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09-01)
온전한 성전이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9장 1-10절
위대한 인물 중에는 대부분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서 어려운 가운데 장성해서 큰 인물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의 어려운 환경은 비참한 기억만은 아니라 성공 영광의 기쁨을 배가시켜 주는 배경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는 자신의 옛 모습을 생각해보면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감사가 넘칩니다.
앞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데 과거와 현재의 모습과 누릴 수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보게 됩니다. 첫 장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되 반드시 피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자신과 백성의 허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옛 언약의 한계(1)
심오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시청각으로 이해시킵니다. 이것을 통해서 먼저 이해시킨 후에 성숙해짐에 따라 점점 더 심오한 개념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적 진리를 계시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1)
기존 대제사장과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8장 마지막에서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새 언약’을 염두에 두면서 ‘첫 언약’ 아래에서 드리던 제의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독자들이 ‘첫 언약’에서 제사법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섬기는 예법’은 제사장 직무와 관련된 규칙들을 가리킵니다. 모든 제의적 섬김은 율법의 규정한 규칙을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새 언약’의 효력은 성도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질문이며(기독론), 또한, 신앙의 작동 원리(구원론)와 실천(윤리)을 질문이기도 합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저자는 추상적인 개념 대신 그림과 이야기를 사용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대로 드려져야 한다는 원리를 내포합니다. 또한, 첫 언약의 예배는 ‘성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때 성도는 ‘첫 장막’과 ‘둘째 장막’으로 구성된 장막 전체를 가리키는데, 첫 장막 가리키는 ‘성소’(2)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이 예배의 구성원이나 장소 그리고 순서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배당의 인테리어와 교회 구성원이 유명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예배 위에 하나님의 임재하십니다. 형식으로서 예배가 아니라 온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당에서의 예배가 세상에 나가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살아가는 예배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성전을 통한 새 언약의 필요(2-5)
우리를 막는 근본적인 장벽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비천한 우리 죄인을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인간적인 노력이나 성취는 결코 러물 수 없습니다. 죄인의 온전한 속죄를 위해서는 사람이 지은 성전이 아닌 하늘로부터 임하는 온전한 성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성소의 구조를 이야기합니다.
2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2-5)
본문에 ‘첫 성전’에 대한 구조를 설명합니다. ‘세상에 속한 성소’의 구조와 그 안에 배치된 기구들을 설명하는 이 단락은 사실적 묘사 위주로 서술되었습니다. 다소 무미건조해 보이는 서술이지만, 몇 가지 특징적인 함의가 엿보입니다.
먼저 용어의 문제입니다. ‘첫 장막’을 ‘성소’라고 부르고 나서 지성소에 해당하는 부분을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이라고 표현합니다. ‘둘째 장막’이라는 보다 간략한 표현 대신 굳이 ‘휘장’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0:19-20에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을 힘주어 말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휘장이야말로 지성소의 성격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휘장으로 구분된 두 공간을 각각 ‘장막’이라고 묘사함으로써 마치 완전히 분리된 세계라는 인상을 줍니다. 실상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의 장막 안에 있는 두 개의 방인데도 말입니다. 지성소에 놓인 성물 중 첫 세 가지(향로, 언약궤, 항아리)가 금으로 만들어졌거나 싸였다고 묘사됩니다. 사실 성소에 배치된 등잔대와 상도 금으로 만들어졌거나 싸였지만, 그 점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독자들은 지성소라는 공간에 놓은 금으로 빛나는 성물들을 상상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성소가 지극히 가치 있고 신비로운 공간임을 넌지시 드러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울러 지성소의 성물 중 마지막으로 그룹 (케루빔)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이 모든 물건 중 가장 중요하다는 암시를 줍니다.
이렇게 성막의 기구들을 나열하고 나서 저자는 ‘그것들에 관해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웬만한 유대인이라면 성막의 구조와 기구들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출애굽기 31-34장)을 통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굳이 상술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성막의 문자적 의미나 기능 그 자체가 히브리서의 관심사는 아니다. 성막의 기구 하나 하나에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지금 히브리서의 문맥에서는 필요하지도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첫 언약에 따른 제사 예법(6-7)
이제 인간 제사장이나 피의 제사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열린 은혜의 길을 통해 하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6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6-7)
설교자는 바로 이어서 성막 안에서 제사장이 수행했던 제사 직무를 소개하면서 두 가지 제사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항상’ 드리는 제사입니다(6). ‘섬기는 예식’이라고 통칭된 활동은 모두 네 가지입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양과 소제와 전제를 드리는 타미드 제사(출 29:38-42)와 분향(출 30;8), 진설병(출 25:8) 그리고 등불을 보살피는 일(출 27:20-21)이 그것입니다. 또 다른 제사는 속죄일 제사로서 레위기 16장에 자세히 서술된 규정에 따릅니다(7). 이 둘은 비록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다섯 가지 측면에서 매우 다릅니다. 우선 빈도에 있어서 다릅니다(‘항상’과 ‘일 년에 한 번’). 또 타미드는 첫 장막에서만 수행되고, 속죄일 제사는 둘째 장막에까지 들어가서 행해졌습니다. 전자는 복수의 제사장들이 반열을 따라 교대해 가며 수행했고, 후자는 대제사장 혼자서 행했습니다. 또 하나 두드러진 차이점은 피의 사용입니다. 타미드 제사를 위해서 양을 도살할 때 피가 흐르겠지만 그것을 쏟거나 뿌리는 데 대한 규정이 따로 없습니다. 반면 속죄일 제의에서는 소와 염소의 피를 바르거나 뿌려야 할 특정한 지점이 규정됩니다. 피와 관련된 마지막 차이점은 타미드 제사에서는 특정인의 죄를 속하는 요소가 없는 반면, 속죄일 제사에서는 백성뿐 아니라 대제사장 자신의 허물을 위해서 피를 드렸습니다(뿌리거나 발랐다).
개혁을 필요로 하는 옛 언약(8-10)
규칙과 의식들은 전통의 일부였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합니까? 이런 여러 규칙과 의식들로 토대가 세워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런 모든 것들을 극복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8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8-10)
히브리서 저자는 성령이 분명히 보였다는 말로 1-7절을 관찰이고, 8절 이하는 그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셨다’(8)는 표현은 영적 의미를 풀어내겠다는 뜻입니다. 첫 언약의 규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규정이 뜻하는 바, 혹은 그 규정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야 합니다. 8절의 ‘첫 장막’은 매우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정확히 같은 표현이 2절에서는 성막 중 한 부분, 성막의 앞 공간인 성소를 지시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공간적 축이 아니라 시간적 축을 기준으로 ‘시간적으로 이전 시대 혹은 옛 시대에 속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지은 장막 전체-성소와 지성소를 포괄하는-를 가리킵니다. ‘첫 언약’ 전체를 포괄할 수 있습니다. 첫 장막이 서 있는 동안, 첫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신앙은 설교자와 청중의 동시대 유대인들을 지칭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지정하고 영구적인 만남, 관계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현재까지의 비유’ 즉 현재를 위한 상징입니다(9). 여기서 ‘현재’는 글쓴이와 독자들의 시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1세기의 ‘현재’는 우리의 ‘현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구원을 그들이나 우리나 누리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과 함께 ‘현재’에 참여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이 개시되어 실행되고 있는 시점으로서 ‘현재’는 곧 10절에 나오는 ‘개혁할 때’와 일치합니다. 이처럼 시간을 묘사하는 표현들은 기계적 시간이 아니라 실존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의 시대, 그리고 심지어 21세기에도 아직 ‘현재’를 살지 못하고 여전히 ‘개혁할 때’가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남’이라는 객관적 사태로 표현했다면 9절에서는 ‘섬기는 자가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음’이라는 주관적 사태의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양심은 본래 그리스 도덕철학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자의식을 뜻했습니다. 신약에도 30회나 등장하는데 신앙적 진정성이나 예민한 죄의식,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떳떳한 존재라는 자의식(벧전 3:21)을 의미합니다. ‘양심상의 온전함’을 전적으로 주관적인 느낌으로 환원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라는 역사적, 객관적 사건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또한 그 속죄의 효력이 자신에게 작용함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기는 자’는 기술적으로는 제의를 직접 수행하는 사람, 즉 제사장이라기보다는 맥락상 속죄 받기 위해서 제물을 가지고 나온 예배자 모두를 지칭할 것입니다.
설교자는 ‘첫 장막’에서 행해진 제의는 ‘육체의 예법일 뿐’이라고 단정합니다(10). 가시적인 물건들, 절차들을 처음 설계할 때는 분명 영적 의미와 의도를 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적 의미를 놓치고 다만 형식에 매몰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히브리서 설교자의 관점에서 보면, 육체의 예법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감각과 시선을 다만 보이는 것에 의존하게 하는 본질적 약점을 지녔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 사람의 혈통을 따라 세워진 제사장, 사람의 시각과 후각과 청각이 통제하는 예배는 ‘육체의 예법’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습니다.
예배는 형식도 있어야 하지만, 예배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예배 속에서 임하신 성령의 능력 속에서 묵은 마음들을 새롭게 갈아엎어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눈이 주님께만 고정되길 원합니다.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깨달아서,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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