배경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도 사람들이 속옷을 제비 뽑는 것은 나체 상태의 처형을 의미합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편 22:18) 군인들은 처형당하게 된 이유를 제시할 목적으로 예수님의 머리 위쪽에 명패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강도와 같이 십자가 처형을 받은 장면은 예수님께서 강도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받았음을 암시합니다(이사야 53:12).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왕은 예루살렘 밖에서 벌거벗겨진 채 수치와 모욕 가운데 처형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듯이 아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장면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합니다. 본문이 묘사하는 십자가 형벌의 과정은 대중적인 수치를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군인들이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찢어지고 늘어진 몸의 예수님 위에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인 것은 그를 대중에게 경고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체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아 두는 것으로 공개적인 수치를 준다. 하나님의 아들이 벌거벗겨져 저주를 상징하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는 죄인들의 수치를 가려주고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수치가 이 땅의 죄인들에게는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세 부류(39-44)

사람들의 죄악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누가 누가 더 많이 흉악하게 범죄할 수 있는지 경연대회를 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악한 죄성은 꺾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무죄한 예수님의 보혈 능력을 알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39-44)

 

앞 단락에서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했다면 본문에서는 동족을 대표하는 군중, 유대 지도자들, 심지어 십자가의 강도들에게서 조롱당하십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하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비웃습니다(4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놀립니다(41-42).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고 조롱합니다(43). 특히 백성들은 예수께서 구원하는 역할을 할 줄로 기대하고 호산나를 외쳤으나(21:9,15) 구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마저 구원할 수 없는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남을 구원하지만,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이 놀리면서 예수님에게 던진 말의 내용 자체는 옳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다(1:21; 8:25; 9:27, 14:30). 고난의 종으로서 아픈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8:17; 이사야 53:4).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지불하러 오셨습니다(20:28), 주의 만찬을 통해 서도 많은 사람을 위해 피와 살을 주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버림받고 조롱당해 죽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신뢰하십니다. 우리는 세 부류가 조롱하면서 예수님의 신뢰 심을 자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온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는데도 어떤 도움도 얻지 못한 채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특히 신뢰심을 자극하는 소리는 사탄의 광야 시험을 떠올립니다. 사탄은 광야 시험 기사에서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떡으로 만들고(43)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46). 하나님 부재의 상징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수치에서도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함께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죽기까지 순종해서 하나님의 계획, 곧 구원사의 목표를 성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역사에 강력히 개입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인생에 닥치는 시련이나 당혹스런 일들마저도 하나님의 임재와 간섭을 의미합니다. 성자의 특징이 성부에 대한 신뢰였듯이 신자의 특징도 하늘 아버지에 대한 신뢰여야 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택하신 자들의 신뢰심을 건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어느 순간까지 신뢰해야 하는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교훈입니다.


참담한 고난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묵언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의 면류관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사이비입니다. 번영복음과 성공신학은 자아부인 없는 십자가로 진리를 왜곡하는 괴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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