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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2-01)


예루살렘에게서 인증된 사도권

갈라디아서 2장 1-10절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곧 중심에서 나오는 신앙 행위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중심에서 나오지 않는 행동은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 의를 위해 포장해서 외식(外飾)한다면, 사람들은 외모만 보기 때문에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습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에 앞서 마음의 동기와 태도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중심을 다해 하나님을 기뻐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런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사역을 통해, 중심을 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한 일과 그 기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회고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위해 방문했지만, 그 계기를 통해 자신이 전한 이방인 복음에 대해 예루살렘 사도들과 내용이 같다는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이 사실은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경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두 번째 방문했던 예루살렘(1-2)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화려한 경력이나 출중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끌고 나가면, 모든 회중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이처럼 바울의 관심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습니다.

1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입증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소명의 근원이자 메시지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더 나가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회심한 사건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방인의 사도직에 대해 소개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소개합니다.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얼마나 합당한지를 변증합니다. 그 동안 전했던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아직까지 덜 이해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예루살렘 있는 사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는 바울이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일을 설명합니다. 그동안 이방인 선교를 힘써온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그가 전한 복음과 이방인 선교의 열매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사도들과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에 대해서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예루살렘 2차 방문(1)

사도 바울은 회심 후 3년 만에 첫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1:18). 그리고 다시 14년 만에 방문하였습니다(2:1). 사도행전 15장을 참고해 보면, 바울이 두 번째 방문한 ‘예루살렘 총회’에서 ‘율법주의의 부당성’과 ‘이방인의 할례’와 같은 기독교 기초적인 신학들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14년 후에’는 첫 방문 후에 14년이 아니라 회심한 후로부터 ‘14년 후’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방문을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고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27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사도행전 11:27-30)

당시에 바울은 안디옥에서 헬라인, 즉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아가보는 천하가 큰 흉년이 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사도행전 11:28). 그 예언을 따라 팔레스틴 지역에 큰 기근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대 지역의 흉년은 어머니 같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까지 영향을 받아서 힘들었습니다. 그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바울 일행은 안디옥 교회에서 주신 사랑의 헌금을 전달하려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2) 자신이 전한 복음(2)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예루살렘에 구제 헌금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동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사역까지 공인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바울은 바나바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회심자인 디도도 함께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이방은 이방인들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은혜에 대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즉,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혜롭게도 신중하게 예루살렘 총회 전에 먼저 보고한 후에,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총회 석상에서나 유명한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자신의 이방인 사역을 설명한 것은 당시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거짓 교사들이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따져보자면, 자신이 이방인 사역했던 것을 공개 토론을 통해 공론화과정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칫 바리새파 중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같은 유대인들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사도행전 15:5), 예루살렘 교회를 공격하기 기회를 틈타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교제한 사건 때문에 논란이 되어 있었습니다(참고 사도행전 10:1-23). 아마도 바울도 안디옥과 같은 곳에서 사역하면서, 이러한 이방인에 대한 논란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개인적으로 사도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접근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를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지금까지 이방인들의 영혼을 위해 했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도 바울 일행이 이방인들에게 할례 없는 구원에 대한 복음 사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염려는 예수님께서 받는 신학적인 논증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만약 공개적인 논쟁이 터지면 매우 난감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논쟁은 소송을 낳을 것이며, 소송 과정은 많은 시간과 물질이 들어갑니다. 이 때문에 지루한 소송에 휘말리면, 이방인 복음 전파에 혼란이 일어나고 당연히 “유력한 자들”은 초기 기독교 내부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이방인 선교를 당분간 중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더 나가서 기성 유대주의자들의 정치적, 종교적인 압력으로 굴복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만용보다 신중하게 지혜로운 분별을 택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양보하지 않음(3-5)

믿음으로 내딛는 순종의 발걸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약속들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날까지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와 순종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현실 됩니다.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3-5)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런 시도에 유력한 자들인 사도들의 반응을 설명합니다. 사도들은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학적인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에 대한 문제만 언급했던 것입니다.

(1) 이방인 디도를 통한 인정(3)

초대교회 당시에 주요 쟁점은 율법주의자들이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 율법 준수가 화두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계속 해온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율법(할례)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분명한 대답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유력한 사도들에게 자신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의 복음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조건에 반드시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방인 디도에게 강제적으로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3). 디도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율법주의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중지시키기 위해 일환이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복음을 버리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던 것입니다. 디도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에 미혹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방문 기간 동안 바울의 복음에 대한 아무런 도전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2) 거짓 형제들의 존재(4)

예루살렘 교회에는 바울의 복음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서 돌아왔지만, 아직까지 유대교적 생각에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유대 율법주의 신자’라고 부를 수 있지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는 그들을 ‘거짓 사도’라고 불렀던 것처럼(고린도후서 11:13), 이들을 ‘거짓 형제’또는 ‘거짓 형제’라고 지칭합니다. 그들은 계속 율법주의를 고수함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할례를 실행하지 않는 이유를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바울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갈라디아 교회에서 할례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6:12).

기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는 아무도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변방인 갈라디아에서 할례 의식을 강요한다고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만약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의 율법에 대한 주장이 받아 들려졌다면,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현장에서 그들의 맹공격으로 더 많이 바울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처럼 했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옛 율법에 충성하고 있었습니다. 은혜의 교리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려고, 가만히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구원의 진리를 망치려고 하는 사단의 궤계였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갈라디아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복음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사람들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사도들도 서서히 구원론에 대한 신학이 정립되고 있었습니다. ‘거짓 형제들’의 계략으로 인해 구원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더 빨리 얻게 된 것입니다. 결국, 거짓 형제들의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자유’를 빼앗고, 다시 율법의 ‘종’으로 만들려고 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3) 복음의 진리를 수호함(5)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무시한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오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행했던 이방인 디도에게 할례를 행해야 된다고 주장에 결코 한순간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자유’와 율법 아래 있는 ‘종’으로 비교 대조합니다. 후반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섰으니 …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일차적으로 유대인의 율법과 할례의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상황과, 더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성취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5장 13절 이하에서 설명하는 대로, 율법과 상관없는 자유인 방종에 이른 자유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계시된 이상,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살게 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시도에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었습니다(5a).

갈라디아 교회에 침입한 거짓 교사들은 왜 할례를 요구했겠습니까?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무런 근거 없이 무조건 할례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적이면서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례(割禮)’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종교 예식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통해 성경적인 근거로 접근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집안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명하면서 ‘이것이 나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라’(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들은, 이 언약을 배반한 자로,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창세기 17:14).

거짓 교사들은 회심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처럼 창세기 17장을 성경적인 근거로 할례를 주장했을 것입니다. 할례를 하나님 백성의 표지로 제시하는 구약의 선지서인 이사야서나 에스겔서에서도 등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살펴보겠습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이사야서 52:1)

이렇게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여기에서는 언약의 표지 역할 했던 할례가 구속사적 효력이 다했음을 설명하면서, 거짓 교사의 요구에 “한시도” 복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진리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율법주의자들에게 한 치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예루살렘의 인정(6-9)

사람들이 자신에게 사명을 잘 감당하려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끝임 없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사명자가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반드시 성취하게 됩니다.

6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6-9)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안으로 눈을 돌려 사도들과의 관계를 소개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 사도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를 소개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설명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약간 냉정하고 심지어는 교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1) 가미되지 않는 복음(6)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기둥 같이 유력한 자들(2:9; 2:6)이 그 동안 자신이 전한 이방인의 복음과 그들의 구원을 인정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 공의회(사도행전 15장)에 이루기까지, 초대 교회는 이방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조금씩 정리해 가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 유력한 자들과 거짓 관계를 만들어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과의 관계가 없었던 것을, 과거에는 자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음을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으며, 받은 그대로 첨가 없이 순수하게 복음만 전했다고 주장합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이 바울 자신의 사역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덤덤하게 말합니다. 초대교회 차지하는 영적인 지위를 생각해보면, 복음의 진리 앞에서 바울의 태도를 얼마나 담대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들을 높게 평가했지만, 반면에 바울을 아주 낮게 보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동행했고,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 대해서는 참 사도로 보았지만, 바울을 자칭 사도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사도로 나섰으니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부정한 이방인들을 정결의식도 없이 그대로 하나님의 공동체에 부정한 채로 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아무나 쉽게 받아주는 ‘아주 값싼 복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유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은 이번 기회를 통해 처벌 받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쉽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복음에 대해 내용을 추가하거나 할례나 율법 규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6). 사도들은 이방인 디도를 그 상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같은 형제로 받아 들렸고, 외형적으로 바울에게 공식적인 사도들처럼 사도직을 받아야 된다고 거짓 사도라고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더나가서 그들은 바울을 이방인을 향한 사도로 확실하게 인정했습니다.

오히려 더 나가서 예루살렘 교회에 기둥 같은 사도들,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함을 받은 것을 보고,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사도들이 교제했던 것은, 사도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명자임을 인정했기 때문에 서로 교제한 것이었습니다.

(2)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바울(7-8)

유대주의 거짓 형제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들이 바울 일행과 교재하면서 대등한 존재로 대접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사람들이 주관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사역이지만, 서로 다른 방법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할례자에게, 바울은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교제를 통해, 바울 일행은 이방인에게, 다른 사도들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공통된 이해 아래서 한 복음 사역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복음 전파 사명은 동일한 역사이란 점을 상기 시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동일한 밝힘으로써 자신이 분명한 사도임을 천명합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통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그를 사도로 부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신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와 동등한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사도들과 공감대 형성(9)

유대주의 거짓 형제들은 바울와 사도들을 이간질해서 사역을 못하도록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확실한 복음을 인증시키셨고, 더 힘차게 복음을 증거 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기둥인 사도들과 바울 일행은 서로 사역을 인정하는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9)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을 … 보았고(6-10) …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라고, 사역이 이방인들 가운데 지속될 것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이방인 성도에 대한 우려를 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모두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는 거짓 교사들을 향해 영적인 한 방을 날리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초대 교회에 선교 사역은 점점 확장되어 갔습니다. 각자 선교 대상이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경계선으로 선교 대상자에 대한 구분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이 개척한 이방인 교회인 고린도교회에서 ‘게바(베드로)파’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주로 이방인들로 추정되는 점(베드로전서 4:2-3)을 보면 서로가 경계를 넘어 협력 사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기둥인 사도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사도직과 그 동안 이방인을 위한 복음, 그리고 사도들의 사역과 동등하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더 나가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면서 사역을 계속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대적자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중요한 논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부탁(10)

삶에는 우연한 일들이 끝임없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주장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들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진행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일을 달라고 기도하지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10)

예루살렘 기둥인 사도들은 사도권을 의심하지 않고 동등하게 인정하여 바울에게 부탁까지 합니다. 그들의 부탁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이라고, 복음의 증거 가운데 특별히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부탁한 것입니다.

자존심 강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구제를 부탁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이방인 교회를 동일한 형제로 생각하는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면, 절대로 그런 부탁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른 복음을 전파하면서 바른 실천이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구제헌금을 부탁할 때, 자신은 그동안 그렇게 지속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왔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구체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참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인정한 것입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른 삶을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이후에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이방인인 고린도와 마게도니아 교회들에게서 지속적으로 구제헌금을 모금했습니다(고린도전서 16:1-3; 고린도후서 8:1-5). 이 구제헌금은 단순하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하는 목적 외에도, 위에서 말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한 백성임을 상징적 표현입니다(로마서 15:25-28, 31).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의 자세에서 사명사로서 마음가짐을 살펴봅니다. 복음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복음 밖에서 자신을 낮추고 서로를 인정합니다. 그러한 자세는 복음이 더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이방인에게 제시했던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내용 수정이나 첨가 없이 인정받았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이 복음 되도록 서로 협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들은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협력하면, 복음이 더 힘차게 증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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