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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2-01)


내 백성아! 너희 영광을 알라

이사야 51장 17절-52장 12절


 

하나님의 구원은 불의와 부정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정결한 삶을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여전히 과거의 삶에 발목 잡힌 채 종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가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 여호와께서 손에 쥐어주신 분노의 잔을 마시고 취해 땅바닥에 쓰러진 예루살렘에게 기쁜 소식이 주어집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의 손에서 분노의 잔을 거두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9) 하고 간구하는 시온에게 예언자는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17)하고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분노의 잔(17-2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하찮은 벌레에 기겁하는 사람이 있고, 궁핍함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려움의 대상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과연 믿음의 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17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18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19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20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 21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22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23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7-23)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하나님께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9)라고 기도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도리어 예루살렘에게 “깰지어다 깰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잠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과 그 안에 살던 자들이 다 비울 정도로 마셔 취해서 잠든 것입니다.

 

(1)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17-20)

 

예언자는 여호와의 손에서 받아 마신 분노의 잔 때문에 정신을 잃고 멍청해진 예루살렘에게 깨어 일어나도록 권면합니다(17). 예루살렘은 스스로 힘을 내서 절망과 무기력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용기를 내서 예기치 못했던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어나다’는 예루살렘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전제합니다. 여호와의 손은 세상의 창조(45:12; 48:13)와 역사(41:20; 49:22) 가운데 계시된 그분의 압도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분노의 잔은 심판의 표상으로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잔은 운명의 피할 수 없는 결정을 상징합니다(참조. 렘 49:12; 합 2:16; 시 75:8). 여호와께서는 범죄한 예루살렘에게 분노가 가득 찬 잔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분노의 잔을 흠뻑 마신 예루살렘도 망연자실하여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땅바닥에 쓰러진 예루살렘은 손을 붙잡아 이끌어줄 자 하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됐습니다(18). “너를 인도할 자”는 왕이나 통치자보다는 예루살렘의 자녀, 곧 주민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 닥친 “두 가지 일”은 “황폐와 멸망”과 “기근과 칼”을 가리킵니다(19). 예루살렘은 파괴돼 황폐해졌고, 주민은 칼과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동정과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정도로 재앙은 참혹하고 칠제했습니다. 사냥꾼이 쳐놓은 그물에 걸린 영양처럼 여호와의 분노의 그물에 사로잡힌 예루살렘 주민들은 실신하여 길모퉁이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렸습니다(20). 하나님의 분노와 견책이 예루살렘의 아들들에게 가득하였기에, 이들이 파국적 재앙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2) 격려의 말씀(21-23)

 

여호와의 분노에 취해 절망적 형편에 놓인 예루살렘에 구원의 말씀이 선포됩니다(21). 예루살렘에게 당신 분노의 잔을 마시도록 명령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그 잔을 예루살렘의 손에서 거두어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십니다(22). 심판에서 구원받은 예루살렘이 또다시 심판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억울함을 풀어주다’는 원래 ‘변호해주다’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해 소송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루살렘이 받아 마셨던 분노의 잔이 예루살렘을 괴롭히는 자들의 손에 주어집니다(23). 천하 낮은 자리로 떨어졌던 예루살렘의 구원과 그 대적들의 멸망이 대조됩니다. 위로자요 변호자이신 여호와께서 종의 지위로 전락한 당신 백성의 운명에 개입하셔서 이들을 구해주기로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해방(52:1-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놀라운 권세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과 권세를 가진 자들이 정작 자기들의 손에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주신 힘이 얼마나 강하며 우리의 지위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려줍니다.

 

1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2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4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전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에 거류하였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5그러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6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1-6)

 

하나님의 존재는 언제나 신비입니다. 모든 면에서 완뱍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며 안타까워 하십니다. 이것은 철학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께서는 아픈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1) 권면(1-2)

 

예루살렘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1-2). 구원을 약속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에 의존해 힘을 내야 합니다. 이방 압제자의 발바닥에 짓밟힌 시온은 이제 흙먼지를 털고 땅바닥에서 일어나 보좌에 앉아야 합니다. 포로 된 시온은 자기 목의 굴레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옷”은 예루살렘의 지위와 조건을 보여줍니다. 땅바닥에 떨어졌던 영화가 다시 주어집니다.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을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돌아오십니다(7-8). 여호와께서 돌아오신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 이기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 곧 이방인은 시온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2) 구원 약속(3)

 

이스라엘은 “값없이” 팔렸기에 “돈 없이” 구원을 받습니다(3). 이스라엘의 속량은 이들의 죄악과 배역함 때문에 바벨론에 넘겨주었던(50:1) 당신 소유를 되찾아 오는 여호와의 권리 행사에 속합니다. 소유권의 완전 이양이 아니라 일시적 사용권만 넘긴 것이기에 되찾을 때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역사적 회고(4-6)

 

여호와께서는 땅의 세력에 맞서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소유권을 확정적으로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애굽으로 내려가 나그네살이를 했고, 후에는 앗수르의 억압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사로잡혀 바벨론에서 종살이를 하지만, 이스라엘은 변함없이 여호와께 속한 그분 백성입니다. 그분 백성이 까닭 없이 붙잡혀 와서 바벨론 통치자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그분 이름이 날마다 멸시를 당하는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더럽혀진 당신 이름을 위해 침묵을 끝내시고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영예를 지키시기에(그러므로) 그분 백성은 해방을 경험합니다. 구원을 받는 날 이스라엘은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왕 여호와(52:7-10)

누군가가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가슴이 설렐 것입니다. 그 좋은 소식이 승진, 합격,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 응원하는 선수의 금메달 소식 등등 그 무엇이든 비교할 수도 없는 좋은 소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져 옵니다.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9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7-10)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요셉은 고난 속에서도 형통했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알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1)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7)

 

예언자는 달려오는 전령을 보고 기쁨을 노래합니다(7; 나 1:15). 그는 산등성이에 나타난 전령의 가볍고도 재빠른 발걸음에서 그가 가져오는 소식의 내용을 알아챕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기쁜 소식이 마침내 도착했음을 직감합니다. 전령이 가져오는 “좋은 소식”은 ‘평화와 복된 좋은 소식과 구원’에 관한 소식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여호와의 통치’입니다. 예루살렘에게 진노의 술잔을 마시게 하셨던 여호와께서(51:17,20) 승리자로 돌아오셔서 왕으로 통치하십니다(참조. 40:3-5, 9-11).

 

(2) 시온 파수꾼들의 환호(8)

 

망루에서 파수를 보던 자들이 왕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경쾌하게 산을 넘는 전령을 보고 환호합니다(8). 이들은 꿈에 그리던 왕의 귀환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을 보며 기뻐 다 함께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파수꾼들은 이스라엘의 왕이신(41:21; 43:15; 14:6)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놀라운 사건을 직접 목도합니다.

 

(3) 예루살렘의 기쁨(9)

 

그는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 곧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에게 소리 높이 기쁨의 환성을 외치라고 권면합니다(9). 기쁨의 근거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40:1에서는 천상적 존재에게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신 여호와께서 여기서는 직접 당신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이 위로의 구체적 내용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에 세계사적 지평이 주어집니다.

 

(4) 하나님의 구원을 목도 하는 민족들(10)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팔”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민족들로 이를 목격하게 하십니다(10; 51:5). 온 땅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봅니다. 구원의 문이 모든 민족에게 개방되는 45:22과 49:6의 말씀과 달리, 여기서는 민족들이 예루살렘의 구원 가운데 계시된 그분의 능력을 보는 목격자가 됩니다.

 

출바벨론(52:11-12)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건, 우리의 영적 수준이 어떤 하건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통치하시며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다면 우리의 입에서도 찬송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11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12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11-12)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황폐한 예루살렘에 기쁜 소리가 나며 모두 함께 노래할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 더욱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고난 받는 백성보다 때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떠날지어다(11)

 

바벨론을 떠나는 유배민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고 몸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11). “거룩한 성”(1)으로 돌아가는 길이기에 바벨론에서 경험하고 습득한 모든 더러운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을 반드시 제사장들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결과 관련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거룩한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조. 출 19:6). 출바벨론과 출애굽 간에는 일부 다른 점이 있습니다.

 

(2) 앞뒤에서 지켜주시는 여호와(12)

 

애굽을 탈출할 때는 두려움에 떨며 급히 떠나야 했지만(출 12:11; 신 16:3), 바벨론을 떠날 때는 도망을 치듯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12).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멸망시켜 유배민의 귀향을 막지 못하게 합니다. 실제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 왕 고레스가 유배민의 귀환을 공식적으로 허락합니다. 출애굽 때는 하나님의 사자(출 14:19-20; 23:20; 33:2) 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출 13:21-22; 신 1:30, 33)이 앞과 뒤를 옮겨가며 이스라엘을 지켜주었고, 출바벨론 때는 여호와께서 행렬의 앞과 뒤에서 인도하고 보호하십니다. 바벨론을 떠나 돌아오는 길이 더 안전하게 보호를 받습니다.


구원은 상호관계에서 완성됩니다. 구원의 손을 내미실 때 잡아야 하며, 부르실 때 응답해야 합니다.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고,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시민으로 살아갈 채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유는 방종과 거리가 멉니다. 방종은 억압과 속박, 부정한 땅으로의 희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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