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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5-01)


이스라엘을 초대하신 하나님

이사야 55장 1-13절


 

많은 어려움을 겪을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의지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으려 않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자포자기와 냉소가 만연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염증을 느끼고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좌절하지 않고 외칩니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애절한 부르심을 전합니다.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 이사야 40-55장의 결론입니다. 예언자는 ‘목마른 자’에게 물가로 나아오라고, ‘돈 없는 자’도 와서 사 먹으라고 외칩니다. ‘양식이 아닌 것’에 돈을 쓰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에 수고하는 자들에게 그는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을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먹으라고 초대합니다. 그는 피곤하게 사는 자들에게 목마름과 배고픔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은총에 의한 언약(1-5)

하나님께서는 실망한 그의 백성에 항상 그의 나라로 부르심입니다. 그 초대는 척박한 현실만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피조물이 자기를 만드는 하나님을 자기 논리 안에서만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1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회복할 것이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나라가 얼마나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나라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상들은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다른 데서 우리를 만족하게 할 만한 것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1) 참된 양식(1-2)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소리쳐 물건을 파는 장사꾼처럼 와서 물과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외칩니다(1). 그러나 “돈 없이, 값 없이” 물건을 팝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저 주기 위해서 외칩니다. 장사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풍성한 상을 차려놓고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입니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 번 돈으로 양식을 사지만, 그 양식이 굶주림을 해소해주지는 못합니다(2).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은 우상숭배를 가리킬 것입니다. 일부 바벨론 유배민은 이방 신들에게서 살길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 기름진 것”은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의 말씀(약속)을 가리킵니다. 우상들이 주는 일시적 포만감에 빠져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고,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과 해방의 약속으로 갈증과 배고픔을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할 때만 이스라엘은 현재의 절망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헤(3-4)

 

유배민이 들어야 할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 내용, 곧 값없이 주어질 선물의 실체입니다. 3절과 함께 보면, “돈 없이, 값 없이”는 언약의 새로운 성격을 보여줍니다.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의무가 부과된 쌍무적 언약입니다(신 4:40; 5:33; 11:9; 25:15; 32:47). 시내산 언약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시려는 언약은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돈 없이, 값 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의무를 홀로 담당하시고,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에게는 아무 의무도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결코 파기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 되고, 일방적 보호 약속이기에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와 같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범죄했을 때(삼하 11장; 24장) 그분께서 당신 은혜를 거두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부족이나 불순종이 새로운 언약의 유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4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다윗을 민족들에게 증인으로, 그들의 통치자와 명령자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택함받은 왕으로서 통일왕국을 건설하고 주변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통치권을 확장했고, 민족들에게 여호와의 능력을 보여준 산증인이 됐습니다.

 

(3)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시는 여호와(5)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을 들어 당신 영광을 온 땅에 과시하십니다(5).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수치와 유배에 종지부를 찍고 그를 영화롭게 하실 때 이스라엘과 민족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됩니다. 이스라엘이 부르면 민족들이 달려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화를 통해 온 세상에 여호와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말씀의 확실성(6-11)

종종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고 교만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가 부족해서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으려 하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것은 모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초청입니다.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6-11)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 경험한 것 안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인간은 앞날을 예측할 수도 없으며 존재 자체가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사유 방식과 범위를 뛰어넘어, 인간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1)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6-7)

 

구원 시대가 돌아온 것을 아는 예언자는 청중에게 여호와를 찾으라고,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6-7). 여호와를 찾는 일은 결단과 헌신뿐만 아니라 회개까지 포함합니다. 그분은 아무 때나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만남을 허락하셨을 때만 찾을 수 있습니다(참조. 호 5:6; 암 8:12). 여호와를 찾는 행위는 그분을 부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능력과 선하심을 신뢰하는 자만이 그분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부르지 않아서 심판에 떨어졌습니다(43:22). ‘그분의 가까이 계심’은 기도의 동기이자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약속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자는 자신의 길과 생각버려야 합니다. “악인”과 “불의한 자”는 여호와의 구원 계획을 거절하고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자기각에 따라 자기 길을 가는 자를 가리킵니다. ‘돌아옴’은 근본적인 전환이며, 기존의 가치관과 인생관에서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악인이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음은 그분께서 긍휼과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긍휼은 자식의 과오를 뛰어넘고, 그분의 큰 용서는 자식의 수치 씻어줍니다. 그분의 긍휼에 근거한 용서로 그분과 이스라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심각한 균열이 극복됩니다.

 

(2)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나라(8-9)

 

8-9절은 “생각”과 “길”의 모티브를 받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절대 간격을 비유적으로 기술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사람의 생각과 길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 양자 사이의 간격은 하늘과 땅 사이의 무한한 간격과도 같습니다. 높이에 있어 하늘을 땅에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역사 경륜에 있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상호보완적이지 않고 양자택일적입니다.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계획을 실천하는 방법(길)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출발점은 이스라엘이 자기 생각과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읽자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용하지 못하는 유배민을 향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구원을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고레스의 선택과 그를 통한 유배민의 해방과 민족들의 구원은 차라리 걸림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학적 전통과 다르다고 하나님께 따지지 말고 그분의 생각과 길의 절대적 우월성을 인정하고 내맡겨야 한다. 그분 결정의 ‘의로움과 선하심’은 그분께서 주신 약속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이지 검토대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 말씀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길은 공허해서 결실이 없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그분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열매를 맺습니다.

 

(3) 반드시 결실하는 여호와의 말씀(10-11)

 

하늘에서 내린 비와 눈이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셔 싹을 내고 자라게 해서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그분의 말씀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그분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고 사명을 완수합니다(10-11). 예언자가 선포한 그분의 말씀은 주로 미래의 예견, 즉 유배민의 귀환과 예루살렘의 회복에 관한 약속으로 그 성취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분 말씀에는 창조적-실천적 능력이 내재돼 있기에 반드시 그 보내진 목적을 이룹니다(40:8). 유배민의 거절이나 저항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 계획을 그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유배민은 자기 생각과 길을 포기하고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약속하시는 그분의 영원한 언약, 은총의 약속이 가져다주는 그분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찬양(12-13)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신 사람을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찾아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12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2-13)

 

하나님께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 모든 복이 있고, 형통과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기쁨과 평안, 그리고 노래와 손뼉 침이 있습니다.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참된 삶이 있습니다.

 

(1) 유배민의 안전한 귀향(12)

 

유배민이 바벨론을 떠나 귀환하는 것을 보고 자연도 함께 환호하며 손뼉을 칩니다. 유배민의 떠남(출발)은 구원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기에 기쁨의 순간이고, 여호와께서 앞뒤를 지켜주며 인도하시기에(52:12) 그 여정은 평안한 길이 됩니다. 유배민은 시온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께로(40:9-11; 52:9-10) 인도함을 받습니다. 황폐한 산들과 언덕들이 유배민의 귀환에서 구원 시대의 도래를 보며 기뻐합니다. 산들과 언덕들, 모든 나무들이 기쁨으로 귀향민을 맞이합니다. 폐허가 된 땅이 이제 유배민의 귀향과 더불어 다시 생명과 축복의 땅이 됩니다. 가시나무와 찔레나무가 자라던 황무지가 변하여 잣나무와 화석류(도금양나무)가 자라는 기름진 산림이 됩니다.

 

(2) 가나안 땅의 축복(13)

 

13절의 “이것”은 앞에 나온 유배민의 귀향과 자연환경의 우호적 변화를 가리킵니다. 바벨론 유배민이 돌아와 복된 땅에 살게 되는 것이 여호와께 “기념”(영예)과 “영영한 표징”이 됩니다. 원래 ‘이름’을 의미하는 ‘셈’은 ‘영예’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59:19).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배로 더러워졌던 여호와의 이름에 다시 영예가 돌려집니다. 유배민의 해방과 가나안의 축복이 그분의 성실하심과 능력을 입증해주는, 곧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표징이 됩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아 부르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위세에 주눅 들거나 체념하지 않고 희망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첨하고 순응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약속을 따라 광야로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만 안전과 평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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