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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6-01)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으로 성장

히브리서 5장 11절 - 6장 8절


‘당신은 영적 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가운데 성장하지 못해 아직 젖만 먹는 어린 성도가 있는가 하면,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성숙한 성도들도 계십니다. 이런 판단 기준은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 ‘어떤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성숙했느냐?’입니다. 신앙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성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는 수준으로 끝나면, 영적 젖 먹이 수준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을 할 때, 영적인 성장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설명하기에 앞서(7장) 저자는 잠시 정리의 시간을 갖습니다. 신비롭고 그래서 자칫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청중이 들을 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믿음의 도의 초보에 언제까지나 머무른 채 깊은 지식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 염려하면서 신앙에 있어서 자라가야 할 것, 그리고 뒤로 물러나 배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합니다.

 

미성숙한 신앙을 진단함(5:11-14)

자신의 건강상태를 점검하는 것을 ‘건강검진’이라고 합니다. ‘건강검진’을 하다가 큰 병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점검해 본 적 있습니까? 즉, 당신의 영혼에 관한 건강검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살펴보므로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당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함으로, 늘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1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11-14)

본문은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지 않고, 잠시 중단합니다. 앞서 엄중한 소리로 경고했던 히브리서 저자는, 이번에는 그들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전합니다. 그들이 구원에 속했다는 증거는 성도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보여준 행위와 사랑입니다. 저자는 더 나가 소망이 성취될 때까지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권고합니다.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쯤이면 다른 사람을 교육하고 양육할 만큼 지적이나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1) 당시 성도의 영적 상태(11-12)

저자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분의 대제사장직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5:6,10). 그렇다면 이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야 하지만, 5:11이하에서 6:20에 이르기까지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잠시 무대 뒤로 사라진 멜기세덱이 다시 나타나는 시점은 6:20입니다. 그때까지 저자는 당시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잠재적 위험을 경고하면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라’고 권면합니다.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을 망설이는 이유는 당시 성도들이 ‘듣는 데에 둔해졌기’(11b)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듣기에 게으른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청력의 감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력 면에서의 아둔함과 의지적인 면에서의 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잘 적응하지 않는 상태, 그것이 ‘둔함’입니다. 광야 세대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과도 비교될 수 있었습니다(3:8,13,15). 멜기세덱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면면을 이해할 만한 성경에 대한 이해, 영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그들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젖 먹는 아이’와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로 두 가지는 비유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젖 먹는 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긴 하지만, 둔해서 온전하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고집과 욕심에 가득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2) 성숙해야 할 성도들(13-14)

이런 영적 상황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처방하기 위해 저자는 젖먹이와 어른의 비유를 사용합니다(12b-14). 단단한 음식을 ‘의의 말씀’이고, 이것을 먹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은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는 훈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성격과 그 실체적 결과를 가리킵니다.(4:14-16; 1019-25). 그것은 신자들의 구원과 천국 소망과 연결됩니다(10:38; 11:4,7). ‘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마치 운동선수가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하고 시합하는 과정처럼, 성도는 도전과 시행착오, 인내와 성실불굴의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6:12; 10:36; 12:1), ‘선한 것과 악한 것’의 분별은 실생활에서 윤리적 결단 행동으로 이어질 것입니다(13:1-21). 장성한 사람은 연단된(훈련된) 영적 감각을 가졌습니다. 감사, 드림, 협력, 섬김, 자기 죽음, 은혜로운 말의 습관 등 훈련된 영적인 감각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감추어 놓지 말고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들으로 신앙이 더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단단한 음식까지 먹으면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처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6:1-3)

성도는 식물처럼 성장해야 합니다. 항상 기초적인 신앙의 자리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초에 머물지 말고, 기초 위에 더욱 튼튼한 진리의 집을 세우고,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인 성장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공동체에 능력 있게 영향력을 미치게 해야 합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1-3)

누군가가 ‘성장한 교회는 많지만 성숙된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으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에는 신앙인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신앙의 성장에 가로막는 6가지 장애물을 소개합니다. ① 회개치 않은 죽은 행실, ② 하나님에 대한 의심, ③ 세례에 관한 오해, ④ 안수에 관한 혼돈, 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불신 그리고 ⑥ 영원한 심판에 대한 의심 등을 나열했습니다. 여섯 가지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들입니다.

신앙의 기초적 원리에 해당하는 것들을 ‘버리라’는 권면의 의미는 아마 ‘초보 진리를 배우느라 같은 자리에서 언제까지나 맴도는 일은 그만두라’(우리말 성경)에 가까울 것입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의 초보에 매어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불신자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때 가장 먼저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신자들조차 순간순간 크고 작은 죄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전격적으로 바꾸는 일생일대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능력, 성품을 깨닫는 데서 신앙의 움이 틉니다. 세 번째, ‘세례들’은 회심의 표지로서의 세례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행해지던 여러 가지 정결 예식을 포괄합니다. 네 번째, ‘안수’는 치유, 파송, 임직 등을 위해서 행해진 예식 행위입니다. 이 두 가지 항목은 초대 교회에서 혼히 행해졌던 예전이기 때문에 그 의미와 방법을 세례 교육의 일환으로 가르쳤을 것입니다. 마지막 두 항목(‘부활과 심판’) 역시 기독교인이 된 후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기본 교리에 속합니다.

기초적인 원리를 배웠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온전한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3)이라는 말씀은 신앙의 성숙 과정이 은혜의 과정임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성숙은 우리의 주도권, 우리의 애씀보다는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애쓰심에 우리가 이끌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의의 열매를 맺는 성숙한 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만 머무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어떠한 내용인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설교와 성경 연구를 통해 기본 교리를 제대로 정리하여 묵상하는 것은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배교의 양상과 결과(4-8)

생명은 시간이 가면서 성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반대로 퇴보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유지나 전진하지도 못하고 퇴보하는 신앙인들은 무엇인지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은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까지 맛보고서도 타락한 자들에 대해 소개합니다.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4-8)

이 단락은 흔히 10:26-27과 함께 ‘배교 본문’이라고 불립니다. 앞 단락(5:11-6:3)과 이 단락은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됩니까? 방금까지 설교자는 기독교의 기초적 원리에 머무르지 말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라고 역설했고 이어서 4절부터 배교와 그 결과를 설명합니다.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에게 배교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1) 배교에 대한 정의(4-6)

이 단락은 ‘배교(背敎)’에 대한 일종의 정의입니다. 여기 묘사된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 상태는 신약과 당시 유대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표준적인 용어였습니다.

‘한 번 빛을 받음’과 ‘하늘의 선물을 맛봄’ 그리고 ‘성령을 함께 받음’은 모두 회심 과정에서 일어나는 체험을 담아내는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다가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봄’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 체험입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을 거친 참된 기독교인이 배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중요할 수 있는 이 질문을 설교자는 던지지 않습니다. 답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기독교인의 배교는 적어도 히브리서의 저자와 당시 성도에게 기정사실이며, 현실의 일부인 것으로 전제됩니다.

저자는 배교한 신자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도록 만들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최초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배교자의 구원도-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합니다. ‘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제한성이 아니라 당위(‘마땅히 그러해서는 안 됨’) 혹은 사태의 확실성(‘결코 그렇지 않음’)을 표현합니다. 더욱이 배교는 혼자 마음에 품는 생각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주 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행동은 자신의 결연한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까! 그처럼 완고하고 적극적인 배교자에게 ‘새롭게 될’ 일말의 여지가 있다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2) 믿음에 대한 결과(7-8)

본문에서 땅과 작물의 비유는 배교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입니다. 농부, 나무, 열매의 모티프는 예수의 가르침과 구약성경에서 종종 발견됩니다. 산상 설교의 일부로서 예수께서는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7:16-23//누가복음 6:43-45). 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다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막 11:12-25). 요한복음에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연합될 때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한복음 15:1-8). 이런 가르침들의 배경에 구약으로부터의 울림이 있다. 기대했던 참포도 열매 대신 들포도 열매를 맺는 포도원의 노래를 통해 이사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 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을 개탄합니다(이사야 5:1-7). 이런 성경신학적 흐름에 비추어 본다면, 배교는 보다 넓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못하는 삶, 행동, 습관들이 곧 ‘가시와 엉겅퀴’입니다.

교회가 박해받던 시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십자가를 밟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만 배교의 경고가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이들에게만 배교의 경고가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비를 흡수해 왔지만 좋은 열매가 아닌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안정된 가운데 권력과 풍요를 누리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신의 삶이 성장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화되길 원합니다. 지금 영적인 상태에서 자만하며 머무르거나 퇴보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보인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주님을 닮아가는 성품이 자라나길 원합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초보를 넘어서 성숙한 신앙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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