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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8-02)


갈릴리에서 다시 만난 예수님

마태복음 28장 11-20절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 받으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한 제안(4:8-9)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자, 더 온전한 권세와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을 속이는 사람들(11-15)

부활을 두고 전개되는 논쟁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믿어도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영적으로, 혹은 믿어도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영적으로, 혹은 의미로만 취급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1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11-15)

 

여자들은 기쁨으로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러 갔지만, 부활을 믿지 못하는 군인들은 부활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대제사장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일어난 모든 것을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합니다.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리고 그 위에 앉은 것(2)과 무덤이 비고 시체가 사라진 것(3)을 전했을 것입니다.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킨 이유는 시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 말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한 부활은 '몸의 부활'임을 증언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 사건과 함께 벌어진 일을 생생하게 목격한 경비병들의 보고를 묵살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숨기려는 이들의 행동에서 역설적으로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절망과 슬픔 가운데 있는 제자들이 경비병들의 수비를 뚫고 큰 돌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런 싸움도 일어나지 않은 채 정예 군인들이 시체를 소수의 민간인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보고서도 한쪽은 신앙을 갖고 기뻐하며, 다른 쪽은 믿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 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믿지 않는 현상에 대해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갈릴리에서의 재회(16-20)

주님께서는 치유의 하나님으로서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를 안고 오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사랑에 감격하여 남은 생을 주님을 위하여 드렸습니다. 갈릴리에서 열두 명의 소그룹을 데리고 시작한 사역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전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세계선교의 사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6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6-20)

 

마태복음의 마지막 단락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 당부하시는 장면입니다.

 

(1) 주께서 부활한 사실을 의심하는 제자들(16-17)

 

16절부터 무대가 바뀝니다. 갈릴리 시골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있는 바닷가 한 언덕입니다. 성전이란 주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입니다. 건물로 된 성전이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 속죄와 진리가 있지 않으면 그저 벽돌을 쌓아놓은 돌무덤일 뿐입니다. 하지만 갈릴리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셨습니다. ‘열한 제자’(16)는 너무도 상징적입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26:14-16), 그리고 그들의 선동에 놀아난 대중들까지 포함한(27:20), ‘믿지 않은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상징합니다. 이제 그 ‘유다’로 대표되는 ‘불신앙의 이스라엘’은 모두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제 종말의 새로운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스가랴 13:7에서 예언한 대로, 버림받고 죽이심을 당해, 그의 양 무리는 흩어졌지만(26:31),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대로 갈릴리에 먼저 가 계셨습니다(26:32). 하지만 아직도 이 ‘열한 제자들’ 곧 종말의 새로운 양 무리 속에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장차 불어날 이 양 무리 안에도, 결국 떨어져 나갈 자들이 또 생길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모두가 그물에 들어오지만, 전부 고기는 아닙니다(13:44-50). 최종적인 심판은 주께서 다시 오실 그때 이루어질 것입니다(24:29-31).

 

(2) 부활하신 주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명하심(18-20)

 

이제 부활하신 주께서는 다시 한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는 선포를 하십니다. 공식적으로 자신이 만유의 왕 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참 목자 되신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 통치자, 곧 메시아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11:27):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하지만 이제 만유를 상속받을 합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는(4:1-11) 일에 승리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실로 만유의 대리 통치자인 그리스도 곧 메시아시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참된 왕이요 목자로 지명되고 임명되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18-20절에 기록된 이 장면은 그래서 참으로 놀랍고 기쁘고 황홀하며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18-20절에 기록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과 종말의 새로운 양 무리의 모습, 그리고 주님의 권세,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 말씀을 가르침과 주님의 임재의 요소들을 다 갖춘 구약의 배경은 에스겔 34:23-24(37:24-28)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실패하고 흩어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9-10장)에게 돌아오신 종말의 목자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권세와 긍휼로 오십니다(겔 34:1-16). 그리고 ‘구약의 종말의 다윗 목자’(겔 34-37장: 미 2-5장; 슥 9-14장) 전통에 따라, 특히 스가랴 9-14장에 따라 버림받고 수난당하는 목자로서 죽으시고, 종말에 양과 염소를 심판하시는 심판주-목자로 오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새 언약 백성인 회복된 양 무리에게로 돌아와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세우신 ‘다윗 같은 한 목자’가 되십니다(겔 34:23-24). 이분이 교회의 ‘목자장’이십니다(참조, 벧전 2:25; 5:4).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부활의 주님, 교회의 머리 되신 목자장이신 주님은 가장 중요한 명령을 하십니다. 원문에는 ‘제자 삼으라’가 유일한 주동사입니다. ‘가서’와 ‘세례를 주며’ 그리고 ‘지키게 할 목적으로 가르치고’는 모두 분사형태입니다. 그러므로 19-20절은 선교 대명령이 아닙니다. 제자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가장 최종적인 목적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그 내용, 그 분부하신 ‘모든 것들’을 행하여 지키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들’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주님의 순종과 사역을 통해 성취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다시 명령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의 새로운 계명을 순종하고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도 주십니다. 그래서 지킬 수 있다. 이것이 19-20절에 기록된 지상대명령의 핵심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참조, 마 7:26).

‘가서’는 분사로 표현된 부대 상황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세례를 주고’ 역시 부대 상황이고 수단입니다. 세례를 주어 교인 숫자를 늘린 것으로 선교가 다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가르쳐서’도 역시 수단입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많이 가르치면서도, ‘지키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선교 대명령의 실패입니다.

 

주님이 교회와 함께하시는 이유, 종말에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시는 ‘임마누엘’로서 교회 중에 함께하시는 이유는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죄 사함을 선포하여 교인들을 만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저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열방으로 ‘보내는’ 것이 궁극적 목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지 많이 가르치는 것이 목적도 아닙니다.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 되게 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 생명으로 거듭나서, 열방 가운데로, 이방인들 가운데로 나아갈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행하여 그 말씀을 지켜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을 닮은 성품을 가진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곧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지상 대명령입니다.


기독교는 화해와 용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숨 바쳐 우리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다시 오십니다. 실패한 자, 소외된 자, 소망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지금도 찾아오십니다. 어긋난 우리의 인생을 바로 잡아 주시고 새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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