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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4-02)


바울의 권면

갈라디아서 4장 12-20절


‘지도자’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지도자는 몸소 본을 보이는 사람만큼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없습니다. 명확한 증거를 가진 증인만큼 겁날 것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사역에는 지도자가 본을 보이고 성도들은 그 삶을 본받는 아름다운 조화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바란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직접적인 권면의 단락을 시작합니다. 처음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성도들이 그를 환대한 것을 회상하며, 바울로부터 분리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시도를 비판합니다. 성도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나를 본 받는 자 되라(12a)

예수님의 희생을 본 받아 바울도 유대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다.

12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12a)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이성적신 측면에서 맹렬한 논박을 하였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형제’로 부르면서 그들의 태도를 변경시킬 것을 정서적인 측면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되어서 그들을 섬겼던 지난 시절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와 같이 되라’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와 같이 되라’는 권면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 권면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이란 말씀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안디옥 사건(2:11-14)에서 이미 암시되었듯이, 이방인들과 하나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먼저 이방인처럼 되었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9장 19-22절에서 소개되는 바울의 선교원칙과도 부합합니다. 율법 없는 자들을 얻기 위하여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린도전서 9:21)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처럼 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가족으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이란 말은 ‘내가 복음을 따라 살았은즉’이란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는 말은 우선 ‘너희도 복음을 따라 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1장 11-2장 21절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된 바울의 삶을 자전적 어조로 보도해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즉,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특별한 열심이 있는 자였으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2:19)과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게 된 것(2:20)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인칭 고백은 서신의 결론인 6장 14-17절에서도 다시 한 번 절정에 이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1장 11절-2장 11절에 나타난 자서전적 고백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 변호하려는 목적이 있겠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된 삶의 모델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결국 ‘나와 같이 되라’는 명령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너희를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의 신실함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가라는 명령으로 풀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교회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변화된 바울 자신처럼 말입니다.

 

환대했던 갈라디아 교인들(12b-16)

현재 우리 신앙의 모습이 어떠한가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신앙의 모습이 어떠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믿음, 날마다 성장하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을 살펴보면 환경에 따라 변질된 믿음이었습니다.

12…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2b-16)

복음은 율법의 영원한 요구인 참된 사랑을 이루는 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복음만이 참된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해 율법을 완성합니다.

(1) 연약함을 통해 전한 복음(13)

이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전한 과정을 설명합니다. ‘육체의 약함’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13)는 말은, 육체의 약함으로 인해 갈라디아 시방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계획보다 더 오랜 기간 그 지방에 머물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육체의 약함’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도 ‘육체의 가시’를 언급하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다메섹 사건 이후 3일간 보지 못한 뒤 시력의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고 추측합니다. 아울러 선교 여행 중에 겪은 육체적, 정신적 핍박에 노출된 결과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2) 환대했던 갈라디아 교인들(14-1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자신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의 육체적 연약함이 눈과 관련된 것이었을 수 있다는 추측에 힘을 보탭니다. 이러한 육신의 질병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환대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육신의 질병은 악한 귀신의 역사라고 여겼다는 점에서 바울의 질병은 그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13).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않았습니다(13).

오히려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바울은 회상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접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인한 진정한 삶의 변화와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 대한 감사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3:2)는 점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답답한 15절 서두에서 ‘너희에게 있었던 복음으로 인한) 행복/기쁨이 어디로 갔느냐?’라고 질문합니다. 복음 전도자인 바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특별했습니다(15b).

(3) 불편한 관계(16)

지금은 오히려 바울이 ‘참된 말을 하므로’ 그들의 원수가 된 형국입니다(16).

 

거짓 교사들의 의도(17-18)

복을 따르는 것이 참된 성숙의 길입니다. 복음만이 죄인을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이 사랑을 드러냅니다. 복음을 믿을 때 복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복음은 참된 아비의 마음을 갖게 하는 영적 성숙의 길입니다. 복음에서 떠나는 사람은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성숙한 성도가 됩니다.  

17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7-18)

복음으로 주님의 자기 부인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성릐 모든 존귀와 영광을 버리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가장 낮은 곳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복음만이 자기를 위한 열심의 한계를 넘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1) 바울과 분리시키려는 거짓 교사들(17)

사도 바울은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열심을 품는 것에 다른 동기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켜 그들을 향하여 열심을 품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17).

먼저 바울의 선교 여정을 뒤따라 다니며 이방인 성도들에게 율법을 부과하려 했던 거짓 선생들은 바울의 복음에서 ‘율법’이 결여되었다는 확신 아래,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이방인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하려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열심을 품다’라는 의미의 동사 ‘젤로우’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설명할 때 주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들에게 열심을 품게 한다는 것은 결국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게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노리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은 유대교가 초기 기독교 운동을 어느 정도 용인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5:34-39). 즉, 할례나 정결법, 안식법, 음식법과 같은 유대교의 핵심적인 표지들을 지키는 이상 다양한 종파들에 대해서 용인할 의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사건에서처럼 인방인과 식사 교제를 희생하더라도 주류 유대교와의 관계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부과할 수만 있다면 주류 유대교로부터 더욱 인정을 받을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2) 잘못된 열심을 품은 거짓 교사들(18)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5:11)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의 대적자들이 이방인들에게 할레를 전하고 율법에 열심을 내게 한 것은 결국 자신들이 동족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동기에서 나왔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동기가 온전하다면, 서로를 향하여 열심을 품는 것은 언제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18).

 

다시 돌아설 것을 요구(19-20)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르는 삶은 그저 주님이 좋아서 따르기보다 목적의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은 앞서지만 실제적인 준비가 덜 갖춰졌다고 판단되면, 열의를 가라앉히고 기도하며 필요를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현재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지 살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이라면 결단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19-20)

복음을 떠난 갈라디아 성도들은 처음부터 다시 돌봐야 할 영적 어린 아이가 되었지만, 바울은 복음 가운데 그들을 위해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복음에서 떠나는 사람은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성숙한 자가 됩니다.

(1) 다시 수고해야 함(19)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자녀’의 이미지는 곧이어 ‘해산하는 수고’라는 단어로 이어집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낳은 영적인 자녀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그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헬라어 ‘오디노(ὠδίνω)’는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그들을 위한 해산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의 고통은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형성될 때까지’입니다. 이 말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아이가 태어나야 끝납니다. 즉,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도의 태어남과 동일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2) 안타까운 교인들(20)

편지를 쓰고 당시에도 바울은 당장에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나 그들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을 토로합니다(20). 그만큼 복음의 진리를 떠나 할례와 율법을 채택한 그들의 결정이 바울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성도들이 바른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복음도 여전하고 바울도 여전한데, 다만 갈라디아 교인들은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간절히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기를 바랐고 있었습니다. 우리 속한 공동체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지도자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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