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03-01)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
갈라디아서 3장 1-9절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라고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 말씀이 정말 맞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의심하고 있을 때조차도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분명히 맞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한결 같이 변함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진리임을 믿으며 나가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3장에서부터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의로움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한 여러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이 단락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십자가의 망각한 것을 책망하고,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체험했던 경험을 상기시킵니다. 더 나아가 구약의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빛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재해석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1)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진리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의 거짓 복음이든, 교회 안에 유사한 복음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충족성을 허물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을 시도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두 번째 부분의 시작입니다. 첫 번째 부분(1~2장)에서 바울 자신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통하여 사도직을 변호했다면, 두 번째 부분(3~4장)에서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매우 상세히 논증하는 교리적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6장은 교리의 적용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과 사조직의 신적인 기원에 대해 방어하는 입장에서 서술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갈라디아서의 기록 목적인 이신득의(以信得義)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적극적인 자세로 비판합니다. 이미 초대 교회에서는 다음 사실을 결론 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칭의 외에, 다른 율법이나 행위를 통해서도 주어진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으며, 그리스도로 주어진 은혜에 참여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바울은 이 복음의 사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역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헌신하고 성장시켰던 갈라디아 교회까지도 율법주의 거짓 선생들이 침투했습니다. 분명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룬 구속 사역에 믿어야 되며, 더 나가 사람들이 율법을 준행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점점 교회는 망치고 복음에서 율법으로 퇴보하게 만들었습니다. 점점 믿음에서 퇴보해 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꾸짖습니다. ‘어리석도다.’는 원어 상으로 ‘영적 판단력이 없는 사람들아!’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알아야할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사실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할 때, 마치 자신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확실히 믿었습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잘못된 가르침을 교훈하자,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5:7). 바울은 이렇게 그들의 삶 속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의 형상, 곧 바울이 선포하고 보여준 십자가를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워합니다(4:19).
성령에 대한 경험(2-5)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도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에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폐지된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려 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격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믿음이 형식만 남아 율법주의와 통제되지 않은 탐욕으로 가득하게 자리 잡습니다.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2-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어지는 논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칭의에 집중시킵니다. 그래서 중요한 사실을 논하기에 앞서, 사람들의 시선을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라고 집중시킵니다. 칭의에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사실로 접근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왜 그리스도가 칭의의 해답인지를 명시적으로 밝혀 줍니다.
⑴ 성령을 통한 칭의(2)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이 범한 가장 근본적인 잘못에 대해 한 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통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먼저 교리적인 질문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에 대한 경험을 상기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회심과 함께 받았던 성령을 기억케 하면서, 그 성령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묻습니다. 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장 먼저 언급하는 증거는 구약 성경은 성령의 임재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백성에게 실현될 중요한 종말의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요엘서 2:28-32; 에스겔 36:27; 예레미야 31:31-34). 갈라디아서에서 바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받을 복을 말하면서 그것을 ‘성령의 약속’과 동일시합니다(3:14).
바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음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의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아브라함 자손의 표지인 성령의 임재가 그들에게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⑵ 잘못된 육적인 결과(3)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을 때 성령이 개인에게 임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아브라함 자손,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소유로 대변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으로 훌륭하게 그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지 않고 돌연 율법으로 성령을 대체하려 했다는 것이 바울의 설명입니다. 이를 바울은 ‘육체로 완성하려 하였다’고 진단합니다.
‘육체’로 번역된 헬라어 사룩스()는 하나님 없는 이 세대, 이 세상과 그 속에 속한 인간의 모든 활동과 죄악된 본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율법을 사륵스()의 한 요소로 평가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시작하다’와 ‘완성하다’ 두 동사가 동시에 사용되는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시작하신 일을 성령으로 완성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지음 여기에 임한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를 대표합니다. 즉,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1:4)을 받고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으면, 계속해서 그 나라의 삶의 원리인 성령 가운데 머물라는 것입니다.
⑶ 성령으로 돌아서라(4-5)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 ‘파스코’()는 일반적으로 ‘고통/괴로움을 받다’를 의미하는데, 드물지만 ‘긍정적인 경험을 하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후자라면, 당연히 성령의 경험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성령의 역사를 헛되이 경험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그들이 유대인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음을 상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들은 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사 능력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그 율법의 이상을 달성했다면, 율법 아래 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성취요 완성입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단 1회만(그것도 하나님 아버지를 묘사하면서) 언급한 바울은 십자가를 거듭 강조합니다(2:20; 3;1; 5:11; 6:12, 14). 여기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붙잡기만 했어도 꾀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답답해합니다.
헬라어 완료분사 용법을 통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효력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 명백히 나타났음을 강변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넘어서 율법의 기능에 대한 중요한 계시를 전해주는 도구입니다. 즉, 십자가를 보면 율법의 진정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와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가장 중요한 논점인 만큼 바울은 여러 증거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를 뒷받침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재해석(6-9)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이나 후에도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복에 참여하는 것은 율법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6-9)
이제 바울은 두 번째로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 해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대적자들이 먼저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는 할례(割禮)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 언약은 430년 후에 모세 언약을 통해 완전하게 표현됩니다. 두 언약이 하나의 언약인 셈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게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창세기26:5)는 구절에 근거하여, 아브라함도 미리 율법을 지켰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자격은 하례와 율법의 준행이라는 점에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의 양보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은 원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율법과 할례를 행한 본보기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대적자들의 논리는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을 믿고, 17장에서 할례를 행했으며, 26장에서는 율법을 해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하나님을 믿었으니, 이제 할례와 율법을 행할 차례다.’ 매우 성경적으로 보이는 이들의 논리를 바울은 어떻게 반박할 것입니까?
바울의 아브라함이야기 접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바울의 아브라함 이야기 사용이 대적자들의 사용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입니다. 창세기에 대한 빈틈없는 주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째,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창세기 자체의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성취와 완성이라는 문맥에서 새롭게 접근합니다. 즉, 다른 해석학적 준거점에서 출발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다메섹 체험을 통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자손에게 약속된 구원을 이미 성취하였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앗/자손입니다(3:16). 이제는 믿음과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그는 이 확신 속에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율법, 이스라엘 역사의 성취와 완성이라는 구속사적 사실 속에서 보면 아브라함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을 통해 의롭다하심을 받았고(6),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7).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주장은 창세기에 대한 객관적인 주해의 결과가 아닙니다. 창세기 15장 6절이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창세기 17장의 할례나 22장의 이삭 번제 사건이 더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는 대적자들의 예상 가능한 공격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예수가 과연 아브라함 이야기와 구약의 성취일 때만 참인 주장입니다. 예수라는 존재가 바울의 성경해석학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예수가 과연 누구냐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를 구약과 구속사의 성취자로 받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과연 예수가 그러한 분이라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 없이 옛 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복음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방인이 네 안에 복을 받으리라’(8; 창세기 12:3; 18:8; 22:18)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하신 복음이 성취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이 있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그의 복음에 참여합니다.
‘아브라함 안에’ 있는 유일한 자손 예수 그리스도(3:16)가 아브라함의 복에 먼저 참여하고,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복에 참여하는 구속사의 놀라운 전재를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을 떠났고 성령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기쁘게 고난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올바른 신학이 올바른 삶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올바른 신학은 성령의 역사도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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