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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03)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모세

 

히브리서 11장 17-31절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비젼너리(visionary)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통찰력을 말합니다. 보이는 작은 씨앗 하나에서 감추어진 많은 열매를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 모두를 믿음으로 살길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부모, 모세 등은 믿음으로 행한 사람들입니다. 유월적 의식을 제정한 것과 홍해를 건넌 것, 여리고를 돈 것,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 등도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나갔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모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시험을 이긴 아브라함(17-19)

속담에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험은 힘들지만 그것을 극복한 후에 주어지는 열매는 영광스럽습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겸손한 성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7-19)

계속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그 시험은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 시험은 바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말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기도하길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일치시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믿음으로’ 인간의 생각은 접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렸습니다. 그가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던 것은 이삭을 통하여 후손을 번성케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것들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9)라고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모르지만, 이삭을 통해 약속하신 약속을 이루실 줄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창세기 15장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4-5)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다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며, 별과 같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미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이어지고, 아브라함을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수받은 후손(20-23)

빛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을 나타내고, 어둠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부하는 영역을 나타냅니다. 빛의 영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온전히 주인이신 영역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어둠의 영역인 세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20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23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20-23)

이 단락은 전개가 매우 빠릅니다. 앞서 9절에서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들’이라고 언급했던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을 간략하게 차례대로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비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이삭에게 전수됩니다. 이후 후손들인 야곱과 요셉 모두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1) 이삭의 믿음(20)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수 받은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장차 있을 일’ 곧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일과 관련해 야곱과 에서를 믿음으로 축복했습니다(창세기 27:27-29; 39-40). 부모로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바꾸어서 축복하는 일은 부모로서 대단한 갈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모습을 보고 축복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따라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난 사람이나 자녀들을 볼 때,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판단이나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차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보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외모적으로 어부였고, 내적으로는 주변 환경에 대해 이리저리 흔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반석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가능성을 보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너는 굳건한 사람이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바로 그러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당신도 믿음으로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2) 야곱의 믿음(21)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한 것과 같은 일을 했습니다. 야곱도 늙어서 기력이 다해갈 때, 잘 알지도 못했던 손자들에게 축복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손들에게 줄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손자들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자신을 돌보아 주셨던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손자들을 돌봐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곱은 죽어가면서도 지팡이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통제력을 잃어가고 기력이 다해갈 때, 어떻게 모든 것이 잘 될 것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었겠습니까? 죽어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은 평생 동안 행해 왔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일치시키는데서 옵니다.

(3) 요셉의 믿음(22)

조상의 믿음을 이어받은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할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죽은 후 영원히 애굽 땅에 묻혀있지 않도록 하며 자기 뼈를 가지고 가나안으로 옮겨가서 묻으라고 요구합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자신의 최후에 운명이 애굽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출애굽과 같은 엄창난 일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오랫동안 기도에서 온 결과입니다.

(4) 모세 부모들의 믿음(23)

모세의 믿음은 그 부모들의 믿음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왕의 명령에 대해 불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기도의 힘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후손들을 열거합니다. 그 약속을 직접 받을 수 없다면 후손들을 통해서라도 이뤄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후손들에게 빌어 주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열거하신 이유는 그 믿음은 전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대를 이어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을 보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복음이 모든 영혼을 살린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에게 전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계속 이어져 나가고, 믿음의 가문이 이어져 나가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모세의 믿음을 전수 받은 후대(24-29)

고난보다 그 뒤에 오는 영광이 위대한 것을 알면,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한 이들도 있습니다. 믿음은 세상을 배반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 선택이 당장에 위험하고 손해를 끼친다 해도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세가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27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29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24-29)

믿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제 고난을 이긴 사람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애굽 궁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으로 공주의 아들임을 포기했습니다. 어디서 세상의 유혹을 이길 능력이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일생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1) 바로 공주의 아들로 불리기를 거절함(24-26)

모세 역시 족장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보입니다. 다만 족장들에게는 그것이 ‘미래’였다면, 모세에게는 ‘이상’이었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24), 이스라엘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인 일로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2:10에 의하면 물에서 건진 아기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장성하면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벗을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을 자기 형제로 인식하였습니다. 자기 형제를 압제하는 애굽 사람에게 반감을 표출한 것은 그에게 새로운 정체성이 확고했다는 반증입니다. 스데반도 모세가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난’(사도행전 7:23) 때를 나이 40세가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은 어떤 말보다 크고 분명하게 그의 자의식을 나타내주었습니다. 애굽 왕자의 칭호를 거절함으로써 모세는 안락한 성장 배경과 성공의 자원(‘죄악의 낙’과 ‘애굽의 모든 보화’)을 포기했습니다. 단지 주어진 기회와 자원을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고난의 상황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갔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때로 평범한 보통 사람의 삶마저 포기하고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과 ‘그리스도의 수모'가 구체적으로 모세의 생애 동안 어떻게 나타났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지만, 애굽의 왕자에서 미디안의 목자로의 신분 변화만으로도 엄청난 하락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모세는 넓은 길을 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신실한 공동체와 함께 받는 고난,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에 동참하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난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상 주실 것’(11:6)을 믿었고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 ‘상 주실 것’은 히브리서 2:2에서 하나님의 법을 어긴 행동에 대한 응징(膺懲)을 뜻했고, 10:35에서는 조만간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서 인내하는 성도에게 갚아주실 보상을 의미했습니다.

(2) 왕의 분노를 두려워 않고 애굽을 떠남(27)

이 서술이 미디안으로의 탈출을 의미하는지 출애굽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다소 혼동의 여지가 있고 주석가들 사이에도 견해가 갈립니다. 지금까지 설교자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 기술해왔기 때문에 이 부분도 바로 앞 사건에 이어지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뒤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이 출애굽보다 앞서므로 출애굽보다는 미디안으로의 탈출에 관한 서술로 보는 게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하여 견딘’ 사건은 일차적으로 떨기나무에서의 신현(神現) 사건을 지칭합니다(출애굽기 3:6). 이후 광야 여정에서 몇 차례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가까이 있었던 경험도 포괄할 수 있습니다(출애굽기 33:11; 민수기 12:7-8).

모세가 이렇게 결단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27)라고 소개합니다. 애굽에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보다 고난 받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신분이 더 크고 영광스러움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3) 유월절을 제정함(28)

모세가 발휘한 믿음의 세 번째 행동은 유월절의 제정이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라는 명령은 대체 왜 이런 것을 하라고 하나 싶은 명령입니다. 이 행동의 본질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순종이며 의탁이었고 그 결과는 생명이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이 (맏아들과 맏배) 죽던 그 밤에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피 뿌림을 통해 살 수 있었습니다. 모세 시대 생존했던 맏아들들과 맏배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들이 선하신 하나님과 그분을 믿은 조상들의 믿음을 잊지 않도록, 매년 1회 실행할 제의로서 유월절을 지정했습니다. 전통을 정립한 행위도 믿음으로부터 났다고 저자는 가르칩니다.

잠자는 교회는 사단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사단은 더 깊이 푹 자라고 자장가를 불러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사단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공격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행진을 가로막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그러한 방해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전진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전투에서 사단은 패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출애굽 공동체의 사례(29-31)

믿음의 삶이 어리석게도 보입니다. 믿음으로 이스라엘은 마른 땅을 지나듯 홍해를 건넜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은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부귀도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화와 비교할 바 못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승리의 길을 갑니다. 그는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철옹성 여리고를 무너뜨렸습니다.

29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29-31)

믿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애굽을 떠나 바로의 노함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석을 정했습니다.

(1) 홍해를 육지같이 건넘(29)

29-30절에서 서술하는 두 가지 믿음 사건의 주체는 특정인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라는 걸출한 지도자들의 영도력이 작용했지만, 그 두 개인이 행동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때로 공동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의 행동을 함으로써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첫 유월절 밤 맏아들과 맏배들의 생명이 위험했듯이 홍해 도하(渡河) 사건에서 민족의 생사는 다시 한 번 갈림길에 섰습니다. 유월절 때처럼 이번에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선하심에 대한 철저한 신뢰만이 살길이었습니다. 물에 삼켜진 애굽인들의 예에서 보듯이 믿음의 행동은 무작정 한 번 해보는 무모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행한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같은 성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믿음은 거룩한 상상력을 요구하며, 성도들은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여리고를 칠 일간 돌아서 무너뜨림(30)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을 찾는 이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으면서 여리고 둘레를 돌았습니다. 하나님은 단 하루, 한 바퀴의 행진만으로도 충분히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 행진하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 사이에는 아무런 물리적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명령받은 대로 칠 일간 행진했습니다. 칠 일 밤낮 그들은 자기 자신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피 흘리는 전투 없이 승리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종종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피땀과 노력의 대가를 우리 스스로 지불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의 순종은 때로 너무 쉬워서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묵묵히 참으면서 하루에 맡겨진 사소해 보이는 일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3) 라합의 사례(31)

라합의 경우 노아처럼 ‘지금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 경고를 믿었기 때문에 ‘지금 보이는 일들’ 앞에서 지극히 위험한 행동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의 ‘불순종한 자들’이 멸망한 반면, 라합은 순종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창녀라는 과거의 출신과 지위가 믿음의 효력을 막지 못했습니다.

기생 라합도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행동을 선택했습니다. 미래에 하나님의 약속이 가져다줄 축복과 영광을 바라보는 자들은 현실의 유익만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은 바로 믿음의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은 과거의 나를 규정하는 현재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미래의 세계에 기준을 두고 현제의 나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과 사귀는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우리 역시 존귀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에게 닥친 고난으로 인해 절망하지 않도록 힘을 주시고 후에 얻게 될 상급을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고난을 택한 신앙의 선배들을 보며 주님의 나라를 위한 시련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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