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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5)


직접 베드로를 책망했던 바울

갈라디아서 2장 11-21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으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라’ 등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최대 역설은 바로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다는 것’, ‘한 사람의 죽음으로 다른 죽음에서 살아남’,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음’ 등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인류가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인 우리와 율법의 존재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전적 회고로 시작해서 안디옥 사건을 언급으로 마무리 집니다. 이제 베드로가 실수하는데, 이 사실을 꾸짖을 만큼 사도로서 동등함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율법의 삶을 대체한다고 천명합니다. 이는 갈라디아서 전체에 걸쳐서 논증하려는 핵심 주장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위선으로 책망 받은 베드로(11-14)

지도자의 행동은 개인의 행동을 넘어서 대표하는 공동체의 행동이 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항상 신중히 행동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싫은 것도 바른 길을 가야합니다. 지도자의 위선적인 행동은 서로 신뢰를 파괴하고, 불신을 조장하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11-14)

앞에서 바울은 자기가 전했던 복음에 대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로부터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관계를 증명했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도 이방인 디도라는 사례를 통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종한 디도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구원이나 성화에 아무것도 더 해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모든 사건의 회고를 마무리 짖고 있습니다. 마지막 회고로부터 새로운 근거를 제시합니다. 더 신학적인 논쟁을 펼쳤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5:1-10)을 통해 더 확실히 사도들에게 복음과 사도로서 동등한 사실을 인정받았음을 증명합니다.

(1) 책망 받았던 베드로(11)

앞 단락에서도 거론했듯이, 사도 바울 일행은 잠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사도직과 복음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동등하고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방인 디도를 통해,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아무도 율법이나 할례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나 사람을 성화하는 일에 아무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바울은 베드로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나누여서 각자 사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구원에 대해 서로 같음을 확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베드로는 수리아 안디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초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일어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대박해가 시작되었고 사도들을 제외하고 그 많던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의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8:1). 각지로 흩어져서 비록 피난민의 처지였지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북쪽으로 베니게와 구브로 섬 그리고 안디옥 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사도행전 11:19). 이곳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가 머물면서 사역했는데, 너무 성장한 해서 혼자서 목회하기가 힘에 부쳤습니다. 그래서 다소에 있던 바울을 불러와서 함께 수많은 이방인 초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비아냥거리는 말로 ‘그리스도인’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1:25-26). 이방 교회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 했던 곳입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믿었던 사실과는 모순된 행동으로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책망이란 일반적으로 대등한 관계나 상하 관계이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루살렘 교회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모든 지역에서 베드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량감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베드로가 잘못되었을 때는 과감하게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대등한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울이 베드로에 대한 책망할 때, 무책임하게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만나서 베드로의 얼굴 앞에서 직접 책망했다고 소개합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바울보다 먼저 사도가 되었지만 그의 잘못된 행동은 사도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 책망을 받아야 할 이유(12-13)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 성도들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방인 지역인 안디옥에 방문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식사를 했던 것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식사를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식사 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을 먹느냐?’와 ‘누구와 먹느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해 주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을 통해 이방인 고넬료 회심 사건을 통해(사도행전 10:30-48),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이 온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돌변하여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려 식사 자리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사실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은 야고보가 보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의 파송을 빙자해 야고보의 이름을 팔았던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성도에 대한 결정을 했지만,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베드로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했고, 떠나 물러갔던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외식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정결법을 부과하려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유대인 정결법을 따라 이방인을 대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교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를 역행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나가서 외식(外飾)은 또 다시 주님을 부인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바나바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위선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방인에 대한 구원에 대해 혼돈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이방인 성도들에게는 정말 많은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이방인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정결법에서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결법의 종말적 성취라고 할 수 있는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는 새로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의 백성 되는 복음의 진리를 살아내는 모습입니다. 정결법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이 되는 아름다운 모습이 식탁 교제였습니다. 식탁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아름다운 복음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의 실수로 인해 자신에게 책망 받았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와 할례의 무의미함을 인정했던 베드로는 큰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3) 바울의 책망(14)

사도 바울 역시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했기 때문에, 늘 함께 참석하여 식사하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바울은 매우 황당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언행이 일관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공동체가 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보다 큰 문제는, 이 행동 때문에 사실상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곁으로는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의 문제로 보였지만, 은혜의 복음에 대한 싸움이었습니다.

① 바울의 책망

바울은 베드로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고 책망했습니다. 순간 주변 분위기는 매우 싸늘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눈치를 보며, 베드로의 입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향한 책망은 동종 사역자에 대한 질투심은 아니었고, 더더욱 바울의 즉흥적인 기질로 인한 책망도 아니었습니다. 연약한 초대기독교의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 자리에서는 조용히 넘어가고 나중에 조용히 만나서 개인적으로 책망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공동체의 평화와 부흥’이 아니라, 진정한 ‘바른 은혜의 복음’이었습니다. 바른 진리가 없는 기독교는 어떤 상태도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기 때문입니다.

② 베드로의 반응

베드로의 반응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의 반응에 따라 초대교회는 분열할 수 있는 위기가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결과가 나타나있지 않았지만, 베드로의 서신에서 그는 어떻게 받아 들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A.D. 65년에 기록한 베드로후서에서 바울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베드로후서 3:15b)

베드로는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으로 짐작하건데, 그만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울의 책망을 부정적으로 받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 들렸습니다. 바울의 책망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벌려놓은 사건이 아니라 더욱 견고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③ 결과

바울의 책망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많은 사람들과 베드로 앞에서 책망하지 않았다면, 당시 많은 교회들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분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복음의 진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병이나 신분 그리고 출신 구별이 없이 모두가 동등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행동을 통해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바울의 행동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을 위해 평생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이신칭의(15-16)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신 사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은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도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함만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5-16)

사도 바울은 베드로 책망에 대한 이야기를 근거로 좀 더 자세한 신학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이 신학적인 내용은 바울과 베드로가 모두 동일하게 인정한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인정한 것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1) 전통적인 유대인 생각(15)

사도 바울은 전통적인 유대인 관점에서 사람들을 구분해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소개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출생에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나머지 ‘이방인들’을 ‘죄인’이라는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죄인’이라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도 없고 또한 율법이 없기 때문에 준수할 수 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해 부른 것은 유대인의 특권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로서 알고 있듯이’라는 뜻으로 설명을 이어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이분적인 잘못된 생각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결국 자신들을 스스로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아무런 가치 없는 헛된 생각입니다. 이것을 반증하고자 바울은 유대인의 신분을 언급했던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신칭의(16)

바울은 회심 전에 다른 유대인들과 동일한 생각으로 종교적인 열심도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그동안 자신이 믿었던 믿음과는 다른 정반대 주장을 합니다.

먼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어느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것은 더 이상 율법이 옳지 않고,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를 받아 죽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율법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주어진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과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16)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법, 정결법, 음식법이든 다른 어떤 율법의 규정이든,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이제 누구도 하나님과 정상적인 언약적 관계를 누리지 못합니다.

즉, 의로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의로움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실패했지만, 유일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예수는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실함(피스티스(πιστις)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능동적으로 아버지의 모든 뜻에 순종하셨고, 수동적으로는 십자가의 소명을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였던 예수님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3:16)입니다. 그의 신실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언약의 복과 생명, 의로움을 그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약속들을 함께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에만 근거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언약적 산실함이 먼저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근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우리 칭의의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통해 의롭다 함 받는 것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의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17-18)

‘의로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정체성이자 생존의 근거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의로움이란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거나 극한 절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교회 안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삶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7-18)

계속해서 바울은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합니다.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더 이상 사람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행한 의로움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런 ‘이신칭의’의 교리는 사람들을 방종(放縱)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1) 하수인으로 만드는 것(17)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에서 떠나면서, 이방인들과 식사하던 유대인들이 정결법을 어긴 죄인들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잘못도 아닙니다.

(2) 스스로 죄인으로 만든 것(18)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대변하는 주장들을 반박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신학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 의로움을 얻기 위해 유대인의 율법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안디옥 교회에서 베드로가 처한 상황에 해당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주어지는 의로움을 장려하다가, 돌연 정결법을 어겨 죄인이 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의로움을 주신 그리스도의 책임이 아닙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사적 ‘나’를 통원해 다시 베드로의 딜레마를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이미 헐어버린 유대인의 정결법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은혜의 삶(19-21)

믿음은 외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 사람의 수고로 의롭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끝까지 율법을 통한 구원의 길을 고집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욕보이는 것이 됩니다.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19-21)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을 대변하는 주장들, 대적자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1) 율법은 죽고 하나님으로 살아남(19)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와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대적자들을 결정적으로 반박합니다. 그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주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은 더 이상 율법의 요구와 상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말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율법이 더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에서 자유롭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성취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성도 안에 내주하심(20)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심을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이 주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즉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은 것은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규정하는 특수한 형태의 죽음, 나무에 달리는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규정하는 하나님 백성의 범위 밖으로 쫓겨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그리스도가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판명 났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율법이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다.)

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바울 역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이 삶은 아무런 제약이 없는 삶입니까? 20절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 구절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율법 준수보다 더 강력한 새로운 윤리적 동기, 삶이 목표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내 안에 그리스고가 사시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의 피스티스, 즉 그의 믿음/신실하심을나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할례 같은 조건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는 은혜를 붙잡았습니다(21).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예수께서 돌아가셨고, 바울은 그와 함께 죽어 율법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19-20).

(3)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의로움(21)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믿음/ 신실하심을 지금 여기에서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오히려 바울이 하나님 은혜를 폐하려 한다고 공격했을 것입니다(21). 그들에게 하나님 은혜의 회고의 표현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폭발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그 의로움과 은혜를 율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과연 헛되이 죽으신 셈입니다(21).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기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의를 측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종교적인 행위로 신앙을 대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무적인 신앙에 머물 것이 아니라 과거에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했던 자신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당신을 의롭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살리신 은혜에 감사하고 사랑에 감동하여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 주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도록 그분과 교제하시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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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2-01)


예루살렘에게서 인증된 사도권

갈라디아서 2장 1-10절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곧 중심에서 나오는 신앙 행위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중심에서 나오지 않는 행동은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 의를 위해 포장해서 외식(外飾)한다면, 사람들은 외모만 보기 때문에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습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에 앞서 마음의 동기와 태도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중심을 다해 하나님을 기뻐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런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사역을 통해, 중심을 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한 일과 그 기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회고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위해 방문했지만, 그 계기를 통해 자신이 전한 이방인 복음에 대해 예루살렘 사도들과 내용이 같다는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이 사실은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경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두 번째 방문했던 예루살렘(1-2)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화려한 경력이나 출중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끌고 나가면, 모든 회중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이처럼 바울의 관심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습니다.

1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입증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소명의 근원이자 메시지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더 나가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회심한 사건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방인의 사도직에 대해 소개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소개합니다.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얼마나 합당한지를 변증합니다. 그 동안 전했던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아직까지 덜 이해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예루살렘 있는 사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는 바울이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일을 설명합니다. 그동안 이방인 선교를 힘써온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그가 전한 복음과 이방인 선교의 열매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사도들과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에 대해서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예루살렘 2차 방문(1)

사도 바울은 회심 후 3년 만에 첫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1:18). 그리고 다시 14년 만에 방문하였습니다(2:1). 사도행전 15장을 참고해 보면, 바울이 두 번째 방문한 ‘예루살렘 총회’에서 ‘율법주의의 부당성’과 ‘이방인의 할례’와 같은 기독교 기초적인 신학들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14년 후에’는 첫 방문 후에 14년이 아니라 회심한 후로부터 ‘14년 후’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방문을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고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27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사도행전 11:27-30)

당시에 바울은 안디옥에서 헬라인, 즉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아가보는 천하가 큰 흉년이 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사도행전 11:28). 그 예언을 따라 팔레스틴 지역에 큰 기근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대 지역의 흉년은 어머니 같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까지 영향을 받아서 힘들었습니다. 그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바울 일행은 안디옥 교회에서 주신 사랑의 헌금을 전달하려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2) 자신이 전한 복음(2)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예루살렘에 구제 헌금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동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사역까지 공인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바울은 바나바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회심자인 디도도 함께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이방은 이방인들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은혜에 대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즉,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혜롭게도 신중하게 예루살렘 총회 전에 먼저 보고한 후에,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총회 석상에서나 유명한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자신의 이방인 사역을 설명한 것은 당시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거짓 교사들이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따져보자면, 자신이 이방인 사역했던 것을 공개 토론을 통해 공론화과정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칫 바리새파 중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같은 유대인들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사도행전 15:5), 예루살렘 교회를 공격하기 기회를 틈타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교제한 사건 때문에 논란이 되어 있었습니다(참고 사도행전 10:1-23). 아마도 바울도 안디옥과 같은 곳에서 사역하면서, 이러한 이방인에 대한 논란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개인적으로 사도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접근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를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지금까지 이방인들의 영혼을 위해 했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도 바울 일행이 이방인들에게 할례 없는 구원에 대한 복음 사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염려는 예수님께서 받는 신학적인 논증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만약 공개적인 논쟁이 터지면 매우 난감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논쟁은 소송을 낳을 것이며, 소송 과정은 많은 시간과 물질이 들어갑니다. 이 때문에 지루한 소송에 휘말리면, 이방인 복음 전파에 혼란이 일어나고 당연히 “유력한 자들”은 초기 기독교 내부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이방인 선교를 당분간 중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더 나가서 기성 유대주의자들의 정치적, 종교적인 압력으로 굴복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만용보다 신중하게 지혜로운 분별을 택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양보하지 않음(3-5)

믿음으로 내딛는 순종의 발걸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약속들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날까지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와 순종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현실 됩니다.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3-5)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런 시도에 유력한 자들인 사도들의 반응을 설명합니다. 사도들은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학적인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에 대한 문제만 언급했던 것입니다.

(1) 이방인 디도를 통한 인정(3)

초대교회 당시에 주요 쟁점은 율법주의자들이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 율법 준수가 화두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계속 해온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율법(할례)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분명한 대답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유력한 사도들에게 자신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의 복음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조건에 반드시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방인 디도에게 강제적으로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3). 디도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율법주의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중지시키기 위해 일환이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복음을 버리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던 것입니다. 디도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에 미혹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방문 기간 동안 바울의 복음에 대한 아무런 도전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2) 거짓 형제들의 존재(4)

예루살렘 교회에는 바울의 복음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서 돌아왔지만, 아직까지 유대교적 생각에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유대 율법주의 신자’라고 부를 수 있지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는 그들을 ‘거짓 사도’라고 불렀던 것처럼(고린도후서 11:13), 이들을 ‘거짓 형제’또는 ‘거짓 형제’라고 지칭합니다. 그들은 계속 율법주의를 고수함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할례를 실행하지 않는 이유를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바울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갈라디아 교회에서 할례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6:12).

기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는 아무도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변방인 갈라디아에서 할례 의식을 강요한다고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만약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의 율법에 대한 주장이 받아 들려졌다면,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현장에서 그들의 맹공격으로 더 많이 바울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처럼 했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옛 율법에 충성하고 있었습니다. 은혜의 교리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려고, 가만히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구원의 진리를 망치려고 하는 사단의 궤계였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갈라디아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복음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사람들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사도들도 서서히 구원론에 대한 신학이 정립되고 있었습니다. ‘거짓 형제들’의 계략으로 인해 구원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더 빨리 얻게 된 것입니다. 결국, 거짓 형제들의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자유’를 빼앗고, 다시 율법의 ‘종’으로 만들려고 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3) 복음의 진리를 수호함(5)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무시한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오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행했던 이방인 디도에게 할례를 행해야 된다고 주장에 결코 한순간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자유’와 율법 아래 있는 ‘종’으로 비교 대조합니다. 후반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섰으니 …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일차적으로 유대인의 율법과 할례의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상황과, 더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성취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5장 13절 이하에서 설명하는 대로, 율법과 상관없는 자유인 방종에 이른 자유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계시된 이상,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살게 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시도에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었습니다(5a).

갈라디아 교회에 침입한 거짓 교사들은 왜 할례를 요구했겠습니까?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무런 근거 없이 무조건 할례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적이면서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례(割禮)’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종교 예식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통해 성경적인 근거로 접근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집안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명하면서 ‘이것이 나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라’(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들은, 이 언약을 배반한 자로,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창세기 17:14).

거짓 교사들은 회심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처럼 창세기 17장을 성경적인 근거로 할례를 주장했을 것입니다. 할례를 하나님 백성의 표지로 제시하는 구약의 선지서인 이사야서나 에스겔서에서도 등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살펴보겠습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이사야서 52:1)

이렇게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여기에서는 언약의 표지 역할 했던 할례가 구속사적 효력이 다했음을 설명하면서, 거짓 교사의 요구에 “한시도” 복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진리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율법주의자들에게 한 치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예루살렘의 인정(6-9)

사람들이 자신에게 사명을 잘 감당하려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끝임 없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사명자가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반드시 성취하게 됩니다.

6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6-9)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안으로 눈을 돌려 사도들과의 관계를 소개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 사도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를 소개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설명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약간 냉정하고 심지어는 교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1) 가미되지 않는 복음(6)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기둥 같이 유력한 자들(2:9; 2:6)이 그 동안 자신이 전한 이방인의 복음과 그들의 구원을 인정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 공의회(사도행전 15장)에 이루기까지, 초대 교회는 이방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조금씩 정리해 가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 유력한 자들과 거짓 관계를 만들어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과의 관계가 없었던 것을, 과거에는 자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음을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으며, 받은 그대로 첨가 없이 순수하게 복음만 전했다고 주장합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이 바울 자신의 사역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덤덤하게 말합니다. 초대교회 차지하는 영적인 지위를 생각해보면, 복음의 진리 앞에서 바울의 태도를 얼마나 담대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들을 높게 평가했지만, 반면에 바울을 아주 낮게 보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동행했고,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 대해서는 참 사도로 보았지만, 바울을 자칭 사도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사도로 나섰으니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부정한 이방인들을 정결의식도 없이 그대로 하나님의 공동체에 부정한 채로 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아무나 쉽게 받아주는 ‘아주 값싼 복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유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은 이번 기회를 통해 처벌 받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쉽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복음에 대해 내용을 추가하거나 할례나 율법 규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6). 사도들은 이방인 디도를 그 상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같은 형제로 받아 들렸고, 외형적으로 바울에게 공식적인 사도들처럼 사도직을 받아야 된다고 거짓 사도라고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더나가서 그들은 바울을 이방인을 향한 사도로 확실하게 인정했습니다.

오히려 더 나가서 예루살렘 교회에 기둥 같은 사도들,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함을 받은 것을 보고,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사도들이 교제했던 것은, 사도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명자임을 인정했기 때문에 서로 교제한 것이었습니다.

(2)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바울(7-8)

유대주의 거짓 형제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들이 바울 일행과 교재하면서 대등한 존재로 대접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사람들이 주관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사역이지만, 서로 다른 방법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할례자에게, 바울은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교제를 통해, 바울 일행은 이방인에게, 다른 사도들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공통된 이해 아래서 한 복음 사역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복음 전파 사명은 동일한 역사이란 점을 상기 시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동일한 밝힘으로써 자신이 분명한 사도임을 천명합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통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그를 사도로 부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신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와 동등한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사도들과 공감대 형성(9)

유대주의 거짓 형제들은 바울와 사도들을 이간질해서 사역을 못하도록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확실한 복음을 인증시키셨고, 더 힘차게 복음을 증거 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기둥인 사도들과 바울 일행은 서로 사역을 인정하는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9)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을 … 보았고(6-10) …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라고, 사역이 이방인들 가운데 지속될 것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이방인 성도에 대한 우려를 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모두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는 거짓 교사들을 향해 영적인 한 방을 날리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초대 교회에 선교 사역은 점점 확장되어 갔습니다. 각자 선교 대상이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경계선으로 선교 대상자에 대한 구분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이 개척한 이방인 교회인 고린도교회에서 ‘게바(베드로)파’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주로 이방인들로 추정되는 점(베드로전서 4:2-3)을 보면 서로가 경계를 넘어 협력 사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기둥인 사도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사도직과 그 동안 이방인을 위한 복음, 그리고 사도들의 사역과 동등하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더 나가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면서 사역을 계속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대적자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중요한 논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부탁(10)

삶에는 우연한 일들이 끝임없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주장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들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진행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일을 달라고 기도하지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10)

예루살렘 기둥인 사도들은 사도권을 의심하지 않고 동등하게 인정하여 바울에게 부탁까지 합니다. 그들의 부탁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이라고, 복음의 증거 가운데 특별히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부탁한 것입니다.

자존심 강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구제를 부탁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이방인 교회를 동일한 형제로 생각하는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면, 절대로 그런 부탁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른 복음을 전파하면서 바른 실천이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구제헌금을 부탁할 때, 자신은 그동안 그렇게 지속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왔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구체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참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인정한 것입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른 삶을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이후에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이방인인 고린도와 마게도니아 교회들에게서 지속적으로 구제헌금을 모금했습니다(고린도전서 16:1-3; 고린도후서 8:1-5). 이 구제헌금은 단순하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하는 목적 외에도, 위에서 말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한 백성임을 상징적 표현입니다(로마서 15:25-28, 31).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의 자세에서 사명사로서 마음가짐을 살펴봅니다. 복음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복음 밖에서 자신을 낮추고 서로를 인정합니다. 그러한 자세는 복음이 더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이방인에게 제시했던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내용 수정이나 첨가 없이 인정받았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이 복음 되도록 서로 협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들은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협력하면, 복음이 더 힘차게 증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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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1-02)


사도 바울의 회심과 소명

갈라디아서 1장 11-24절


한국 법원에서 죄인들을 심판할 때 ‘증거재판주의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어려운 재판이라도 증거가 없으면, 벌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재판에서 증거만 있으면 증인은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설득력이 강합니다. 그리고 어떤 재판이든 승리할 수 있어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복음의 증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복음이 남을 살리기 위해 먼저 그 복음을 전하는 자 자신을 살렸고 변화시켰다는 증걸르 보이면 가장 확실합니다. 바울은 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 이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부름 받은 이후에는 어떻게 사역하였는지를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술합니다. 이 모든 것의 초점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음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기원(11-12)

교만은 스스로 높이려고 자신의 뛰어난 업적만을 내세웁니다.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과 거대한 느부갓네살 동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만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인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만을 세우고 헌신했습니다.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2)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소아시아 남부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돌아간 직후에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공격했습니다. 이제 세워진 연한 순과 같은 교회들을 강탈하기 위해, 그들은 ‘율법의 실천을 통해서 의를 이룬다.’는 거짓 복음으로 어린 교인들을 유혹했습니다. 특히,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교인들에게 바울에 대해 불신을 심기 위한 모략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인했습니다. 그래야만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전한 복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지속적으로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역사적이며 전통적인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의 전통적인 율법을 통한 구원에 비교해보면 내용도 내용적으로도 부실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통성이나 역사성도 없는 이단에 불과한 주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갈라디아 공동체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본격적인 반박에 나셨습니다. 먼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강한 어조로 사용했지만, 그들을 사랑이 담긴 호칭으로 부릅니다(참고 갈라디아서 3:1). 그의 의도는 지금부터 시작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증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라고 세 가지 부정어를 강조해서 사용합니다. 바울은 강력하게 자신이 전한 복음의 근원이 인간이나 세상이나 자연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았으며(사도행전 22:3), 때문에 인간에 의한 전승되고 교훈되어진 것을 좇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도, 사람들에게 받은 것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배운 것도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철저하게 율법을 교육 받아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론이라면, 사람들이 행해야 할 종교행위를 많이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차원에서 노력이 전혀 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꾸며 지어낼 만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코 사람의 기쁨과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힙니다(10).

사도 바울은 그 동안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결론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것입니다. 회심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로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아그립바 2세에게 바울은 자신의 회심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계시해 주신 내용에 대해 설명합니다.

16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사도행전 26:16-18)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경험을 염두해 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은 바울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메섹에서 바울은 부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유대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종말의 부활 가운데 이미 들어갔다는 사실과 부딪혔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새로운 창조’였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를 덧입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그가 오르신 것은, 그가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외로움을 성취하고, 완전한 거룩과 영광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창조가 예수 한 사람 안에만 성취되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에게로 가야 그 새창조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 신학이 형성됩니다.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이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든 이제는 모든 것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성취한 구원을 함께 누린다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적 주장입니다. 즉, 이제는 율법이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되는 과정(13-24)

복음의 일꾼은 저절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정하십니다. 한때 복음의 대적이었던 사람도 하나님의 택정 안에 있으면 완전히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복음을 위한 충성한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증명합니다. 복음을 향한 열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13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3-24)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다시 돌아보면서 설명합니다. 자신이 사도가 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 의한 사도’나 ‘스스로 세워진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 회심함을 입기 이전(13-14)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죄를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지만, 회개하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 분입니다. 점점 죄가 무르익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 심판 앞에서 인간의 직위, 재물, 힘 등은 모두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으로 살아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기 전에 행했던 복음의 박해자로서 생활을 언급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자기의 체험을 제시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논증하는 것은 바울이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사도행전 22:3-10; 26:5-12; 빌립보서 3:4-6).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회심 이전에는 유대인으로서 전통과 유대교를 열렬히 추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자기만의 종교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바리새인으로서 광신도였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유대교와 조상 전통에 대해 특별한 열심을 품었던 자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옹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을 ‘나사렛 이단’(사도행전 24:5)으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그리고 교회를 멸하려 했던 자입니다.

회심하기 전에 추종했던 유대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롭게 살아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메시아가 왔지만, 제일 먼저 환영하고 영접해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세우실 때는 랍비 가운데서 세우실 것이다.’고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시골 출신 이단자나 정신이상자로 생각하고 영접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바탕으로 바울이 유대교를 열심히 믿고 조상의 전통을 옹호할수록 원수이자 이단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의욕이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열정은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수기 25장 11-13절에 등장하는 비느하스 이야기는 후대의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대한 열심을 고취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전수되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을 품고 배교한 동족들을 처단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보존한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시편 106:13).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유대교가 취하리라 예상 가능한 행위였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멸하려 했던 것 또한 비느하스 이야기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면서 틀림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유대인들의 정결법과 안식법을 비롯한 모세 율법을 규정대로 지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더 나가 율법과 함께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는 성전을 허물겠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 위에,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인식이 유대인들에게 만연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다는 소식은 율법에 열심 있는 자, 바울을 움직이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혈기가 가득한 바울을 가던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당국자들부터 예수의 이단자들을 구금해도 좋다는 영장을 손에 쥐고 있었을 것입니다. 머릿속에는 수단 방법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모든 구금할 것인지 그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잘 설명합니다.

4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사도행전 22:4-5)

회심 전 바울의 마음은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멸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으로 알았고, 이 사명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2) 회심함을 입는 과정(15-17)

진심으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종종 변화되었다고 대중적인 간증하던 사람들이 때로는 다시 돌아가서 범죄 해서 지탄을 받는 경우를 봅니다. 이러한 모습은 잠시 동안 변했을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확실하게 변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동안 잘못된 모든 열심에 대해 “그러나”라는 한 단어로 회심 전에 모든 사건을 요약합니다. 유대교에 깊이 빠져 있던 바울이 과거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코 인간적인 힘이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변화는 매우 기적적인 사건으로서 그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임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구원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① 구원의 주체

바울은 자신의 구원 과정을 간증하면서 주어가 ‘나’에서 ‘하나님(이가)’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주체가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할 수 있었던 조건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해 관심도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 조건으로 살펴보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더 나가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하게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고 있는 다메섹 도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말합니다.

② 구원의 시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시기를 말합니다. 그 시기를 추측해보면, 대부분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러 가고 있을 때인 다메섹 길 위이라고 추측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바울에 대한 관심을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 고백합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오래전부터 예정(豫定)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했던 모든 일들(태어나면서 받은 영향, 경험 그리고 교육 등)을 이방선교를 위해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예레미야 1:5)

③ 구원의 방법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는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선악을 알기 전부터 이미 택정하셨고, 정확한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은혜로 그를 구원의 반열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나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어떤 일이나 조건이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생각이나 준비하지 않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부르셨던 것입니다.

④ 구원의 목적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이유를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고백합니다. 구원도 기적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멈추지 않고, 바울 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 ‘속에’ 그의 아들을 계시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바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단순히 어떤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실재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과 같은 바울을 보화와 같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은 앞으로 바울이 전해야할 그리스도의 은혜를 그대로 대변해 줍니다. 자신이 하나님 은혜의 살아있는 증거인 셈입니다.

⑤ 구원의 사역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원의 반열에 옮겨놓으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주인이기도 하시며 이제 그의 아들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하나의 백성으로 부르신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바울을 부르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16).

바울은 구원 이후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당시 나바티아 왕국이 있었던 아라비아 지방(현 요르단 페트라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후에 가장 먼저 이스마엘 후손들에게로 달려가 이제는 비로소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게 되었음을 전한 셈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만 가능했습니다. 구원의 반열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하심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복음을 위임 받은 후, 어떤 사람과 상의하거나 심지어는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구원과 사도직은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에만 의존합니다.

(3) 회심함을 입는 이후(18-20)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은혜에 거룩함으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결과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었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의존되어 있거나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그들에게서 파생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존경했지만, 그들을 죠제의 대상으로 여길 뿐 그들의 지시를 받거나 그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심 후 첫 예루살렘 방문 동안에 바울은 베드로와 여고보를 만났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방문 때에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이 ‘복음’을 듣거나 배웠을 것입니다 

2장 11-14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오히려 당시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성숙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였음을 바울은 주장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경험을 시작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거하여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알려주려 합니다.

(4) 부르심을 이후 평가(21-24)

사명자는 척박한 땅을 개간하는 농부와 비슷합니다. 척박한 땅을 개간하듯이 완악하고 강퍅한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부드럽게 만들어 가는 사투(死鬪)의 현장입니다. 시작은 매우 힘들고 어렵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사역하다보면, 때가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역했던, 안디옥과 다소 지방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파송되어 안디옥에서 사역한 바나바가 다소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동역합니다. 이 두 사람의 사역을 통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안디옥에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유대의 교회들이 얼굴로 알지 못했던 바울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나의 선한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유대교회의 평가를 소개함으로써 자신의 사역과 복음의 내용이 신뢰할 만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복음은 사도 바울의 모든 삶에 적용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삶을 통해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는 이 복음으로 자신의 삶을 통째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자신을 변화시켜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 은혜의 복음만을 위해 헌신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복음의 신실성을 반영하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복음 전도가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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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1-0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본질

갈라디아서 1장 1-10절


오늘날은 다른 복음의 전성시대가 되었습니다. 메시지가 과거에는 강단을 통해서 전달되었지만, 현대는 많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고갈 되어서 문제가 아니라 홍수처럼 범람해서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복음들 중에 어떤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도 가짜 사도라고 비난 받을 정도로 가짜 복음은 위세를 떨쳤고 공동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만드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따라간 갈라디아 교인들을 질책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해 강력한 저주를 선언하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바울의 첫 인사(1-5)

대부분의 악성 종양, 즉 암은 발견한 즉시 그곳에 어디든지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수술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양이 온 몸으로 결국에는 퍼져 죽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도 악성 종양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단 사설들입니다. 이것들은 발견한 즉시 추방시켜야 합니다.

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5)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핍박하던 바울을, 역설적으로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결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영적 해방의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통한 구원이라는 ‘거짓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과 믿음의 ‘참된 복음’으로 나갈 수 있게 인도합니다.

(1) 기록자 : 바울의 사도성(1)

사도 바울은 부름 받은 사도로서 서신을 기록합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다른 서신들과 비교해 볼 때, 갈라디아서에서만의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첫 인사부터 주목할 만한 두 가지인 사도의 근원과 복음의 핵심을 소개합니다.

① 사도의 근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소개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쓰자마자 자신의 사도됨의 기원과 진정성을 변호하는 것으로 갈라디아서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바로 수술 칼을 집어든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가 악성 종양과 같은 대적자들의 공격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도직에 대한 방법은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가지는 진정성 여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② 복음의 핵심

사도 바울은 첫인사에서부터 자신이 전하려는 복음의 핵심을 요약하여 첨가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4)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기원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부활’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1절이 유일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새 창조’(6:15)와 같이 부활로 인한 구속사적 결과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부활이 바울신학에서 찾지 하는 위치를 고려할 때 이례적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그 논쟁의 성격상 부활보다는 십자가 죽음이 강조된다는 점을 앞으로의 설명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수신자 : 형제인 성도들(2)

편지의 수신인이 한 회중이 아니라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들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신학적, 목회적 문제가 여러 회중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3) 내용 : 인사하는 내용(3-5)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는 신학적인 배경을 갖는 표현입니다. 당시 헬라어가 통용되던 세상에서는 전형적으로 서신의 첫 단어는 ‘문안’을 뜻하는 ‘καρδίαν’라는 인사였습니다(사도행전 15:23; 야고보서 1:1). 그런데 바울의 이 편지는 독특한 안부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리스도의 은혜’(5:15)와 ‘하나님의 평화’(5:1)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이라고 인사는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에 대한 또 다른 요약입니다.

① 그리스도의 은혜

구약에서나 그리스-로마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나 ‘은혜’는 후견인이 예속인에게 베푸는 선물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은혜는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2:21; 1:14)로, 때로는 ‘그리스도의 은혜’(1:6)로 표현합니다.

② 하나님의 평강

‘평화’는 구약의 ‘샬롬’ 이해를 그 배경으로 가집니다. 이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이웃, 자기 자신,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6-9)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죄 아래 있던 모든 인류가 대속을 받아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결코 가감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어ᅟᅮᆫ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만이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6-9)

사도 바울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곧 바로,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복음을 저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배교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엄하게 꾸짖습니다. 배교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어쩜 너희들이 이렇게 속히 배교할 수 있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그들의 배교에 영적인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1) 다른 복음

배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진정한 복음에 대해 등 돌림으로써 그리스도를 떠난 결과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이들도 자신들이 이해하는 ‘예수’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또 ‘교란케 하는 자들’의 복음을 듣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혼동하여 그들을 따라갈 만큼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변질케 했다’(7)고 말합니다.

결국 그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6). 이 결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2) 그리스도의 복음

우선 ‘복음’이라는 단어가 1장에 계속 되풀이되는 점에 유의해야합니다. 헬라어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은 그리스도-로마 세계에서 황제의 즉위, 황제의 전쟁 승리, 황위를 이를 왕자의 탄생 등과 관련된 소식을 일컫는 단어였습니다.

이사야 52장은 이 단어가 소유하고 있는 구약적 배경을 설명해 줍니다.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이사야 52:7-8)

이곳에서 ‘좋은 소식’은 평화와 구원의 소식으로 이는 곧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이사야 52:7)는 선포입니다. 두 가지 배경에서 공통되는 개념은 왕적인 다스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7)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했다는 선포와 그 선포가 가져온 결과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왔던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했다는 선포는 이방인인 그들도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살도록 부름 받았음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홀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 없이 하나의 하나님 백성으로 모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은 무엇입니까? 2장 이하의 문맥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다른 복음은 여전히 유대인들만을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으로 인정하는 선포입니다. 할례와 율법 준수가 중요한 자격 요건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보편적인 다스림과 은혜를 부인하는 복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바라지 않는 사도(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풍성한 보상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손익을 떠나서 무작정 순종해야 합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속에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반면, 바울의 대적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요소들이 있었던 것을 보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잇다고 가르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다른 복음’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피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을 할례와 율법으로 인도함으로써 유대인 공동체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가르침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으로 규정했습니다. 이것은 동족들로부터의 핍박을 면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십자가의 능력을 가리는 것입니다(5:11; 6;12). 어찌 이러한 자들을 ‘그리스도의 종’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 있는 그대로 지키려는 바울의 열정이 보입니다.


오늘날 상대주의가 우상처럼 떠받드는 시대입니다. 서로를 향한 ‘관용’을 내세우며 단 하나의 진리와 단 하나의 복음만을 주장하는 우리 기독교를 향하여 ‘독선’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둘일 수 없기에 천하 만민에게 구원 얻을 길도 둘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됨은 수용성 여부로 판가름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거짓 복음’에 단호히 배격하고, ‘바른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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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개론



◎ 기록자

◇ 갈라디아서 저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 내적 증거 : 본 서의 서두에 나오는 바울의 사도권 변증(1:1), 그리고 자신을 1인칭을 사용한 문장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외적 증거 :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가 갖고 있는 사상적인 유사점 등이 그의 저작을 뒷받침해 줍니다.


◎ 수신인

◇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라고 헬라어 제목으로 볼 때, 당연히 수신인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 등에 있는 교회입니다.


◎ 기록 연대

◇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는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수리아 안디옥에 머물 때, 곧 예루살렘 교회(사도행전 15장)가 있기 전인 A.D. 48-49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은 A.D. 51-53년에 수리아 안디옥이나 또는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 갈라디아 지역

◇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키 중부 지방에 있는 하나의 주(州)였습니다. 지명의 기원은 ‘골사람’(Gauls)을 헬라어로 ‘Galavtai’(갈라디아)로 부른 것에 유래합니다.
◇ 이 지방은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민족이동의 통로이자 식민 활동의 무대였으며 예로부터 갖가지 문명이 꽃피었습니다. B.C 1680년대에는 이 반도의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히타이트 왕국이 일어났으나, B.C 1200년대에 쇠퇴하자 그 대신 프리지아 왕국이 일어났으며, B.C 700년대에는 리디아·카리아 등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BC 546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이 침입한 후로는,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반도 전체가 그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B.C 189년 로마의 무장 만리우스에게 정복 되었으나, 왕국의 존속이 허락되고, 그 후 로마의 유력한 동맹국으로 되었습니다.
◇ 이 주(州)에는 산맥과 넓고 높은 평지들과 호수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넓은 지역인데, 표고 700-1,000m의 고원지대입니다. 기후는 스텝 또는 사막성 기후이며, 여름이 짧고 겨울은 몹시 춥습니다. 흑해 연안지방은 기온 변화가 적으며, 연간 비가 잦다.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은 지중해성 기후이며, 생활하기에 가장 알맞습니다.
◇ 주요산물은 밀·보리·포도·과일·잎담배 등이며, 석탄·크롬·철광석·구리·망간 등 광물자원도 풍부합니다. 주요도시는 앙카라·이즈미르·아다나·부르사 등이 있습니다.


◎ 갈라디아에 존재한 교회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로 말미암아 설립된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함으로 교회가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속히 가서 그들의 문제를 바로 잡아 주기를 원했지만, 사정이 허락되지 않아 긴급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리로 인하여 황폐해 가는 갈라디아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고, 또한 그들을 속히 돕고자 긴급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성도들에게 간략하게 문안한 함께 곧 바로 본론적인 말을 시작합니다.


◎ 갈라디아서의 기록 목적

◇ 첫째로 사도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 자신의 사도직과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것임을 밝히고자 했다.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의 사도직이나 복음을 예수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고 왜곡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초반부에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고 복음의 신적 기원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가 전한 복음도 어떤 사람들에게서도 받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 둘째로, 사도 바울은 율법의 의미를 밝히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의 처지를 분명히 드러냄으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음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율법의 행위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만 드러나 율법의 저주를 받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믿을 때 성령을 받은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셨고 그로 인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제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근거해 대신 정죄 받으셨고 저주 받으셨기에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이에 율법에 의해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셋째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업을 받을 자며 자유자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율법주의를 따를 때 다시 종 노릇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임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아들의 영을 받아 아들의 명분을 얻은 것이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유업을 얻을 것을 확신한다.
     그런데 이런 영광스런 신분을 가진 자들이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종노릇하고 있다. 율법주의들이 강요한 할례를 받고,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들을 따르면서, 전에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어할 정도로 사랑했던 바울을 아브라함의 두 아들 예를 든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에게서 난 자는 아들이기에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는 자다. 그러나 종인 하갈에게서 난 자는 종이기에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지 못하고 쫒겨난다. 이 둘은 각각 율법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을 비유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다. 그러므로 자유를 누리며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한다.

​◇ 넷째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다.
할례를 받는 등 율법주의에 조금이라도 연관되면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다. 율법주의와 복음을 따르는 삶은 절대로 섞일 수 없다. 하나를 취하면 전체를 취하는 것이며,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어떤 삶인가? 그것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삶이다. 믿음을 따라 살 때 사랑으로 역사함으로 거룩한 삶을 성취한다.
복음을 알고 믿어 의롭다함을 얻고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은 절대로 딴 길로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혼란은 어떤 자들이 들어와 일으킨 혼란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기 때문에, 거짓교리가 조금이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해야한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곧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 왜냐면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죽음에 참여할 때 육체의 정욕과 탐심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이미 육체를 죽인 자니 성취된 것을 일상에서 실현하며 살아가야 한다. 즉 날마다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아야한다. 성령으로 생명을 얻은 자는 성령으로 날마다 살아가야 한다.

​◇ 다섯째로,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이 영생을 거둠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살아야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그렇기에 성령을 따라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거두려고 해야한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복음 안에 서는 것이며, 율법주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함께 짐을 져야한다.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고 항상 자신을 살펴 경계해야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각각 자기가 져야 할 짐을 져야한다. 또한 말씀을 배우고 가르침 받기를 좋아해야 한다. 말씀을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를 존경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한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야한다. 때가 이르면 거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있을 때 선을 행함으로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한다. 물론 이때 믿음의 가정에게 우선 선을 베풀어야 함은 물론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한다. 육체를 자랑하는 것은 헛되며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기에 무능하다. 오직 복음만이 새생명을 갖게한다. 오직 복음만이 평강과 긍휼을 얻게 한다. 바울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이것은 바울이 참된 진리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증거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필요하다.


◎ 갈라디아서의 구조

​◇ 본서는 내용 면에서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1) 사도 바울은 그의 사도 자격을 변호·논증한다(1:11-2:21). 바울의 사도 자격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이 분명히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열거하여 사도 자격을 변호한다.
①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신 점(1:11-24)
②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그의 복음이 인정받은 점(2:1-10)
③ 베드로의 위선을 바울이 책망한 점(2:11-21)

(2) 사도 바울은 복음과 유대주의적 이단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점을 지적하며, 후자를 강력히 논박한다(3:1-5:12). 만일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그의 약속들에 참여한 자라고 한다면 구원을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의 참 의의와, 믿는 자는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3)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5:13-6:8).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자유의 생활을 상세히 논의하며, 육체의 일과 대조시킨다.

 

개요

1:1-10 서 론
   1:1-5   문안  
   1:6-10  시작하는 말

1:11-6:10 본 론
   1:11-2:21  사도로서의 변호
   1:11-12  복음의 출처
   1:13-24  바울의 개인적인 간증
      1:13-17  바울의 개종
       1:18-24  성도의 생활
   2:1-21   바울의 사역의 변호
       2:1-5    예루살렘 공회
       2:6-10   바울과 사도들
       2:11-14  베드로의 외식
       2:15-21  이신득의
   3:1-4:31  바울의 복음 변호
       3:1-5    믿음과 행위의 논제
       3:6-4:7  교리적인 문제
       3:6-9    아브라함의 자녀들
       3:10-14  율법의 저주
       3:15-18  아브라함의 씨
       3:19-22  율법과 언약
       3:23-29  아브라함과 후사들
       4:1-7    하나님의 후사들
       4:8-31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권면
          4:8-11   율법으로의 다시 돌아감에 권면
          4:12-20  개인적인 관계의 권면
          4:21-31  우화로서의 권면
  5:1-6:10  거룩한 삶으로서의 부르심
      5:1     전환
      5:2-12  은혜에서 떨어짐에 대한 경고 
      5:13-26 성령 안에서의 삶
      5:13-18  참 자유는 방종이 아님
      5:19-21  육체의 일
      5:22-26  성령의 열매
      6:1-10   실천적인 가르침들
         6:1-5    서로 짐을 지기
         6:6-10   지혜로운 돈 사용

 6:11-18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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