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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02)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아브라함

히브리서 11장 8-16절


그리스도인의 삶에 믿음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믿음은 낙담 중에 있을 때, 다시 소망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고, 때로는 세계를 향해 도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믿음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현실을 순종하게 만들고,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 새로운 꿈과 비전을 가지고 마치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성경을 통해 계속 믿음의 위대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믿음의 여정을 따르면서 우리의 믿음도 성큼 자라날 것입니다.

 

본문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해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 역시, 믿음으로 죽음 것 같은 몸에서 잉태하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례(8-12)

믿음은 연약한 인생을 위대한 삶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노아는 인류 구원의 도구가 되었고, 노쇠한 아브라함은 모래와 같은 많은 후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그릇은 육체의 힘이나 재력이나 지식의 양으로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다면 약한 자도 강한 자가 되고, 비천한 자도 위대한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8-12)

성경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념과는 다릅니다. 앞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1)이라고 선언했는데,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누군가가 ‘믿음은 익숙한 것과 결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때로 우리들이 편안하게 안주할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노아에 이어, 이제 유대교와 초대교회에서 이상적 인물로 인정되어 온 아브라함의 믿음을 모본으로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독자들이 ‘장차 올 세상’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경험을 순례의 한 과정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 나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제시합니다.

(1) 부르심에 순종하여 떠남(8)

믿음은 때로 안주할만한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서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두렵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행보에 본을 보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노아처럼 아브라함도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을 삶을 지표로 삼았고 떠납니다(8).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순종하여’ 자신의 터전인 하란을 직각적으로 순종합니다(창세기 12:1-4). 그 떠남은 ‘상속받은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떠났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알아야 했던 모든 것은 땅의 위치가 아니라, 오직 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위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어느 땅인지 전혀 정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시니깐 장차 받을 땅을 향해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순종하며 그 땅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2) 타국에 거류함(9-10)

아브라함의 믿음의 핵심은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다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집을 떠난 사람이라면 어느 곳에 안착하길 원하면서 장막을 치는 건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저자가 부각하고 싶은 점은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도착해서도 계속적으로 장막에서 살았다는 점입니다(9b). 아들 이삭, 손자 야곱까지 함께 그렇게 했다면 여기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은 육십 세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얻었습니다(창세기 25:26). 창세기 25:7-9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였으므로 3대가 함께 살았을 기간은 적어도 15년입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유목민도 아닙니다. 그가 자손들까지 거느린 마당에 빨리 정착해서 자기 집을 짓고 안정을 추구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저자는 아브라함은 ‘마치 외국에서 살듯이 그 땅에 얹혀살았다.’고 소개합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이 장막에서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대한 기업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착하지 않고 유랑 생활을 했던 것은 믿음으로 살기 위한 결단이었고 실천이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세운 장막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건축자와 창건자’이신 성는 영원하고 안정적인 것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성을 ‘하늘 본향’(13-16),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12:22), ‘하늘 예수살렘’(12:22), ‘흔들리지 않는 나라’(12:28), ‘장차 올 영원한 도시’ 등으로 표현해 확인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장막 생활을 했던 가나안 땅은 고대했던 진정한 기업이 아닙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기업은 ‘견고한 기초가 있는 도시’였습니다. 성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기대 때문에 현재 고난, 상실이나 실패를 자처하는 용기가 신앙입니다.

(3) 많은 후손을 낳음(11-12)

가나안 땅을 차지했어도 그것으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긍극적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땅-도시’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논의를 전개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초래된 세 번째 결과를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출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생식 능력의 회복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이 아브라함의 믿음(신실함)으로 전이 되었습니다. ‘죽은 자와 같았던’ 사람에게서 셀 수 없이 많은 후손들이 태어났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믿음의 모본에 ‘사라’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비현실적인 상황 아브라함 100세, 사라 90세인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죽은 자와 같았던’ 상황에서 아들 이삭을 낳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랐던 것은 아들을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이 실현되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얻는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약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끝까지 믿었고, 그 믿음으로 죽은 자와 같았던 태를 통해 이삭을 주였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그의 믿음으로 인해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자신들의 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비중이 큰 만큼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11절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받기 시작할 때, 보이는 세계도 새롭게 열려지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한 것은 믿음이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감으로 실제화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의 표현을 순종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아브라함 가족의 믿음의 특징(13-16)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기라서 같은 신앙의 선조들은 한결같이 믿음을 품고 실천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믿음의 곁은 조금씩 달랐지만, 삶의 중심에 주를 행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 있기를 소망합니다.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3-16)

아브라함과 사라를 소개한 다음에, 다음 선진들을 소개하기 전에 믿음으로 사는 삶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 다음에 이삭과 야곱, 요셉을 비롯한 선진들을 소개합니다. 13절에 ‘이 모든 사람들’은 4-12절에서 서술했던 네 사람(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지칭합니다. 아브라함을 포함해서 선진들을 통해 믿음의 특징을 몇 가지 볼 수 있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음(13a)

믿음의 선진들의 특징은 일평생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해 주신 약속에 대해 흔들림 없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 다시 말해서, 죽는 순간까지 삶 전체가 믿음의 원칙을 따라 일편단심 하나님을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사는 동안 이룩한 성과나 성공이 그들의 믿음을 측정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인생이 별 볼 일 없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약속된 것을 완전하고 가시적인 형태로 받지 못한 채(‘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삭과 야곱을 품에 안았지만, 모래와 같이, 별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은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땅의 약속에 관해서 그는 얻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에게 초능력에 가까운 놀라운 시력을 주었습니다. 땅에 있으면서 천상의 세계를 내다볼 수 있는 영적 차원의 시력이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성취를 보았고 멀리서나마 손을 흔들며 기쁘게 인사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2) 나그네처럼 사는 삶(13b-14)

신실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고백했습니다. 창세기 23:4에서 사라의 매장지를 구매하면서 아브라함이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묘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자는 이미 8-9절에서 아브라함의 본향 탈출과 거류민적 정체성을 설명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한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회적, 경제적 기득권을 확보하거나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이익을 주장하지 않는 그들의 삶 자체가 증언이었고 웅변이었습니다. 이곳이 본향이 아님을, 다른 한 본향을 추구하고 이씀을 그들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나그네처럼 살아갔습니다. 삶을 안주(安住)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은 우리들이 영원한 살고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탱해준 것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장막생활이며, 나그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장래에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재로 그들이 사모하고 찾아 나선 땅은 가나안이었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그 가나안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도성, 즉 하늘에 있는 도성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12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졌다고 말하지만, 곧이어 13절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했고 단지 멀리서 그것이 성취될 것을 바라보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곳의 생활은 아침 안개와 같이 이 땅에 왔다갑니다. 우리들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면 나그네로서 거추장스럽습니다. 이 땅에 너무 애착을 가지고 안주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한 삶(simple life)’이 중요합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단순해야 합니다.

(3) 더 나은 본향을 소망(15-16)

믿음은 결국 소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나온 본향 대신 들어갈 본향, 즉 하늘 본향을 추구하는 분명한 목표 의식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수단 삶아, 신앙을 발판 삼아 성공과 안정을 추구하려고 시도한다면 결국 믿음을 배반하는 꼴입니다. 세속적, 물질적 가치의 총화가 ‘나온 바 본향’인데,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그리로 회귀할 기회는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한 곳, ‘더 나은 본향 ’을 향해서 눈을 고정하고 손을 뻗어 거기에 다다르려고 했습니다.

소망을 신실하게 붙잡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선 준비하신 ‘한 성’(16,10)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약속한 그 ‘처소’이고(요한복음 14:2)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히브리서 12:22-23).

 


믿음의 선진들이 고난과 핍박 중에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는 이 세상에만 소망을 집중하지 안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다양한 유혹을 만납니다. 그 유혹은 세상에 안주하는 삶,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마음 그리고 세상 것에 대한 욕심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당신의 믿음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 유혹을 떨칠 수 있는 갓은 더 나은 천성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소원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나그네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그네는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영원한 고향인 천성을 바라보며 주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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