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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6-01)


사랑의 실천에 대한 권면

갈라디아서 6장 1-10절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기능은 하나님을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더욱 율법을 사랑하고 그 속애 담긴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여 율법이 주신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울은 어떻게 묘사하겠습니까?

 

서신을 마무리하기 전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해 여러 가지 윤리적 권면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을 살필 뿐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르치는 자를 지원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며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재차 강조합니다.

 

서로 짐을 지라는 권면(1-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의미는 은혜로 구원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도록 가능하게 해주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해 도우면서 살아갑니다.

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1-2)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과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람을 그 열매를 가지고 비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에 기록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교훈은 비록 실천적 권면이기는 하나 역시 이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5:16-26). 그러나 이어지는 본문은 갈라디아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기술한 부분으로 교회 내 범죄자들과의 관계를 해소하고 원활한 교제를 권면한 것으로 본 서신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공동체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야 할지에 대해서 다룹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지칭하면서 이 단락을 이전 단락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킵니다. 분쟁에 대한 화해를 권면했던 바울은 이제 더욱 구체적으로 성도가 지향해야 할 생활 규범을 제시합니다.

(1)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음(1a)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는지에 대해 다룹니다.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범죄는 고의적인 범죄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혹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불법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신령한 너희’라고 지칭한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24)이란 표현과 같은 의미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에게 연약함으로 범죄한 자들에 대해 배척하지 말고, ‘온유한 심정으로 그를 회복시켜주라’는 것이 바울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이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건면하여 범죄한 자로 하여금 그 죄 가운데서 돌이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5:32).

(2) 유혹을 당하지 않도록(1b)

그렇게 범죄한 사람을 세워주면서 ‘자신도 유혹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다른 사람이 범죄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책망하는데 관심을 갖습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당시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두드러진 태도였습니다(요한복음 8:3).

하지만 성도들은 그들과 달리 범죄한 자들을 권면하고 또한 바르게 세우는데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죄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존재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의 행동을 더욱 자중하고 실족하지 않도록 스스로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취할 삶의 태도이기 떄문입니다.

(3) 서로 자기 짐을 지라(2)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지라’고 명령합니다. 이곳에서 ‘짐’은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일’(마태복음 20:12)을 뜻합니다. 계속적으로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 즉 범죄함으로 겪게 되는 수고와 고통을 서로 같이 나누는데 힘쓰라는 권면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법’은 율법이나 계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은 이미 5장 14절에서 온 율법이 이웃 사랑의 명령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웃 사랑의 명령으로 성취된 율법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짐으로써 이웃 사랑의 명령을 성취하게 된다는 의미는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법이 이웃 사랑의 명령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바로 그 사랑의 정신으로 보여주신 모든 삶과 거기에 내포된 윤리적 명령들로 그리스도의 법을 확장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 동안 이웃이 될 수 없는 세리와 죄인들을 이웃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다시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의 신실함(2:16; 20)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연약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처럼 낮아지고 비움으로서 이웃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채워질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만하지 말라는 권면(3-5)

사람들을 평가할 때는 조심스럽게 살펴야 합니다. 쉽게 평가해서도 너무 율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타인의 경우에는 원석에서 순금을 만들어내듯 꼼꼼하게 살피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대충 쉽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반대로 행동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3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3-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 속에 있는 분쟁과 다툼을 의식하며 이미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 자만하지 말라’(5:26)고 권면했었습니다. 다시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허영과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는 사람 또는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1) 헛된 교만(3)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보면서, 허영과 자기 자랑에 빠지지는 일에 대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경고합니다. 특히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서 분쟁을 야기 시키고 또한 성도들을 이간질 시켰던 자칭 진리를 선포한다는 거짓 선생들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온유한 심령을 갖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이 교만입니다. 고린도전서 전반부(1-4장)에서 볼 수 있듯이, 명예와 수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권 속에 살던 당시의 이방인들에게 자기 자랑과 타인으로부터 받는 인정은 모든 공적인 삶의 목표처럼 여겨졌습니다. 심지어는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까지도 자기 자랑의 재료로 삼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주를 이룬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등에서 모두 교인들 간의 다툼과 분쟁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통해 의롭게 생각하여 행동하는 것에 대해 성경에서는 ‘스스로 속임이니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원어의 ‘프레나파타(ψρεναπατα)’는 ‘마음을 타락시킨다’는 뜻입니다. 교만한 자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의롭게 생각해서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기회를 상실하게 되어 멸망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또한 성경에서 자주 교훈하고 있습니다(잠언 16:18; 야보고서 4:6).

(2) 자기 점검(4)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활 속을 점검함으로 규모 있는 실제적인 삶을 살도록 권합니다. ‘점검하라’는 참과 거짓에 엄격하며 행동을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일을 참견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서 자랑거리를 찾는 나쁜 습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일을 점검하라고 명령했지만, 정작 그 점검의 기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가 말했던 ‘그리스도의 법’이나 ‘하나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자기를 점검하면’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점검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고 그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랑거리를 찾는 나쁜 습성(4)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외형적 행동을 연약하여 범죄하는 자들과 견주어 자랑거리로 내세웁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그런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일 분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는 사람은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그리스도의 법’에 비추는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악에서 승리하게 된 것에 대하여 자랑할 만한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고린도후서 1:12). 그것만 자랑합니다.

(3) 자기 짐을 지라(5)

사도 바울은 더 나가서 ‘각자 자기의 짐을 지라’(5)는 권면합니다. 이 권면은 ‘각자 자기의 일을 살피라’(4)는 명령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과 함께 자기의 짐도 져야 한 것입니다. 자기 일을 살피는 것이 자기 무거운 짐입니다.

이곳에서 ‘짐’은 군인들이 행군할 때 지는 군장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생활 속에서 개인 형편에 따라 담당해야 할 의무입니다.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함께 자기의 짐도 져야 하는데,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이 바로 자신의 ‘무거운 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얼마나 흔한지 모릅니다. 참 이웃 사랑은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기다림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서부터 역지사지가 가능합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신을 통해서 관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이웃 사랑입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성도는 각기 자기에게 맡겨진 일과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말고 성실히 수행하라는 신앙적 권면인 것입니다.

 

선을 행하며 살라는 권면(6-10)

교회는 크든 적든 사역자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큰 교회라고 많이 누리고 작은 교회라고 힘들어지면 공동체 사역은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자립하지 못한 작은 교회가 역부족일 때는 큰 교회에서 후원해서 서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가 공생하는 사역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사도 바울은 스승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바울 외에 다른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성도들에게 사례를 받는 목회자도 있지만, 순회 전도자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 대한 영적인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1) 가르치는 자와 함께(6)

사도 바울은 먼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분명히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눈여겨 볼 것은 갈라디아 교회들 속에 바울을 제외하고 소위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작위로 거짓 선생들까지를 포함하지 않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들과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좋은 것을 나누라’는 것은 곧 교사들에게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 자신에게도 물질적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그린도전서 9:12), 복음을 위해 그 권리를 희생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 권리를 희생하더라도 다른 말씀 사역자들을 위해서는 지원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선배 사역자 바울의 사랑 많은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심는 대로 거둔다(7-8)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7)는 이후에 따라올 경고의 내용을 소개하는 도입부입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든다’는 두 표현은 당시에 잘 알려진 격언입니다. 이러한 도입부과 격언들은 8절의 내용을 강조하는 기능을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보편적인 법칙은 성도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심는 데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은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그래서 세대의 특징인 ‘육체’ 곧 ‘죄악된 본성’을 위하여 심는 자는 결국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거둘 것입니다. 한편으로 ‘성령’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3-4)

주후 1세기경 회심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동족의 종교와 삶의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이웃들로부터 소외와 여러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처럼, 철저한 회심을 요구하는 진리일수록 버려야 할 과거의 삶의 방식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는 그것이 곧 썩지 않는 영원한 유업을 얻는 길이라는 확신을 전해줍니다.

(3) 낙심하지 말라(9-10)

거대한 제국 속에 흩어져 있는 조그만 가정 교회들이 제국의 억압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성령을 위하여 끊임없이 심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바울이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포기하지 말자’ 그리고 ‘선한 일을 하자’고 종용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이 일은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함께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말자’(9)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성령을 따라 심은 선행의 씨앗은 반드시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확신을 줍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이러한 선행을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욕하는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베풀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정들은 특별한 선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0).

거대한 제국 속에서 소수집단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견고한 신앙공동체와 그 속에서만 가능했을 진실한 교제와 나눔이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따라, 분쟁과 다툼을 멈추지 않는다면, 바울이 5장 21절에서 경고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요지입니다.


장신은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썩어서 없어질 가치가 아닌 영원히 남을 가치여야 합니다. 성령 안에 거하여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은 율법에 온기를 불어넣고 참 생명력을 갖게 하여, 율법의 본래 정신을 따라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믿음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만 율법은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법,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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