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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2-02)


우리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2장 11-18절


한 남자가 정원을 살피다가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큰 비가 곧 올 것 같았고, 개미들이 하던 모든 작업을 휩쓸어가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 남자는 개미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싶었지만, 개미의 언어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개미들이 알아듣는 말로 경고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도망쳐! 곧 비가 온다!’라고 소리쳤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개미가 되면 어떨까?’, ‘그럼 개미들이 처한 위험에 대해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묵상을 통해 이 세상 역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 구원의 창시자로 온전하게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지니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마귀를 멸하시며,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을 놓아주려 하십니다.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신 그분은 시험과 고난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시험과 고난을 몸소 받으셨기 때문에 능히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형제’라고 부르심(11-13)

지금은 덜하지만, 고아들이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는 사회적인 편견과 냉대입니다. 그들을 위해 누군가가 같은 편이 되어주면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모든 인류는 고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본문에서 이러한 연약한 존재인 인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1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11-13)

세상의 인간관계는 수준 차이가 조금만 있으면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낮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쉽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쉽게 어울리지 못합니다. 세상의 관계는 조금만 차이 나면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낮고 천한 이 세상과 천한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이유(10)

10절은 5-9절과 11-18절을 맺어주는 연결 고리와 같아서 양편의 생각을 다 담아냅니다. 이곳에서 두 가지 핵심 주제는 ‘아들이 받으신 고난’과 ‘완전케 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맛보셔야 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 10절의 주요 내용입니다.

먼저, 고난에 대한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죽음의 고난’은 ‘잠깐 천사보다 낮아지심’(9)의 연장 선상에 있습니다. 성육신이 그리스도의 본질을 단지 암묵적으로 내비쳤다면 고난은 뚜렷하게 드러냈습니다. ‘고난’은 세 가지 각도에서 조명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죽음을 소멸의 한 양상으로 파악하고 신성의 대척점(對蹠點)에 놓았던 헬레니즘의 세계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영광을 품고 있고 고난이 존귀를 잉태한다는 역설은 성경에서 중심사상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기충족적이지 않고 대리적(代理的)이며 대속적(代贖的)이었습니다. ‘모든 일들을 위해’ 그분은 죽음을 맛보셨습니다(9).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심’(10)도 고난의 결과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우리를 위할’뿐 아니라 ‘우리에 앞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통과하신 고난과 영광의 전 과정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범이자 선례가 됩니다(히브리서 6:20 참조). 고난을 피해야 할 어떤 것, 혹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 여정에 통합된 한 부분이라고 이해함으로써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신실함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온전케 되심’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에서 15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칠십인역의 용례를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고난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제사장과 같은 사역을 ‘완전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전함’은 그의 ‘직분에 꼭 들어맞는’, ‘적합한’, 그리고 ‘자격과 능력을 충족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한편, ‘거룩하게 하시는 분’ 예수님과 ‘거룩하게 된’ 우리는 한 부모를 모신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형제’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과 관계를 회복시키길 원하셨습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아들이 오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렸던 창조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구원이 창시자’(10)로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은 구원의 영광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구속의 은혜를 베푸셨고, 그리스도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와 성도가 한 근원에서 남(11-13)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두 번째 의미는, 성도의 거룩함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결과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우리가 다 한 근원이신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도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한다면 사람은 율법 속에서 헤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님이 은혜로 거룩하게 하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믿는 성도를 형제와 교회,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구원하신 분과 구원받은 이들’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를 대언하겠다는 저자의 설교 철학이 12-13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여기 인용된 시편 22:22과 이사야 8:17b-18은 11절의 선언에 대한 권위 있는 역할을 합니다.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22:22)

17…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이사야 8:17b-18)

성자들은 ‘형제’라고 기꺼이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저자는 시편과 이사야에서 듣습니다. 사실 우리는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형제(兄弟)”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 주시고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장점을 좋아하지만, 약점은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부족한 것과 연약한 것, 그리고 모자란 것까지도 모두 아시면서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병든 것, 연약한 것을 덮어주시고 안아주십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이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사람이 가진 모든 연약함을 몸소 다 경험하셨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고프시고, 매를 맞으면 아프시고, 일하시면 피곤하신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결코, 슈퍼스타가 아니셨습니다. 일반적인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아낌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사랑하면서도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면서, 사랑하면서도 섭섭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형제라고 불렀다면, 자동적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 우리를 향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부르지 않고,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여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아낌없이 사랑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연약한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이 사람이 나의 형제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그분 곁에 서기가 한없이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그분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변화된 새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영원한 자유가 되어 주심(14-18)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으로 오실 수 있는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는 그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승리와 해방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효력은 천사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강조합니다.

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14-15)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문으로 입적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 대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지불 되었습니다. 이제 영적 자부심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14-15)

사람들은 많은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중에 하나는 죽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 속에서, 평생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갑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약점을 노립니다. 가장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그것을 시험의 도구로 삼아 마치 그것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자기에게만 있는 것처럼 속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생명조차 빼앗은 것같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거짓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것처럼 보인 사단을 멸하시러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참 생명은 하나님의 권한 안에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의 종으로 지배하던 사단의 권세는 무너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서 함께 한 자들은 사단이 절대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멸하는 무기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부활 앞에서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목적은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죄 씻음 받고, 마귀로부터 자유케 되고, 죄의 종노릇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구원의 중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친히 시험도 받으시고 고난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승리하고 구원의 통로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사망을 이기고 마귀 권세를 이긴 자입니다. 이런 승리의 삶을 나눠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는 사람들은 사단이 절대로 손댈 수 없습니다.

(2)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신 예수(16-18)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는 승리와 해방의 효력이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사들은 죽음과는 상관없는 존재들입니다. 대속의 은혜는 일생을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던 인간들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친히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진정 굳게 붙들어야 할 분은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시요, 고난 중에 우리를 도우실 분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흔들리는 믿음과 가치관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때로는 쓰러질지라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씻으셨습니다.

시험 받고 어려움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이 땅에 오셔서 육신으로 호흡하셨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으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삶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고난 당하셨지만, 죄에 패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생명의 길을 발견합니다. 시험과 고난 당하신 주님은 시험받는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평생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능히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친히 인간이 되셨을 때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부족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통로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의 통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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