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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02-02)


데살로니가를 통한 감사와 소원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20절


부모님은 자녀들이 상을 받아오면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두기고 받아온 트로피는 잘 보이는 장식해 두기도 합니다. 자녀들은 이러한 부모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자녀의 성공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당신을 기쁘게 하고 희망에 가득 차게 합니까? 당신이 자랑스러워한 것들이 하나님께 보셨을 때, 기쁘시게 하는 것들이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감사합니다. 그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랑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말씀을 통해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은 말씀으로 위로하게 위해 성도들을 다시 만나길 원했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감사(13-16)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성도가 환난에 처해 있을 때 그 빛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성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13-16)

바울은 성도들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지만, 말씀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는 것을 기억하면서 벅찬 마음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13)

첫 번째 감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짧은 시간에 복음을 증거했지만,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성장하고 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말씀을 받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실제로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며 지금 성도들 안에서 ‘또한(και)’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이 보여주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 바울에게 나타났으며, 동일한 능력이 성도들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받은 말씀이 지금까지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한다고 감사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스스로 지어낸 인간의 말이라고 하여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말씀을 인간적인 차원의 말로 국한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대단한 용기를 심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 속에서 말씀이 살아 움직이도록 합니다. 말씀이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고 고통을 통과하는 원동력입니다.

(2) 유대 성도들을 본받음(14)

다음 감사의 조건은 특별히 복음을 받아서 세워진 성도들과 교회들을 본받는 자된 것으로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1:6에서 사도들을 본받은 자들로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제 본 절에서는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보다 확고히 해줍니다. 그것은 유대에 있는 교회에서 일어난 것처럼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박해를 견뎌내고 믿음을 지킨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성도들에게서 신앙을 본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본받은 것은 바로 고난까지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믿었던 사람들과 교회들이 고난 가운데서 세워졌습니다. 고난 중에서 흔들림이 없이 세워졌습니다.

참 신앙의 표지 중에 하나가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잘 된 것이 아니라 고난 있는 것이 참 신앙의 증거이고 표지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들림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축복 그리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신앙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거입니다.

 

박해자들의 정체(15-16)

철저히 말씀대로 살면 살수록, 세상과 불화하고 고난은 불가피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하는 그 일은 죄를 채워서 주의 분노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삶인 것을 알 때,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그들에게 대해 정체를 밝힙니다.

15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13-16)

믿음의 역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고난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 고난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에게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복음 전파에는 감사와 고난이 항상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핍박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대해 범죄한 악행들을 낫낫이 들어냅니다.

(1)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죽임(15a)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구약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죽이는 데 관여한 사람이 실체로는 소수지만, 그들의 지도자들의 악행에 소극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는 메시아를 거절하였고 메시아의 죽음에 공모자가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손을 씻어 자기 책임을 부인하고 유대인들이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마태복음 27:25)고 랬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시인한 셈입니다.

그러니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유대인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의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것은 주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핍박한 것처럼 악한 죄이며,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핍박한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악한 죄를 지었다는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기보다는 예수님과 그의 백성들에 반대하는 ‘모든 자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을 쫓아냄(5b)

유대인들은 성도들을 쫓아냈습니다. 사도행전 8:1-3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성도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냈습니다. 여기서 바울과 그 일행이 쫓겨난 일은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난 것(사도행전 17:5-10)과 베뢰아에서 쫓겨난 것(사도행전 17:13)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내좇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과 그 일행을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자신들의 사도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7:10을 보면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 인들의 폭동을 동반한 박해로 인해 그 도시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박해를 바울 팀이 당했고,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음(15c)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실패했음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를 박해할 때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1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4:3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거룩, 순결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박해하였고(2:15) 죄를 항상 채움으로써(2: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4)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이 됨(15d)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타 민족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습니다. 타키투스는 유대인들이 서로에게는 신실하지만 타 민족에 대해서는 증오와 적대감만을 보였다고 썼습니다(History, 5.5).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유대인들에 대해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은 유대인들이 로마의 공적 제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유대인이 모든 사람의 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키투스가 말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반대를 일삼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5) 그들의 대적하는 행동(16a)

유대인들의 반대로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하는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므로(16a) 모든 사람의 대적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과 구원의 역사가 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하여 감하게 저항하였습니다(사도행전 13:45-50; 14:2,19).

(6)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16b)

16a절에서 보듯이 바울 팀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려 하지만 유대인들이 막았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항상 채우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노하심’을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주후 49년) 혹은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학살 사건(주후 49년) 혹은 심각한 기근(주후 47년) 혹은 예루살렘의 멸망(주후 68-70년)을 가리킬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사건들 중 무엇을 가리키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일은 주의 분노를 불러오지만, 그 세상 앞에 굴복하지 않다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마음속에서만 맴도는 아니라 마음속에 역사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의 소원(17-18)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남이 그리워지고, 만나면 서로 헤어지기 싫어하고, 그리고 옆에 있어도 보고 싶어 합니다. 성도 간의 사랑 또한 이런 사랑은 아니지만 친밀해야 합니다. 그 관계에서는 탐심이 있을 리 없고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사욕을 취하려고 일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의 친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7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17-18)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알리고 싶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 그들을 만나려는 노력(17)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이 생명의 위협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떠나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7장).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들에게 있었고 항상 만나기를 사모했습니다. 떨어져 있었기 그들을 잊어버리거나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떠난 것은 얼굴이 마음은 아니라는 것과 그들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를 알리고 싶었습니다(17). 바울은 자신을 ‘고아(ἀπορφανιξω)’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는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먼이러한 목자의 심정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2) 사탄의 방해(18)

바울은 여러 번 데살로니가 교회로 다시 돌아가려고 계획했지만, 뜻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마음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여의치 않아서 갈 수는 없었습니다.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지만, 가로 막은 것은 ‘사단의 방해’였습니다. 사단의 황동 목적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로부터의 방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엥콥토’는 도로에 홈을 파서 말이나 수레의 통행을 금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사단의 방해’는 데살로니가에서의 박해나 바울의 질병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데살로니가 선교가 실패하길 원했고, 바울은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감당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개인적으로 싸움을 붙이고 불화를 조장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 간의 관계는 인간관계, 그 이상이며 영적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혹은 성도간의 교제 속에서 타인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에베소서 4:22-27)

사단은 성도들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면 능력이 강력해지기 때문에 구축하지 못하도록 성도들끼리 서로 적대시 하도록 방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의 능력을 약화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단의 방해와 반대에 부딪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의 자랑(19-20)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의 자랑거리에 대한 대상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9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19-20)

세상 사람들의 자랑거리나 기쁨이나 소망은 세상 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랑과 소망은 바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가장 기뻐하시고 천하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방해가 있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열매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바울에게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입니다(19). 바울은 그들 때문에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면류관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3에서 회심자들을 ‘열매’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9:2에서는 ‘사도됨에 대한 인침’이라 하였고, 빌립보서 4:1에서는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분투하고 땀 흘린 바울과 동료 선교사들에게, 그들을 통해 구원하신 영혼들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20절에서 바울은 그의 선교팀이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영광과 기쁨을 이미 얻었음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종말에는 더 충만한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을 등한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당신에게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인간고나계가 바르게 세워지며 교회 속한 성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일과 세우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시험과 핍박이 당연히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끌면 순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주님 없는 인생의 평탄함보다 주님과 함께하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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