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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3-02)


과거를 통해 권고하신 예수님

히브리서 3장 7-19절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능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 되시고, 어느 때는 자신이 주인 될 때가 있습니다. 사단은 ‘너의 삶에 주인이 되면 행복한 것이다.’라고 충동합니다. 스스로 주인되었을 때는 불순종하고, 자신의 주장과 결정 그리고 행동이 옳다고 고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셨을 때, 행복이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진정한 행복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많은 것을 교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강퍅한 마음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했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들처럼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갑니다. 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선진들의 불순종을 통한 권면(7-11)

인생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빨리 가야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멈추시면 자리에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느린 것 같아도 바른길을 갈 때, 늦어 보일지라도 마침내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조금 늦어 보이고, 소득이 없어 보지만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큰 영향력 있게 세우실 것입니다.

7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7-11)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실패를 반복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1) 광야 세대의 거역함과 완고함(7-9)

본문에서도 ‘그러므로’라고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이는 저자가 3:6에서 에둘러 주었던 명령인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곧게 잡고 있어야 한다’는 부연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3:1-6 전체를 염두에 두었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언급했던 모세의 신실함에 연결해서 ‘그의 신실함과 대조되는 불신실한’ 광야 시대의 이야기하려는지도 모릅니다. 광야 시대의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모릅니다. 광야 시대를 떠올라게 하는 그 많은 성경구절 중에서 설교자는 그들의 불신앙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담긴 시편 95:7b-11을 낭독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광야 세대 이야기의 원자료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기나 민수기, 신명기 본문 대신 시편 95편을 사용합니다. 사실 시편 95:7b-11에는 출애굽기 15:23과 17:7, 신명기 16:6, 민수기 14:21-23이 모두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이 시는 모세오경에 대한 인용이고, 일종의 주석이요 해설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성경 내의 성경 해석’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서 저나는 이것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전제합니다(7). 모세오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듯이 몇 백년 후 이스라엘의 정황 속에서 거듭해서 들려진 그 말씀의 해석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7 …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편 95:1-11)

저자가 낭독하는 성경 본문은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7절부터 시작합니다. 7b절의 화자는 시편 95편의 시인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대상은 시편 95편의 독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8절 이하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녹음해 두었다가 트는 것처럼 직접 화법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시편의 청중 ‘너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열조’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말라고 하신다. 이어지는 10-11절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광야 세대의 현장으로 간 것처럼, 하나님이 광야 세대를 향해서(‘이 세대에게’) 하시는 말씀이 들려집니다. 즉, 히브리서의 청중은 시편을 듣고, 시편의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은 시편의 청중뿐 아니라 광야 세대를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이 히브리서의 청중,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인용문 속에 인용문을 배치하는 이런 장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생생하게, 진지하게 듣도록 돕습니다.

(2)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자들(10-11)

9절과 10절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합니다. 광야 세대의 완고함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므로’를 통해서 이 논리적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이 접속사는 인용된 원문인 칠십인역 시편 95편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 95편에서는 ‘사십 년 동안’이 열조의 행위에 연결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조 편에서 보면 ‘사십 년’은 반역의 시간이었습니다(히브리서).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반역의 세대를 향한 진노와 심판의 시간이었습니다(시 95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이 공존했던 시간이 바로 ‘사십 년’이었습니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돌이킴의 기회를 저버린 백성에게 가나안 입성을 불허하신 하나님의 결정은 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음성(10-11)은 민수기 14장의 상황을 기초로 재구성된 말씀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입성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그들은 도리어 낙담하고 원망했다.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중한 맹세의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내 쉼에 들지 못하리라.’ 우리도 시편 95편의 청중과 함께 엎드려서 이 음성을 듣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섭섭함과 안타까움, 절절한 사랑이이 신탁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권면(12-19)

하나님께서 속상하신 것은 세상 때문에 속상하신 것이 아니라 믿는 성도들 때문에 속상하십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은 속상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가나안 땅에 들어놓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시련을 주었습니다. 믿음의선택을 해야할 때, 모두가 믿음의 선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 앞에서 바른 믿음의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 있겠습니까? 본문으로 들어가서 결과를 보겠습니다.

12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2-19)

히브리 기자가 왜 이것을 언급하겠습니까? 초대교회의 성도들 역시 그런 실수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완고해져서 강퍅해졌습니다. 강퍅케 된 이유는 죄의 유혹입니다. 죄 때문에 강퍅해졌고 실패했습니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성경을 회중의 상황에 적용하기(12-14)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기 위해 권면합니다. 믿음이 없이 악심을 품고 있을 때,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악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지면 불안이 찾아옵니다. 출애굽 세대의 불신앙을 반면교사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 있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편 95편의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신학적인 메시지의 요체를 시편 95편에서 발견합니다. 먼저 시편 95편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특히 ‘오늘’과 ‘안식’이라는 두 단어가 중요합니다. ‘안식’에 대해서는 4장에서 더 자세히 논의할 것입니다. ‘오늘’은 시편의 원 독자들과 히브리서의 청중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종말을 동시에 조망하게 해주는 신비로운 단어입니다. 이후 달란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이 시편 당시의 시간에 한정되지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4:7-8). 히브리서의 시간도 ‘오늘’이고,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이 도래할 때도 ‘오늘’입니다. 21세기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도 여전히 참 안식을 갈망하며 경건과 신앙을 지키려 애쓰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광야 세대처럼 되지 않기 위한 실제적인 방안이 제시됩니다. ‘오늘’이라 부르는 이 하루 동안 성도들은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기 위해서, 형제자매를 거울로 삼아 신뢰 위에서 서로를 경고하고 책망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마음의 굳어짐의 원인은 죄입니다. 종류, 경증과 무관하게 죄는 결국, 성도의 마음을 굳게 만듭니다. 거창한 철학이나 교리적 오류에서 불신앙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죄와 불신앙의 매키니즘은 일방적이지 않으며, 그 둘 사이에는 나선형 순환 관계가 있습니다. 죄가 불신앙을 조장하고 불신앙은 죄를 묵과하며 확대 재생산합니다.

‘믿지 않음’, ‘하나님에게서 떨어짐’, ‘완고하게 됨’은 모두 같은 상태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들입니다. 아마 첫 번째 단어는 ‘불신실함’, 두 번째 단어는 ‘하나님을 저버림 혹은 배반함’이라는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상태는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음’입니다. ‘완고함’과 ‘견고함’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상태를 묘사하는 형용사들입니다. 둘 다 ‘단단하고 굳은 상태’를 표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그 두 단어를 적용하면 정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완고해질 것입니까? 견고해질 것입니까?

(2) 성경에 비추어 스스로 성찰하기(15-19)

저자는 15절에서 시편 95:7-8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청중의 삶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갑니다. 연이은 세 개 수사의문문, 그리고 대답들로 좀 더 과격한 도전을 던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 질문은 시편 95편이고, 대답은 민수기 14장에 근거해서 주어집니다. 시편 95편을 통해,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단지 역사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광야 시대일 수 있겠구나’라는 섬뜩한 착상을 떠올려야 합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성도들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경고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광야에서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서 각성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나는 ‘그들은 믿지 않았다’라고 표현합니다. 초심을 잘 지키려면 다른 이들과 물질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긍휼과 자비의 실천은 우리를 정화해 줍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강퍅하면 교만해지고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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