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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6-02)

 


영혼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6장 9-20절


약속하신 기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항해 중입니다. 그 항해 속에는 항상 바람과 파도가 있습니다. 때로는 배를 삼킬 만한 큰 파도가 닥치기도 하는데, 그런데도 이 항해의 길에서 벗어나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닻,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든든히 붙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성숙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경고의 말씀에 이어 확신과 격려로 균형을 잡습니다. 성도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보여준 행위와 사랑을 하나님께서 기억하므로 우리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바라는 것, 구원의 소망이 과연 이루어질까?’ 하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실하게 참고 실천하는 믿음이 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의 사례에서 배웁니다.

 

구원에 대한 축복(9-12)

하나님께서는 성숙을 말씀하시지만, 쉽지 않습니다. 정말 성장하고 성숙하고 싶지만, 자꾸 초보에 머물렀습니다. 더욱더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받은 축복을 귀하게 여깁니까? 축복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축복을 지키는 일입니다.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9-12)

본문 이하는 앞부분과는 반전을 이루며 목회적인 격려 하고 있습니다. 그 격려는 8절까지의 엄중한 경고의 목소리와 균형을 이룹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남겨놓고 히브리서를 읽는 수신자들에게 다시 히브리서 기자는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을 조금 더 전진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덧붙이면서 시작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삭의 아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결국에는 그 축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 것과 지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의 행진, 복음의 행진. 소망의 행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9-10)

성숙할 수 있다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결코 성장해야할 우리들을 잊어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방황하려고 하고, 성장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보장하시고 성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도 당신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장과 성숙을 기다리고 계시며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삶을 감사하면서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1-12)

편지를 보내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장하고 성숙하길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각 사람들에게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11)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라고 권합니다. 소망이 끝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게으르지 아니하고”라고 권고합니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이러한 네 가지를 이루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항상 똑같이 부지런하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끝까지 지킬 것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나가고 계십니까? 또 게으름을 내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둘씩 매진하면서 노력하면서 믿음과 오래 참음을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열매를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성장을 향해 나가는 길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길은 이러한 것을 지켜갈 때, 가능하다 라고 이야기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정말 성숙하여서 구원의 확실을 날마다 누리며 나가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 아브라함(13-15)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우리들이 구원의 확실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시겠습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어떻게 이끄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성장하고 성숙하길 소망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3-15)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더욱더 성숙하고 온전하게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만큼 성도들의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은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를 듭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 믿음을 통해서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소망을 같이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1)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아브라함(1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을 때,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13). 원래 맹세란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를 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걸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며 맹세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그 위에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보다 위대한 존재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거짓된 우상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으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14;창 12:1-2; 22:17)고 약속하셨습니다.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까지 아브라함은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 90세에, 이삭을 얻는 데도 무려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창 12:4; 21:5).

(2) 오래 참아 약속을 받음(15)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보기까지 인내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15). 아브라함의 나이로 볼 때, 도저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으로 인해 그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 중 그가 살아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창 17:6-8). 약속의 씨에 대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에 맹세로 그 약속의 확실함을 보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복음의 약속들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장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모진 난과 유대주의의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복음의 약속은 전혀 변함이 없지만, 그 약속이 실현되기까지는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너무나 조급합니다. 조급하면 지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조급하신 분이 아닙니다. 약속을 받은 우리는 그 약속이 변치 않음을 믿으며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약속을 견고하게 품음(16-20)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고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충분히 인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인내입니다.

16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16-20)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성도들은 흔들림이 없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느 순간에도 절대로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예를 통해 약속의 확고함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큰 안위를 주는 일입니다.

(1) 맹세의 역할(16)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맹세하셨습니다(16). 원래 ‘맹세’라는 뜻은 ‘사람들 사이의 다투는 일에 최종적인 결론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 이후에는 다른 결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큰 자를 지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자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는 맹세가 필요치 않습니다. 항상 다툼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간에게는 맹세가 필요하지만, 빈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이 맹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실 때도 맹세하셨다(7:20-22)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맹세가 보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17-18)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입니다. 맹세는 특별히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17). 그 약속은 당장 손에 실물을 쥐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주는 행위입니다. 실물을 당장 손에 쥐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매우 불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약속만을 기다렸는데, 그 약속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기나긴 기다림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약속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큽니다. 하나님게서는 우리의 이러한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맹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 다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우둔하여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한 뜻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받았던 약속은 현실에서 직접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은 여호수아 13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해 줄 때, 정복한 땅만 아니라, 아직 정복하지 않는 땅도 분배해 주셨습니다. 각 지파가 분배받을 땅을 지도에 그려서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곳들은 너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힘이 나는 것은 현실만 가지고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까지 기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직 현실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당신의 꿈과 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한 뜻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려고 맹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를 통해 우리에게 안위를 주십니다(18).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두 가지 행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약속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맹세하실 때에는 더더욱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실물로 가진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우리에게 큰 위로와 능력이 됩니다. 소망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절망이 됩니다. 희망이 기대감이 무너지면 낙망이 됩니다. 사람들이 약속은 희망을 부풀렸다가 높이 뛰어놓은 후에 터뜨려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기대감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기대감을 이루어 주시고 채워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 1:18)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3) 휘장 안에 들어감(19-20)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 ‘영혼의 닻’에 비유됩니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닻이 필요하듯 우리 영혼도 닻이 필요한데, 이 닻이 우리가 가진 소망입니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안전한 항구에 닻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튼튼하고 견고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 항구에 멈추어 서 있지만, 이제 곧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서 출항할 것입니다. ‘소망’은 현실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이미 확신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 또는 맹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19). 이런 주제의 전환이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7장에서 다룰 내용을 고려하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이 소망의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맹세가 가장 크게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닫혀 있던 휘장 안으로 담대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아서 우리는 휘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휘장은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만고불변의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맹세에 의거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성소로 우리보다 앞서 들어가셨습니다. 이 사실은 현실에 많은 유혹과 도전 앞에 놓여 있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소망의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능력이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18)에게 하나님의 맹세로 세움 받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보다 큰 위안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신 안의 의심과 불안, 흔들리는 믿음을 모두 떨쳐 보리고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며 그 약속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의 모습으로 성숙함으로 하나님 맹세를 따라 승리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약속을 이루신 영광의 예수님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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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6-01)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으로 성장

히브리서 5장 11절 - 6장 8절


‘당신은 영적 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가운데 성장하지 못해 아직 젖만 먹는 어린 성도가 있는가 하면,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성숙한 성도들도 계십니다. 이런 판단 기준은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 ‘어떤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성숙했느냐?’입니다. 신앙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성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는 수준으로 끝나면, 영적 젖 먹이 수준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을 할 때, 영적인 성장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설명하기에 앞서(7장) 저자는 잠시 정리의 시간을 갖습니다. 신비롭고 그래서 자칫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청중이 들을 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믿음의 도의 초보에 언제까지나 머무른 채 깊은 지식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 염려하면서 신앙에 있어서 자라가야 할 것, 그리고 뒤로 물러나 배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합니다.

 

미성숙한 신앙을 진단함(5:11-14)

자신의 건강상태를 점검하는 것을 ‘건강검진’이라고 합니다. ‘건강검진’을 하다가 큰 병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점검해 본 적 있습니까? 즉, 당신의 영혼에 관한 건강검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살펴보므로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당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함으로, 늘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1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11-14)

본문은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지 않고, 잠시 중단합니다. 앞서 엄중한 소리로 경고했던 히브리서 저자는, 이번에는 그들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전합니다. 그들이 구원에 속했다는 증거는 성도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보여준 행위와 사랑입니다. 저자는 더 나가 소망이 성취될 때까지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권고합니다.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쯤이면 다른 사람을 교육하고 양육할 만큼 지적이나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1) 당시 성도의 영적 상태(11-12)

저자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분의 대제사장직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5:6,10). 그렇다면 이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야 하지만, 5:11이하에서 6:20에 이르기까지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잠시 무대 뒤로 사라진 멜기세덱이 다시 나타나는 시점은 6:20입니다. 그때까지 저자는 당시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잠재적 위험을 경고하면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라’고 권면합니다.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을 망설이는 이유는 당시 성도들이 ‘듣는 데에 둔해졌기’(11b)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듣기에 게으른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청력의 감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력 면에서의 아둔함과 의지적인 면에서의 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잘 적응하지 않는 상태, 그것이 ‘둔함’입니다. 광야 세대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과도 비교될 수 있었습니다(3:8,13,15). 멜기세덱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면면을 이해할 만한 성경에 대한 이해, 영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그들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젖 먹는 아이’와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로 두 가지는 비유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젖 먹는 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긴 하지만, 둔해서 온전하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고집과 욕심에 가득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2) 성숙해야 할 성도들(13-14)

이런 영적 상황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처방하기 위해 저자는 젖먹이와 어른의 비유를 사용합니다(12b-14). 단단한 음식을 ‘의의 말씀’이고, 이것을 먹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은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는 훈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성격과 그 실체적 결과를 가리킵니다.(4:14-16; 1019-25). 그것은 신자들의 구원과 천국 소망과 연결됩니다(10:38; 11:4,7). ‘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마치 운동선수가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하고 시합하는 과정처럼, 성도는 도전과 시행착오, 인내와 성실불굴의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6:12; 10:36; 12:1), ‘선한 것과 악한 것’의 분별은 실생활에서 윤리적 결단 행동으로 이어질 것입니다(13:1-21). 장성한 사람은 연단된(훈련된) 영적 감각을 가졌습니다. 감사, 드림, 협력, 섬김, 자기 죽음, 은혜로운 말의 습관 등 훈련된 영적인 감각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감추어 놓지 말고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들으로 신앙이 더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단단한 음식까지 먹으면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처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6:1-3)

성도는 식물처럼 성장해야 합니다. 항상 기초적인 신앙의 자리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초에 머물지 말고, 기초 위에 더욱 튼튼한 진리의 집을 세우고,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인 성장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공동체에 능력 있게 영향력을 미치게 해야 합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1-3)

누군가가 ‘성장한 교회는 많지만 성숙된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으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에는 신앙인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신앙의 성장에 가로막는 6가지 장애물을 소개합니다. ① 회개치 않은 죽은 행실, ② 하나님에 대한 의심, ③ 세례에 관한 오해, ④ 안수에 관한 혼돈, 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불신 그리고 ⑥ 영원한 심판에 대한 의심 등을 나열했습니다. 여섯 가지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들입니다.

신앙의 기초적 원리에 해당하는 것들을 ‘버리라’는 권면의 의미는 아마 ‘초보 진리를 배우느라 같은 자리에서 언제까지나 맴도는 일은 그만두라’(우리말 성경)에 가까울 것입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의 초보에 매어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불신자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때 가장 먼저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신자들조차 순간순간 크고 작은 죄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전격적으로 바꾸는 일생일대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능력, 성품을 깨닫는 데서 신앙의 움이 틉니다. 세 번째, ‘세례들’은 회심의 표지로서의 세례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행해지던 여러 가지 정결 예식을 포괄합니다. 네 번째, ‘안수’는 치유, 파송, 임직 등을 위해서 행해진 예식 행위입니다. 이 두 가지 항목은 초대 교회에서 혼히 행해졌던 예전이기 때문에 그 의미와 방법을 세례 교육의 일환으로 가르쳤을 것입니다. 마지막 두 항목(‘부활과 심판’) 역시 기독교인이 된 후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기본 교리에 속합니다.

기초적인 원리를 배웠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온전한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3)이라는 말씀은 신앙의 성숙 과정이 은혜의 과정임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성숙은 우리의 주도권, 우리의 애씀보다는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애쓰심에 우리가 이끌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의의 열매를 맺는 성숙한 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만 머무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어떠한 내용인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설교와 성경 연구를 통해 기본 교리를 제대로 정리하여 묵상하는 것은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배교의 양상과 결과(4-8)

생명은 시간이 가면서 성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반대로 퇴보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유지나 전진하지도 못하고 퇴보하는 신앙인들은 무엇인지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은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까지 맛보고서도 타락한 자들에 대해 소개합니다.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4-8)

이 단락은 흔히 10:26-27과 함께 ‘배교 본문’이라고 불립니다. 앞 단락(5:11-6:3)과 이 단락은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됩니까? 방금까지 설교자는 기독교의 기초적 원리에 머무르지 말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라고 역설했고 이어서 4절부터 배교와 그 결과를 설명합니다.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에게 배교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1) 배교에 대한 정의(4-6)

이 단락은 ‘배교(背敎)’에 대한 일종의 정의입니다. 여기 묘사된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 상태는 신약과 당시 유대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표준적인 용어였습니다.

‘한 번 빛을 받음’과 ‘하늘의 선물을 맛봄’ 그리고 ‘성령을 함께 받음’은 모두 회심 과정에서 일어나는 체험을 담아내는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다가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봄’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 체험입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을 거친 참된 기독교인이 배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중요할 수 있는 이 질문을 설교자는 던지지 않습니다. 답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기독교인의 배교는 적어도 히브리서의 저자와 당시 성도에게 기정사실이며, 현실의 일부인 것으로 전제됩니다.

저자는 배교한 신자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도록 만들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최초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배교자의 구원도-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합니다. ‘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제한성이 아니라 당위(‘마땅히 그러해서는 안 됨’) 혹은 사태의 확실성(‘결코 그렇지 않음’)을 표현합니다. 더욱이 배교는 혼자 마음에 품는 생각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주 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행동은 자신의 결연한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까! 그처럼 완고하고 적극적인 배교자에게 ‘새롭게 될’ 일말의 여지가 있다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2) 믿음에 대한 결과(7-8)

본문에서 땅과 작물의 비유는 배교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입니다. 농부, 나무, 열매의 모티프는 예수의 가르침과 구약성경에서 종종 발견됩니다. 산상 설교의 일부로서 예수께서는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7:16-23//누가복음 6:43-45). 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다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막 11:12-25). 요한복음에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연합될 때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한복음 15:1-8). 이런 가르침들의 배경에 구약으로부터의 울림이 있다. 기대했던 참포도 열매 대신 들포도 열매를 맺는 포도원의 노래를 통해 이사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 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을 개탄합니다(이사야 5:1-7). 이런 성경신학적 흐름에 비추어 본다면, 배교는 보다 넓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못하는 삶, 행동, 습관들이 곧 ‘가시와 엉겅퀴’입니다.

교회가 박해받던 시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십자가를 밟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만 배교의 경고가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이들에게만 배교의 경고가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비를 흡수해 왔지만 좋은 열매가 아닌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안정된 가운데 권력과 풍요를 누리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신의 삶이 성장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화되길 원합니다. 지금 영적인 상태에서 자만하며 머무르거나 퇴보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보인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주님을 닮아가는 성품이 자라나길 원합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초보를 넘어서 성숙한 신앙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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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5-01)


위대한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5장 1-11절


이 시대는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사람, 조직 그리고 공동체들이 기초가 흔들리고 무너져갑니다. 앞날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입니다. 이 불안한 시대에서 누군가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지켜주는 후견인이 대단한 능력자이며 위대한 분이라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탁월한 후견인이십니다. 그분은 능력이 많으시며 자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 주시기까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본문에서 아론 후손의 대제사장보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대제사장의 역할한 것을 알립니다. 구약 대제사장은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직분은 아닙니다. 아론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 받은 사람들만이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대제사장의 모습(1-4)

예수님 같은 대제사장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사람들의 연약함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먼저 구약 대제사장의 자격과 역할에 대해 설명합니다. 대제사장의 위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신 것을 설명합니다.

1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 때문에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죄를 씻는 방법인 제사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백성을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유대인들은 유다 지파 출신인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제사장이 될 있내고 반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제사장으로 새워졌던 멜기세덱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임명으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1) 대제사장의 자격(1a)

‘왜냐하면’이라면서 대제사장 예수님과 관련한 결론적 권면의 이유를 제공합니다. 대제사장이 누구인지 왜 예수님께서 큰 제사장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대제사장이 세워지기 위한 자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사람 가운데서’라고 소개합니다(1).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부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므로 신적인 존재가 아닌 사람만 가능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충만한 신성을 가지고 태어나신 분이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해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장으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사람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자격으로 대제사장은 ‘취한 자’로서 택함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람 중에서 취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선택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2) 대제사장의 사역(1b)

본문에서 대제사장의 사역을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선택함을 받은 대제사장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예물과 속죄 제사들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가 백성들을 위해 중보를 감당했습니다. 요약하면, 대신 제사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중요한 역할은 1년에 단 한번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모든 백성들의 죄를 놓고 용서를 구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3) 대제사장의 자질(2-3)

대제사장의 자질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대제사장은 일반 사람들과 거룩하게 구별된 일을 하지만, 그들은 일반인과 똑같은 존재라고 합니다. 먼저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2) 대제사장조차도 특별한 능력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연약한 사람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백성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리지만, 자기를 위하여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대제사장’이란 거룩함과 독특함이 있지만, 자신도 일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4:15).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선포했습니다(벧전 2:9). 모든 성도는 대제사장입니다. 이제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항상 자신을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속한 사역을 하는지, 아니면 육신에만 매어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리스도(4-6)

지상의 대제사장은 스스로 이 존귀한 신분을 취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늘의 부르심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불러주신 아론과 그 자손들만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대제사장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신 이유를 소개합니다.

4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6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4-6)

지금까지는 사람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에 관해 설명했지만, 이제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대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한 분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부르심을 받은 대제사장(4)

다시 원리적인 측면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존귀는 사람이 스스로 취하거나 아무나 스스로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자라야 그 존귀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이는 첫 대제사장 아론을 세울 때부터 지키던 원리입니다(출애굽기 28:1-3; 29:1). 이런 원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어 거룩한 직무를 자의대로 수행하려 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고라, 민수기 16장; 웃시야, 역대하 26장). 왕 같은 대제사장인 성도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5-6)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 영광을 치하실 충분한 자격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저자는 시편 2:7을 통해 예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소개합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예수님께서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라고 스스로의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시편 2:7은 이제 1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1:5).

‘내가 너를 낳았다’는 선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이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이루어진 일임을 밝힙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받듯이 그렇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지명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시편 110:4은 신약성경에서 딱 한 번 인용됩니다.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110:4)

시편 110:1은 신약 여러 곳에서 나오는(마태복음 22:44; 마가복음 12:36; 누가복음 20:42-43; 사도행전 2:34-35)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만큼 4절이 히브리서 신학의 독특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란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이셨다면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과 같은 중보의 역할을 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순 있지만, 사람으로 바뀐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성육신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혈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은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론의 자손들만이 대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존귀한 직분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때 한 번 나타난 아무 독특하고 신비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를 소개하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창 14:18).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을 만나게 하시고, 축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친 하나님의 제사장은 일반적인 위치를 초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신적 기원을 같은 멜기세덱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레위지파의 반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제사장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의 자손들로부터 나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과 달리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멜기데섹(히 7:3)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을 통해서 세워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온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친히 일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것처럼 귀한 축복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 인간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완전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죄인들의 연약함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인간 죄를 위해 속죄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대제사장 자신들도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위한 제사를 먼저 들려야 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갈등하는 백성들과 공감하며 도와줄 주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어서 설명하기를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신을 위한 속죄 제사가 필요 없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불완전한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을 능가합니다.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이 돌아올 때마다 죄 사함의 제사를 드려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단번에 속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은 사람이 하지 못하는 탁월한 속죄를 가능하게 하는 증표가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확신하고 기뻐하며 평강 중에 거할 수 있는 까닭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중보자로 자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벨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예수님(7-10)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예수님의 본을 좇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에 자신을 드릴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대제사장들과 차이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의 사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참된 성도답게 살 수 있는 보여 주셨습니다.

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7-10)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대제사장의 영예를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랐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겸손에 대한 좀 더 깊은 묵상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스스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몇 가지 구체적인 행동과 성품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육신 기간 그리스도의 신분과 성품을 특징짓습니다.

(1) 간구하셨던 예수님(7)

예수님께서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심판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고, 고난을 거절하지 않고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은 육체에 계실 때,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성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대신해 고난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2) 순종하신 예수님(8-9)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도 ‘순종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사람들과 자신을 위해 대제사장의 사역을 행하셨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들이지만 고난의 터널을 통과합니다. 순종을 배우게 되고 온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심은 인간을 위한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고난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완전함을 성도들이 본받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비결은 순종입니다. 할 말 다하고 살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끝까지 침묵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말 있어도, 침묵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에서도 침묵하신 예수님을 목상해 보시길 바랍니다(마태복음 27:14). 침묵하시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3) 멜기세덱의 반차이신 예수님(10)

6절에서 처음 인용되었던 멜기세덱이 10절에 다시 등장하게 된 단서는 9절의 ‘영원한’ 구원의 모티프입니다. 시편 110:4에서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칭해졌습니다. 영원성은 존재 혹은 기원뿐 아니라 수행한 직무의 결과와도 관련됩니다. 속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그것이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6절의 인용 구절과 10절에서 반복된 표현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제사장’이 ‘대제사장’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또한 사소해 보이지만 우연이나 실수가 아닌 저자의 분명한 의도를 엿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9절 이하에서 더 명확하게 그려질 대속죄일 제의에서 그 속죄 제의의 담당자는 일반 제사장이 아닌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만드신 세상의 빛과 어둠을 다 겪으셔야 했고, 기쁨과 영광만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도 아셔야 했고, 기쁨과 영광만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도 아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되셔서 그분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칭함을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느끼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바로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있습니다.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은 ‘조물주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세상을 내버려둘 수 있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주시요 온전히 장성한 믿음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계속적인 훈련 없이 신앙의 연조만을 자랑하지 맙시다. 우리를 초보적 믿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부단한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경건의 훈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을 향해 분발하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그 사랑을 외면하는 세상을 향해 열정적으로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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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4-02)


대제사장을 통한 천국 입성

히브리서 4장 12-16절


우리 손에 성경이 들려져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성경은 움직이지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살아 있으므로 운동력 있고 에너지가 있습니다. 운동력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날쌘 검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에 도전을 주고, 삶의 기준으로 살아 계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도 철학도 예술도 그리고 문화도 아닙니다. 오직 실재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당신을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살아있고 예리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니 어떤 것도 그분 앞에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남(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선포되지만, 사람들의 귀를 통해 듣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전하고 귀로 듣는 작용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만나주시는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인격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매우 귀하고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 말씀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2-13)

저자는 앞부분 1-11절까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합니다. 출애굽 했지만, 불신앙으로 광야에서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불신앙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우리는 아무것도 감추거나 꾸며낼 수 없었습니다. ‘불순종의 본’에 빠지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감추려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감출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단 한 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떤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날선 칼(군인의 검이라기보다는 수술 집도의의 메스와 같은)과 같아서 우리 마음의 생각의 결과 의도의 방향까지 분별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우리의 삶에 관한 결산을 해드려야 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말씀은 힘이 있고, 양날에 날카로워서 그 효과가 탁월합니다. 혼과 영과 관절 그리고 골수를 쪼갤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성에 대해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소개합니다. 아직까지 유효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운동력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살아있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지런함 때문에 많은 존재와 많은 상황이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움직인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좌우에 날쌘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알지 못한 부분, 우리 안에 더 숨겨진 부분까지 모두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12)라고 분리합니다. 예리한 칼은 분리하는 힘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제사할 짐승을 예리한 칼로 각을 떴습니다. 그리고 드려야 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합니다. 이렇게 말씀은 칼과 같아서 구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과 마귀의 생각으로, 즉,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구분합니다. 두 번째로 말씀은 마음과 생각을 감찰합니다. 본문에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들어 납니다. 말씀에 가까이 가면, 모든 것이 들어날 것입니다. 감추어진 모든 것이 들어나는 것이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마치 많은 사람 앞에서 강제로 옷을 벗긴 것처럼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판단 앞에 모든 피조물이 하나도 그 앞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사의 메스보다 예리합니다. 의사의 메스가 가르지 못하는 부분, 마음의 숨은 생각까지도 하나님의 눈앞에 드러내어 놓습니다. 하나님이 상관하시는 만물은 다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납니다. ‘드러난다’라는 의미는 레슬링에서 목이 잡힌 상태나 제물의 목이 칼 앞에 노출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명적 약점이 노출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그의 취약점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태어나기도 전부터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행해왔던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모든 것이 피할 수 없게 다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말씀으로 주님께서 당신의 삶을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신다면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며 예리한 검으로 역사하시는 말씀을 체험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심판을 위한 해결(14)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 있으며 예리하게 다가올 때, 거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부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당신의 치명적인 허물이 드러났을 때, 그 허물에 대한 결과는 분명히 심판입니다. 그 심판을 해결할 해결책들은 무엇입니까?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

하나님 앞에 드러날 모든 모습은 연약함 그 자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부르실 때,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2:11)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벌거벗은 존재로 나간다고 할지라도 담대하게 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성도들을 이끌고자 하신 것은, 벌하고 욕하기 위해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히 여기셔서 온전케 만드시기 위해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곧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형태로 나타났는데, 말씀이 보인 형태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숨도 못 쉴 정도로 긴장되었지만, 예수님 앞에 나오면 자비와 위로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초대하고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로 날마다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존재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가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던 예수님, 삼십 팔 년된 병자를 일으켜 세워 주셨던 예수님, 십자가에 보혈을 흘려주셨던 예수님,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 어떤 죄인도 어떤 원수도 다 품어주시는 예수님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험한 세상에 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반면 자신이 약하다고 여기고 강함의 원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함과 강함을 모두 갖추기 원하십니다.

 

사정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15-16)

이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약함이 적나라하게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담대함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담대함은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유일하신 분이시며 하늘의 성소를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을 세상이 본 적이 없습니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5-16)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한결같이 우리처럼 육신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셔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처럼 죄를 짓는 분은 아니며, 또한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며 그 긍휼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다시 한 번 대제사장의 역할을 살펴보면,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를 가지고 1년에 한 번만 성전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백성의 죄악을 해결한 일을 담당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대제사장이 없습니다. 이 땅에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한 번 들어갔을 뿐, 오직 휘장 밖에서만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휘장을 열어젖히듯 하늘을 가르시고 지성소 중의 지성소라고 할 수 있는 하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참 성전에 들어갈 길을 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연약함을 모두 감당하고 성전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의 연약함, 허물, 부족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고통과 배신과 매맞음, 억울함 그리고 죽음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다 가신 것은 당신을 위함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아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더 잘 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절망보다 더 깊은 절망을 체휼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우셨으면 심한 통곡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을 당신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 은혜로 대제사장을 힘입을 때 우리는 하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의지해 긍휼과 도우심을 얻어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의 원천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리를 인도해 나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담대하게 그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 앉으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당신에게 넘칠 것입니다.

한 주 동안 찬송가 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를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찬송을 통해 주님의 보좌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상태로 주일 준비하면, 예배의 시간이 은혜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 연약함을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하늘 보좌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항상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다가 오실 것입니다. 문제와 결정을 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변명하지 않고 솔직하게 아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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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4-01)


순종으로 얻는 영원한 안식

히브리서 4장 1-11절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이유는 안식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후, 참 안식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안식(安息)’은 쉬운 말로 ‘쉼’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할 일을 다 하고 난 다음에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안식에 들어가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안식은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안식의 결국은 평안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평안하십니까? 지금 평안이 흔들리고 있다면 안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7에서 시작한 설교는 4장으로 넘어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선포된 것이 전부가 아니라 선포된 약속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말씀과 믿음의 연합(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선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따라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많은 약속을 응답해 주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한 효과는 그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약속을 누릴 수 없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1-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로 삼아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기려는 유혹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힘을 무력 시키고 믿음의 자녀들로 살 수 있도록 믿음의 자녀로 창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 믿는 자들을 도와주십니다.

(1)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1)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로 가다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길로 갔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저자는 먼저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1)라고 소개합니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주목을 받습니다. 그 의미를 자유자재로 바꾸어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하나님 백성의 삶을 다채롭게 표현합니다. 만약 ‘멈추다’, ‘쉬다’라는 의미를 강조하면 행위에 대한 규정이 될 것입니다. 장소(안식처)나 시간(안식일)을 뜻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안식은 종말에 누릴 구원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4장을 포함한 보다 큰 단락(3:7-4:13)의 출발점은 출애굽 세대의 광야 여정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이 그들의 소유가 되리라고 약속하셨고 그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음은 대부분의 출애굽 세대에게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실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들어갈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 땅에 모든 고통과 수고를 벗어버리고 영원히 안식에 들어갈 길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라고 권고합니다. 어떤 사람이 약속이 있어도 들어갈 수 없습니까?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because they were not united by faith with those who listened/ESV)”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안식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따라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적으로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애굽 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기적도, 반석에서 물이 나온 기적도, 날마다 만나는 먹는 체험도 그리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에 의해 광야까지는 이끌려 왔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은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가나안 땅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환경 때문에 넘어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환경 속에서 약속을 믿고 끝까지 붙잡아야 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는 구원에 대한 ‘두려움’과 ‘힘씀’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씀합니다.

(2)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2)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예로 보면서, 수신자들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2)라고 소개합니다. 안식(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가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참 안식도 구원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마음만 강퍅해집니다. 강퍅하면 고집이 생기고, 고집은 교만이 낳습니다. 그리고 교만은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순종의 세계에서 살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그 들은 말씀을 믿음과 결합해야 합니다. 성경의 약속들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믿음은 사람들이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결단해야 합니다. 주저하고 있으면 또 계속 광야에게 머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깁니다. 매일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릴 때,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당신의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죄악과 싸워 이기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의 세력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한데로 살 것을 결단하시면, 당신에게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소망을 위해 달려가는 지금, 당신은 과연 천국에 이를 있는 사람인지 항상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과 믿음 위에 굳게 서야합니다. 선포되는 말씀과 우리의 믿음이 연합될 때,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창조 때 안식하신 하나님(3-8)

과거 출애굽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끝까지 순종하면 안식을 누리며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는 안식은 어떤 안식입니까?

3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3-8)

믿음의 선배들의 실패는 오늘날 우리를 위한 좋은 교훈이면서 또한 두려움과 좌절의 이유도 될 수 있습니다. ‘선배들이 못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들처럼 우리도 실패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앞설 수 있습니다.

(1) 창조하신 때 안식하신 하나님(3-4)

이런 두려움에 응답이라도 하듯 저자는 회중에게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확언합니다(3a). 3b절의 전환은 다소 파격적입니다. 이제껏 시편 95편을 중심으로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다루어 오다가, 여기서 창세기 2:2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태초의 창조와 안식을 거론합니다.

본문은 창세기 1장에 나온 안식에 대해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안식의 원형은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쉬신 일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본향’(11:14) 혹은 ‘하늘의 예루살렘’(12:22)이라고도 합니다. 안식은 창조 때 주어진 것입니다. 안식은 단순히 일을 마쳤기 때문에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분의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고 누리시는 날입니다. 안식일에 초점은 하나님과 백성들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창조를 마치신 다음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했던 쉼,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쉬셨던 태초의 쉼(창세기 2:2)의 반영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무 피곤함이나 고통, 두려움도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다음 안식을 하셨지만, 인간은 먼저 안식하고 일을 하기 시작하는 스타일입니다. 따라서 먼저 안식하고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먼저 관계를 회복하는 예배를 드리고 일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안식일 개념이 다릅니다.

(2)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5-6)

하나님께서 안식을 준비하시고 모두 들어오라고 하시지만, 왜 많은 사람이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불순종은 불안을 낳고, 순종은 안식을 낳습니다.

안식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죽어서 가는 내세의 안식입니다. 또 다른 안식은 현실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는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것이 안식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의, 죄악, 고통, 눈물 그리고 죽음이 엉켜있는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함께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우리는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주시기를 원치 않고, 반대로 안식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안식과 즐거움에 취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완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자녀들은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던 것처럼 성도들에게도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계획을 세워 시작하든지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순서이며 안식에 개념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 전에 예배를 드리고 시작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안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마음이 부드러우면 안식이 있지만, 강퍅하면 안식이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말씀과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용납의 마음, 순종의 마음에 안식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헌신을 원하시면,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곳에 안식이 있습니다.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데,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불순종하면 안식이 없습니다. 순종하면 그곳에 안식이 있습니다.

(3) 안식에 들어가려면 (7-8)

구약 성경에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고 선언하는 것입니다(7). 이러한 내용이 세 번이나 언급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진노를 초래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비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얻게 되는 안식은 여호수아가 주었던 안식과 비교할 수 없는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진정한 안식과 비교할 수 없는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의 안식을 얻은 것은 하나의 예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다’라고 한 말은 우리가 실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여호수아인 예수님을 따라 본질적인 안식, 곧 영원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안식에 들어가길 위한 수고(9-11)

어제의 확고한 신앙과 강력한 의지가 오늘의 신앙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들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주지 못합니다. 어제 잘했던 사람들이 오늘 죄의 유혹으로 완악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는 것입니다. 저자는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9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9-11)

앞서 설명한 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안식은 역사를 초월하여,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의 시간을 관통하면서 모든 세대에게 지속합니다. 과거나 현재의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열려 있다는 것은 맛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옛적 광야의 이스라엘에게도,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에게도, 히브리서의 청중에게도, 그리고 오늘날 히브리서를 읽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안식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안식을 미래의 일이 아닌 ‘현재’로 설명합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안식을 완성되어버렸다면, 하나님께서는 시편 95편에서 다시 거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편 95편에 전제된 영적 상황과 히브리서의 영적 상황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식에 들어갈 약속’, ‘안식할 때’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구원신학은 ‘이미 그러나 아직’ 위에 펼쳐진다는 면에서 신약성경 전체의 구원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성경 다른 곳에도 구원이 역사 속 현실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전망이라고 말하는 말씀은 많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다른 신약성경보다 더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점은 ‘이미’ 얻은 안식이 ‘아직’ 얻지 못한 안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해야 했던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해방과 구원 이후의 여정에서 불순종과 불신앙의 도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거기에 닿지 못한다고 여겨질까?’ 두려워하고(1),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진행하고 있지만,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9).

이미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셔서 안식을 완성시키시고 누리고 계십니다(10).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누리고 계신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안식이 완성될 때까지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히 12:1). 사탄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안식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참된 안식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놀라운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안식이 없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행위기 때문입니다. 오직 복음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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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3-02)


과거를 통해 권고하신 예수님

히브리서 3장 7-19절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능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 되시고, 어느 때는 자신이 주인 될 때가 있습니다. 사단은 ‘너의 삶에 주인이 되면 행복한 것이다.’라고 충동합니다. 스스로 주인되었을 때는 불순종하고, 자신의 주장과 결정 그리고 행동이 옳다고 고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셨을 때, 행복이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진정한 행복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많은 것을 교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강퍅한 마음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했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들처럼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갑니다. 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선진들의 불순종을 통한 권면(7-11)

인생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빨리 가야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멈추시면 자리에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느린 것 같아도 바른길을 갈 때, 늦어 보일지라도 마침내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조금 늦어 보이고, 소득이 없어 보지만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큰 영향력 있게 세우실 것입니다.

7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7-11)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실패를 반복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1) 광야 세대의 거역함과 완고함(7-9)

본문에서도 ‘그러므로’라고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이는 저자가 3:6에서 에둘러 주었던 명령인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곧게 잡고 있어야 한다’는 부연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3:1-6 전체를 염두에 두었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언급했던 모세의 신실함에 연결해서 ‘그의 신실함과 대조되는 불신실한’ 광야 시대의 이야기하려는지도 모릅니다. 광야 시대의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모릅니다. 광야 시대를 떠올라게 하는 그 많은 성경구절 중에서 설교자는 그들의 불신앙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담긴 시편 95:7b-11을 낭독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광야 세대 이야기의 원자료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기나 민수기, 신명기 본문 대신 시편 95편을 사용합니다. 사실 시편 95:7b-11에는 출애굽기 15:23과 17:7, 신명기 16:6, 민수기 14:21-23이 모두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이 시는 모세오경에 대한 인용이고, 일종의 주석이요 해설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성경 내의 성경 해석’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서 저나는 이것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전제합니다(7). 모세오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듯이 몇 백년 후 이스라엘의 정황 속에서 거듭해서 들려진 그 말씀의 해석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7 …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편 95:1-11)

저자가 낭독하는 성경 본문은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7절부터 시작합니다. 7b절의 화자는 시편 95편의 시인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대상은 시편 95편의 독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8절 이하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녹음해 두었다가 트는 것처럼 직접 화법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시편의 청중 ‘너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열조’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말라고 하신다. 이어지는 10-11절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광야 세대의 현장으로 간 것처럼, 하나님이 광야 세대를 향해서(‘이 세대에게’) 하시는 말씀이 들려집니다. 즉, 히브리서의 청중은 시편을 듣고, 시편의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은 시편의 청중뿐 아니라 광야 세대를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이 히브리서의 청중,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인용문 속에 인용문을 배치하는 이런 장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생생하게, 진지하게 듣도록 돕습니다.

(2)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자들(10-11)

9절과 10절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합니다. 광야 세대의 완고함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므로’를 통해서 이 논리적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이 접속사는 인용된 원문인 칠십인역 시편 95편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 95편에서는 ‘사십 년 동안’이 열조의 행위에 연결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조 편에서 보면 ‘사십 년’은 반역의 시간이었습니다(히브리서).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반역의 세대를 향한 진노와 심판의 시간이었습니다(시 95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이 공존했던 시간이 바로 ‘사십 년’이었습니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돌이킴의 기회를 저버린 백성에게 가나안 입성을 불허하신 하나님의 결정은 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음성(10-11)은 민수기 14장의 상황을 기초로 재구성된 말씀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입성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그들은 도리어 낙담하고 원망했다.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중한 맹세의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내 쉼에 들지 못하리라.’ 우리도 시편 95편의 청중과 함께 엎드려서 이 음성을 듣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섭섭함과 안타까움, 절절한 사랑이이 신탁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권면(12-19)

하나님께서 속상하신 것은 세상 때문에 속상하신 것이 아니라 믿는 성도들 때문에 속상하십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은 속상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가나안 땅에 들어놓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시련을 주었습니다. 믿음의선택을 해야할 때, 모두가 믿음의 선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 앞에서 바른 믿음의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 있겠습니까? 본문으로 들어가서 결과를 보겠습니다.

12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2-19)

히브리 기자가 왜 이것을 언급하겠습니까? 초대교회의 성도들 역시 그런 실수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완고해져서 강퍅해졌습니다. 강퍅케 된 이유는 죄의 유혹입니다. 죄 때문에 강퍅해졌고 실패했습니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성경을 회중의 상황에 적용하기(12-14)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기 위해 권면합니다. 믿음이 없이 악심을 품고 있을 때,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악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지면 불안이 찾아옵니다. 출애굽 세대의 불신앙을 반면교사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 있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편 95편의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신학적인 메시지의 요체를 시편 95편에서 발견합니다. 먼저 시편 95편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특히 ‘오늘’과 ‘안식’이라는 두 단어가 중요합니다. ‘안식’에 대해서는 4장에서 더 자세히 논의할 것입니다. ‘오늘’은 시편의 원 독자들과 히브리서의 청중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종말을 동시에 조망하게 해주는 신비로운 단어입니다. 이후 달란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이 시편 당시의 시간에 한정되지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4:7-8). 히브리서의 시간도 ‘오늘’이고,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이 도래할 때도 ‘오늘’입니다. 21세기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도 여전히 참 안식을 갈망하며 경건과 신앙을 지키려 애쓰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광야 세대처럼 되지 않기 위한 실제적인 방안이 제시됩니다. ‘오늘’이라 부르는 이 하루 동안 성도들은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기 위해서, 형제자매를 거울로 삼아 신뢰 위에서 서로를 경고하고 책망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마음의 굳어짐의 원인은 죄입니다. 종류, 경증과 무관하게 죄는 결국, 성도의 마음을 굳게 만듭니다. 거창한 철학이나 교리적 오류에서 불신앙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죄와 불신앙의 매키니즘은 일방적이지 않으며, 그 둘 사이에는 나선형 순환 관계가 있습니다. 죄가 불신앙을 조장하고 불신앙은 죄를 묵과하며 확대 재생산합니다.

‘믿지 않음’, ‘하나님에게서 떨어짐’, ‘완고하게 됨’은 모두 같은 상태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들입니다. 아마 첫 번째 단어는 ‘불신실함’, 두 번째 단어는 ‘하나님을 저버림 혹은 배반함’이라는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상태는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음’입니다. ‘완고함’과 ‘견고함’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상태를 묘사하는 형용사들입니다. 둘 다 ‘단단하고 굳은 상태’를 표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그 두 단어를 적용하면 정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완고해질 것입니까? 견고해질 것입니까?

(2) 성경에 비추어 스스로 성찰하기(15-19)

저자는 15절에서 시편 95:7-8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청중의 삶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갑니다. 연이은 세 개 수사의문문, 그리고 대답들로 좀 더 과격한 도전을 던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 질문은 시편 95편이고, 대답은 민수기 14장에 근거해서 주어집니다. 시편 95편을 통해,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단지 역사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광야 시대일 수 있겠구나’라는 섬뜩한 착상을 떠올려야 합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성도들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경고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광야에서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서 각성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나는 ‘그들은 믿지 않았다’라고 표현합니다. 초심을 잘 지키려면 다른 이들과 물질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긍휼과 자비의 실천은 우리를 정화해 줍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강퍅하면 교만해지고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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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3-01)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 차이

히브리서 3장 1-6절


등산을 하다 보면 등산로가 있습니다. 정상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그런 경험이 한번 준비되는 길이 아닌 더 빠른 곳으로 가고자 그 길을 벗어나서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 힘들었고,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려서 어려움에 처할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우리에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신, 준비하여 주신 그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벗어나서 나간다면 우리에 인생길도 어려움에 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천사와 비교를 끝낸 후, 구약 대표자인 모세와 예수님과 비교가 이어집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충성한 것으로 영광을 받을 만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뛰어난 지도자이며 중보자인 모세와의 비교를 통해 우월하신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영광스런 대제사장(1-2)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생각과 언어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반대로 마귀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마귀가 좋아하는 생각을 하고, 마귀 편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개합니다.

1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1-2)

독자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사실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단의 강력한 무기인 죽음을 죽음으로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1)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

먼저 저자는 성도들을 향해 ‘하늘에 속한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제’로 여겨주심이 일어나 중요한 일인지 힘주어 설파했습니다. ‘거룩한 형제’(2:11)로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자비와 임재를 상기시킵니다. 서로에게 형제 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형제 되게 하는 속성은 ‘하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하늘로부터의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2:10의 ‘영광’, 그리고 후반부의 중심 아이디어인 ‘천상의 성소’(8:5; 9:23)를 염두에 두면, ‘하늘의 부르심’은 곧 ‘하늘로 향해 나아오라는 부르심’이 됩니다. 이제 저자는 앞서 2:17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주제를 계속 이어받아 이제 1절에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그리스도만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도리의 창시자이기 때문입니다(12:2). 예수 그리스도는 대속의 사역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사도의 근원이시며,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예수님의 자비하심의 측면은 뒤에 가서 집중적으로 부각 되지만(4:15-5:10), 2절에서는 먼저 그의 신실하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입니다. 부름 받은 존재임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살지 않습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지만,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언제나 넘칩니다.

(2) 모세와 예수님의 공통점(2)

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를 들어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명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동시에 대조하면서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인 교회와 그 속에 속한 우리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제사장의 자질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근거를 모세에게서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자기를 세우신 분께 실실하셨습니다. ‘모세가 (신실)한 것과 같이’(2)라는 말씀은 모세 제사장과 예수 제사장 사이에 공통적인 출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세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공통점의 기반 위에서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실함을 갖추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 그의 신실함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그 민수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민수기 12:7)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감당한 부분에서 모세와 같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자신의 사역을 잘 감당했습니다. 교회는 오직 신실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온 집에서 한 것처럼 자신을 세우신 분께 신실하셨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차이점(3-6)

훌륭한 집보다 그런 집을 지은 건축가가 더 귀합니다. 세상은 광대하지만,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럽고 위대하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께 영원히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신실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3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3-6)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위대한 존재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 중에서 비교해보면, 구약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모세보다 위대한 존재라고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종으로서 신실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지위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1) 차이점⑴(3-4)

3절은 모세와 예수님의 공통점(신실한 제사장)을 기반으로 삼아 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소개합니다. 그 차이는 첫째, ‘집 지은 자’와 ‘집’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창조주인 반면에, 후자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모세의 차이점은 이런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가 맞지만, 그는 단지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십니다.

저자는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4)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관한 독립적인 진술 같지만, 문맥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위를 가지신 분임을 명백하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세의 영광을 질적인 차원에서 능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집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집을 지은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자이신 것입니다. ‘집이 어떤 집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집안에 누가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집의 가치는 ‘그 안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어 집니다. 천국이 좋은 이유는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천국의 개념은 주님과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누구와 함께 있느냐?’의 개념입니다. 비록 당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보다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친히 섬겨 주셨습니다. 그 탁월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도의 인생길을 지도해 주십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하여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멀리서 지켜만 보시지 않고, 친히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사건을 거울로 삼아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자 중에 불순종하는 자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멋진 집을 보고 칭찬하지만, 그 집을 지어 준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건축가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모든 피조물보다 존귀하신 분입니다. 저 위대한 모세도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창조자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경배만 받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12장 7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 관해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섬김을 받는 사람들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보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대제사장의 섬김을 받는 자들입니다.

(2) 차이점⑵(5-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집의 상속자이십니다. 아들로서 집에 대해 신실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는 그분과 함께 그 집의 상속자가 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이 사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예수님의 비슷한 점은 ‘신실함’이지만, 그들의 차이점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의 ‘아들’이고, 모세는 ‘사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보좌를 물려받을 분입니다.

성경은 이런 확신 위에 견고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소유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백성을 맡아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받은 백성 받게 살아가야 합니다. 즉 세상이 낙심케 해도 참된 소망을 가지고 이겨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소유한 것에 소망을 둡니다. 그러나 성도는 소유한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랑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이나 쇠줄 등 아무리 튼튼한 줄을 던져 주어도 그가 그 줄을 단단히 잡지 않는다면 급류에서 건짐을 받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견고히 붙잡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는 도리’ 곧 참 고백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며 생명 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이 이 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줄을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져 주시는 줄은 가장 견고한 밧줄입니다.

예수님은 참 고백의 밧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섬기는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줍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깊이 생각하면 유혹과 절망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소망과 확신이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인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도우심을 바라며 간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섬긴 모세처럼, 당신을 살리신 예수님처럼 충성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의 소망을 견고히 붙들고 이 땅에서의 시련들을 이겨 내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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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2-02)


우리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2장 11-18절


한 남자가 정원을 살피다가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큰 비가 곧 올 것 같았고, 개미들이 하던 모든 작업을 휩쓸어가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 남자는 개미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싶었지만, 개미의 언어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개미들이 알아듣는 말로 경고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도망쳐! 곧 비가 온다!’라고 소리쳤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개미가 되면 어떨까?’, ‘그럼 개미들이 처한 위험에 대해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묵상을 통해 이 세상 역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 구원의 창시자로 온전하게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지니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마귀를 멸하시며,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을 놓아주려 하십니다.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신 그분은 시험과 고난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시험과 고난을 몸소 받으셨기 때문에 능히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형제’라고 부르심(11-13)

지금은 덜하지만, 고아들이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는 사회적인 편견과 냉대입니다. 그들을 위해 누군가가 같은 편이 되어주면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모든 인류는 고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본문에서 이러한 연약한 존재인 인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1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11-13)

세상의 인간관계는 수준 차이가 조금만 있으면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낮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쉽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쉽게 어울리지 못합니다. 세상의 관계는 조금만 차이 나면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낮고 천한 이 세상과 천한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이유(10)

10절은 5-9절과 11-18절을 맺어주는 연결 고리와 같아서 양편의 생각을 다 담아냅니다. 이곳에서 두 가지 핵심 주제는 ‘아들이 받으신 고난’과 ‘완전케 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맛보셔야 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 10절의 주요 내용입니다.

먼저, 고난에 대한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죽음의 고난’은 ‘잠깐 천사보다 낮아지심’(9)의 연장 선상에 있습니다. 성육신이 그리스도의 본질을 단지 암묵적으로 내비쳤다면 고난은 뚜렷하게 드러냈습니다. ‘고난’은 세 가지 각도에서 조명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죽음을 소멸의 한 양상으로 파악하고 신성의 대척점(對蹠點)에 놓았던 헬레니즘의 세계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영광을 품고 있고 고난이 존귀를 잉태한다는 역설은 성경에서 중심사상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기충족적이지 않고 대리적(代理的)이며 대속적(代贖的)이었습니다. ‘모든 일들을 위해’ 그분은 죽음을 맛보셨습니다(9).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심’(10)도 고난의 결과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우리를 위할’뿐 아니라 ‘우리에 앞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통과하신 고난과 영광의 전 과정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범이자 선례가 됩니다(히브리서 6:20 참조). 고난을 피해야 할 어떤 것, 혹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 여정에 통합된 한 부분이라고 이해함으로써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신실함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온전케 되심’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에서 15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칠십인역의 용례를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고난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제사장과 같은 사역을 ‘완전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전함’은 그의 ‘직분에 꼭 들어맞는’, ‘적합한’, 그리고 ‘자격과 능력을 충족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한편, ‘거룩하게 하시는 분’ 예수님과 ‘거룩하게 된’ 우리는 한 부모를 모신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형제’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과 관계를 회복시키길 원하셨습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아들이 오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렸던 창조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구원이 창시자’(10)로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은 구원의 영광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구속의 은혜를 베푸셨고, 그리스도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와 성도가 한 근원에서 남(11-13)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두 번째 의미는, 성도의 거룩함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결과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우리가 다 한 근원이신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도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한다면 사람은 율법 속에서 헤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님이 은혜로 거룩하게 하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믿는 성도를 형제와 교회,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구원하신 분과 구원받은 이들’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를 대언하겠다는 저자의 설교 철학이 12-13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여기 인용된 시편 22:22과 이사야 8:17b-18은 11절의 선언에 대한 권위 있는 역할을 합니다.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22:22)

17…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이사야 8:17b-18)

성자들은 ‘형제’라고 기꺼이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저자는 시편과 이사야에서 듣습니다. 사실 우리는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형제(兄弟)”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 주시고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장점을 좋아하지만, 약점은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부족한 것과 연약한 것, 그리고 모자란 것까지도 모두 아시면서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병든 것, 연약한 것을 덮어주시고 안아주십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이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사람이 가진 모든 연약함을 몸소 다 경험하셨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고프시고, 매를 맞으면 아프시고, 일하시면 피곤하신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결코, 슈퍼스타가 아니셨습니다. 일반적인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아낌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사랑하면서도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면서, 사랑하면서도 섭섭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형제라고 불렀다면, 자동적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 우리를 향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부르지 않고,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여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아낌없이 사랑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연약한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이 사람이 나의 형제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그분 곁에 서기가 한없이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그분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변화된 새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영원한 자유가 되어 주심(14-18)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으로 오실 수 있는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는 그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승리와 해방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효력은 천사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강조합니다.

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14-15)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문으로 입적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 대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지불 되었습니다. 이제 영적 자부심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14-15)

사람들은 많은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중에 하나는 죽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 속에서, 평생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갑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약점을 노립니다. 가장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그것을 시험의 도구로 삼아 마치 그것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자기에게만 있는 것처럼 속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생명조차 빼앗은 것같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거짓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것처럼 보인 사단을 멸하시러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참 생명은 하나님의 권한 안에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의 종으로 지배하던 사단의 권세는 무너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서 함께 한 자들은 사단이 절대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멸하는 무기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부활 앞에서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목적은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죄 씻음 받고, 마귀로부터 자유케 되고, 죄의 종노릇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구원의 중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친히 시험도 받으시고 고난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승리하고 구원의 통로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사망을 이기고 마귀 권세를 이긴 자입니다. 이런 승리의 삶을 나눠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는 사람들은 사단이 절대로 손댈 수 없습니다.

(2)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신 예수(16-18)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는 승리와 해방의 효력이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사들은 죽음과는 상관없는 존재들입니다. 대속의 은혜는 일생을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던 인간들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친히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진정 굳게 붙들어야 할 분은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시요, 고난 중에 우리를 도우실 분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흔들리는 믿음과 가치관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때로는 쓰러질지라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씻으셨습니다.

시험 받고 어려움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이 땅에 오셔서 육신으로 호흡하셨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으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삶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고난 당하셨지만, 죄에 패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생명의 길을 발견합니다. 시험과 고난 당하신 주님은 시험받는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평생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능히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친히 인간이 되셨을 때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부족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통로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의 통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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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2-01)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2장 1-9절


오늘날은 나르시시즘(자기애)의 광풍이 몰아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자신에 대한 관심사 외에는 그 어떤 이야기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극도의 불안이 엄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합니다. 점점 자기만의 성을 쌓아가다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위기의 시간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장엄한 시와 찬미로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을 선포한 후 설교자는 청중, 즉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를 점검합니다.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묵상에 멈추지 않고 성도 자신들의 상태를 돌아보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시편 구절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그것의 효과를 설명합니다.

 

구원을 등한히 여지지 말라(1-4)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유념하여 듣지 않으면, 정처 없이 떠다니는 배처럼 잘못된 말씀의 물살에 휩쓸려 명망으로 떠내려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이 진리임을 알고 고백한다고 해도 말씀을 기억하며 살고 헌신하지 않는다면, 자신과는 아주 상관없는 진리가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흔들릴 수 있는 성도들을 향해 지금까지 주신 말씀을 잘 붙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1-4)

구원의 확신은 주관적 감정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도들과 하나님의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람들이 전한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저자는 천사 숭배 문제를 일단락하면서 유대인 개종자들에게 더 이상 영적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 줍니다. 즉 믿음에서 벗어나며 영적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더욱 유념할 것을 권면합니다.

(1) 현재의 위험(1-3a)

먼저, 한 가지 살펴야 할 것은 ‘그러므로’입니다. 신약, 특히 바울 서신과 일반서신을 읽을 때, 예사로이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과 관계를 표현하는 접속사이므로, 직전 단락의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야 필요성이 있습니다. 1장에서 강조된 주제는 천사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의 지위와 능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러므로’는 ‘아들은 천사보다 우월하시며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므로’에 대한 줄임말입니다. 이제 2장에 들어서 천사들은 구약 율법을 전해준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입니다.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으로부터, 율법보다 뛰어나고 엄중한 복음의 우월성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1절은 히브리서 저자가 1장 내내 아껴 두었다가 비로소 내뱉은 간절한 주장이자 메시지입니다. 이제껏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하도록 합시다’라는 당부와 권고의 말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히브리서의 장르에 관해 설명했다시피 이 책의 장르 자체가 ‘권면의 말’(13:22)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은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2:1-4은 바로 그 목적을 이루는 첫 번째 지점입니다. 이 단락을 필두로 앞으로 네 번이나 더(3:7-4:13; 6:4-8; 10:26-31; 12:25-29) 이른바 ‘경고 단락’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유념해야’하고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 표현들이 구체적인 자세 혹은 행동을 지시합니다. 전자는 주의를 기울여 듣는 행동을 가리키기도 하고(사도행전 8:6,10), 들은 것에 따라 살아가는 실천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신명기 32:46). 후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태도, 나태함,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에 합당한 책임과 부담을 회피하는 행동(action) 또는 무행동(non-action)을 가리킵니다.

(2) 과거의 확증(3b-4)

저자가 1-3a절에서 현재 신자들이 노출된 위험을 경고했다면, 3b-4절에서 복음의 작동 방식을 한 번 더 확인합니다. 복음이 ‘이같이 큰 구원’인 이유는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에 다음 세 가지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①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② 그것을 ‘들은 이들’이 우리에게 확증하였습니다. ③ 하나님께서 표적, 기사,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 함께 증언하셨습니다. 이 중 마지막 세 번째 것은 히브리서의 저자와 독자들이 복음의 현재적이고 역동적인 체험을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역사는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사도행전과 바울이 개척한 몇몇 교회에 한정된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를 받아 읽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활동이 복음의 신앙을 구성하는 불가분리적 요소였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복음은 명제나 교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고 활동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성령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증언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들면 영적 표류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복잡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고 가까이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경주에서 확실하게 승리하는 길입니다.

 

참 사람 예수의 신분(5-9)

예수님과 함께하는 부활을 소망합니까? 주님이 부활하셔서 만물의 통치자가 되신 것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도 죄에 대해 죽었고, 그분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부활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실 마지막 날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온 세상을 통히하게 될 것입니다.

5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5-9)

여기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청중의 관심을 그의 중심 사상, 즉 미래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운명으로 돌립니다. 이제 그분의 성육신을 통해 그 운명을 함께 나눌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관성이 전면에 부상하게 됩니다.

다시 천사가 거론되지만 여기서는 지위나 능력 면에서의 대비보다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 즉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예견한 예언의 말씀으로 인용된 것은 시편 8편입니다. 이 시편은 원 문맥에서 메시아적 예언이 아니라 인생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하지만 시편 8:6의 원래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사람’과 ‘인자’는 분명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인간 존재는 만물의 영장으로 세움 받아 존귀와 영광을 누리지만, 천사에 비하면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그래서 ‘조금’ 못한 존재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메시아적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해석은 원래 문맥과 긴밀히 잇닿아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비추어주는 새로운 차원이 더해집니다.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셔서 성육신하신 동안, 특히 육체적 고통과 죽음을 맛본 상황에서는 천사보다 조금 못한 상태에 계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분이 죽음의 고난 이후 부활 승천하셨을 때 영광과 존귀를 입으셨으므로 성육신의 기간은 잠시 동안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와 독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이미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만물은 그 발아래 복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두 사건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존재합니다. 계획의 첫 부분은 이루어졌지만, 나머지 부분, 즉 승귀하신 예수님께 대한 만물의 복종은 ‘아직 보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바울 사도의 인식과도 일치합니다. 아직 성취되지 않았지만, 그 성취가 확실한 장래의 모습에 대해서 바울도 여러번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과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 8:18-21),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함”(엡 1:10),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함”(빌 2:10), 그리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됨”(골1.20)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 예수를 본다’고 말합니다. 정말입니까? 그(와 그의 독자들)는 환상을 보았던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읽고, 듣고, 그래서 이해하고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보는’ 경험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내 일부 전통은 신앙에 있어서 봄의 차원을 지나치게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이천 년 기독교 역사 동안 문자를 읽어서 이해함으로 믿고 신앙을 배워간 사람들은 극소수였습니다. 교회 건축을 통해서 예배당에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와 그림, 조각을 통해서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의 표정과 행동을 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보다 신비적이고 내밀한 체험을 가진 신앙인들의 이야기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시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은 주관적이고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보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우리가 낙담할 필요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첫째 것의 성취를 이미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취된 것을 보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 완성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반에서 볼 수 있는 ‘이미 그러나 아직’ 종말론과 일맥상통합니다.

9절 후반부에서 저자는 복음과 구원에 관해서 이제껏 강조하지 않았던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요점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조금’ 혹은 ‘잠시 동안’못하게 되셔서 죽음을 맛보신 사건은 예수님 자신의 영광과 존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온 신학적 묵상이 여기서 모든 사람들에게로 옮겨집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시편 8편을 인용할 때부터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구속 사역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는 방식임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고 돌보십니까?’라는 시인의 물음은 참 사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온전하게 대답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없으신 분입니다. 낮아져 죽음의 고난을 맛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부활 승천하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겸손하게 낮아지시고 죽음의 고난을 경험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는 마땅한 경배를 드리며 복종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인 개종자들의 혼란과 표류를 막기 위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굳게 붙들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근거도 예수 그리스도시며, 구원의 근거도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푯대요 목자시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흔들림 없는 성도들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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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1-02)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히브리서 1장 5-14절


한국교회는 공동체들이 침체 되었거나 침체 되어 가고 신앙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만큼 영적인 상황은 어려워질 것입니다. 보이는 상황이나 현상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인도하시는지 근원적인 원인을 찾아 상류로 올라가거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선언으로 히브리서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길고도 리드미컬한 문장에 이어 일곱 개의 성경 주절이 낭독됩니다. 장엄한 어조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 보다 뛰어나신다고 선언합니다. 정교하게 조율된 이 단란의 열쇠를 맡은 ‘말씀하심’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말씀을 전달하시는 아들 사이의 관계는 신비롭고 독특합니다.

 

유일무이한 아들의 지위(5)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능력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 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믿고 순종할 때 그 이름의 능력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며, 하나님의 저녀와 백성이 되는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5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5)

앞(1:4)에서 소개된 ‘천사보다 뛰어나신 아들’에 주제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일곱 개의 구약 인용구를 특이한 방식으로 연속적으로 나열합니다. 일곱 개의 인용구 중 다섯 깨는 시편에서, 두 개는 사무엘하와 신명기에서 각각 하나씩 온 것입니다. 그중 다섯 개는 아들에 관한 일용이고, 한 개는 아들과 천사의 관계, 그리고 한 개는 천사에 관한 인용입니다.

구약 성경을 인용한 첫 두 구절인 시편 2:7과 사무엘하 7:14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합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공식적이며 전형적으로 메시아의 탄생을 의미하는 구절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언제 천사 중 누구에게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느냐?”(5a)라는 수사적 질문으로 도입됩니다. 이 질문은 ‘그렇지 않다’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합니다. 곧 두 인용구는 아들에게만 적용될 뿐 천사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째 인용구는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도다”라고 합니다. 이는 시편 2편 7절에서 왔습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이 말씀에 나오는 ‘아들’은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 중 누구에게도 ‘아들’이라고 지칭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2편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그분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을 묘사한 대관식 시편입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을 예언합니다. ‘너를 낳았도다’라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윗을 통해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인용구인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될 것이다”는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왔습니다.

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사무엘하 7:11-17)

위 말씀은 선지자 나단의 예언 가운데 주어진 신탁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예언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게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그 온전한 성취가 솔로몬이 내다보았던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선언합니다(참조 요 7:42; 행 13:23). 이 전달된 메시지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확증합니다. 나단은 다윗 가문의 왕위는 영원할 것이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으며 신적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곳에서 ‘아들’은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바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구절을 인용해서 한 문장으로 통합되면서 그 적용 대상이 다윗 왕조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전환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천사가 아무리 뛰어나고 위대하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향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이 말씀을 한 적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보다 더 뛰어난 존재는 없습니다. 천사는 다만 하나님의 피조물뿐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재물이 귀한들 어찌 자녀들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리스도보다 더하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소유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이 소유한 왕권과 창조의 능력(6-12)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기분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신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주님은 창세 전부터 지금까지 동일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한결같으시기에 죄악 가득한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도 그분은 모든 약속을 신실하게 다 이루셨습니다.

6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6-12)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천사에게도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는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심판을 하실 분이십니다. 이제 천사와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천사에 대한 소개(6-7)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실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온 세상과 만물을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십니다.

6절에 인용된 칠십인역 신명기 32:43, 시편 104:4 그리고 시편 44:7a절은 ‘A는 B에게 경배하라-A는 유한하다-B는 무한하다’의 논리 구조로 만듭니다. 즉, 뒤의 두 시편이 맨 앞에 신명기 말씀의 이유와 근거를 대는 형국입니다.

43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명기 32:43)

4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편 104:4)

7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시편 44:7)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신적인 권위가 있지만, 천사들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거룩한 존재이긴 하지만 신적인 권위는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원하신 아들께 경배함이 마땅합니다. 또한,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104편 4절을 인용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이 아니라 칠십인역 본문을 따르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하실 때 천사를 도구의 역할로 쓰십니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8-9)

천사의 존재와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상속자이시고, 만유를 유업으로 받아 통치하고 주관하십니다. 이어지는 8-9절에는 칠십인역 시편 44:7-8이 인용되었습니다.

7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8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시편 44:7-8)

하나님께 만유의 통치자로 기름 부음을 받은 아들은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이십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섬기는 종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업을 잇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유의 통치권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3) 창조이신 그리스도(10-12)

당시 사람들은 천사를 숭배했지만, 천사와 그리스도는 비교도 안 됩니다. 또한, 10-12절에서도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옷처럼 낡고 변하지만, 그리스도는 그 시대가 다함이 없습니다. 천사들도 피조물의 존재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102:25-27을 인용해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창조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언급합니다. 예수님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요한복음 1:3).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진 천지 만물은 장차 사라질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천사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보다 먼저 변하고 타락한 존재가 천사였습니다. 천사 루시퍼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납니다. 그가 바로 사탄이 되었습니다. 타락한 그 천사가 하와를 유혹해서 자기처럼 타락시켰습니다. 천사는 이런 존재입니다. 피조물이기에 낡고 변하고 타락하고 멸망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 우편으로 승귀하신 아들(13-14)

천사는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모든 원수가 다 진멸될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시며, 천사에게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하신 분입니다.

13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4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3-14)

이제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위를 확정합니다. 5절의 질문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드러냅니다. 시편 110:1을 인용하여 스스로 답합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편 110:1)

앞서 지적했듯이, 마지막 인용구(13)는 첫째 인용구와 유사한 도입구로 시작하여 일곱 개 인용구 모두를 묶는 틀을 형성합니다. 마지막 인용구(13)는 시편 110:1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왕시로서 이스라엘 왕을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에 비추어 칭송하는 이 시편은 초대교회에서 메시아적 시편으로 널리 사용되며(행 2:34; 고전 15:25), 예수님 자신도 그런 이해를 공유하십니다(막 12:35-37; 14:62).

본 절에서 이 시편의 인용은 3b절에서 이미 소개된 기독론적 진리(‘높은 곳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다’)에 대해 구약적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3b 절에서처럼 여기서도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는 것은 승귀 사건과 일치됩니다. 아들은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사역을 마친 후 아직 미래로 남아 있는 원수들에 대한 최종적 승리 때까지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서 기다리십니다(참조 10:12-13; 행 2:33-36; 5:31; 고전 15:25).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게 하신 이는 천상천하에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온 우주의 지배자로서 행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립니다. 이 특권과 권세는 결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특별한 것입니다. 천사는 이 아들의 사역을 위하여 존재하며 아들의 명령에 따라 심부름을 하는 존재합니다. 결국, 천사는 아들에게 종속되며 의존하며 복종하는 신분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모든 천사들’이란 한 천사도 예외 없음을 가리킵니다. 모든 천사는 그리스도가 부리는 ‘영’일 뿐입니다. 또한 ‘구원 얻을 상속자’는 바로 성도들입니다. 아버지의 상속을 받을 상속자들입니다. 구원을 승계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종들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을 감당하냐면 구원 얻을 상속자 곧 성도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보냄을 받은 종들입니다. 이것이 천사의 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인 천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섬기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천사들의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상과 천사의 위상은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높이 받든 천사보다 훨씬 큰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천사들도 모르는 놀라운 보화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들로 명령에 따라 심부름을 하면서 그 내용을 알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숨겨져 있는 보화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진리 즉 복음입니다. 천사는 이 진리를 모릅니다. 그러나 왕이신 아들 그리스도는 피조물인 천사보다 더 높으시고 탁월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죄로 인하여 파괴된 자연계와 영적 세계 모두를 회복하시고 그 세계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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