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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0-02)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신분

히브리서 10장 10-18절


같은 시간에 같은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동일한 은혜를 받는 것은 압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의무감과 죄책감 속에 부담스럽고 힘겨운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에 차이이겠습니까? 율법적인 신앙생활과 복음을 누리며 신앙생활 한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 한국은 오랫동안 유교적인 전통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 속에는 자꾸만 무엇인가를 해야 만하는 공로주의에 묶여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토록 바리새인들에게 서슬 시퍼런 질타를 해야만 해겠습니까? 그들 안에 공로주의가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식을 통해서 사람들 앞에 인정받으려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묶여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새로운 은혜의 길로 불러주십니다.

 

본문에서 각 제사장들이 날마다 제사를 드리지만 그 제사로는 결코 죄를 없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해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므로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영원히 온전케 되었으며, 또 다시 제사 드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이 됨(10-11)

구약의 제사장들은 동물을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많은 제사장이 있었지만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만약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주셨습니다.

10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0-11)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로 드리신 독특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말씀은 속죄함의 중요한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피를 뿌리지 않고는 정결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옛 율법(언약)에서는 반복적으로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 때마다 사람들이 피를 흘릴 수 없었기 때문에 짐승의 피의 제사를 통해 완전한 구속이 올 때까지 드려야 했습니다. 동물의 제사는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제사를 ‘매일’, ‘자주’, ‘같은 제사’를 드렸어야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두 말씀을 비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옛 언약은 임시 규정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계속 반복하지만 죄를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옛 언약이 죄의 뿌리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반복적이 제사를 통해서 죄 용서를 위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드림으로 속죄를 입으셨습니다. 단번에 드린 제사를 통해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거룩이 임했습니다. 거룩은 행위로 임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종종 술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선을 행하고, 주일 성수를 잘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 등을 거룩함의 척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외적 행위보다 속사람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한 인간의 됨됨이와 행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 악인도 얼마든지 의인의 행위를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행위로 거룩해지려고 하면, 옛 언약 속한 것처럼 계속해서 제사를 들렸어야 했습니다. 날마다 죄성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 노력은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반복적으로 동물 제사의 무능함과 예수님의 희생 제사의 능력을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예수님의 피가 인간의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온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단 번에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거룩한 신분이 되었지만, 어느 때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여전히 거룩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신분은 거룩해졌지만, 그런데 삶의 행위는 옛 사람의 자아가 살아서 득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 행실들이 자신도 모르게 뛰어나오기 때문에 나는 아직 거룩해지지 않았다고 단정해 버리고 맙니다. 이제는 거룩한 존재로 변화된 사람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이 십자가 앞에서 부정직하고 불결한 모습이 있다면 이 시간에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과감하게 끊어 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12-14)

어두운 밤에 촛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태양이 뜨는 시간에는 촛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태양과 같은 존재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성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이성으로 생각할 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2-14)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이며 본채의 형상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으로서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 동등 됨은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죄를 사하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미 우리의 신분은 거룩한 존재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러나 마귀의 존재는 주님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은 원수 마귀를 완전하게 제압하는 날입니다. 이 날에 우리의 존재는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집니다. 그 때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셔야 됩니다. 매일매일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대적 마귀의 권세를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과 죄사함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새 언약이 체결됨(15-18)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예방 접종을 여러 번 해야 합니다. 어떤 접종은 반복적으로 계속해야만 건강을 유지하지만, 어떤 것을 한 번 접종함으로 평생을 가는 접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단 번에 제사를 드림으로 구원에 대한 항체는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에 반복적으로 예방 접종하지 않으면, 삶을 유지하기 힘든 일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예방 접종해야 합니다.

15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15-18)

히브리서 기자는 예레미야 31장 새 언약에 관한 말씀을 인용해서 구속에 관한 설명을 합니다. 새 언약은 돌판이나 종이에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한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입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위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제사로는 죄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차원이 다릅니다. 첫째,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앞에 고백되어진 죄는 다시 기억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옛 언약은 인간의 죄를 항상 기억나게 하지만, 새 언약은 완전한 용서를 가져왔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용서된 죄들이 기억나서 죄책감이 일어나는 것은 마귀가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도록 고발하는 방법입니다. 둘째, 새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준법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법을 인간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자발적인 의지로서 옛 언약이 기록되었던 돌판과는 대조됩니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기록한 양피지를 이마에 붙이거나 속목에 매고 다녀야 했습니다(신 6:8). 율법을 상기해 지키고자 한 방편이었으나 그들은 표면적으로만 지켰습니다(마 23:5). 법을 잘 아는 자가 법을 잘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이용하고 할 때가 있습니다. 법을 지키려는 마음과 의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머리가 아닌 마음에 두고 지키려 해야 합니다. 한 번 용서하신 죄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한 번 구원 받은 것은 영원한 항체입니다. 이미 죄에 대한 용서의 항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로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덮었습니다. 죄와 불법이 더 이상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우리들을 주관하는 일들은 없을 것입니다.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 앞에 당신을 스스로 정죄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당신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기고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거룩함과 평강을 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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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0-01)

 


율법 그림자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10장 1-10절


어느 실체의 그림자만 보면, 그 실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 실체에 대해 상상할 수 있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율법 제사는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온전한 속죄를 이룰 때까지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장래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율법의 제사는 죄를 기억나게 할뿐 사람들을 온전히 할 수 없어 제사가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그리스도는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는 율법의 제사를 폐하시고 자기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하십니다.

 

율법과 제사가 그림자인 이유(1-4)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지만 온전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늘 가장 좋은 것으로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겸손과 감사로,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제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1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1-4)

논증의 소재는 앞 9장에서부터 이어지지만, 논조는 더 강해집니다. ‘율법’은 내용상 첫 언약의 속죄 제사를 의미합니다. 율법에 대해 이미 8:5에 나왔던 ‘그림자’가 다시 한번 사용됩니다. 대제사장 예수님의 사역 설명을 1년에 한 번 언약 백성의 죄를 속하는 대속죄일과 연결해서 소개합니다. 이전처럼 기존 대제사장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내용상 첫 언약의 속죄 제사를 가리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항상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1). ‘온전하게 한다’라는 표현은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이나 제사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가르침은 곧 ‘제사와 같은 물리적인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정신이 중요하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점차로 확실해질 것이나 저자는 십자가의 능력에 의지해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죄의 결정적 도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옛 질서 아래에서 해마다 항상 드리는(1) 수없이 많은 희생 제사들은 곧 섬기는 자들을 온전하게 하는 능력이 율법에 없음을 증언해 줍니다.

율법이나 성전의 제사가 그림자일 뿐인 이유는 물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자꾸 반복되기 때문입니다(2). 즉 무엇인가를 완성했다면 그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니 불완전하다는 것이지, 그 정신과 의미가 밝혀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율법에 규정되어 매년 반복하는 제사들은 죄를 없애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기억하게 합니다. 이렇게 매년 소와 염소의 피로 제사해도 죄를 없애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것이 물리적이기 때문이거나 그 정신을 바로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피가 세상의 죄를 대속할 만한 가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3-4).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신 사건은 역사적으로, 물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에, 신앙은 단지 정신이나 신념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고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칩니다.

 

참된 제사를 위한 몸을 준비하심(5-10)

진정한 마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비단 예배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며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는 않은 채 하나님께 형식적인 예배와 헌금만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5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5-10)

히브리서 기자가 가르치는 ‘진짜 제사’는 정신적인 제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 즉 가장 고귀한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하는 성경은 시편 40:6-8입니다(5-7). 구약 본문과 내용이 약간 다른 이유는 저자가 70인역에 근거해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6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편 40:6-9)

여하튼 저자는 이 본문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율법에 기록하신 제사와 예물, 번제와 속죄제를 불완전한 것으로 여기사 기뻐하지 않으시고(8),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온 한사람을 세우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9). 특히 저자는 하나님께서 ‘한 몸’(5,10)을 예비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율법에 규정된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는 가장 고귀한 제물로 제사가 드려졌기에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없기 때문이지, 물리적인 행위보다는 정신적인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그 아들의 ‘몸’을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합니다(로마서 12:1). 우리는 생각으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몸으로 믿습니다.


어디에서나 인터넷을 통해 통신이 가능한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가 굳이 한자리에 모이고,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는 이유도 사실 이 때문입니다. 주님이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하겠다고 선포하지 않으시고, 굳이 사람이 되셔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이유 역시 우리가 몸으로,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자들이 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신앙의 영역과 삶의 영역을 따로 떼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삶을 주님께 살아 있는 제사로 드리겠다는 결단을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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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9-03)


완전한 제사를 성취하신 예수님

히브리서 9장 23-28절


전남 담양에 가면, ‘죽녹원’이라는 대나무 테마파크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가사문화마을’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담양 지역에 있는 가사문학권의 정자들을 한 곳에 모아서 잘 지어 놓았습니다. 한 곳에서 다양한 정자들을 볼 수 있어 좋지만, 아쉬운 것은 진본이 아니라 본을 떠서 만든 모형(model)이라는 것입니다. 실물 정자가 있는 곳에 가야만 정자들과 어우러진 남도의 정원과 주변 풍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옛 언약을 통해 죄 용서함의 모형인 성전과 제사를 주셨습니다. 그 제사를 통해 죄 용서함을 받았지만, 모형인 까닭에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지상 성소에서의 제의 호라동과 천상 성소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제의 활동을 병행하고 대비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명합니다. 옛 언약은 모형인 성소에서 짐승의 피로 여러 번 하나님께 나가야 했지만,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단 한 번으로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완전하게, 영원히 없이 하셨습니다.

 

대비1 : 실체와 그림자의 비교(23)

‘모형(model)’은 실체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견본 주택은 집을 살 사람들에게 미리 보이기 위하여 실제 내부와 똑같게 지어 놓은 집입니다. 건축은 된 후에는 모형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림자 역시 참된 것이 보이기 전에는 유익하나, 참된 것이 나타나면 쓸모없게 됩니다.

23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23)

저자는 직전에서 예수님께서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을 소개받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지상에서 드리는 제사는 얼마나 제한적이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사는 흠이 있는 제사가 아니라 한계가 있는 인간들이 드린 제사였습니다. 실체가 오기 전에 실체를 소개하는 그림자 역할을 하는 제사였기 때문에, 실체가 오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지상에서 드리는 제사’와 ‘하늘에서 드리는 제사’를 대조하면서, 지상 성소에서 드린 제의 활동과 천상에서 드린 그리스도 제의 활동을 대비시키면서 예수님의 제사가 어떤 점에서 우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차이는 지상의 제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제사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제사를 드리셨고, 그것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완전하게 영원히 없게 하셨다는 것이 다릅니다.

지상의 성소에서 짐승의 피를 언약 책과 백성들에게 뿌림으로써, 언약의 확실성을 보증하고 언약 당사자들의 책임을 확증하였습니다. 또 제의적으로 정결케 하기 위해서 각종 기구들에게도 피를 뿌렸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로는 ‘하늘에 있는 것들’을 정결케 할 수 없습니다. ‘더 좋은 제물’ 즉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하늘에 있는 것들’은, 앞 단락을 염두에 두면, 장막에 배치된 기구들입니다. 저자는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습니다. 물건들 하나하나보다 ‘지상-천상’의 대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것들’이 부정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제물을 준비하기 위한 의미로 봐야 합니다. 하늘의 장막에도 지상의 것과 같은 기구들이 있다거나, 그 기구들이 어떤 이유로 정화가 필요한 상태에 있다거나, 그리스도의 피가 그것들에 뿌려져서 정결케 된다는 서술은 히브리서 외 성경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내용입니다. 아마,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필요 이상의 세부적 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과 가치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지상의 제사와 비교하여 인식하라는 권면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모형과 그림자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용서의 길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것이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임시방편의 길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해 천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 따르면 제사장은 매년 제물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죄를 씻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의식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궁극적인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천국의 모형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완전한 성취가 된 십자가의 은혜가 임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반복되었고,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임시로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게 되자 율법의 제사는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구약의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의 복음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마음에 새겨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과거의 옛 죄악의 습성을 버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빛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대비2 : 장소에 대한 비교(24)

인간 대제사장들은 반복적으로 제물을 드려서 자신과 백성을 정결케 해야 했습니다. 손으로 만든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지성소를 통하지 않고는 곧바로 자기의 피로 하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우리의 제사장으로서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장소에 대해 비교합니다.

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24)

두 번째 대비는 장소의 대비입니다. 매년 속죄일에 한 번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지상 장막의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의 성소는 ‘참 것의 그림자’인데, 여기서 ‘그림자’는 ‘모형’, ‘복사물’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서 그분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지상의 대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희생 제물로써 죗값을 치렀음을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지상의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참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지상의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일 뿐입니다.

이렇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곳은 완전하지 않은 지상의 성막 아니라, 하늘의 성소 ‘바로 그 하늘’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면전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거기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그 세부 사항은 기록하지 않지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면전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를 변호하고 간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께서 서셨습니다.

이런 의미는 지상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말씀드렸지만, 대제사장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성소에서 하신 일들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피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해서 중보하심으로 대속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모든 죄악의 빚을 갚아 주셨습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변호하는 중보자로 서신 것입니다.

 

대비3 : 제사 횟수에 대한 비교(25-26)

예수 그리스도는 모형이나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로 서 계셨습니다. 마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선교할 때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대제사장을 대비해 봅니다.

25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26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5-26)

세 번째, 지상의 대제사장과 천성의 대제사장과 대비가 되는 것은 출입하는 횟수에 대한 것입니다. 위 두 번째 대비에서처럼 속죄일 제의의 상황이 전제됩니다. 대제사장은 매년 일 년에 한 번씩 반복해서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짐승의 피를 들고 가야 했습니다. 그 피는 다른 짐승의 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처럼 ‘자주’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은 일이 없이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이 두 시간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단회성을 묘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두 표현을 통해서 처음과 끝, 태초와 종말이 상응하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저자는 이미 1:10에서 시편 102:25-27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계시고, 더 나아가 천지창조에 참여하셨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이 ‘세상 끝에’ 일어났다는 인식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1:2)에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셨지만,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나타나심을 가리켜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누차 언급했었습니다. 이곳에서 ‘종말’이란 하나님의 시간표상으로 마지막이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과 후에 모든 구원 역사에 클라이맥스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무르익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체의 시간이 왔으니 그림자의 시간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언약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율법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전처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반복되는 종교적인 제사나 행위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은 하늘로부터 주신 전적인 은혜의 산물입니다. 스스로 개척해서 만들어낸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대비 4 : 구원의 길(27-28)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은 애써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끔찍한 지옥의 심판을 하실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판이라는 주제는 하나님의 성품과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죽음이 확실한 것처럼 심판도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7-28)

저자는 앞에 제시한 그리스도 희생의 단회성을 부연하고 보충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관찰하는 일반적 원리에 근거해서(27)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유일회성을 역설합니다(28).

(1) 일반적인 원리에 근거(27)

이 구절은 흔히 문맥과 상관없이 분리해서 암송하는데, ‘죄의 형벌’이라는 제목이 붙여서 제시됩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유익이 있지만 성경해석의 측면에서는 중요한 것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그 제목이 붙을 수 있는 근거는 아마 사후 심판의 확실성을 말하는 하반절일 것입니다.

죽은 이후 세상 혹은 상태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과학적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사후 세계는 불확실 그 자체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애가 육체적 생명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예사의 종말에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그 결과에 따라 영원한 지복 혹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가르침과 조화를 이룹니다. 이 구절을 암송함으로써 기독교의 심판 교리를 각인할 수 있는 유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얻는 부분과 함께 놓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이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심판이나 죄의 형벌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만 떼어서 암송함으로써 사람이 한 번 죽듯이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죽으셨다는 이 단락의 대지를 놓치게 됩니다.

의미의 중심이 하반절의 ‘심판’이 아니라 상반절에 ‘한 번 죽음’에 놓여 있고, 그것이 히브리서의 신학적 주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27절은 그 문장 자체만으로 완결된 의미 전달을 할 수 없도록 서술되었습니다. 27절을 이끄는 접속사 ‘카토손’이 28절 첫머리의 부사 ‘후토스’와 갈고리처럼 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27절은 28절을 말하기 위한 전제 혹은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27절만 떼어서 암송하면서 그것 자체의 의미, 그것도 하반절의 의미에만 집중하게 되면 이런 종합적인 내용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27절에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을 정도로 인간의 필멸성은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또 굳이 인간이 ‘한 번’ 죽는다고 말함으로써 28절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죽으심을 말하기 위한 논리적 준비를 합니다. 반면, 하반 절에 심판을 언급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불명확한 채로 남습니다. 27절만 놓고 보면 마치 육체적 죽음 직후 영원한 심판이 내려지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27절과 긴밀한 대구 관계에 있는 28절을 통해서 어느 정도 밝혀질 수 있습니다.

만약 세상에 법도 없고 심판도 없다면 악한 사람들을 좋아하겠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곳이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심판의 때에 우리를 변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행해 두 가지의 섭리를 집행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모든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 건강한 자나 약한 자나 누구나 동일하게 맞이하는 필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을 마주해야 합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고 겪어야 할 일입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영생의 은혜가 임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영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을 가름하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유일회성(28)

우선 28절 상반절에서 저자는 두 동사 ‘(그리스도가) 드려지다’와 ‘(죄를) 담당하다’를 사용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사실과 그 결과를 기술합니다. 28절 하반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보여짐’의 목적이 성도들의 구원이라고 밝혀집니다. 이러한 내용에 비추어 27절 하반절을 보면, 심판관은 사람마다 죽은 후 바로 행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것입니다. 그 심판은 적어도 예수를 ‘바라는’, 즉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멸망이 아닌 구원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결국 독자에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망(待望)하는가?’라는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두 가지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구원을 받고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피할 길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인데,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피할 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이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고 받아들일 때,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우리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 드린 결과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본향이라고 부르는 천국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이 복음을 영접한 백성에게는 가장 큰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후에 심판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직 심판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완전한 속죄를 믿음으로 받아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더이상 사단의 거짓과 미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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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9-02)


완전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9장 11-22절


좋은 옷을 구매하면, 이전 허름한 옷은 가치가 없게 됩니다. 좋은 것을 풍족하게 얻은 사람은 전에 허름한 물건은 이제 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과거 어떤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을 영적으로 깨끗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죄를 없애려고 노력하지만 절대로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영적으로 깨끗하게 하며,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시켰음을 이해하게 될 때,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구약 제사법으로는 불완전하므로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짐승의 피로 일시적으로 정결하게 할 수 있었지만, 완전할 순 없습니다. 그 결과, 다른 방법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정결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건이 피로 정결케 되듯, 피 흘림이 없으면 용서함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피 흘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뤄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영원한 속죄의 성취(11-14)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죗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노예가 자신의 몸값을 지불해야 결박에서 벗어나 지유인이 될 수 있듯이, 죄의 사슬에 결박된 사람이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참선, 금욕, 심지어는 자신의 몸을 자해까지 하며 죄를 제거하고 거룩해지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과연 완벽하게 죄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11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11-14)

지금까지 9:1-10까지 불안전한 구약에 ‘옛 성막’과 ‘대제사장’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죄인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는 한계와 달리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능력(11-14)에 대해 드려진 장소와 제물의 효력을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인간 대제사장 중의 한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소개합니다(11).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벽한 제사 질서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장막’에서 행하는 제사 예법과 대비되는 ‘둘째 장막’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제사 예법을 기술합니다. 첫 장막과 둘째 장막의 대비는 더욱 넓게는 첫 언약과 둘째 언약의 대비이고, 그런 의미에서 8장 후반부에 제시된 예레미야의 새 언약 예언의 해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1-15절은 6:1-10:18에 걸친 큰 단락 내의 주제 단락이 됩니다.

첫 언약에 속한 장막과 제사 행위는 제한적인 속죄의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개혁될’, 즉 바르게 고쳐질 예정이었습니다. 새 언약에 따른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가 바로 그 ‘개혁’ 사건이었습니다. 첫 언약의 장막보다 더 좋은 장막에서 뛰어난 대제사장께서 더 강력한 속죄 제의를 통해 더 완전한 속죄의 효력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신다고 기록한 일부 사본들이 있고, 개역개정처럼 ‘장차 이루어질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기록한 사본들이 있지만, 중요한 점은 그분이 새 언약에 따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즉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입니다(15). 그분의 대제사장 직분은 첫 언약에 속한 대제사장과 비교하여 더 뛰어나며 또한 완전합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더 크고 완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심(11b)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지은 장막보다 ‘더 크고 완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마 부활에 이은 승천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완전한 장막은 하늘에 속하며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장막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듯 들리는 이 표현은 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비되는 피조물의 속성, 본질적 한계와 결함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자족성이 ‘손으로 지은’ 전이나 역설 우상에 깃들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사도행전 17:24-25). 스데반 역시 예루살렘 성전(사도행전 7:48-49)과 우상(사도행전 7:41; 참조. 신명기 4:28; 37:19)이 손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결정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고 규정합니다. 첫 언약에 따라 지어진 성소, 거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여겨졌고 어쩌면 지상 어떤 장소보다 거룩한 곳이었지만, 그것도 사람의 손으로 지어졌고 그 점에서 연약하고 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더 크고 완전한 장막에 들어가신 그리스도가 지상 성소에서 섬기던 제사장들보다 뛰어납니다.

(2)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성소에 입성(12-14a)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통해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12-14a). 제물의 피는 정화 기능을 가졌습니다. 제물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일정한 기준을 만족시키는 ‘흠 없는’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흠 없는 제물이라도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에 비길 수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영’이기 때문입니다(14). 그래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 다른 제물의 희생보다 뛰어납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단 한 번 바쳐졌습니다(12). 제사를 거듭 드려야 했던 이유는 개별 제사가 불완전하고 효력이 잠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제사는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을 지닙니다.

(3)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12)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성소에 들어가 완전한 속죄 혹은 구속을 이루셨습니다(12). 짐승의 피와 그것을 태워 얻은 재는 단지 육체를 정결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육체만이 아닌 ‘양심’까지도 ‘죽은 행실’로부터 정결케 했습니다. 전인적 정결을 거친 신자는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14b).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속죄하심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백성된 우리의 본분은 정결한 마음과 행실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약/유언과 죽음의 관계(15-17)

범죄한 사람은 죄에 대한 대가를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해서 언약을 깨뜨렸기에 우리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위해 대신 돌아가심으로써 다시 우리를 언약의 파트너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15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15-17)

이 모든 그리스도의 제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새 언약의 중재 활동입니다(15). 여기서 ‘중재자’는 중간에 있는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뜻을 갖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행자, 수행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리스도께서 받아 시행하셨고, 언약의 내용이 신자들의 존재와 삶에 작용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설교자가 15b절에서 설명하는 역할은 그것과 약간 다릅니다. 그것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연결 혹은 이행되는 과정의 중간에서 그 이행을 담당하는 활동입니다. 그리스도는 ‘첫 언약 때 범한 죄에서’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첫 언약의 효력을 자신의 존재로 받아 안아서 새 언약의 효력을 성도들에게 안겨주신 분, 그래서 그리스도는 중재자이십니다.

이어지는 ‘유언’과 관련한 논의는(16-17) 한편으로는 앞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라는 생각을 받아서 보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15절에 나온 ‘언약’이라는 단어를 '게제라 샤와' 기법으로 해설합니다. 저자는 하나의 단어 ‘디아테케’가 ‘언약’과 ‘유언’ 둘 다를 의미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합니다. 히브리서 7:22에 처음 나왔고 이후 총 17회 사용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에 맺는 약속 혹은 언약이라는 의미지만, 16절과 17절에서만큼은 명백히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남기는 말, 즉 유언을 뜻합니다. 유언을 남긴 당사자가 죽은 후에 비로소 유언이 효력을 발휘하듯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서 새 언약, 새 유언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죽음과 언약D,; 효력 관계는 이어지는 소단락에서 죽음의 한 제유법적 심상인 ‘피’를 통해서 상술 됩니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대속하셨을 뿐 아니라 성도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며, 영원한 기업 곧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약속을 누리며, 완성될 그 날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된, 그들은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 약속의 기업, 곧 선물을 받는 새 백성입니다. 이 영원한 기업을 잘 누리길 원합니다.

 

언약에서 피의 의미(18-22)

이 세상과 구별되는 삶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누릴 길이 없습니다. 세속에 물든 내 목숨을 주와 복음을 위해 버리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언약은 두 당사자가 목숨을 걸고 하는 맹세입니다. 첫 언약도 피로 세웠습니다. 다음 새로운 언약에도 피가 필요했습니다.

18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18-22)

이 단락은 언약 체결할 때도 피가 필요하다는 원리를 첫 언약의 경우를 통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을 때도 짐승들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신학적 의미를 파생시킵니다.

첫째, 피 흘림은 죽음을 암시합니다. 피를 많이 흘리면 죽기도 하겠지만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레위기 17:11) 피 흘림 자체가 곧 생명의 상실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피는 언약 당사자들의 책임을 확정합니다(18-20). 계약서의 서명이나 도장과 같습니다. 설교자는 여기에 성경적 근거를 더 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기록하고 나서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피의 절반을 우슬초에 적셔서 언약 체결의 당사자인 백성에게 뿌려야 했습니다(출애굽기 24:6-7). 즉,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피가 언약 당사자를 책임 있는 존재로 일깨웠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피는 정결케 한다. 장막 자체와 각종 제사 도구들에 피를 뿌려서 정결케 했습니다(21). ‘거의 모든 것’이 피로 정결케 되므로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22). 여기서 히브리서 설교자는 의식적 정결(ritual purity)을 도덕적 정결(moral purity)과 구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막 기구들을 의식적으로 정결케 했던 첫 언약의 피는 사람의 양심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둘째 언약의 피를 예표 합니다. 한편, 22절에 사용된 명사 ‘하이마테퀴시아(αἱματεκχυσία)’는 ‘피’라는 명사와 ‘쏟다’, ‘붓다’라는 동사의 의미가 결합된 복합명사입니다. 우리말 ‘피 흘리다’는 대개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서 피가 나오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단락의 맥락, 그리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구약 동물 제사의 맥락에서 보면, 희생제물에서 나온 피를 제단 아래에 쏟거나 그것을 받아 바르거나 뿌리는 행위들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레위기 16:11-15).

희생 없는 사랑, 희생 없는 대속, 희생 없는 섬김은 모두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신의 백성을 택하시고 용서하시며 정결케 하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되게 하심은, 모두 다 아들 예수의 피를 흘리고 대속하게 하신 가장 값비싼,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을 통해서 우리가 정결하게 되었고 살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새 백성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들을 보면,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냥 진멸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천년 세월 동안 죄 사함을 정당화하는 제사를 쌓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자기 아들을 그 선례에 따라 완전한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의 수많은 제물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억울하게, 그러나 훨씬 더 순순히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이 죄 사함의 은혜를 되새기는 하루를 보내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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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9-01)


온전한 성전이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9장 1-10절


위대한 인물 중에는 대부분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서 어려운 가운데 장성해서 큰 인물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의 어려운 환경은 비참한 기억만은 아니라 성공 영광의 기쁨을 배가시켜 주는 배경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는 자신의 옛 모습을 생각해보면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감사가 넘칩니다.

 

앞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데 과거와 현재의 모습과 누릴 수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보게 됩니다. 첫 장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되 반드시 피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자신과 백성의 허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옛 언약의 한계(1)

심오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시청각으로 이해시킵니다. 이것을 통해서 먼저 이해시킨 후에 성숙해짐에 따라 점점 더 심오한 개념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적 진리를 계시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1)

기존 대제사장과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8장 마지막에서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새 언약’을 염두에 두면서 ‘첫 언약’ 아래에서 드리던 제의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독자들이 ‘첫 언약’에서 제사법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섬기는 예법’은 제사장 직무와 관련된 규칙들을 가리킵니다. 모든 제의적 섬김은 율법의 규정한 규칙을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새 언약’의 효력은 성도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질문이며(기독론), 또한, 신앙의 작동 원리(구원론)와 실천(윤리)을 질문이기도 합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저자는 추상적인 개념 대신 그림과 이야기를 사용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대로 드려져야 한다는 원리를 내포합니다. 또한, 첫 언약의 예배는 ‘성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때 성도는 ‘첫 장막’과 ‘둘째 장막’으로 구성된 장막 전체를 가리키는데, 첫 장막 가리키는 ‘성소’(2)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이 예배의 구성원이나 장소 그리고 순서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배당의 인테리어와 교회 구성원이 유명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예배 위에 하나님의 임재하십니다. 형식으로서 예배가 아니라 온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당에서의 예배가 세상에 나가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살아가는 예배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성전을 통한 새 언약의 필요(2-5)

우리를 막는 근본적인 장벽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비천한 우리 죄인을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인간적인 노력이나 성취는 결코 러물 수 없습니다. 죄인의 온전한 속죄를 위해서는 사람이 지은 성전이 아닌 하늘로부터 임하는 온전한 성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성소의 구조를 이야기합니다.

2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2-5)

본문에 ‘첫 성전’에 대한 구조를 설명합니다. ‘세상에 속한 성소’의 구조와 그 안에 배치된 기구들을 설명하는 이 단락은 사실적 묘사 위주로 서술되었습니다. 다소 무미건조해 보이는 서술이지만, 몇 가지 특징적인 함의가 엿보입니다.

먼저 용어의 문제입니다. ‘첫 장막’을 ‘성소’라고 부르고 나서 지성소에 해당하는 부분을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이라고 표현합니다. ‘둘째 장막’이라는 보다 간략한 표현 대신 굳이 ‘휘장’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0:19-20에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을 힘주어 말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휘장이야말로 지성소의 성격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휘장으로 구분된 두 공간을 각각 ‘장막’이라고 묘사함으로써 마치 완전히 분리된 세계라는 인상을 줍니다. 실상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의 장막 안에 있는 두 개의 방인데도 말입니다. 지성소에 놓인 성물 중 첫 세 가지(향로, 언약궤, 항아리)가 금으로 만들어졌거나 싸였다고 묘사됩니다. 사실 성소에 배치된 등잔대와 상도 금으로 만들어졌거나 싸였지만, 그 점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독자들은 지성소라는 공간에 놓은 금으로 빛나는 성물들을 상상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성소가 지극히 가치 있고 신비로운 공간임을 넌지시 드러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울러 지성소의 성물 중 마지막으로 그룹 (케루빔)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이 모든 물건 중 가장 중요하다는 암시를 줍니다.

이렇게 성막의 기구들을 나열하고 나서 저자는 ‘그것들에 관해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웬만한 유대인이라면 성막의 구조와 기구들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출애굽기 31-34장)을 통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굳이 상술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성막의 문자적 의미나 기능 그 자체가 히브리서의 관심사는 아니다. 성막의 기구 하나 하나에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지금 히브리서의 문맥에서는 필요하지도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첫 언약에 따른 제사 예법(6-7)

이제 인간 제사장이나 피의 제사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열린 은혜의 길을 통해 하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6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6-7)

설교자는 바로 이어서 성막 안에서 제사장이 수행했던 제사 직무를 소개하면서 두 가지 제사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항상’ 드리는 제사입니다(6). ‘섬기는 예식’이라고 통칭된 활동은 모두 네 가지입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양과 소제와 전제를 드리는 타미드 제사(출 29:38-42)와 분향(출 30;8), 진설병(출 25:8) 그리고 등불을 보살피는 일(출 27:20-21)이 그것입니다. 또 다른 제사는 속죄일 제사로서 레위기 16장에 자세히 서술된 규정에 따릅니다(7). 이 둘은 비록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다섯 가지 측면에서 매우 다릅니다. 우선 빈도에 있어서 다릅니다(‘항상’과 ‘일 년에 한 번’). 또 타미드는 첫 장막에서만 수행되고, 속죄일 제사는 둘째 장막에까지 들어가서 행해졌습니다. 전자는 복수의 제사장들이 반열을 따라 교대해 가며 수행했고, 후자는 대제사장 혼자서 행했습니다. 또 하나 두드러진 차이점은 피의 사용입니다. 타미드 제사를 위해서 양을 도살할 때 피가 흐르겠지만 그것을 쏟거나 뿌리는 데 대한 규정이 따로 없습니다. 반면 속죄일 제의에서는 소와 염소의 피를 바르거나 뿌려야 할 특정한 지점이 규정됩니다. 피와 관련된 마지막 차이점은 타미드 제사에서는 특정인의 죄를 속하는 요소가 없는 반면, 속죄일 제사에서는 백성뿐 아니라 대제사장 자신의 허물을 위해서 피를 드렸습니다(뿌리거나 발랐다).

 

개혁을 필요로 하는 옛 언약(8-10)

규칙과 의식들은 전통의 일부였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합니까? 이런 여러 규칙과 의식들로 토대가 세워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런 모든 것들을 극복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8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8-10)

히브리서 저자는 성령이 분명히 보였다는 말로 1-7절을 관찰이고, 8절 이하는 그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셨다’(8)는 표현은 영적 의미를 풀어내겠다는 뜻입니다. 첫 언약의 규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규정이 뜻하는 바, 혹은 그 규정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야 합니다. 8절의 ‘첫 장막’은 매우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정확히 같은 표현이 2절에서는 성막 중 한 부분, 성막의 앞 공간인 성소를 지시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공간적 축이 아니라 시간적 축을 기준으로 ‘시간적으로 이전 시대 혹은 옛 시대에 속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지은 장막 전체-성소와 지성소를 포괄하는-를 가리킵니다. ‘첫 언약’ 전체를 포괄할 수 있습니다. 첫 장막이 서 있는 동안, 첫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신앙은 설교자와 청중의 동시대 유대인들을 지칭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지정하고 영구적인 만남, 관계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현재까지의 비유’ 즉 현재를 위한 상징입니다(9). 여기서 ‘현재’는 글쓴이와 독자들의 시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1세기의 ‘현재’는 우리의 ‘현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구원을 그들이나 우리나 누리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과 함께 ‘현재’에 참여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이 개시되어 실행되고 있는 시점으로서 ‘현재’는 곧 10절에 나오는 ‘개혁할 때’와 일치합니다. 이처럼 시간을 묘사하는 표현들은 기계적 시간이 아니라 실존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의 시대, 그리고 심지어 21세기에도 아직 ‘현재’를 살지 못하고 여전히 ‘개혁할 때’가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남’이라는 객관적 사태로 표현했다면 9절에서는 ‘섬기는 자가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음’이라는 주관적 사태의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양심은 본래 그리스 도덕철학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자의식을 뜻했습니다. 신약에도 30회나 등장하는데 신앙적 진정성이나 예민한 죄의식,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떳떳한 존재라는 자의식(벧전 3:21)을 의미합니다. ‘양심상의 온전함’을 전적으로 주관적인 느낌으로 환원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라는 역사적, 객관적 사건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또한 그 속죄의 효력이 자신에게 작용함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기는 자’는 기술적으로는 제의를 직접 수행하는 사람, 즉 제사장이라기보다는 맥락상 속죄 받기 위해서 제물을 가지고 나온 예배자 모두를 지칭할 것입니다.

설교자는 ‘첫 장막’에서 행해진 제의는 ‘육체의 예법일 뿐’이라고 단정합니다(10). 가시적인 물건들, 절차들을 처음 설계할 때는 분명 영적 의미와 의도를 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적 의미를 놓치고 다만 형식에 매몰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히브리서 설교자의 관점에서 보면, 육체의 예법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감각과 시선을 다만 보이는 것에 의존하게 하는 본질적 약점을 지녔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 사람의 혈통을 따라 세워진 제사장, 사람의 시각과 후각과 청각이 통제하는 예배는 ‘육체의 예법’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습니다.


예배는 형식도 있어야 하지만, 예배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예배 속에서 임하신 성령의 능력 속에서 묵은 마음들을 새롭게 갈아엎어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눈이 주님께만 고정되길 원합니다.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깨달아서,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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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8-01)


대제사장으로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8장 1-13절


아파트 견본 주택(모델하우스)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화장실도 모양만 있지 작동하지 않습니다. 깔끔하고 멋있게 지어졌지만, 그것은 모형일 뿐입니다. 앞으로 지어질 새로운 아파트는 이러한 모양으로 건축될 것입니다 라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지어진 모형입니다. 그것은 겨울에 난방시스템이 없어서 무척 춥습니다. 화장실도 모양만 있기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파트가 다 지어지면 그 모델하우스는 자기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곧 해체됩니다. 마치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과 같습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 제도는 하늘에 있는 것의 불완전한 모형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장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으로, 이것이 완전했다면 새로운 언약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언약은 옛 언약의 부족함을 대신하여 완벽한 제사를 주셨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하고 충족스러운 희생이므로 더 이상의 구약적인 제사가 필요 없게 되어졌습니다.

 

하늘 성소에서 섬기는 대제사장(1-2)

교회는 영원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견고하게 섭니다. 교회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성소에서 섬기시는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1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1-2)

히브리서 기자는 4장에서부터 지금까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해 왔습니다. 7장에서는 예수님을 ‘더 높으신 제사장’, ‘더 좋은 소망’ 그리고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제 이 내용들을 기초하여, 8-10장까지 대제사장으로서 드린 ‘제사’도 아론 계열 제사장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그런 대제사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로 운을 뗍니다(1). 그 다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모습을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 예수님(1)과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예수님입니다(2). 시간적으로 예수님의 지상 사역 이후 현재 상태를 소개하고 있고, 공간적으로 그가 하늘과 성소와 참 장막에 있다고 밝힙니다. 하늘은 우주라는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 사람이 거하는 이 땅과 구별된,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여기는 공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 보좌에 앉아 계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오른편에 계십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거룩한 곳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 사람들이 만든 성소 안에 광대한 창조주를 모실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상징일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소와 참 장막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 성소를 하나님께서 세운 곳으로 묘사한 것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늘 성소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4의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은 것은 구약 내용과 동일하고, 하늘 성소에서 섬기는 것은 멜기세덱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란 의미입니다. 현재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하늘의 왕이자 영원한 대제사장 삼겠다는 하나님 약속의 온전한 성취를 경험하는 상태입니다.

기자가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모습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독자와 관련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현재 하늘에 있다는 것은 과거 이 땅에서 행한 희생 사역의 결과이며, 그 사역으로 성도는 구원 과정의 시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저자가 하늘의 예수님을 언급한 것은 거짓 교훈으로 흔들리는 독자에게 복음의 확실성을 상기시켜 진리에서 멀어지지 말라고 권하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도는 예수님의 현재 상태를 통해 미래 소망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사역을 통해 영광의 위치에 있기에, 성도들도 예수님을 따라 인내로 신앙을 지키면 장차 영원한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성도는 고난에 굴하지 말고 계속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3-13)

예수님께서 다른 어떤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신 분임을 확신할 때,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까? 가장 탁월하신 분임을 믿습니까? 죽은 뒤에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히 주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이 땅에서는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주님을 외면하진 않으십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새로운 주제의 시작은 구약의 제사장들과 예수님을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3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6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7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3-13)

옛 언약과 새 언약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고 지키는 백성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가능해집니다.

(1) 대제사장 사역과 제물(3-4)

기존 대제사장과 대조해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설명은 10:18까지 이어집니다. 우선, 대제사장 사역과 관련한 세 요소를 소개함으로써 설명의 준거 틀을 제시합니다.

이 부분은 그 첫 번째로서 제물에 대해서입니다. 대제사장은 예물과 제물을 드리기 위해 세움을 받았기에 그 직을 수행하려면 하나님께 드릴 어떤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존 대제사장과 새로운 대제사장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편지를 쓸 당시 이 땅에 존재했다면, 그는 대제사장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미 율법을 따라 예물 드리는 대제사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만일’의 조건문은 현재 사실과 반대 상황을 설정해 전달하는 형식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에 있기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에게는 이 땅 대제사장들의 제물과 다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제물은 십자가에서 흘린 자신의 피, 곧 예수님 자신의 생명입니다.

(2) 대제사장의 사역할 장소(5)

대제사장과 관련한 두 번째 요소는 사역 장소입니다. 모든 제사장은 사역할 성소가 있지만, 특별히 대제사장은 성소 안쪽 휘장을 지나 가장 거룩한 장소에서 사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존 대제사장들이 섬기는 장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완전한 장소가 아닙니다. 단지 그분의 임재를 상징하는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며 실체는 따로 있습니다. 옛 언약을 맺을 당시 모세가 만든 장막 성전도 하늘의 완전한 모습을 뽄 떠 만든 것입니다(출 25:9,40). 장막 성전은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세워진 것이지만, 그분이 온전히 거하는 곳이 아니기에 기존 대제사장들 사역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전의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장 거룩한 하늘 성소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백성을 위한 속죄 사역을 완수했고, 이제는 하늘에서 중보의 대제사장 사역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3) 새로운 언약에 대한 설명(6-13)

대제사장과 관련한 세 번째 요소는 언약입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이 특별한 관계를 맺는 일종의 계약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창 15:17-21; 17:1-14)는 한 개인에 대한 것이기에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맺었지만, 이스라엘은 집단이기에 인간 중개자가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대제사장이 아니었지만, 하나님 편에서의 중개자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을 주관했습니다(출 24:1-11). 이후 대제사장들은 옛 언약 체계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결해 지성소에서 속죄 사역을 드림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언약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고 죄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언약 백성의 삶을 규율하는 율법,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핵심 원리를 따라 사는 삶을 거절하고 자기 자신을 창조주 삼아 반역하며 살았습니다(9). 언약 관계를 깨는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는 대제사장 사역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언약은 피, 곧 생명으로 계약한 것이기에(출 24:8) 그 관계를 지킬 법적 의무가 있고, 어느 한쪽이 그 관계를 깨면 다른 쪽이 관계를 깬 쪽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언약 백성이 먼저 관계를 깼기에 하나님은 당연히 심판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했고, 편지를 쓰는 당시까지도 이민족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옛 언약은 비난받을 것이 없지 않습니다(7). 언약 자체는 흠결이 없습니다. 다만 옛 언약은 처음부터 인간의 죄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은 심판 과정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사랑하고 그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시며 관계를 깬 언약 백성은 심판하십니다. 심판 중에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새 언약을 약속하십니다(9-12; 렘 31:31-34). 새 언약은 옛 언약처럼 ‘하나님-백성’의 관계를 공유하지만, 구별된 특징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법, 곧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합니다.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돌판’이라는 외부에 기록했지만, 새 언약에서는 사람 마음에 새겨 언약 백성이 내면에서부터 하나님 뜻을 지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친밀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자고 말하지 않을 정도로 언약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3) 죄 사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을 깬 자들을 심판하지만, 그들에게 죄사함의 과정을 허락해 회복의 기회를 주겠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로 사람들 죄에 대한 완전한 해결의 문을 열었고(롬 4:25), 자신의 피를 새 언약의 피로 삼아(눅 22:20) 죄 용서받은 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요 14:6) ‘하나님-백성’을 넘어 ‘아버지-자녀’의 위치를 얻게 했습니다(요 1:12; 롬 8:15). 더 나아가 성령을 보냄으로 내면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능케 하고(요 14:20; 요일 3:24) 하나님의 뜻을 지키게 돕습니다(요 16:13). 그렇기에 새 언약은 옛 언약의 한계를 뛰어넘는 더 좋은 것이며(13),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새 언약이 체결될 수 있도록 중재한 연결자입니다(6). 지금까지 언급한 대제사장과 관련한 세 요소, 곧 제물과 사역 장소와 새 언약 성취는 이후 9-10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더 나은 언약적 친교를 선물해줍니다. 하나님과 풍성히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은 속죄의 목표이자 이유입니다. 죄 사함 자체만을 기뻐하는 데 머물지 말고, 더 나은 의를 이루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의 능력으로 어렵고 힘든 현실을 들애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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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7-02)


멜기세덱 반차를 쫓는 예수님

히브리서 7장 11-22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새로운 날들이 시작됩니다. 이 새로운 날들이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감이 되길 바랍니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새로운 하루가 걱정이 되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새로운 하루는 기대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알 순 없지만, 미래를 주간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 지파 제사장을 통해 온전함에 이룰 수 있었다면, 새로운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다 지파로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새로운 제사장으로 오셨고, 생명의 능력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제사장직의 필요성(11-14)

이목구비(耳目口鼻)보다 뚜렷한 마네킹보다 웃음 짓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능력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정한 제사장직을 행하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11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12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13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11-14)

본문은 이제 왜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제사장 제도의 두 방향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후손 중 레위 지파로 이어지는 제사장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을 세워 속죄를 위한 제사 직무를 수행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율법에 규정하시고 절차를 따라 모든 과정이 이뤄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구원받기에는 너무 불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래부터 더 완벽한 방법을 염두 해두고 계셨습니다. 때가 되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제사 제도’도 과거의 방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이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율법과 제사 제도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었지만, 그 주인공인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은 갈등하고 예수님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 제도’도 세상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표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제사 제도들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으로 행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은 늘 변해야 하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세례 요한의 아버지였던 제사장 사가랴도 반차에 따라서 연중에 한 부분은 성소에 들어가서 성소의 일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아론의 반차는 24반차로 1반차 마다 2주씩 1년에 계속 24번 사이클이 돌아가면서 성소에서 직무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한계성을 극복하시기 위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신 진정한 의미의 대제사장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은 아론의 일상적인 반차가 아니라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영원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려 오신 것입니다. 성전에 진짜 주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율법학자들이 진정한 성전에 주인이 등장했는데, 성전을 지키던 그 사람들이 성전의 주인을 오히려 거부합니다. 본문에서 설명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15-19)

15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17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19(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15-19)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않고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는 원형이고 표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과거의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에 의지하지 않고 ‘불멸의 생명의 능력’으로 제사장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직의 자격이 없는 유다 지파 가운데서 예수님을 세우시고 레위제사장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 반차를 따라서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새 언약입니다. 우리는 예수 대제사장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익숙하지 않는 모습으로 찾아오셔도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환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식을 통해서 일하시지만,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일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더 좋은 언약의 보증(20-22)

성도들이 신앙의 핍박을 만나면 ‘세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갈 것인가?’라는 갈등하는 분이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머무를 것인가에 갈등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합니다. 이 둘 중에 더 좋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머무는 것이다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0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20-22)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신뢰할 만한 보증인을 만나는 것보다 복된 일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속이기 위해 보증을 서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작 보증을 서 줄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보증 설 의욕도 있고, 능력 잇고, 무엇보다 ‘통하는’ 보증인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맹세로 세우신 보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간 제사장들은 아무도 맹세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맹세로 세움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맹세로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인이십니다. 곧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통하는’ 보증인을 가진 셈입니다. 맹세로 세우신 보증인을 의지하고 나아오는 우리를 하나님은 절대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되신다는 사실은 시편 110편을 인용합니다. 시편 110편은 집중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 있습니다. 다윗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1,4)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위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지칭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느냐?’(마 22:45)고 매우 어려운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아무런 대답을 못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메시아는 영원의 세계에 계신 분입니다. 그 영원의 세계에 계신 분이 시간 세계에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21절 하반 절에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는 말씀도 시편 110편 4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겠다.’고 하신 것은 약속뿐만 아니라 맹세까지도 하셨습니다.

사실 인간들은 자신이 약속한 것조차 지키지 못합니다. ‘약속하고 맹세한다.’하지만 못 지킵니다. 수많은 부부들이 결혼하고 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배우자에게 ‘결혼을 속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속았다.’고 하지만 본인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인간 안에는 그 만큼 죄가 많고 인간의 마음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속을 하지만 그 약속에 맹세까지 하지만 그것을 완전하게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언제나 든든히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2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세우신 구원의 보증이시며, 과거 언약들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완전한 제사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제사로 우리들의 죄가 사함을 입었습니다.

제사는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어린양의 피를 뿌려서 나가야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완성시키신 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간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고, 놀라운 회복과 축복에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있습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이 과거로 돌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과거로 돌아가면 십자가의 은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당신의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지금도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천국 문에 들어가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여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생각을 허물고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이 세워 둔 고집과 편견을 깨뜨리게 하시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며 받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 십자가에서 단번에, 온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온전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제가 고민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 주님 안에 있음을 알기에 오늘도 주님을 제 삶의 주권자로 모셔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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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7-03)


영원한 중보자이신 예수님

히브리서 7장 23-28절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살아 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이 스스로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 구원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생의 길을 인도해 주셔서 평단하고 견고한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평탄하고 견고한 길을 갈 때, 인생에 놀라운 승리와 기쁨을 맛보실 것입니다. 삶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로 주인 삼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 인생을 기초로 하고 멋있는 인생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본문에서도 멜기세덱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을 말합니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온전함에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새로운 제사장을 다시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멜기세덱 반차를 따라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 지파로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새로운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옛 언약은 온전함을 구비한 새 언약이 오심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영원한 제사장인 그리스도(23-2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다른 모든 제사장보다 우월하신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레위 계열의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커다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 제사장들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23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3-25)

예수님께서는 약속된 새로운 제사장이라는 논증이 계속됩니다. 기존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제사장직을 계속 유지할 수 없어서 많은 수가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기에 변함없는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23-24). 이 표현에는 세 가지 대조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많은 수와 한 명의 대조이고, 둘째는 제사장직의 단절성과 지속성의 대조이며, 셋째는 죽음의 한계와 영원성의 대조입니다. 모든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셋째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에는 중보자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 직무를 감당하게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이 죄가 없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필요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는 하나님께 나가는 데는 제사장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구약 성경에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1년에 24단계로 나누어서 직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성소의 직무를 단계마다 감당하려면 상당히 많은 제사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문헌에 의하면 AD70년경에 역사가인 요셉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만 해도 대제사장으로 취임했던 사람이, 83명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상에서도 보면, 민수기에 첫 인구조사 했을 때, 1세 이상의 레위인들의 숫자가 22,000명에 달랐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레위 자손으로서 성소의 직무를 따라 다른 사람들의 제사를 도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제악(諸惡)이 있고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23下)라고 직무를 감당하던 제사장들이 한계는 죽음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죽고 나면, 또 다른 제사장이 대신해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영원 중보자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도 시대도 지나가면 변하고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초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24)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의 유일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돌아가실 일이 없었습니다. 또 그 제사장의 직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사장의 직분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염소와 송아지 피로 말미암지 않고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 9:12). 그래서 이제는 다른 제물이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서는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을 때, 예수님의 수제자인 3명이 따라갑니다. 그들은 환상 가운데 그 형체가 변한 것을 봅니다. 베드로가 너무나 감격해서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9:33)라고 감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무런 대답도 안 하시고, 그 환상을 다 거두신 후에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9:36)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환상도 신비도 세상의 모든 천지 만물도 다 사라지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구약에 나온 수많은 제사장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예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에 붙잡아야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인간 제사장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을 붙잡아야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 곁에 항상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제사장 직을 맡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람들의 중보하실 수 있습니다. 중보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골 3:1).

영원한 제사장인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대제사장을 힘입어 항상 현재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 대제사장은 자기를 힘입은 모든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대제사장은 우리를 위해 계속적인 간구를 아버지 앞에 드리십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 그 기도의 제목들을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고합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응답을 받아 우리들에게 허락하십니다. 우리들이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우리를 위해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인 예수의 역할(26-2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직접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를 통해 제공하셨습니다. 그 일을 감당한 예수님의 역할에 대해, 예수님의 성품에 대해서 다음에는 설명합니다.

26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27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28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26-28)

우리들이 하나님께 행했던 일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은 그의 거룩함을 본받았습니다. 그분은 결백한 분이십니다. 우리들도 그의 결백한 부분을 본받았습니다. 그 분은 순견한 분입니다. 그의 순결한 부분을 본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대제사장이시고 우리들에게 합당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긴 하지만, 이 땅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목마름, 갈증 그리고 눈물을 채워주실 분은 오직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친구가 좋은 점은 항상 나의 약점과 아픔을 함께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친구에게서 얻을 수 없는 아쉬운 점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주시는 참 친구입니다. 인간 제사장들은 다른 사람의 죄를 지고 하나님께 나갈 때, 먼저 자기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 자신들이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26)고 소개하비다. 예수님은 거룩하십니다. 악이 없으십니다. 더러움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 합당한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계시면서도 죄인들과 섞이지 아니 하셨습니다. 죄인들 한 가운데 계셨지만, 그 죄인들과는 다르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악인들 안에 계시면서도 죄인들에게 휩쓸려가지 않으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의 더러움과 죄악에 휩쓸려가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과 섞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살려 내시기 위해 죄인들 한 가운데 계셨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에 들어가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회사나 직장을 처음 들어갈 때는 ‘하나님! 이 직장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점점 분위기에 휩쓸려 세상의 즐거움과 물질을 추구하는 분위기에 빠져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잘못된 방법으로 사업하는 분위기에 얼마나 쉽게 휩쓸려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입학해서 ‘이 학교가 거룩해지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지만, 그 가운데 휩쓸려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직 십자가의 복음을 마음에 품고 성령에 충만한 가운데 살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도 당신이 세상 한 복판에 들어가지만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세상에 휩쓸려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 인생에 완벽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대제사장은 거룩하고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를 위해 죄를 대속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탁월한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큰 특권입니다. 하늘보다 높이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모든 아픔을 함께 나누시는 대제사장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면서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지금 당신의 아픔과 문제들도 지켜보시는 줄 압니다. 힘든 때일수록 예수님을 힘입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가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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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7-02)


멜기세덱 반차를 쫓는 예수님

히브리서 7장 11-22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새로운 날들이 시작됩니다. 이 새로운 날들이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감이 되길 바랍니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새로운 하루가 걱정이 되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새로운 하루는 기대감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알 순 없지만, 미래를 주간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 지파 제사장을 통해 온전함에 이룰 수 있었다면, 새로운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다 지파로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새로운 제사장으로 오셨고, 생명의 능력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제사장직의 필요성(11-14)

이목구비(耳目口鼻)보다 뚜렷한 마네킹보다 웃음 짓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능력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정한 제사장직을 행하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11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12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13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11-14)

본문은 이제 왜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제사장 제도의 두 방향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후손 중 레위 지파로 이어지는 제사장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을 세워 속죄를 위한 제사 직무를 수행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율법에 규정하시고 절차를 따라 모든 과정이 이뤄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구원받기에는 너무 불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래부터 더 완벽한 방법을 염두 해두고 계셨습니다. 때가 되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제사 제도’도 과거의 방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이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율법과 제사 제도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었지만, 그 주인공인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은 갈등하고 예수님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 제도’도 세상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표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제사 제도들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으로 행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은 늘 변해야 하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세례 요한의 아버지였던 제사장 사가랴도 반차에 따라서 연중에 한 부분은 성소에 들어가서 성소의 일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아론의 반차는 24반차로 1반차 마다 2주씩 1년에 계속 24번 사이클이 돌아가면서 성소에서 직무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한계성을 극복하시기 위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신 진정한 의미의 대제사장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은 아론의 일상적인 반차가 아니라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영원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려 오신 것입니다. 성전에 진짜 주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율법학자들이 진정한 성전에 주인이 등장했는데, 성전을 지키던 그 사람들이 성전의 주인을 오히려 거부합니다. 본문에서 설명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15-19)

 

15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17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19(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15-19)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않고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는 원형이고 표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과거의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에 의지하지 않고 ‘불멸의 생명의 능력’으로 제사장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직의 자격이 없는 유다 지파 가운데서 예수님을 세우시고 레위제사장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 반차를 따라서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새 언약입니다. 우리는 예수 대제사장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익숙하지 않는 모습으로 찾아오셔도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환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식을 통해서 일하시지만,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일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더 좋은 언약의 보증(20-22)

성도들이 신앙의 핍박을 만나면 ‘세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갈 것인가?’라는 갈등하는 분이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머무를 것인가에 갈등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합니다. 이 둘 중에 더 좋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머무는 것이다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0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20-22)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신뢰할 만한 보증인을 만나는 것보다 복된 일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속이기 위해 보증을 서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작 보증을 서 줄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보증 설 의욕도 있고, 능력 잇고, 무엇보다 ‘통하는’ 보증인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맹세로 세우신 보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간 제사장들은 아무도 맹세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맹세로 세움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맹세로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인이십니다. 곧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통하는’ 보증인을 가진 셈입니다. 맹세로 세우신 보증인을 의지하고 나아오는 우리를 하나님은 절대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되신다는 사실은 시편 110편을 인용합니다. 시편 110편은 집중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 있습니다. 다윗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1,4)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위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지칭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느냐?’(마 22:45)고 매우 어려운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아무런 대답을 못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메시아는 영원의 세계에 계신 분입니다. 그 영원의 세계에 계신 분이 시간 세계에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21절 하반 절에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는 말씀도 시편 110편 4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겠다.’고 하신 것은 약속뿐만 아니라 맹세까지도 하셨습니다. 사실 인간들은 자신이 약속한 것조차 지키지 못합니다. ‘약속하고 맹세한다.’하지만 못 지킵니다. 수많은 부부들이 결혼하고 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배우자에게 ‘결혼을 속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속았다.’고 하지만 본인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인간 안에는 그 만큼 죄가 많고 인간의 마음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속을 하지만 그 약속에 맹세까지 하지만 그것을 완전하게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언제나 든든히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2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세우신 구원의 보증이시며, 과거 언약들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완전한 제사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제사로 우리들의 죄가 사함을 입었습니다.

제사는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어린양의 피를 뿌려서 나가야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완성시키신 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간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고, 놀라운 회복과 축복에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있습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이 과거로 돌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과거로 돌아가면 십자가의 은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당신의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지금도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천국 문에 들어가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여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생각을 허물고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이 세워 둔 고집과 편견을 깨뜨리게 하시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며 받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 십자가에서 단번에, 온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온전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제가 고민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 주님 안에 있음을 알기에 오늘도 주님을 제 삶의 주권자로 모셔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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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7-01)


대제사장으로 우월하신 예수님

히브리서 7장 1-10절


만약, 당신이 백화점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백화점 안에 있는 물건 중 원하는 한 가지만 가져가도 좋다!’라고 한다면, 그 많은 물건 중에 아마 ‘가장 값지고 좋은 것’을 취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곳에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은 ‘가장 좋은 것’ 전 단계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베풀어 주시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 가장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시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왕입니다. 그는 구약에 아주 자미 나오지만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비록 레위 지파가 다른 지판의 십일조를 받지만 그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아브라함과 함께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멜기세덱과 그리스도(1-3)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과 오래 참음 그리고 인내로서 약속을 기업으로 잡고 소망 가운데 살아간 자들입니다. 그 당시뿐 아니라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믿음의 대표적인 표본이 되고 본보기가 된 사람들입니다. 많은 선진들 중에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멜기세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과 같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1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1-3)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멜기세덱을 소개해 합니다. 멜기세덱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멜기세덱은 매우 신비로운 사람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제사장으로 섬기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1) 살렘 왕 멜기세덱(1)

히브리서 기자는 5:6-11에서 언급한 후 잠시 미루어둔, 멜기세덱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주제를 다시 꺼내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창세기 14:17-20을 근거로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소개합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에서 갑작스러운 등장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는 성경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의 언급은 신비감을 줍니다. 그에 대해 창세기 14장에서 소개합니다. 그곳을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왕에게 붙잡혀 있는 조카 롯을 구하려 갑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 여러 나라 왕들과 전쟁으로 승리해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사람이 멜기세덱이었다고 말합니다.

멜기세덱에 대해 창세기 14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17-20)

아브라함 시대에 멜기세덱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멜기세덱은 불가사리한 신비감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나안 땅에는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모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만났고,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등지고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안타까워하시면서 홍수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노아가 세 아들을 통해서 인류를 번성시키면서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10대손이 아브라함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런 놀라운 신앙의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소개한 멜기세덱의 이름은 ‘나의 왕은 의로우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소개합니다. 멜기세덱을 소개하면서 ① 살렘 왕 ② 떡과 포도주 가짐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④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함 ⑤ 아브라함으로부터 얻은 것 중 십분의 일을 받음 등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전쟁에서 큰 승리를 이룬 것도 감사의 제목이지만, 그 전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멜기세덱과 같은 인물을 만나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갔다는 것은 크고 놀라운 영적 체험이었습니다.

(2) 의의 왕, 평강의 왕(2)

그 특징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살렘 왕 : 이곳에서 ‘살렘’이란 말은 ‘평화’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왕은 ‘평화의 왕’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이와 관련된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 9:6) 장차 오실 메시아 아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랍도록 완벽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평강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② 떡과 포도주 가짐 : 떡과 포도주는 우리가 행하는 성찬과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찬식은 영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만큼 귀한 교제가 있었다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포도주와 떡을 가지고 나아간 적이 없습니다. 귀한 승리를 위한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④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함 : 도대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할 수 있었습니까?

⑤ 아브라함으로부터 얻은 것 중 십분의 일을 받음 :아브라함은 십일조라는 규칙이 생기기도 전에 십분의 일을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받쳤습니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을 아주 존귀하게 여기고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아들과 닮은 멜기세덱(3)

히브리서 기자는 더욱더 대범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시편 110:4이 해석의 기준점입니다. 이는 “(그가)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는 진술이 잘 보여줍니다. 히브리서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3)라고 소개합니다. 멜기세덱은 전혀 그의 배경에 대한 소개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중에 이런 존재는 누구입니까? 이런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에 의거해서 몇 가지 추론 합니다. 먼저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의의 왕’으로 풀이하고, 또 살렘 왕이었다는 사실을 ‘평강의 왕’이라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이는 멜기세덱을 진정한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예표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뜻의 신비한 출현을 소개합니다. 이 역시 예수님과 연결시키지 위한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입니다. 중요한 것은 멜기세덱이 비춰 주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이루셨을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망이 더 좋은 소망으로 가득 차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멜기세덱이라는 존재에 대해 함께 나누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탁월성(4-10)

샘플은 원형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잘 만들어진 모형은 원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해줍니다. 모형의 목적은 원형을 가리키는 데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본문에 등장한 멜기세덱도 예수 그리스도 모형의 한 예입니다. 다음으로 멜기세덱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4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4-10)

구약의 내용을 통해 멜게세덱의 탁월성을 논증합니다. 특별히 대제사장으로서의 위치에 대해 다루는데, 멜기세덱의 위치, 멜기세덱의 지위가 매우 우월하다는 의미를 거론합니다. 그를 설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서 입증하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줌(4)

멜기세덱의 첫 번째 탁월성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에게 전쟁에서 얻은 노획물에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선물을 드리고 나서 그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인 유대인들에게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며 가장 존경스러운 인물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더 높은 자라고 인정했던 멜기세덱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2) 멜기세덱의 탁월성1(5-7)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레위의 후손 제사장들은 모세 율법을 따라 자기 형제들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으라고 명령받았지만(5; 민 18:21), 멜기세덱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않았음에도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그가 아브라함 후손의 삶을 규율하는 모세 율법을 뛰어넘는 존재하는 말이며, 레위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쳤기에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 십분의 일을 바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9). 이런 면에서 제사장 위치로 보면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뛰어납니다.

(3) 멜기세덱의 탁월성2(8)

다음으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위에 있는 자가 아래 있는 자를 위해 축복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7)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역시 ‘조상’이라는 말이 중요한데, 아브라함이 레위 계통 제사장의 조상이기에 후대 대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죽은 자들과 살아 있다는 자와의 대조입니다. 멜기세덱이 부모와 족보뿐 아니라, 출생과 죽음의 정보도 없이 항상 제사장직에 있다고 말한 3절 내용과 관련해 영원한 제사장직의 모형이기에 죽음을 경험해 늘 새로운 제사장이 필요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탁월합니다.

(4) 멜기세덱의 탁월성3(9-10)

여기에서는 제사장 가문으로 알려진 레위 지파도 포함됩니다.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라는 표현은 레위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받쳤다는 것, 제사장 지파인 레위도 아브라함이 드렸기 때문에 멜기세덱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이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단정해서 말하지 않고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9)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 율법, 모세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 이런 인물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들이고 중요한 신앙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드린 헌신과 예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헌신과 예배는 아브라함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멜기세덱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율법 이전에 중심이 있었고, 형식 이전에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가 레위 제사장보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훨씬 높고 탁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종합하면, 멜기세덱은 레위 계통 제사장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빌고 십분의 일을 받은 영원한 대제사장 같은 존재이기에 모세 율법이 규정한 제사장들보다 뛰어납니다. 저자의 의도는 멜기세덱 자체를 높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레위 계통보다 뛰어난 멜기세덱을 모형으로 그보다 더 뛰어난 참대제사장 예수를 소개하고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세와 관련한 옛 언약 제사장을 통한 속죄 사역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논증하려는 것입니다. 구약을 알고 있는 유대인 신자에게 다시 구약을 통해 이렇게 논증해야 하는 것은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독자를 지키고 싶은 저자의 마음과 열심이 담겨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의와 평강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은 중요한 순간에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인 십일조를 받쳤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에게 복을 빎을 받았습니다. 멜기세덱과 비교할 수 없는 의와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의와 평강을 내려 주시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존경심을 표했던 것처럼 우리도 마땅히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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