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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6-02)


예수 그리스도만 위한 성도의 삶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마치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어낸 성취처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 구속의 은혜, 그분의 나라의 영광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그분만을 나타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적으로 정리해서 강조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희석시켰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옛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창조가 결정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이 놀라운 은혜가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빌며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이기적인 목적(11-13)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제부터 삶의 우선순위를 예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다음 사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당신은 가장 사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해야 합니다.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11-13)

대적자들은 할례를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몸의 소욕을 죽이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았으니 그 욕망을 절제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의 할례를 자신들의 성과물로 자랑하고자 했습니다. 오로지 관심은 자기 자랑이었습니다.

(1) 바울의 친서(11)

바울 당시에 서신을 보낼 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말로하고 가까운 사람이 대신 기록하여 전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대서인(代書人)을 통해 편지를 작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마지막에 자신의 서명을 넣음으로써 그 편지의 진정성을 입증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친필 사인과 같은 역할 한다고 하겠습니다. 간혹 결론부에서 첨가하는 중요한 내용을 직접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바울은 본 절부터는 직접 친필로 쓰고 있습니다. 편지 전체가 자기 자신의 편지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서신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그의 이름을 도용해서 편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낼 수 없습니다. 동시에 바울의 편지가 바울의 견해가 분명하다는 것을 확실히 해주는 것입니다. 이 서신이 결론 부분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2) 잘못된 가르침의 동기(12-13)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격양된 모습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12-1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대적자들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사실상 반쪽짜리로 만들고, 혼합주의 신앙과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 믿음을 대단한 것으로 만든다면 은혜를 모르는 행동입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루는 삶,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중심 메시지를 상기시킵니다. 그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평가합니다. 본문의 ‘육체’는 다소 중립적입니다.

여기서는 이 세대에 속한 삶의 체계 전체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악한 속성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시작된 다음 세대의 삶이 아니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한다’는 표현은 ‘옛 세대의 삶의 체계 속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옛 세대에 속한 삶의 체계 중 하나가 유대교입니다. 그 유대교의 체계 속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려 하는 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목적절에서 바울은 그들의 동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전체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유대교의 주류 집단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한 셈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할례를 받은 그들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 베드로의 행동이 일관되지 못함(2:14)을 지적하면서 본문의 유사한 비판을 가합니다. 베드로 자신도 유대교 율법 속에서 일관되게 살지 않으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으로 살 것을 강요한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의 삶의 체계가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 이전에 거짓 교사들이 자신도 그 체계 속에서 일관되게 살지 않으면서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부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유대인화 함으로써 동족 유대인들을 향하여 자기의 자랑거리를 쌓으려 할 뿐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하여 하례와 율법을 부과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새로운 창조(14-16)

종종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그 사랑의 가치는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고도 남을 가치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한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십자가의 가치와 사랑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4-16)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이 육체, 곧 옛 세대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려고 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무엇을 자랑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는 이 자랑을 가장 강한 형태의 이중 부정문을 사용하여 전달합니다. ‘메 게노이토(μη γενοιτο)’라는 표현 자체만으로도 강한 표현인데 이중 부정문 형식을 빌려 강조의 의미를 더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 그 무엇이라도 자랑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14)라는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십자가 외에’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십자가’ 앞에 있는 전치사 ‘엔(εν)’의 의미를 살려 ‘십자가에 관한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삶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12-13절의 ‘육체’와 대조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그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는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고 그 앞의 ‘십자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후자가 조금 더 자연스럽습니다. 즉,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세상이 나에 대해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코스모스(κοσμος)’는 위의 ‘육체’와 유사한 개념으로, ‘세상’ 역시 하나님이 없는 삶의 체계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러한 하나님 없는 세상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표현은 ‘그와 함께 부활한다’는 표현과 합하여 옛 세대의 삶을 떠나 다음 세대의 삶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결국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이 악한 세대’(1:4)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였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음 세대의 삶을 시작하였음으로 ‘나 또한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힌다’라는 바울의 고백은 당연한 귀결입니다(14).

‘육체’와 ‘세상’으로 대변되는 이전 세대에서는 할례와 무할례의 구분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이미 살기 시작한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할례의 여부가 무의미합니다(15). 그것은 할례가 악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15)이라는 번역보다 ‘새로운 창조’가 더 낳은 번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신 것을 시작으로 그 새로운 창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에 속해 새로운 생명과 삶을 살아갈 것인지의 질문이 있을 뿐입니다.

16절의 ‘규례’는 ‘기준’ 혹은 ‘원칙’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습니다.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여 ‘이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기준은 14-15절의 내용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 기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어진 새로운 창조 속에서 살아가는가?’입니다. 바울은 ‘이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와 자비를 구합니다.

바울이 첨가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16) 이 이스라엘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갑자기 육신적 이스라엘에게도 평화와 자비를 신포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서신 전체를 통해서 바울이 다룬 핵심적인 질문은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는 곧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인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3:16절에서 그리스도를 유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규정한 바울은 서신 내내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야말로 약속의 자녀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로 서신을 끝내기 전에 바울은 이 짧은 한마디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이제 진정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마지막 인사(17-18)

마지막이라고 하면 괜히 섭섭해지고 슬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은 당사자의 진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동화는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편지는 다시 뵙길 원한다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생애 마지막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7-18)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기에 앞으로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수고로움을 주자 말라는 명령으로 편지를 마무리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편지와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 방법이고 바울의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17)는 말라고 합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 중 당한 여러 공격과 그 연장 선상에서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공격을 기억하게 합니다. 자기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성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 내세울 것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뿐이란 것입니다. ‘흔적’으로 번역된 원어 ‘스티그마(στιγμα)’는 몸에 새겨진 ‘노예의 표식’이나 ‘종교인들의 문신’을 일컫는 말로, 고대 사회의 관행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종의 표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스티그마’가 타인도 볼 수 있는 표식임을 생각해 볼 때,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많은 핍박과 그로 인해 얻은 육신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자신이 4장 13-14절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바울에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얻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빌면서 편지를 시작했던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6:18)을 빌며 편지를 끝맺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창조주요,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통해 결정적으로 계시되었음을 다시 한 번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정리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여러 가지 대안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사역을 위해서 율법이 있었고, 그분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 불타서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그와 동행한 흔적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출입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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