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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6-02)

 


영혼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6장 9-20절


약속하신 기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항해 중입니다. 그 항해 속에는 항상 바람과 파도가 있습니다. 때로는 배를 삼킬 만한 큰 파도가 닥치기도 하는데, 그런데도 이 항해의 길에서 벗어나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닻,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든든히 붙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성숙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경고의 말씀에 이어 확신과 격려로 균형을 잡습니다. 성도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보여준 행위와 사랑을 하나님께서 기억하므로 우리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바라는 것, 구원의 소망이 과연 이루어질까?’ 하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실하게 참고 실천하는 믿음이 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의 사례에서 배웁니다.

 

구원에 대한 축복(9-12)

하나님께서는 성숙을 말씀하시지만, 쉽지 않습니다. 정말 성장하고 성숙하고 싶지만, 자꾸 초보에 머물렀습니다. 더욱더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받은 축복을 귀하게 여깁니까? 축복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축복을 지키는 일입니다.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9-12)

본문 이하는 앞부분과는 반전을 이루며 목회적인 격려 하고 있습니다. 그 격려는 8절까지의 엄중한 경고의 목소리와 균형을 이룹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남겨놓고 히브리서를 읽는 수신자들에게 다시 히브리서 기자는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을 조금 더 전진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덧붙이면서 시작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삭의 아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결국에는 그 축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 것과 지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의 행진, 복음의 행진. 소망의 행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9-10)

성숙할 수 있다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결코 성장해야할 우리들을 잊어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방황하려고 하고, 성장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보장하시고 성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도 당신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장과 성숙을 기다리고 계시며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삶을 감사하면서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1-12)

편지를 보내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장하고 성숙하길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각 사람들에게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11)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라고 권합니다. 소망이 끝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게으르지 아니하고”라고 권고합니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이러한 네 가지를 이루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항상 똑같이 부지런하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끝까지 지킬 것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나가고 계십니까? 또 게으름을 내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둘씩 매진하면서 노력하면서 믿음과 오래 참음을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열매를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성장을 향해 나가는 길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길은 이러한 것을 지켜갈 때, 가능하다 라고 이야기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정말 성숙하여서 구원의 확실을 날마다 누리며 나가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 아브라함(13-15)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우리들이 구원의 확실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시겠습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어떻게 이끄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성장하고 성숙하길 소망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3-15)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더욱더 성숙하고 온전하게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만큼 성도들의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은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를 듭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 믿음을 통해서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소망을 같이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1)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아브라함(1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을 때,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13). 원래 맹세란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를 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걸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며 맹세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그 위에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보다 위대한 존재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거짓된 우상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으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14;창 12:1-2; 22:17)고 약속하셨습니다.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까지 아브라함은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 90세에, 이삭을 얻는 데도 무려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창 12:4; 21:5).

(2) 오래 참아 약속을 받음(15)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보기까지 인내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15). 아브라함의 나이로 볼 때, 도저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으로 인해 그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 중 그가 살아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창 17:6-8). 약속의 씨에 대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에 맹세로 그 약속의 확실함을 보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복음의 약속들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장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모진 난과 유대주의의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복음의 약속은 전혀 변함이 없지만, 그 약속이 실현되기까지는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너무나 조급합니다. 조급하면 지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조급하신 분이 아닙니다. 약속을 받은 우리는 그 약속이 변치 않음을 믿으며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약속을 견고하게 품음(16-20)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고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충분히 인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인내입니다.

16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16-20)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성도들은 흔들림이 없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느 순간에도 절대로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예를 통해 약속의 확고함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큰 안위를 주는 일입니다.

(1) 맹세의 역할(16)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맹세하셨습니다(16). 원래 ‘맹세’라는 뜻은 ‘사람들 사이의 다투는 일에 최종적인 결론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 이후에는 다른 결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큰 자를 지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자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는 맹세가 필요치 않습니다. 항상 다툼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간에게는 맹세가 필요하지만, 빈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이 맹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실 때도 맹세하셨다(7:20-22)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맹세가 보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17-18)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입니다. 맹세는 특별히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17). 그 약속은 당장 손에 실물을 쥐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주는 행위입니다. 실물을 당장 손에 쥐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매우 불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약속만을 기다렸는데, 그 약속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기나긴 기다림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약속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큽니다. 하나님게서는 우리의 이러한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맹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 다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우둔하여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한 뜻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받았던 약속은 현실에서 직접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은 여호수아 13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해 줄 때, 정복한 땅만 아니라, 아직 정복하지 않는 땅도 분배해 주셨습니다. 각 지파가 분배받을 땅을 지도에 그려서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곳들은 너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힘이 나는 것은 현실만 가지고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까지 기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직 현실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당신의 꿈과 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한 뜻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려고 맹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를 통해 우리에게 안위를 주십니다(18).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두 가지 행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약속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맹세하실 때에는 더더욱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실물로 가진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우리에게 큰 위로와 능력이 됩니다. 소망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절망이 됩니다. 희망이 기대감이 무너지면 낙망이 됩니다. 사람들이 약속은 희망을 부풀렸다가 높이 뛰어놓은 후에 터뜨려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기대감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기대감을 이루어 주시고 채워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 1:18)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3) 휘장 안에 들어감(19-20)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 ‘영혼의 닻’에 비유됩니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닻이 필요하듯 우리 영혼도 닻이 필요한데, 이 닻이 우리가 가진 소망입니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안전한 항구에 닻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튼튼하고 견고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 항구에 멈추어 서 있지만, 이제 곧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서 출항할 것입니다. ‘소망’은 현실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이미 확신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 또는 맹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19). 이런 주제의 전환이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7장에서 다룰 내용을 고려하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이 소망의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맹세가 가장 크게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닫혀 있던 휘장 안으로 담대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아서 우리는 휘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휘장은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만고불변의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맹세에 의거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성소로 우리보다 앞서 들어가셨습니다. 이 사실은 현실에 많은 유혹과 도전 앞에 놓여 있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소망의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능력이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18)에게 하나님의 맹세로 세움 받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보다 큰 위안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신 안의 의심과 불안, 흔들리는 믿음을 모두 떨쳐 보리고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며 그 약속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의 모습으로 성숙함으로 하나님 맹세를 따라 승리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약속을 이루신 영광의 예수님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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