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03-0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의미
갈라디아서 3장 19-29절
부모가 자녀에게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하나하나 도덕적인 사안들을 법으로 정해두고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정죄하면 그것을 잘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이 법으로 인해 부모는 아이들을 정죄하고, 아이들은 그 법 아래에서 곧 고통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아직 도덕이나 윤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법을 지킬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이들과 함께 이 도덕이 왜 필요한지를 나누고, 또 도덕의 정신을 가르치고, 지킬 수 없는 아이들을 보호하며 가르치면, 그것을 자신들에게 왜 필요한지, 왜 지켜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지만, 조금씩 지켜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것이 바로 율법(律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 왜 있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겠습니까? 본문은 은혜와 율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준수가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왜 율법을 주셨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처음부터 율법이 생명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구속사 속에서 한시적인 목적을 위해 주셨음을 주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된 생명과 의로움의 유업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차별 없이 주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19-22)
사람들은 혼돈을 머금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하고, 선악의 기준을 제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런 기능을 합니다. 율법 앞에 설 때, 자신이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지, 죄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19-22)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게 속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의 진정한 본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을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다른 것으로 그 근거를 삼을 수 없습니다. 만약 십자가를 약화시키고 무효화시킨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구약은 율법을 통하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율법은 왜 필요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무엇이냐?’라는 주제 아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여러 명제들을 쏟아냅니다.
(1) 죄를 깨달게 한 율법(19)
사도 바울은 율법이 구속사가 진행되는 중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즉 ‘범법함 때문에’(19) 더해졌다고 말합니다. 즉 ‘범법함 때문에’라는 의미는 ‘범죄하였다는 것을 알도록’, 또는 ‘범죄함에서 돌이키도록’이라 뜻입니다. 이는 율법의 일반적 기능을 내포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오히려 그 범법함의 증가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회심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 율법의 기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 중보자를 통한 율법(19)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천사들을 통해 중보자, 즉 모세의 손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를 통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개입되었다는 인식은 사도행전 7장 53절과 히브리서 2장 2절에도 등장합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사도행전 7:53)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히브리서 2:2)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들을 통해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4장 1-3절, 8-11절의 문맥에서 율법이 지니는 한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3) 한계성 있는 율법(19)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 즉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만 허락되었습니다. 이는 율법의 한시성(限時性)을 분명히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4) 생명이 없는 율법(21)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처음부터 율법은 생명을 주기 위해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의로움을 율법을 통해 주셨을 것입니다. 율법은 생명과 의로움을 주기 위해 복음과 경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반대하거나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시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5)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22)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 즉 ‘그리스도의 믿음(또는 신실함)’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개역개정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이라고 번역했어야 합니다.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6) 제한적인 율법(21)
성경은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어서 은혜 아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문맥에서 ‘율법’과 사실상 유사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율법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범법함을 증가시켰습니다(19)는 이해와도 상통합니다.
그러면 20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개역개정의 번역대로 ‘중재자는 한 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번역이 다수의 의견입니다. 중재자인 모세가 천사들과 이스라엘 백성 두 편 사이에서 중재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재차 확인하려 하는 것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천사를 통해 주어졌다(19)는 사실과 모든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즉 율법의 한계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20). 즉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요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은 다른 방법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든 민족의 구원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포함해서 율법 준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이 주장한 것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정죄 받은 모든 사람은 이제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율법으로 구원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방법(23-25)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능력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가능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이 미치기 전까지는 모두 율법 아래 갇히고 매어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 대해 어쩔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할 뿐이었습니다.
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23-25)
율법은 인간 자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그 율법의 저주와 굴례에서 자신을 건져 줄 다른 누군가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율법의 저주를 해결하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함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자를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해 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1) 율법 아래 갇힘(23)
사도 바울은 19절과 22절을 되풀이해서 표현합니다(23).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갇혀 있었던’ 시기는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의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 백성이 율법 아래 살던 기간을, 다메섹 이후의 관점에서 묘사한 표현입니다.
추가되는 결정적인 표현은 ‘믿음의 도래’인데,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23)으로 시작해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로 끝냅니다. 이는 ‘믿음’이 어떤 인물이나 사건인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믿음’은 원어로 ‘피스티스(πιστις)’인데, 그 앞에 정관사가 있는 점을 고려해, 직전의 피스티스, 즉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특정하여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율법 아래에 놓였다’는 의미로 정리됩니다.
(2) 초등교사가 된 율법(24)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비유가 24절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인의 자녀가 장성할 때까지 그를 맡아 잠시 보호하는 ‘훈육교사’의 관습을 통해 설명합니다. 율법은 훈육교사처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우리를 맡아 보호하셨습니다. 결국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됩니다.
(3) 율법에서 벗어남(25)
사도 바울은 다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율법의 한시성을 강조합니다. ‘그 믿음’, 즉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신 이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의 율법 아래에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한 유업(26-29)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민족이 차별의 담이 하물어졌습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이요,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망 없는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소식입니다.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6-29)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함을 알게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얻은 유업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됨(26)
이 단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지는 의미에 집중합니다. 바울 서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연합 사상은 본문에서처럼 ‘그리스도 안에’(26),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음’, ‘그리스도로 옷 입음’(27), ‘그리스도에게 속함’(29) 등의 어구로 표현됩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과히 바울신학의 중심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속사 속에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으로 아브라함 자손에게 약속된 모든 복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그 은총들은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은 3장 13절에서 성령의 약속을 언급합니다. 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2장 17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가 시신 삶을 살아갑니다.
(2) 그리스도와 살아감(27)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다’(27)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상태를 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의 실제적으로 있던 세례의식을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이 표현은 ‘어떤 사람의 특징, 성격, 생각을 모방하여 그 사람처럼 되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성품, 생각, 행동을 본받고 닮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같이 동일한 고백입니다.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3) 차별이 없음(28)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하여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자녀된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야말로 인종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서 하나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4) 아브라함의 자손(29)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29). ‘그리스도의 것’ 혹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 자손이요 약속을 이를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뿐만 아니라,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이 하나의 교회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는 메시지는 당시의 사회적 질서와 관습을 생각할 때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이제 율법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름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이제는 옛전 생활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본 받아 살아가며,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요구가 구원의 조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도 차별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제는 율법을 그 정체성으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정체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확인됩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살아가며 종노릇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아니라 주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사로 남을 판단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서 하나된 교회 공동체, 하나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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