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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4-03)


자유인인 그리스도인

갈라디아서 4장 21-31절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진리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거라고 착각합니다. 자기 하나도 다스리기 힘든 미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혼자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왜 예수님이 오셨겠습니까? 왜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했겠습니까? 구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율법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들이라는 점을 재확인합니다. 사라와 하갈의 아들 이야기를 통해 ‘약속과 율법’을 대조하고 ‘성령과 육체’의 대립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누가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을 참 후손인지 밝힙니다. 비록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하지만, 결국에는 성령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만이 유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21-23)

불신앙의 세계에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심할 때는 잠시라도 현실에 순흥하려는 태도를 취하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태도조차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1-23)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바울이 거론하기 전에 대적자들이 먼저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할례와 함께 이삭에게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현혹되어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갈라디아서의 중심사상을 체계적으로 교리를 마무리하면서, 명확히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친숙한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해서 권면합니다.

(1) 율법의 의미를 청종(21)

사도 바울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소재는 자주 사용한 성경 본문 중 하나입니다. 특히 약속의 자녀에 대한 소재로서 적합한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을 통해서만 진정한 구원의 방편이요 하나님 백성의 표지임을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한 사람들은 바울의 대적자들뿐만 아니라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옛 언약의 체계 속에 머물고자 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직까지 체계적인 신앙이 정립되지 못하고 초보적인 상황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이 서신을 읽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에 집중합니다. 그는 당시에 회당에서 랍비나 선생들이 청중들에게 성경을 낭독하기 전에 집중하도록 환기시키기는 방법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두 아들(22-23)

사도 바울은 율법을 따라 가려는 자들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정체성을 통해 설명합니다. 전자는 육체를 통해 태어났지만, 후자는 하나님 약속을 따라서 났습니다.

① 육신을 따라 난 이스마엘

먼저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은 하갈의 아들에 빗댈 수 있는 종의 언약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이 그 옛 언약을 대표합니다. 율법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② 약속을 따라 난 이삭

반면에 이삭은 사라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이삭처럼 자유인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이삭처럼 자유인의 자녀입니다. 그들의 본거지는 이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인 어머니에게서 난 이삭처럼 하늘의 예루살렘으로부터 태어난 자유인들입니다.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문제는 누가 그 약속과 자유를 소유한 이삭의 후손인가 입니다.

 

사라와 하갈에 대한 비유적 해석(24-26)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당시에만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대에 숨겨진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그 숨겨진 영적인 교훈을 찾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 또한 색다른 기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대표적인 두 아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영적 교훈이 있었습니다.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4-26)

율법주의를 이겨 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은혜로 모든 죄와 사망의 종의 자리에서 벗어났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유자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언약을 상징한 두 여인(24a)

본 단락에서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사라-하갈 이야기 해석이 알레고리적 해석의 결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를 놓고 오랜 토론이 있어 왔습니다. 우선 사라-하갈 이야기가 동시대 유대인들이 알레고리 해석의 주요 재료로 사용한 성경본문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2) 종노릇할 하갈의 자녀(24b-25)

바울의 구약 사용을 이해할 때, 그가 1세기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다양한 해석 방법을 공유하였다는 점을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이 미드라쉬의 일종인 ‘원자화’ 해석 방법을 사용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과 신약 저자들의 구약해석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해석의 준거점이었습니다. 사라-하갈 이야기 이해의 결정적인 준거점도 창세기의 원래 문맥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완성된 구원,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외롭다함 받게 되었다는 새로운 틀 속에 사라-하갈 이야기를 재위치 시킨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용된 방법이 알레고리입니다. 사라와 하갈은 각각 새언약과 옛언약에 대한 상징입니다(24).

역사적으로도 몸종이었던 하갈을 바울은 시내산과 연결시키고 나아가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연결시킵니다. 그의 자녀들은 모두 종입니다. 반면, 자유한 사람들의 어머니가 됩니다.

(3) 자유자인 사라의 자녀(26)

바울의 대적자들은 틀림없이 자유자의 자녀요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그의 육신적 후손인 유대인과 그들이 시내산에서 받을 율법과 연결시켰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약속, 유대인, 시내산, 율법, 자유는 하나의 언약 체계 속에서 편안하게 어울립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주장이 (그 자체 내에서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믿음이 오기 전까지만’이라는 것입니다(3:23). 그리스도는 약속-율법-자유의 연결고리를 끊으셨습니다. ‘약속-자유’라는 새롭고도 보편적인 연결고리를 만드셨슨비다.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킨 새언약의 체계 속에서 볼 때는, 이방인에게까지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지금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야말로 이방인들을 ‘종’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복을 이미 받은 자들로서 사라를 ‘우리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유업을 누릴 약속의 자녀(27-28)

하나님만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자신의 재능과 실력이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해 나가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7-28)

사도 바울은 이사야 54장 1-2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이사야서 54:1-2)

여기에서 ‘잉태하지 못한 자’는 일차적으로 사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의 ‘홀로 사는 자’에 대한 원래 표현은 ‘황폐한 여인’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남편 없는 여인이 남편 있는 여인보다 자녀가 더 많은 기이한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남편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5).

남편 있는 여인은 육신의 자녀를 낳을 뿐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 준 여인은 약속의 자녀를 낳습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사라는 잉태치 못하였으나, 결국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낳았고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해 열방으로부터 수많은 약속의 자녀들을 낳은 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사야서 54장 1-2절이 ‘고난 받는 종’의 노래(이사야 52:13-53:12)에 뒤이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 종은 땅에서 고난을 받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으나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때, 그 종이야말로 많은 의로운 후손들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54장 1-2절에서 이 종은 ‘잉태치 못하였으나 많은 자손을 본 여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의도하였습니까?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잉태치 못한 여인’이 보게 될 약속이 자녀임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할례와 율법을 준수해야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손이 된다는 오경 원래의 역사적 문맥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유업을 누릴 약속의 자녀(29-31)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을 때,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현실 앞에 탄식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종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현재 고난에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29-31)

교회는 교회 안에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지를 잘 살피고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이삭과 함께 두고 문제를 개선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어미인 여종까지 모두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1) 성령을 받은 자가 핍박(29)

사도 바울은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대조합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3장과 4장에서 아브라함의 자녀된 징표로 바울이 줄곧 강조해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자 사라의 요구를 따라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내보내라 명령하신 창세기 21장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지금도 육체를 따라난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핍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으로 난 자’가 누구인지가 재정의 되었을 뿐입니다.

(2) 여종의 아들은 유업을 나누지 못함(30)

사도 바울은 창세기 21장 30절을 빌려 ‘여종과 그 아들들을 내쫓으라’고 명합니다. 율법을 부과하려는 유대파 그리스도인 거짓 선생들을 내쫓으라는 직접인적 명령인 셈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주신 약속을 함께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성령 받는 자유자의 자녀(31)

이 단락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갈라이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그들이야말로 약속의 자녀, 자유자의 자녀임을 재확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 속의 아이를 희롱했듯이(창 21:90), 바울 당시에도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이 성령을 따라 난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29). 하지만 그들은 약속의 자녀들이 누리는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 은혜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만이 유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사실에 대해,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게 될 유업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계보를 이은 것은 육체의 생각과 힘으로 낳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믿음과 약속을 따라 낳은 이삭입니다. 이삭은 장자가 아니었지만 언약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보다 먼저 주신 약속을 따라 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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