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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3-01)
 


산 제사로 드린 거룩한 삶

히브리서 13장 1-1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모든 주변 그리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똑똑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관계를 맺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본문은 성도들에게 믿음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련의 도덕적 권면들이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을 채웁니다. 공동체 생활의 대원칙으로 형제 사랑을 전재한 다음 손 대접, 아픔을 공감함, 성 윤리, 그리고 돈에 관한 경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교회 내 지도자들에 대한 태도와 이단적 가르침에 대해서 경계합니다. 앞서 상술했던 그리스도의 제사 적분 모티브를 재활용해서 저자는 성도들에게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권면합니다.
 

선한 믿음의 행실(1-8)

참된 예배는 예배당 밖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모호하거나 흐릿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다 간 선진들은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선명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성도들은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일상생활에 관련된 권면들을 제시합니다.
1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6)
12장에서 이미 시작된 권면이 13장에서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것과 개인적인 삶을 정결하게 유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활 속에서 다섯 가지 영역에서 선한 믿음의 행실을 소개합니다.
(1) 형제를 사랑(1)
하나님의 백성을 특징짓는 삶의 최우선 덕목으로서 먼저 ‘형제 사랑’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2:11-12). 이 지위는 성도들의 고유한 특권입니다, 이처럼 한 가족이 된 성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족 사랑의 수행해 왔습니다(참고, 6:10; 10:32-34). 그런데 저자는 독자들에게 과거 형제 사랑이 약해져서는 안 되고 ‘지속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며, 그들의 ‘형제 사랑’ 역시 흔들림 없이 지속되는 것이 마땅합니다(참조, 12:27).
(2) 손님을 대접(2-3)
‘형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권면은 ‘손님 대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돌봄 대상에는 공동체 내부의 형제자매뿐 아니라 공동 외부의 나그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당시 순회하면서 사역해야 했던 초대교회 상황에서 나그네 대접은 지극히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참고, 마태복음 10:40-42; 사도행전 21:16).
저자는 ‘소홀히 하기 마라’라고 권면합니다. 공동체 내부의 형제자매에 비해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참된 대접의 가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가운데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합니다. 사실 믿음의 선조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들을 영접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세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그 중 둘이 천사들이었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창세기 18:1-15; 창세기 19:1-12; 사사기 6:11-18; 13:3-22). 보상을 내다보지 않은 대접이 기대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원리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십니다(마태복음 25:37-40)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기꺼이 섬기는 환대(歡待)의 정신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습니다.
(3) 고난 받는 자를 생각(3)
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형제 사랑’에 대해 예시합니다. 즉, ‘감옥에 갇힌 이들’, ‘학대 받는 이들’을 우리는 ‘기억’라고 권고합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굶주림과 헐벗음에 열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고대 사회의 수감자들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동료 성도들의 돌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독자들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동정한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10:34).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관심을 잊지 말고 계속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관심의 정도를 ‘마치 자신도 함께 갇혀 있는 것처럼’이라는 어구로 강조합니다. 독자들에게 기대되는 관심은 힘든 일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형제들과 동질감을 갖는 것입니다(2:11-18). 여기서 ‘학대받는 자들’은 독자들이 이미 경험했던 고난의 내용들을 회상케 해 줍니다. 이미 그들은 비방과 환난을 당해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고, 재산을 빼앗기기까지 했었습니다(10:32-34). 그리고 그들은 그처럼 고난당하는 자들의 동료가 되기도 했었습니다(10:33). 따라서 독자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몸으로’ 고난을 경험한 것처럼, 학대받는 자들을 잊지 말고 계속적으로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가정을 귀하게 지킴(4)
저자는 ‘형제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제 성(性)과 관련하여 권면합니다. 저자는 이 권면을 가족관계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모두가 결혼을 귀하게 여기라’라는 권면은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금욕주의자들에게 결혼의 가치를 인정하라는 권면이라기보다는, 이미 결혼한 자들 모두에게 결혼 관계를 인정하라는 권면이라기보다는, 이미 결혼한 자들 모두에게 결혼 관계를 존중하라는 권면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고(창세기 2:24; 마태복음 19:4-6),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 제도를 존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와 짝을 이루는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여라’라는 권면은 앞의 권면의 구체적 의미를 밝혀 줍니다. 오늘날처럼 독자들 당사에도 결혼 관계를 떠난 부적절한 성 행위가 사회적으로 만연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속적 윤리 기준이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음란한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씰 예수님께서는 정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기만 해도 이미 마음속에서 그녀와 간음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마태복음 5:2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육체적으로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5) 탐심을 버림(5-6)
마지막으로 저자는 탐심과 관련하여 권면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은 삶을 살아라’(5a)라는 권면은 당시 윤리적 가르침의 주요 항목입니다(마태복음 6:24; 디모데전서 6:10). 독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도 기쁨으로 당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러한 과거의 경험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박해에 대비해서 그들 사이에 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경향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마땅히 기대되는 형제 사랑(곧 나그네 대집, 갇힌 자 돌봄 등)을 위축시키기 마련입니다(16).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마태복음 6:24),
둘째 권면인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여라’(5b)라는 첫째 권면을 강화시켜 줍니다. 스스로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거슬 추구하기 때문에 형제를 위해 나눌 수 없습니다(누가복음 12:13-21). 그런데 독자들이 만족하는 근거는 스스로 가진 것이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에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구약성경의 인용을 통해 확증합니다(5b). '네가 결코 너를 떠나지고 않겠고, 또한 결코 너를 버리지도 않겠다.‘ 이는 아마도 신명기 31:6,8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두려운 분이시지만, 역설적으로 그분께서 함께 해 주시면 가장 안정합니다(마태복음 6:25-32). 이처럼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자신이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형제의 필요에 대해 관대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5-19).
형제는 사랑해야 하지만, 방탕한 사랑과 탐욕 가득한 돈 사랑은 멀리해야 합니다. 결혼의 순결함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성도를 떠나지 않고 도우실 것을 믿고 하나님보다 제물을 더 사랑하지 말고 자족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관련된 권면들(7-9)

예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이 동일하시니, 그분의 가르침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산할 사람처럼 경성하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되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형제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7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 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7-9)
위에서 제시했듯이 선진들은 학대받는 사람을 위로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그리고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삶이 성도의 삶에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제 저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영적 지도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영적인 지도자에 대한 적절한 태도를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도하던 설교자 또는 교사들은 지금 그들을 떠나고 없습니다. 저자는 옛 지도자들에 대해 지녀야 할 태도를 세 가지 동사 ‘기억하라’, ‘살펴보라’, ‘본받으라’로 요약합니다.
먼저 ‘기억하라’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변화시키는 창조적 힘을 캐내기 위해서입니다. 과거 지도자들을 기억하라 권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말하여 주던’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앞서 2:3에서 언급된 이들, 곧 구원의 말씀을 독자들에게 확증해 주었던 이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행실의 결과’라는 표현은 그 지도자들이 이미 돌아가신 것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과거 지도자들은 더 이상 살아 있지도 않고, 따라서 그들의 활동을 지속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독자들이 그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계속 기억할 것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그 독자들의 힘의 원천은 무엇보다 과거 지도자들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지도자들의 생활과 그 결말을 살펴보고서, 그들의 믿음을 닮아가야 합니다. 삶의 정황이 삭제된 말씀은 생명력도 적용성도 없습니다. 저자는 ‘그들의 행실의 결과를 살펴보면서, 그 믿음을 본받아라.’라고 권면했습니다. 과거 지도자들은 단지 말씀만 전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 살았고 믿음 안에서 죽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11장의 믿음의 모본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들에게 믿음의 모본이 되기에 마땅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인상적인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하심’을 선언합니다(8). 이 선언은 앞뒤 문맥에 잘 연결되지 않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8절에 소개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7절에서 소개된 과거 지도자들의 모습과 현저히 대조됩니다. 과거 지도자들은 훌륭한 믿음의 본들이지만, 이미 떠나갔고, 따라서 독자들 앞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12:2) 예수 그리스도는 든든한 믿음의 기반으로서 독자들과 항상 변함없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삼중적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공유한 분이심을 부각하려 한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변함없으심은 지나간 시대의 지도자들을 우리가 기억해야할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동일성을 깨달음으로써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의 허망함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종종 변화무쌍함과 다채로움으로 그 오류와 거짓을 포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없는 사랑의 진정성으로 마음속 중심을 사로잡으십니다. 변함없으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그들을 언제나 변함없이 인도하시고 도와주십니다(7:25; 12:20-3).
9절은 8절과 대조적인 내용을 담은 명령을 기술합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들에 이끌리지 마라’는 아마도 당시 독자들이 ‘여러 가지 다른 교훈들’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앞에서 레위적 대제사장의 많음과 대제사장 예수님의 단일성을 대조하였고, 레위적 희생 제사의 많음과 예수님의 단일한 희생 제사를 대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독자들을 위협하던 ‘교훈들’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단일성과 암묵적으로 대조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다른 교훈들’은 이교적인 가르침을 의미하고, 기독교 신앙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훈들’은 독자들에게 생소한 교훈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주변에서 이끌려서는 안 되는 잘못된 교훈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에 이끌리는 것은 과거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던 하나님의 말씀(7), 곧 그리스도의 참된 교훈을 떠나는 것입니다.
저자가 이렇게 ‘끌리지 말라’고 명령한 이유를 ‘마음은 음식들이 아니라 은혜로 견고해지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라고 밝힙니다. 저자는 ‘마음이 견고해지는 것’이 독자들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전재합니다. 그 견고해짐의 두 가지 근거, 곧 ‘은혜’와 ‘음식들’이 대조됩니다. ‘음식들’도 마음을 굳건히 해줍니다(시편 104:15). 하지만 이제 ‘음식들’의 규례를 따라 행하는 자들은 더 이상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음식들’에 관한 규례들은 개혁의 때까지만 부과된, 옛 언약의 규례들이기 때문입니다(9:10). 따라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새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4;16;10:29;12:15,28). 마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자가 비판하는 점은 경건한 삶을 이유로 음식과 같은 눈에 보이는 특정 행동이나 규율의 준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은혜가 어떤 행동, 규칙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고난에 대한 묵상과 권면(10-15)

복음으로 완성된 삶을 살아가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절정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신앙의 절정을 예수님과 함께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설명하면서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지 제시합니다.
10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0-15)
본문은 형식상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0-12절은 설명 형식을 띄고, 13-15절은 설명에 기초한 권면형식을 띱니다. 저자는 9절에서 ‘다른 교훈들’을 경계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이 권면은 본 소단락의 도약대 역할을 합니다. 독자들에게 추구해야할 참된 예배의 모습을 ‘다른 교훈들’과 대조하면서 제시해 나갑니다.
(1) 해설 단락(10-12)
이 단락은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로 시작합니다. 독자들에게 지금 ‘제단’을 가지고 있다고 진술합니다. 옛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은 장막의 제단에서 동물을 제물로 제사를 들렸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제단’에서 하나님께 새로운 형태의 제사를 드립니다(15-16). 그리스도의 죽음 사건을 대유적으로 지칭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유익을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누릴 수 없습니다(10b).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방법을 강력하게 대조시킵니다.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를 통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아직도 옛 언약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권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 특권은 ‘그 제단으로부터 먹을 권한’이라고 말합니다. 옛 언약 하에서 장막에서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과 예배자들은 제사를 드리며 음식을 먹고 즐거워할 권한이 있었지만(신명기 12:6-7; 17-18), 새 언약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의 유익으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11절에서 그들이 그 제단으로부터 먹을 권한이 없는 이유를 흥미롭게도 구약에서 제시합니다.
(2) 설명에 기초한 권면(13-15)
저자는 지금까지 해설했던 사실에 근거하여 독자들에게 도전적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자.’ 이제 독자들은 중대한 결단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모독하는 성문 안 도시에 머물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저주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셨던 성문 밖, 곧 ‘진 밖으로’ 나가든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치욕을 짊어지고 ‘진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당시 종교 체제하에서 ‘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부정한 취급당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레위기 24:14,23; 민수기 15:35). 독자들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이미 고난과 수치를 경험하였습니다(10:32-34; 12:4). 그런데도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다시 그리스도의 수치에 동참할 것을 촉구합니다(마태복음 10:38; 누가복음 9:23).
이렇게 결단해야할 이유를 명확히 밝혀 줍니다. 본 단락을 시작할 때, ‘가지고 있는 것’을 지적했지만, 이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지적합니다(14a). 바로 ‘영구한 도성’이었습니다. 독자들이 눈앞에 안락과 안전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되고, 오히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10:34)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안전을 제공하는 ‘영구한 도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논의를 통해 공동체 예배 주제로 귀결됩니다. 이미 성취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중간 기간에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제사는 지금까지와 다른 형태로 들려져야 합니다. 옛 언약의 제사는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핵심이지만, 이제 예수님의 단번에 드려진 제사로 종결되었고, 그 대신에 드려야 할 제물은 ‘찬양’입니다(15b).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제사보다 감사의 제사를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부각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드리는 찬양의 제물은 ‘늘’, 곧 지속적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성도들 역시 성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로서, 거룩한 산 제물로서 살아갑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성도들로서 살아가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가정을 잘 지키며, 그리고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부으신 것처럼 십자가 놀라운 사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품어주고, 그 사랑으로 복음의 삶을 살아가고 그리므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는 놀라운 축복의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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