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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5-02)


육체의 일과 성령의 사역

갈라디아서 5장 13-26절


세상적인 관점에서 죄는 눈에 보이도록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상해를 입혔는지 여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죄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적 삶으라고 말합니다. 그렀다면, 영생은 이타적인 삶입니다. 타인을 섬기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열매가 투기하고 노엽게 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의 핵심은 바로 회생적인 사랑입니다. 성령의 사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율법에서 자유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놓인 삶은 잘못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방종의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율법으로부터는 자유 하였으나 오히려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으로 종노릇(13-15)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사망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성도의 자유는 섬김을 위한 자유입니다. 스스로 주장하는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사랑을 통해서 주어지는 자유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섬기는 사랑이었고,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법이었습니다.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3-1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옛 삶에서 해방시켜 의의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신 데는 위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빨리 망각한 채 세상적인 개념의 자유로 돌아갑니다.

(1) 자유를 위한 부르심(13)

①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반복적인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유한 자유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게 강조하게 된 이유는 복음을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된 성도들의 궁극적인 자유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중심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②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바울은 ‘그러나 그 자유로 유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란 부분을 직역하면, ‘너희의 자유를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삼지 바꾸지 말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를 방종의 도약대로 삼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는 곧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이 ‘새 언약’을 통해 자유를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만큼 율법적 의를 내세워 육체의 할례를 중시하는 율법주의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벗어남을 기회로 육체적 쾌락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통해 영원한 자유를 소유한 성도의 절제된 생활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강조되는 사상입니다(고린도후서 7:1).

③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본 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13)와 ‘멸망할까 조심하라’(15)고 두 명령어가 직접적 권면 단락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유’(13)와 ‘종’의 이미지는 5장 앞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과 같이 한 민족에게 제한된 법을 지키는 것을 ‘종의 멍에’를 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5:1). 이제 13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지니는 자유의 속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최고의 섭리인 복음을 이해하고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자유’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그 자유는 ‘육체의 기회’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13).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그 ‘자유’는 타인을 사랑하게 하고 타인을 섬기는 종이 되게 합니다.(13).

(2) 율법의 완성(14)

바로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율법 전체를 ‘성취’하는 삶이란 점을 재확인해줍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 ‘페플레로타이(πεπληρωται)’가 완료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나셔서(4:4) 우리를 대표하여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단번에 성취되었습니다. 그 핵심은 이웃을 제가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사랑의 삶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반하는 삶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3) 분쟁의 결과(15)

사도 바울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고 한 마디 덧붙입니다. ‘자유’를 ‘방종’으로 변질되면 교회는 결코 ‘사랑의 섬김(종노릇)’에 대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서로 물고 뜯는 현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경고합니다. 교회 안에서 싸움과 다툼은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영적 자살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내면의 영적 전쟁(16-18)

인간의 육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들은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맺은 모습은 곧 있을 심판대 앞에서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결과는 영생을 거두는 삶으로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16-18)

사도 바울은 본문의 두 번째 주제인,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에 대해 거론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는 분명히 분쟁과 다툼을 비롯한 여러 윤리적 문제들이 있었음을 암시해줍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입된 거짓 선생들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완전한 자격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과 행동 방식 모두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그러한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성령입니다.

(1) 성령을 따라 행해야함(16)

본문은 성도들 안에 ‘육체의 소욕’이 있고 ‘성령의 소욕’이 두 가지가 공존합니다. 다음 절에 설명하겠지만, 이 둘은 서로를 거슬리고 언제나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정상적인 내면에 일어나는 영적 상태입니다. 절대로 비정상이 아닙니다. 즉 육체와 성령의 전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영적 전쟁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선택하고 행해야 하느냐?’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Live by the Spirit)”고 권고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영적 전쟁에서 육체의 소욕,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지도, 여러분의 결심도 결코 이 영역에 있어서 여러분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2) 육체 대 성령(17)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르는 삶과 ‘육체’를 따르는 삶을 대조하며 설명합니다(17).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를 거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성도의 현재적 삶이 이 두 가지 소욕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대가 아직 지속되고 있는 한가운데에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와 종말의 영인 성령이 앞당겨 침투함으로써 생겨난 현상입니다.

바울신학 속에서 ‘성령’과 ‘육체’의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은 종말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으로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원리입니다. 반면에 ‘육체’는 반대로 세상적인 삶의 원리를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없이 삶을 대변합니다. 그래서 ‘육체’는 바울서신 속에서 종종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것’(16)은 당연합니다.

(3) 성령 안에서 율법(18)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행동방식 모두를 규정하는 대답입니다.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유대인의 율법을 통해 정체성과 행동방식을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소욕’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19-23)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욕심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예수님의 종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닫고 육신의 요구에 굴복할 때, 자신은 물로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할지라도 성령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질서와 이기심과 진리에 대한 무관심뿐입니다.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19-23)

전쟁터에서 양편의 군대를 묘사하듯이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구분된 선악을 나란히 놓으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1) 육체의 열매(19-21)

사도 바울은 육체, 곧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성적인 타락, 우상숭배 행위, 내면의 미움과 분노, 외적인 방탕, 공동체의 분열 등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반지 못한다’(21)고 잘라 말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전에도 누누이 경고했던 바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신학이 처음부터 ‘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 선교사들을 인식하며 줄곧 공격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율법의 행위’이지 불특정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또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행해서는 육체를 따르는 삶의 방식 전체를 공격합니다. 믿음에 합당한 선한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열매(22-23)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합니다. 다만 이곳에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간략하게 하나씩 개요만 살펴보겠습니다.

① 사랑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 중 가장 먼저 ‘사랑’이 언급된다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온 율법이 사랑의 계명에서 성취되었다는 이 사랑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② 희락

‘희락’은 내면이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③ 화평

‘화평’ 또는 ‘평화’는 단순히 고통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샬롬’ 개념이 그러하듯,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 정의, 행복이 구현되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④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부정적인 상황을 견디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⑤ 자비와 양선

‘자비’와 ‘양선’은 다소 중복되는 성령의 열매로서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행위들입니다.

⑥ 충성

‘충성’은 헬라어 피스티스()에 대한 번역으로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하여 ‘신실함’을 다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⑦ 온유

‘온유’는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공격적이지 않고 겸손하며 사려 깊은 내면의 상태입니다.

⑧ 절제

마지막으로 ‘절제(節制)’는 욕구가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를 알고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에 반하는 어떠한 율법도 없다’고 말합니다. 온 율법이 사랑의 계명으로 성취되었다는 말씀을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이야말로 율법이 지향해 온 삶의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24-26)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들, 즉 이제 자기가 왕이던 나라를 버리고 예수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삶으로 전환한 자들에게 성령님은 내주하십니다. 이제 그들의 죽은 옛 자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하여 그들로 예수님의 삶에서 맺혔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4-26)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복음의 진리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이미 ‘내가 그리스도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라디아서 2:20)고 선언했습니다. 이 표현은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표현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2:20)는 수동적인 표현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24)는 능동적 표현으로 바뀌었습니다. 못 박은 대상은 ‘육체와 그것에 속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이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현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이 세대 가운데 있으면서도, 이 세대의 운영원리인 ‘육체’와 그것의 특징인 정욕과 탐석을 따라 살지 않고, 다음 세대의 새로운 창조를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 은총을 한마디로 ‘성령으로 살게 되었다’(25)고 표현합니다. 그 성령을 따라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살라’(25)는 것입니다. 자만하며 서로를 충동질하는 것(16) 성령을 따라 사는 삶과 모순됩니다. 그것은 이미 못 박은 ‘육체’의 삶으로 돌아가는 격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고 자유로운 성도인지 알고 싶습니까? 성령으로 사는지 또는, 육체로 사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당신의 삶 속에 나타난 열매, 성품에 나타나는 열매를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데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을 것입니다. 반대로 육체를 따라 살면 그에 따른 열매가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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