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12-02)
징계를 통한 하나님의 교훈
히브리서 12장 9-17절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는 순간은 안간힘을 쓰고 나오는데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도움을 주려고 가위로 잘라주면, 나비는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날아갈 수 없습니다. 고치 밖으로 나오려 안간힘을 쓰면서 모든 영양분을 날개와 온 몸으로 보내고 몸이 가벼워진 후에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한 자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있습니다. 날아올라 승리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추구할 것은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그 능력, 그 평안을 추구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로 권고하실 때가 있습니다. 징계는 즐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른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특히 육신의 욕구를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달려갈 것을 권고합니다.
거룩함에 참여케 징계(9-10)
이 세상을 이길 능력은 훈련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훈련은 고난을 통해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고난을 훈련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훈련되어지고 그 훈련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유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9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9-10)
하나님께서 율법인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잇는 중간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 속에서 아름다운 형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을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의 말씀, 훈련에 순종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들은 자녀가 잘못되기를 바른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를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 근실하게 징계합니다(잠 13:24). 이때 미련한 자녀들은 부모의 징계를 거역하지만 지혜로운 자녀는 오히려 부모님을 공경하면서 복종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징계에 복종해야할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며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아버지이십니다. 그 좋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고난은 훈련입니다. 우리의 영적 유익으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를 유익하도록 고난을 허락하시고, 이 훈련을 통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훈련을 통해 유익함과 보람되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유익은 “거룩하심에 참여케”(10)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처해있는 어려운 어려움과 역경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훈련의 기간이라고 생각하시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좀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성숙되어져가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훈육을 대한 성도의 자세(11-13)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나무는 더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운 향기를 피우고 충실한 열매를 맺습니다.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은 강합니다. 고난에 흔들이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사명을 감당하며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징계의 매서운 바람이 불어올 때는 즐겁지 않습니다.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징계가 나의 모난 부분을 깎아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먹도록 합니다.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1-13)
아버지의 훈육은 당장은 즐겁게 느껴지지 않지만 나중에 그것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체력과 기술을 단련할 때 고통스럽지만 그런 ‘연단’을 통해서 긴 경주에서 승리하고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자는 그 기쁨의 정체를 ‘의로움으로부터 나온 평화로 가득한 열매’라고 부릅니다(11b).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잘못을 처벌하기 위해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빚어지고 체득되는 형화로 가득한 열매가 있습니다.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은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의의 평강한 열매’(11)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훈련을 통과했을 때, 그 의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훈련은 우리를 성숙케 합니다. 죄로 인해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인간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못난 부분을 깎아내시고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이 훈련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먼저이며,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의와 평강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연단을 통해 죄와 정욕으로 비틀거리는 마음이 고침을 받아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될 때야 비로소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결국은 당신에게 유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무엇을 고침을 받아야 합니까?
몇 가지 권면(14-17)
모든 열매는 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뿌리가 무엇을 빨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어떤 열매를 맺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쓴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상한 심령으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삶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결코 용서할 수 없이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쓴 뿌리의 인생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상한 심령이라는 열매가 썩어버리기 때문에 용서하는 삶, 품어주는 삶 그리고 감싸주는 삶을 말합니다.
14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4-17)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몇 가지 권면합니다.
(1) 모든 사람과 함께 화평과 거룩을 추구(14)
14a절을 기독교인이 교회 밖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원리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우선 문장에서
(2) 많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쓴 부리 제거(15)
여기에서 두 가지 권면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권면은 각 개인의 분발을 촉구하기보다는 공동체가 함께 서로를 돌아보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추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큰 구원’(2:3)과 연관된 은혜입니다(4:16). 따라서 이 은혜에 이르지 못함은 곧 배교를 뜻합니다. 두 번째 권면은 한국의 기독교에서 오해가 많은 구절입니다. ‘쓴 뿌리’라는 표현은 본래 신명기 29:17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 심리적 상처나 극심한 고통의 기억 때문에 생긴 어떤 마음의 병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신명기 29장의 맥락에서 이 표현은 쓴 ‘열매’, 즉 우상숭배와 교만을 일으키는 악한 의도와 경향성을 말합니다. 그 결과는 개인의 삶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다른 이들을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3) 음행과 망령됨을 피하라-에서의 사례(16-17)
이 권면에는 이삭의 큰아들 에서가 등장합니다. 그는 헷 족속의 두 여인과 결혼했습니다(창세기 26:34-35). 이 결혼의 부도덕성은 여러 고대 유대 문헌에서 지적되었고 여기서 ‘음행’이 가리키는 것도 그 내용일 것입니다. 또한 그는 당장의 허기를 채울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 넘겼습니다(창세기 5:29-34). 이 행동으로 인해 에서는 ‘망령된 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능멸하고 하찮게 여긴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정황은 에서의 가치관이 지극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구 충족에 의존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잠깐 실수했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진게 아니라 일관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등진 배교였습니다. 앞서 누누이(6:4-6; 10:26-31) 경고했듯이 배교자의 회복은 불가능합니다(17). 신실함의 요청은 그만큼 엄중합니다.
이것을 '쫓으라'는 것은 노력하고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화평함과 거룩함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들이 노력하고 추구하길 원하십니다. 그 때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열매는 주를 보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천국에 가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에 대한 아름다운 환경도 아닙니다. 성도들이 그토록 만나고 싶은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는데,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접적으로 거울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해서 보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보는 사람에게는 화평함과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들은 화평한 삶은 서로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꼭 필요하게 공동체를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그 삶은 거룩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함 삶이란 영혼이 맑아야 합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이 주를 볼 수 있습니다. 교활한 사람은 주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를 보는 사람은 거룩함으로 그의 삶이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중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고난은 누구나 힘듭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훈련으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훈련이라고 여길 때, 오늘 하나님께서 어려움 속에 있는 당신과 동행하신 것을 느낄 것입니다. 감사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기간이 지난 후에는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통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복된 영광을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훈련을 통해 다른 형제와 자매를 섬기는 도구로 변화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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