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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1-02)


사도 바울의 회심과 소명

갈라디아서 1장 11-24절


한국 법원에서 죄인들을 심판할 때 ‘증거재판주의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어려운 재판이라도 증거가 없으면, 벌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재판에서 증거만 있으면 증인은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설득력이 강합니다. 그리고 어떤 재판이든 승리할 수 있어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복음의 증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복음이 남을 살리기 위해 먼저 그 복음을 전하는 자 자신을 살렸고 변화시켰다는 증걸르 보이면 가장 확실합니다. 바울은 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 이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부름 받은 이후에는 어떻게 사역하였는지를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술합니다. 이 모든 것의 초점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음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기원(11-12)

교만은 스스로 높이려고 자신의 뛰어난 업적만을 내세웁니다.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과 거대한 느부갓네살 동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만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인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만을 세우고 헌신했습니다.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2)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소아시아 남부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돌아간 직후에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공격했습니다. 이제 세워진 연한 순과 같은 교회들을 강탈하기 위해, 그들은 ‘율법의 실천을 통해서 의를 이룬다.’는 거짓 복음으로 어린 교인들을 유혹했습니다. 특히,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교인들에게 바울에 대해 불신을 심기 위한 모략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인했습니다. 그래야만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전한 복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지속적으로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역사적이며 전통적인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의 전통적인 율법을 통한 구원에 비교해보면 내용도 내용적으로도 부실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통성이나 역사성도 없는 이단에 불과한 주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갈라디아 공동체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본격적인 반박에 나셨습니다. 먼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강한 어조로 사용했지만, 그들을 사랑이 담긴 호칭으로 부릅니다(참고 갈라디아서 3:1). 그의 의도는 지금부터 시작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증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라고 세 가지 부정어를 강조해서 사용합니다. 바울은 강력하게 자신이 전한 복음의 근원이 인간이나 세상이나 자연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았으며(사도행전 22:3), 때문에 인간에 의한 전승되고 교훈되어진 것을 좇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도, 사람들에게 받은 것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배운 것도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철저하게 율법을 교육 받아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론이라면, 사람들이 행해야 할 종교행위를 많이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차원에서 노력이 전혀 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꾸며 지어낼 만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코 사람의 기쁨과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힙니다(10).

사도 바울은 그 동안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결론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것입니다. 회심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로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아그립바 2세에게 바울은 자신의 회심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계시해 주신 내용에 대해 설명합니다.

16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사도행전 26:16-18)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경험을 염두해 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은 바울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메섹에서 바울은 부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유대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종말의 부활 가운데 이미 들어갔다는 사실과 부딪혔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새로운 창조’였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를 덧입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그가 오르신 것은, 그가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외로움을 성취하고, 완전한 거룩과 영광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창조가 예수 한 사람 안에만 성취되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에게로 가야 그 새창조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 신학이 형성됩니다.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이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든 이제는 모든 것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성취한 구원을 함께 누린다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적 주장입니다. 즉, 이제는 율법이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되는 과정(13-24)

복음의 일꾼은 저절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정하십니다. 한때 복음의 대적이었던 사람도 하나님의 택정 안에 있으면 완전히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복음을 위한 충성한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증명합니다. 복음을 향한 열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13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3-24)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다시 돌아보면서 설명합니다. 자신이 사도가 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 의한 사도’나 ‘스스로 세워진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 회심함을 입기 이전(13-14)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죄를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지만, 회개하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 분입니다. 점점 죄가 무르익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 심판 앞에서 인간의 직위, 재물, 힘 등은 모두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으로 살아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기 전에 행했던 복음의 박해자로서 생활을 언급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자기의 체험을 제시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논증하는 것은 바울이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사도행전 22:3-10; 26:5-12; 빌립보서 3:4-6).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회심 이전에는 유대인으로서 전통과 유대교를 열렬히 추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자기만의 종교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바리새인으로서 광신도였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유대교와 조상 전통에 대해 특별한 열심을 품었던 자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옹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을 ‘나사렛 이단’(사도행전 24:5)으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그리고 교회를 멸하려 했던 자입니다.

회심하기 전에 추종했던 유대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롭게 살아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메시아가 왔지만, 제일 먼저 환영하고 영접해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세우실 때는 랍비 가운데서 세우실 것이다.’고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시골 출신 이단자나 정신이상자로 생각하고 영접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바탕으로 바울이 유대교를 열심히 믿고 조상의 전통을 옹호할수록 원수이자 이단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의욕이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열정은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수기 25장 11-13절에 등장하는 비느하스 이야기는 후대의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대한 열심을 고취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전수되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을 품고 배교한 동족들을 처단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보존한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시편 106:13).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유대교가 취하리라 예상 가능한 행위였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멸하려 했던 것 또한 비느하스 이야기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면서 틀림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유대인들의 정결법과 안식법을 비롯한 모세 율법을 규정대로 지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더 나가 율법과 함께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는 성전을 허물겠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 위에,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인식이 유대인들에게 만연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다는 소식은 율법에 열심 있는 자, 바울을 움직이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혈기가 가득한 바울을 가던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당국자들부터 예수의 이단자들을 구금해도 좋다는 영장을 손에 쥐고 있었을 것입니다. 머릿속에는 수단 방법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모든 구금할 것인지 그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잘 설명합니다.

4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사도행전 22:4-5)

회심 전 바울의 마음은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멸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으로 알았고, 이 사명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2) 회심함을 입는 과정(15-17)

진심으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종종 변화되었다고 대중적인 간증하던 사람들이 때로는 다시 돌아가서 범죄 해서 지탄을 받는 경우를 봅니다. 이러한 모습은 잠시 동안 변했을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확실하게 변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동안 잘못된 모든 열심에 대해 “그러나”라는 한 단어로 회심 전에 모든 사건을 요약합니다. 유대교에 깊이 빠져 있던 바울이 과거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코 인간적인 힘이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변화는 매우 기적적인 사건으로서 그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임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구원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① 구원의 주체

바울은 자신의 구원 과정을 간증하면서 주어가 ‘나’에서 ‘하나님(이가)’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주체가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할 수 있었던 조건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해 관심도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 조건으로 살펴보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더 나가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하게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고 있는 다메섹 도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말합니다.

② 구원의 시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시기를 말합니다. 그 시기를 추측해보면, 대부분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러 가고 있을 때인 다메섹 길 위이라고 추측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바울에 대한 관심을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 고백합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오래전부터 예정(豫定)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했던 모든 일들(태어나면서 받은 영향, 경험 그리고 교육 등)을 이방선교를 위해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예레미야 1:5)

③ 구원의 방법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는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선악을 알기 전부터 이미 택정하셨고, 정확한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은혜로 그를 구원의 반열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나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어떤 일이나 조건이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생각이나 준비하지 않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부르셨던 것입니다.

④ 구원의 목적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이유를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고백합니다. 구원도 기적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멈추지 않고, 바울 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 ‘속에’ 그의 아들을 계시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바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단순히 어떤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실재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과 같은 바울을 보화와 같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은 앞으로 바울이 전해야할 그리스도의 은혜를 그대로 대변해 줍니다. 자신이 하나님 은혜의 살아있는 증거인 셈입니다.

⑤ 구원의 사역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원의 반열에 옮겨놓으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주인이기도 하시며 이제 그의 아들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의 백성으로 부르신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바울을 부르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16).

바울은 구원 이후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당시 나바티아 왕국이 있었던 아라비아 지방(현 요르단 페트라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후에 가장 먼저 이스마엘 후손들에게로 달려가 이제는 비로소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게 되었음을 전한 셈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만 가능했습니다. 구원의 반열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하심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복음을 위임 받은 후, 어떤 사람과 상의하거나 심지어는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구원과 사도직은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에만 의존합니다.

(3) 회심함을 입는 이후(18-20)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은혜에 거룩함으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결과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었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의존되어 있거나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그들에게서 파생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존경했지만, 그들을 죠제의 대상으로 여길 뿐 그들의 지시를 받거나 그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심 후 첫 예루살렘 방문 동안에 바울은 베드로와 여고보를 만났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방문 때에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이 ‘복음’을 듣거나 배웠을 것입니다 

2장 11-14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오히려 당시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성숙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였음을 바울은 주장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경험을 시작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거하여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알려주려 합니다.

(4) 부르심을 이후 평가(21-24)

사명자는 척박한 땅을 개간하는 농부와 비슷합니다. 척박한 땅을 개간하듯이 완악하고 강퍅한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부드럽게 만들어 가는 사투(死鬪)의 현장입니다. 시작은 매우 힘들고 어렵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사역하다보면, 때가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역했던, 안디옥과 다소 지방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파송되어 안디옥에서 사역한 바나바가 다소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동역합니다. 이 두 사람의 사역을 통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안디옥에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유대의 교회들이 얼굴로 알지 못했던 바울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나의 선한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유대교회의 평가를 소개함으로써 자신의 사역과 복음의 내용이 신뢰할 만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복음은 사도 바울의 모든 삶에 적용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삶을 통해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는 이 복음으로 자신의 삶을 통째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자신을 변화시켜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 은혜의 복음만을 위해 헌신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복음의 신실성을 반영하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복음 전도가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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