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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8-02)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하나님의 섭리

이사야 48장 12-22절


 

포로된 바벨론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니 어느덧 꿈을 잃고 있습니다. 구원하시겠다는 말씀도 들리지 않고,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집니다. 세상에 동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끌려올 때보다 더 큰 위기의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말씀하셨기에 그분의 구원 계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그분께서는 능력의 말씀으로 역사를 결정하시는 ‘처음’이시고, 선포된 당신 의지를 관철시키시는 ‘마지막’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말씀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여호와에게서 나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 일을 실행하시는 여호와(12-16)

사람들은 이전에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잘 살펴보면 그 원리는 하나로 모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에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에 없었던 일을 행하시더라도 그 원리는 동일하게 유지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12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13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14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하였느냐 15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16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12-16)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시며 당신이 창조주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를 세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바벨론이 행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1)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12-13)

 

여호와께서 독립인칭대명사 ‘나’를 세 번 사용하시면서 야곱 이스라엘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십니다(12). “나는 그니”는 공존을 거절하시는 여호와의 유일성과 절대 능력을 보여줍니다. 민족들의 신들이 아니라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41:4; 44:6). 홀로 창조하신 그분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홀로 통치하십니다. 한순간도 피조 세계의 통치권을 넘겨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분의 구원 사역을 신뢰하고 전해야 합니다. ‘부름 받음’은 이스라엘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택하신 분의 의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징계를 받고 유배에 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분과 관계있는 백성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기에(13; 42:5; 45:12) 그것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정하셨기에 땅은 흔들리거나 혼돈 상태에 빠지지 않으며, 하늘을 보호막처럼 펼치셨기에 피조물이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질서를 정하셨기에 이를 흔들어 파괴하려는 세력은 보복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그분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창조와 관련하여 그분의 오른손이 사용된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분의 손은 역사 안에서 거듭 구원과 심판을 집행하는 능력의 손으로 등장합니다. 13절의 “그들”과 “그것들”은 하늘의 별들보다는 바로 앞에 나온 하늘과 땅을 가리킵니다. ‘부르다’와 ‘서다’(아마드)는 각각 ‘불러 생기게 한다’와 ‘출현한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명령하시자 하늘과 땅이 출현하였습니다(창 1:6-10).

 

(2) 고레스를 부르신 분(14-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너희는 다’)에게 모여 들어보라고 요청하십니다(14).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바사 왕 고레스를 가리킵니다(45:1). 여호와를 알지 못하지만(45:4-5), 그분의 구원 사역을 집행한다는 의미에서 고레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나의 기뻐하는 뜻”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그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고레스를 통해 당신께서 기뻐하는 뜻을 이루시고(46:10), 고레스는 그분의 목자로 그분의 모든 기쁨을 성취합니다(44:28). “그의 팔”은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와 동격입니다. 고레스는 여호와의 능력의 팔로 그분의 뜻을 실행합니다. 어느 우상도 고레스의 승리나 그에 의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만 고레스를 역사 무대로 불러 나오게 하셨고,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15). 민족들을 놀라게 한 고레스의 형통은 여호와께서 주신 것입니다.

 

(3) 비밀히 말하지 않으시는 분(16)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당신께로 가까이 오도록 부르십니다(16). “이것”은 14-15절에 언급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나아와 그분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처음부터”는 ‘고레스가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결정을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선포만 살펴봐도 이스라엘은 역사의 결정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부터”는 예언의 성취와 관련된 말로 ‘이 일이 생길 때부터’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는 여호와께서 성취의 주체이심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여호와에 의한 것이며, 고레스는 그분의 도구일 뿐입니다.

 

(4) ‘나와 그의 영’(16)

 

여호와의 인칭이 16b절에서 갑자기 다른 누구의 1인칭으로 바뀝니다.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나’는 아마도 여호와의 종을 가리키는 것 같고, “이제는”은 새로운 구원 시대의 시작을 시사합니다(43:1; 44:1; 49:5). 여호와께서 당신 영으로 무장시킨 종을 보내 “처음 일들”과는 구별되는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탄식하시는 여호와(17-19)

지금도 말씀의 생수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안에는 쉽게 밑줄이 그어지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복을 약속하는 말씀만이 아니라 경고도 있습니다.

 

17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18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19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17-19)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더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우리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약이나 규제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완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 잘 모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1) 유익하도록 가르치시는 분(17)

 

말씀 전달에 앞서 여호와가 다시금 이스라엘의 구속자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구속자”(고엘)는 집안의 일원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부당한 죽음을 당했을 때, 도와주거나 ‘피의 복수’를 해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거룩하신 이”도 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거의 구원의 문맥에서만 등장합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언약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언약관계에 따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끄시고 이스라엘은 그분께 순종하며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가르침을 주시고 생명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은 문자적으로 가나안으로 가는 귀향길을, 비유적으로는 그분께로 돌아가는 영적 갱신의 길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영적-내적으로도 여호와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2) 순종하지 않은 결과(18-19)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스라엘은 유익함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의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주의한다’는 ‘의지적으로 귀를 기울여 듣다’ 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신 것은 실천적 완전보다는 당신의 명령에 대한 진지한 응답이었습니다. “평강”(샬롬)은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구현된 상태를 가리키는 포괄적 개념이고, “공의”도 구원과 승리와 정의를 내포하는 다의적 개념입니다. “강”과 “바다 물결”은 생명의 풍요로움과 넘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 언약관계를 유지하였다면 이스라엘은 샬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모래처럼 많은 자손’(19)은 유배민의 처량한 모습을 족장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창 22:17; 32:12)과 대비시켜 줍니다. ‘이름의 끊어짐’은 자식의 없음이나 후손의 멸절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위대한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참담한 존재로 전락한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불순종으로 멸망 당한 이스라엘에게 다시 미래가 없습니까?

 

유배민을 구원하시는 여호와(20-22)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소홀히 여길 거슨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이 시대는 말씀의 홍수의 시대입니다. 말씀이 많이, 그리고 자주 들리는 시대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귀만 커지고,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한다면 우리는 유다 백성보다 더욱 복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0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21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22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셨느니라(20-22)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구원과 과거의 구원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땅 끝까지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바위를 쪼개 물이 솟아나게도 하셨습니다.

 

(1) 바벨론 탈출(20)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기에 구원이 가능합니다.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이 제2의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급히 애굽을 떠난 것처럼(출 12:11; 신 16:3) 후손들도 도망치듯 바벨론을 떠나야 합니다(20). “피하고”의 ‘바라흐’는 원래 ‘도망합니다’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구속자 여호와께 의존하여 바벨론을 떠나야 하고, 출바벨론의 구원 경험을 땅 끝까지 선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환호하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고 땅 끝까지 알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킨 여호와의 능력을 온 세상에게 전하는 증인 역할이 맡겨집니다.

 

(2) 광야 길을 함께하시는 여호와(21)

 

첫 번째 출애굽과 두 번째 출애굽(출바벨론)이 하나로 연결되어 선포됩니다(21; 43:19). 처음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막으로 인도하시지만 목마르지 않게 해주십니다. 그때처럼 바위를 쪼개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십니다(참조, 출 17:1-7; 민 20:2-11; 시 78:15,16; 105:41; 114:8). 출애굽의 광야 기적이 출바벨론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출애굽 때 불모의 광야 길을 함께하셨던 여호와께서 바벨론 유배민이 돌아오는 험난한 길에도 함께하시며 이들의 귀향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3)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22)

 

문맥에 돌출적으로 보이는 22절은 17-19절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악인’은 여전히 여호와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 곧 예언자와 종을 통해 선포된 “새 일”을 거절하고 자기 길을 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유익하도록 가르치시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를 떠난 자들에게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아끼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삶은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자신을 맡길 때 시작됩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떠나길 주저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평강과 공의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출 바벨론의 여정에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민하지 말고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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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8-01)


완고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사야 48장 1-11절


 

평생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완고하게 거역하는 길을 갑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지만 그분의 명예를 훼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무조건 믿어야 합니까? 이스라엘이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기만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외음부터 말씀하시고 이를 이루시면서 역사를 이끌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전 약속이 모두 성취됐다면 미래 약속도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진실과 공의가 없는 이스라엘(1-2)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어 철저히 욕망을 추구합니다.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진실과 공의에 있습니다. 삶에 거짓과 악의로 가득하면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없고, 회복될 수 없습니다.

 

1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2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1-2)

 

유다 사람들의 말과 행실은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이스라엘이라, 유다의 자손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심기며 의하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1) 전통에 따른 경건(1)

 

이스라엘이 들어야 할 말씀은 3-11절에 나오지만, 이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청자들이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순종하지 않았음을 시사해줍니다. “야곱의 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조상에서 나왔음을 보여주고 또 각 구성원의 일치와 연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는 이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참된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허리”는 바벨론유배민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사로잡혀 온 자들임을 시사하고, 창세기 49:8-12에 나오는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을 암시합니다. 이들은 자랑스러운 전통의 계승자이며 여호와를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교적 환경에 살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자신들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는’ 자들, 즉 조상들의 신앙 전통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고백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2) 거룩한 성 출신을 자랑하는 자들(2)

 

더 나아가 “거룩한 성 출신”임을 자랑합니다. 유배민은 예루살렘의 이름을 따라 자신들을 예루살렘 공동체로 간주하였기에 “거룩한 성 출신”이란 표현에는 종교적 의미도 포함됩니다. 민족적-종교적 전통에 뿌리내린 유배민의 경건은 사람들의 눈에는 완벽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보시기에는 진실과 공의가 없는 속 빈 껍질에 불과했습니다.

 

'처음 일들'의 선포(3-6)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을 입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선민으로 자처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백성임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진실과 공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은 신앙의 가문이나 연조, 자의식 같은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됩니다.

 

3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4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5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내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6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3-6)

 

이스라엘 자신들을 이렇게 칭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에게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 사실을 후대의 이스라엘에게 기록된 말씀을 통해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은 진실도, 공의도 실천하지 않으며, 완고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1) 알려주시고 이루신 여호와(3)

 

여호와의 역사 경영을 되돌아봅니다.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하실 일들을 미리 알려주시고 이를 이뤄오셨습니다(3). “예로부터"는 세상이 창조된 이후,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를 가리키고, ”처음 일들”은 6절의 “새 일”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예언자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 선포되고 성취된 모든 사건을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예언이 성취된 과정으로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재앙이나 심판의 문맥에 등장하는 “홀연히”는 심판의 돌발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분께서는 알리신 일들이 때가 되면 단호하고도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2) 이뤄지기 전에 알려주신 이유(4-5)

 

4-5a절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미리 알려주신 이유를 가르쳐주는데,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의지적이고 완강하고 단호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절했습니다(참조. 신 31:27; 렘 5:3; 겔 3: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역한 성품을 아셨기에 핑계할 수 없도록 처음부터 먼저 들려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5b절은 유배민이 우상숭배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일부 유배민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멸망에서 이방 신들의 승리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언자들의 선포와 그 결말을 살펴본다면 우상들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쓸데없는 소리를 더는 떠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역사를 경영해 오셨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3) 증인의 역할(6a)

 

이야기의 흐름과 내용에서 6절의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것을 보라”는 5절의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에 직접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미 들은 것들을 살펴서 그 진위를 확인해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알리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개별적 사건들의 합(合)이 아니라 연속적인 역사 전체를 가리킵니다. 한두 사건은 우상들도 우연히 예견하고 이룰 수 있지만, 역사를 연관된 흐름으로 선포하고 이끄시는 분은 여호와 외에는 없습니다. 첫 번째 논증은 수사적 의문문으로 끝을 맺습니다.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역사적으로 확인된 보고 들은 것을 알리도록 권면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과거 역사에 대한 공적 증인의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새 일’의 선포(6b-8)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 주시고 그대로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의 역사를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배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립니다.

 

7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8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7-8)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 일, 곧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는 은비한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들어본 적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는, 전혀 새로운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인간의 완악함과 패역함을 뛰어넘습니다.

 

(1) ‘새 일’을 알려주시는 여호와(6b)

 

하나님께서 이제 “새 일”을 선포하십니다(6b). 3절의 “예로부터”에 대응하는 “이제부터”는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는 역사의 전환점을 가리킵니다.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간 심판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처음 일들”(이전 일들)이 주전 587년 유다의 멸망과 유배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이라면, ‘새 일들’은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내다보는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이제 심판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새로운 일들, 곧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감추어진 일들)”을 들려주십니다. 예로부터 알려지고 들려진 처음 일들(3)과 달리 새 일들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에게 알려지거나 들려지지 않았던, 이제 막 시작되는 사건들입니다.

 

(2) 지금 창조된 ‘새 일’(7)

 

이 새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 곧이제 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며, “오늘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들어본 적이 없던 것들입니다(7).새 일들은 창조되자마자 즉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다고 먼 훗날에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창조주가 선포하셨기에 신속하게 진행되고, 또 이런 의미에서 지금 선포됨으로써 창조됩니다. 창조의 능력을 품은 하나님 말씀은 선포되는 순간부터 작용합니다. 새 일의 미지적(未知的) 성격은 3절에 나오는 성취의 돌발적 성격(‘홀연히’)에 상응합니다. 7b절은 56절과 유사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새 일들은 다른 신들을 통해 알려진 적이 없는, 하나님께서 지금 창조하신 일들이기에 누구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새 일들에 대한 신들의 무지는 이들의 무능력과 이들이 헛것임을 보여줍니다. 새 일들의 선포를 듣고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역사도 지배하시는 참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상 7a절에 직접 연결되는 8a절은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창조된 새 일의 ‘새로움’을 강조하는 언급입니다. 새 일에 관해서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고, 그렇기에 당연히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3) 들어본 적이 없는 ‘새 일’(8)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도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일이 선포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 일을 이제야 알려주시는 이유는 이들이 배반만 하고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라 불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8b).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돌봄과 관심의 대상’이던 이스라엘(참조. 44:1,24; 49:1, 5)이 여기서는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로 언급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본성에 속하는 악행이었습니다. 요약하면, 예로부터 알게 한 “처음 일들”을 들으려 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새 일”도 듣지 않을 것이기에 이들에게 미리 알려지지 않고 ‘지금’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새 일’의 선포 근거(9-11)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 시켜 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높이지 못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새 일을 행하심으로 친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9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11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9-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그들을 멸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징계의 과정을 통해 연단하기는 하시지만, 새 일을 행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1) ‘내 이름을 위하여’ 참으시는 분(9)

 

그 목이 쇠의 힘줄이고 그 이마가 놋인(4),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인(8)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처음 일들”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멸망에 떨어진 이스라엘이 “새 일”의 선포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쪽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구원이 하나님의 자기결정에 의해 그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이름과 당신 영광(명예)을 위해 노여움을 참고 분노를 억눌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9).

 

(2) 이스라엘의 연단(10)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연단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행동을 일러 모태에서부터 배역하였다고 평가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잘못과 죄악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나를 위하여’ 이루시는 분(11)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11)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 당신 능력을 과시하시고 당신 이름의 영예를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심으로 당신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지도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성품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인도하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된 것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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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7-01)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7장 1-15절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은 오만해져 그들의 번영이 자신의 힘과 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고통 위에서 사치와 부를 누리면서 자신의 나라가 영원할 것처럼 자고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이란 한낮의 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에 빠진 바벨론을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 민족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던 바벨론의 운명이 만군의 여호와에 의해 멸망으로 결정 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던 것처럼 바벨론도 멸망당하고 주민들이 사로 잡혀간다. ‘여러왕국의 여주인’이 보좌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앉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당신 백성을 위하여 바벨론에 보복하십니다.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1-4)

작은 나라에 사는 한 사람이 강대국의 멸망을 예언한다면 다들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이처럼 아사야의 예언은 당시에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었지만, 그는 당당하게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국가나 도시의 이름은 여성명사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사야는 바벨론을 여성에 비유하는데, 흥미롭게도 그 여성의 연령대를 조금씩 높이며 그 예언을 진행합니다.

 

1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2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3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4우리의 구원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1-4)

 

바벨론은 무너졌습니다. 바벨론은 처녀 딸같이 곱고 아리따운 존재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흠모하고 존경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수욕과 치욕을 당할 것입니다. 보좌가 아닌 티끌과 땅에 앉게 될 것입니다.

 

(1) 땅바닥에 앉는 바벨론(1)

 

민족들을 짓밟으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처녀 딸 바벨론”에 멸망과 사로잡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화려함을 자랑하던 여왕 바벨론은 보좌에서 내려와 티끌에 앉아야 합니다(1). ‘티끌에 앉다’는 자주 탄식과 관련돼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낮아짐을 상징합니다.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던’(14:17) 바벨론이 그 위엄과 영화를 빼앗기고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곱고 아리따운 바벨론의 현재 모습이 곧 닥칠 비참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2) 수치를 당하는 바벨론(2-3a)

 

화려함과 사치를 즐기던 여왕 바벨론이 비천한 여종의 신세로 전락합니다(2). 부유한 집안에서 곡식 가루를 내기 위해 맷돌을 돌리는 일은 여종의 일에 속했습니다. “너울을 벗으며”도 바벨론의 쇠락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너울은 귀족 집안의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는 데 쓰는 천입니다. 여종이 된 바벨론에게 너울은 맷돌질을 하는 데 방해만 되기에 벗어버립니다. ‘치마’는 바닥에 끌리는 긴 옷자락을 가리킵니다. 왕궁에서 사치와 품위를 자랑하며 입던 자락이 길게 끌리는 옷은 강을 건너는 데 짐만 될 뿐입니다. 사로잡히거나 도주하는 여왕 바벨론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다리를 드러낸 채 강을 건넙니다. 속살(알몸)이 드러나고 치부까지 보이게 됩니다(3a).

 

(3) 여호와의 보복(3b)

 

바벨론의 멸망이 정치적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사건입니다(3b). 하나님의 보복은 원래 사법적 영역에 속한, 특히 ‘피의 복수’ 제도(참조. 창 4:15,24; 출 21:20)에서 나온 개념으로 훼손된 법질서의 회복을 목표로 합니다.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는 단호한 보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맞서는 자는 누구라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4) 우리의 구원자 만군의 여호와(4)

 

4절은 신뢰의 고백이 담긴 찬양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의 구원자’의 이름입니다. 구원자(고엘)는 씨족 구성원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권리를 찾아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는 ‘피를 보복하는 자’로 살인자를 만나면 죽여야 합니다(민 35:19,21,24-2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고엘 자격으로 바벨론에 보복하십니다.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의 구속자’에 대한 찬양의 언어입니다.

 

내가 영영한 여주인이 되리라(5-7)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짓밟고 혹사시켜 취한 번영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부가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처우 위에서 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까닭은 무자비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고 노인들에게조차 무거운 멍에를 지웠습니다.

 

5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 6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7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5-7)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잠깐 쓰임 받은 종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만했고, 지나치게 포악하게 이스라엘을 대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또한 모든 열국의 여주인처럼 행세하며 포악함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 흑암으로 돌아가야 하는 바벨론(5)

 

앗수르처럼 바벨론도 교만에 사로잡혀 멸망의 길을 갑니다. 갈대아는 보좌에서 내려와 티끌에 잠잠히 앉아 있다가 흑암으로 들어가야 합니다(5). 흑암은 멸망과 심판을 상징합니다. “여러 왕국의 여주인”은 바벨론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을 지칭하는 ‘여주인’은 2절에 묘사된 여종과 대조됩니다. ‘왕국들의 여주인’이라 불리는 바벨론이 맷돌을 돌리는 여종이 됩니다.

 

(2) 여호와의 백성을 학대한 바벨론(6)

 

바벨론의 운명이 이스라엘의 심판에 연계됩니다(6). 여호와께서는 당신 백성의 배반에 분노하셔서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동정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억압했습니다. 존경과 배려의 대상인 노인에게도 멍에를 무겁게 짊어지웠습니다. 유배민에 대한 바벨론의 잔혹하고도 비인간적인 처우를 고발하십니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점령과 유배는 하나님의 결정이기에 책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역할은 전체적으로 10:5-19에 나오는 앗수르의 역할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가 교만으로 심판에 떨어진 것처럼 바벨론도 같은 운명에 넘겨집니다.

 

(3) 장래 일을 생각하지 않은 바벨론(7)

 

영원한 통치권 주장이 교만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됩니다(7).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현재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영원한 지배권을 주장했다는 뜻입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자기 기업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 일[들]”은 6절에 언급된 바벨론의 무자비한 통치 아래 억압당하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종말”은 ‘여호와의 백성을 학대한 결과로 초래될 일’을 가리킵니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8-11)

멸망받을 바벨론이 악은 교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만이 가득합니다. 과부가 되지도 않으며, 자녀를 잃지도 않으리라고 큰소리칩니다. 불행과 아무 상관없이 살 수 없다고 믿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고 믿습니다.

 

8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9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8-11)

 

멸망 받을 바벨론의 악은 교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만이 가득합니다. 과부가 되지도 않으며, 자녀를 잃지도 않으리라고 큰소리칩니다. 불행과 아무 상관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숨겨져 있어서 어떤 존재도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며 심판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1)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는 바벨론(8-9)

 

풍족하고 안락한 삶이 바벨론을 교만하게 합니다(8). 사치와 평안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업적에 쉽게 도취돼 자기 능력을 절대화합니다.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는 교만의 정체와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 주장과 문자적으로 거의 동일합니다(43:11; 44:6; 45:5,6,14; 46:9 등). 바벨론이 신적 지위를 주장한 것입니다(참조. 14:13-14).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은 주민의 상실을 의미하고 ‘과부가 됨’은 ‘버려짐’, ‘수치’, ‘보호를 박탈당한 절망적 삶’을 상징합니다. 과부로 나앉지도 않고 자녀들을 잃는 일도 없으리라는 바벨론의 주장은 자녀를 잃고 과부처럼 절망하는 예루살렘의 운명(49:14-21)과 대조됩니다. 그러나 자신은 겪지 않으리라고 확신한 두 가지 일이 “한 날에 갑자기” 바벨론에 들이닥칠 것입니다(9).

 

(2) 모든 지혜에 걸려 넘어지는 바벨론(10-11)

 

정한 때가 되면 바벨론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바벨론의 운명을 예루살렘의 운명(51:19)과 연결해줍니다. 주술과 주문은 특히 재앙이나 불행을 막는 데 쓰는 제의적 기술이며, 바벨론의 주술과 주문은 고대 근동에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재앙을 선포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시기에 바벨론의 수많은 주술과 주문이 쓸모없게 됩니다. 하지만 교만에 취한 바벨론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가졌다고 자기 미래를 자신합니다(10). 바벨론이 의지하는 ‘악’은 앞 절에 나오는 주술과 주문을 가리킵니다. 악의 열매가 재앙이기에 악에 의존하는 자에게 재앙은 운명이 됩니다. “나를 보는 자가 없다”는 은밀한 공간에서 행하는 해로운 마술이나 주술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은 제의적-주술적 기술을 통해 신의 영역을 넘나들었습니다. 바벨론이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지혜와 지식을 확신했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주술과 주문에 관한 제의적 지식과 기술을 가리킵니다(44:25). 바벨론은 이 지혜와 지식으로 재앙을 예측하고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이 의지하는 주술과 주문은 ‘악’(라아)이기에 ‘재앙’(라아)이 들이닥칩니다(11). 여호와가 내리는 재앙이기에 바벨론의 요술로는 피하지 못하고, 바벨론은 순식간에 멸망에 떨어질 것입니다.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 보라(12-15)

바벨론에게 하신 경고는 결국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엘로카드입니다. 우리는 형통할 때 그 번영에 취해 하나님의 사인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장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벨론은 우리의 반면교사입니다. 섰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주의해야 될 때임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12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놀라게 할 수 있을는지, 13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 14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덥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 15네가 같이 힘쓰던 자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장사하던 자들이 각기 제 길로 흩어지고 너를 구원할 자가 없으리라(12-15)

 

바벨론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자 바벨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바벨론이 자랑하하던 주문과 많은 주술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앞에 주술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어둠의 세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 바벨론 학문의 무능력(12-13)

 

바벨론이 자랑하는 제의적 수단의 무능력을 조롱합니다(12). 젊어서부터 애써 익혀온 주문과 주술로 어쩌면 재앙을 위협하여 쫓아낼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술사들과 마법사들이 바벨론을 재앙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책을 제시하지만 도움은커녕 피곤하게만 할 뿐입니다. 이들의 많은 조언이 바벨론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이번에는 점성술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구해보라고 제안합니다(13). 하지만 점성술도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2) 지푸라기처럼 불에 살라지는 자들(14)

 

점성술사들은 불에 타버리는 지푸라기와 같이 멸망할 것입니다(14). 이들을 태우는 불은 그 앞에 앉아 열기를 쬐거나 몸을 덥힐 숯불이 아닙니다(44:14-15). 점성술사들(천체숭배자들)과 우상을 만드는 자들(우상숭배자들)이 동일한 운명에 떨어질 것을 시사합니다.

 

(3) 구해줄 자 하나도 없는 바벨론(15)

 

바벨론을 돕겠다고 나섰던 자들이 제 목숨도 구하지 못합니다(15). 바벨론이 자랑하는 종교뿐 아니라 바벨론에 쌓인 엄청난 부도 재앙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바벨론에 경제적 부를 가져다주었던 대상들이 살길을 찾아 제각기 흩어져 도망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 번영을 추구합니다. 타인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와 부를 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의 영혼을 그 밤에 도로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 없이 이룩한 번영은 독이 되어 치명적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경외심이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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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6-01)


비교할 수 없으신 하나님

이사야 46장 1-13절


 

때때로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고귀한 존재이면서 생명 없고 하찮은 미물에 머리 조아리는 모습을 보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은 그토록 우상적 대상에 집착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모습은 어떤 차별성을 가져야 합니까?

 

  • 앞에서 우상들을 포괄적으로 고발한(40:19-20; 41:7; 44:9-20) 예언자는 이제 시선을 바벨론의 우상들, 특히 미르둑과 느보에게로 돌려 이들의 무능력을 조롱합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민족들을 떨게 한 바벨론의 국가신 마르둑과 그의 아들 느보의 실체가 바벨론이 열망할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숭배자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짐승이 끄는 수레에 실려 안전한 곳으로 도피합니다. 피곤한 짐승의 짐만 됩니다.

 

바벨론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1-4)

 

우상 숭배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잘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손으로 만든 물건을 자기 아래가 아니라 위에 두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합니다. 현대인들의 대표적인 우상은 돈, 졸업장, 직함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람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은 이것들에 지배를 받곤 합니다.

 

1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2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 3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1-4)

 

드디어 바벨론이 무너졌습니다. 이사야는 말씀을 통해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신인 벨과 느보는 버려질 것입니다. 글쓰기와 지혜의 신으로 알려진 느보는 바벨론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1) 무거운 짐이 된 신들(1)

 

예언자는 바벨론 신들의 무능력을 풍자적으로 고발합니다(1). 벨(마르둑)이 엎드러졌고 느보가 고꾸라졌습니다. 침략하는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신상을 수레에 싣고 안전한 곳으로 옮깁니다. 축제 때 메고 다니던 화려하고 거대한 신상들이 이제 피곤한 짐승에게 무거운 짐으로 지워집니다.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우상들입니다. 우상들은 숭배자들에 의지해서 움직이는 생명 없는 물건입니다.

 

(2) 잡혀가는 신들(2)

 

신상들뿐 아니라 옮기던 자들도 엎드러져 적에게 사로잡힙니다(2). 바벨론의 신들은 자기 형상도, 숭배자도, 신상을 옮기던 짐승도 지켜주지 못하는 헛것입니다.

 

(3) 이스라엘을 업으신 여호와(3-4)

 

짐만 되는 바벨론의 신들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업고 안아서 키우셨습니다(3).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는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도 포함합니다. 여호와께서 1인칭 독립인칭대명사 ‘아니’를 다섯 번이나 사용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독점적-책임적 관심을 강하게 보여주십니다(4). 바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헌신과 열정은 늘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백발이 되기까지 업고 가십니다. 노년과 백발은 3절의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와 함께 이스라엘의 전(全) 역사와 실존을 가리킵니다. 바벨론 유배가 그분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의 중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헌신과 사랑은 한결 같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이 지은 이스라엘을 품에 안고 등에 업어 구해내실 것입니다.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5-7)

우상숭배는 고대사회에만 존재했던 현상이 아닙니다. 현대에도 사람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만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5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6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7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5-7)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이방 민족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의 가문은 애굽의 고난 속에서 한 민족으로 잉태되고, 마침내 한 나라가 되어 가나안에 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안았고, 업었습니다.

 

(1) 비교할 수 없는 여호와(5)

 

40:18,25의 경우처럼 5절은 수사적 질문을 통해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주장합니다.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견줄 만한 자가 있습니까? 신들의 위대함이 숭배자들의 크기와 권력에 비례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근원과 존재에 있어 민족들의 신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시기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2) 우상의 실체(6-7)

 

6-7절은 우상을 만들어 봉헌하는 과정을 기술해가면서 그 실체를 풍자적으로 고발합니다. 우상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신을 만들기 위해’ 금전적 지출을 아끼지 않습니다. 장인이 금속이나 나무로 형상을 만드는 작업은 생략되고 마무리 작업만 언급합니다. 도금장이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마무리한 신상이 주문자에게 넘겨지면 사람들이 어깨에 올려 메고 자리에 갖다 놓고 흔들리지 않게 고정합니다. 생명이 없는 물건이기에 움직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소리 질러도 듣지 못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생명이 있어 움직이는 사람이 생명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는 우상에게 도와달라고 부르짖습니다(참조. 시 137:15-17).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우상을 어떻게 하늘과 땅을 당신 보좌와 발판으로 삼으시는 분(사 66:1)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숭배자들의 부르짖음을 듣지도 못하는 우상을 어떻게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출 2:23-25; 삼상 7:9)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희화적으로 기술된 우상의 무능력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시는 분(8-13)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의 간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인이기에 깨어 있지 못하면 이 귀한 증거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께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이후의 삶도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실해야 할 것입니다.

 

8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 9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1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12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13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9-13)

 

 

바벨론은 무너졌습니다. 이제 공주에서 천한 종이 될 것입니다. 맷돌을 돌리고, 치마를 걷을 것입니다. 옷은 신분과 권력을 상징합니다. 이제 노동에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더 이상 그녀를 보호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1) 옛적 일을 기억하라(8-9)

 

드는 사람의 호칭이 긍정적 함의를 갖는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3)에서 책망과 고발의 어조가 담긴 “너희 패역한 자들”(8)과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12)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불순종을 전제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거듭 위로와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달하셨는데도 이스라엘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참조. 42:18-25;43:8,22-28). 유배민은 짐만 되는 바벨론의 신들에 현혹되지 말고 구원과 보호가 오직 여호와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 일”은 1-4절 또는 5-7절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유배민은 하나님께서 먼 옛날부터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셨던 ‘옛적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9). 그분의 이전 일들을 살펴본다면 그분께서 어떤 분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홀로 결정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으로 누구와도 권력과 영광을 나누지 않으십니다.

 

(2)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10-11)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종말”과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알려주셨습니다(10). ‘종말’은 결과로서의 ‘장래 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앞선 선포와 뒤에 나타날 결과의 일치를 보여줍니다.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일이 임의적 사건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또는 앞으로 드러낼 장래 일은 그분께서 처음부터 선포하신 말씀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분은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말씀하십니다. 옛적부터 역사를 경영해 오신 분께서 알려주셨기에 그분의 계획과 뜻은 모두 반드시 성취됩니다. 유배민의 해방을 위해 세우신 계획도 옛적부터 해오시던 방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먼 나라에서 당신 계획을 이룰 자를 부르십니다(11). 바벨론을 기준으로 고레스의 바사는 동쪽에 위치합니다(41:1). 하나님께서 먼 나라에서 한 민족을 불러오신다는 언급은 그분의 우주적 통치권의 표현으로 심판 선포에 자주 등장합니다(참조. 사 5:26; 렘 4:16; 5:15; 합 1:8). ‘사나운 날짐승’은 행동의 신속함과 갑작스러움을 상징합니다. 빠른 속도로 먹이를 덮치는 맹금처럼 고레스는 신속하게 내달리며 민족들을 공격하고 정복합니다. 메대-바사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획을 실행하는 자, 곧 그분의 도구로 부름 받습니다. 바벨론을 불러 예루살렘과 유다를 멸망시키신 하나님께서 이제 메대-바사를 불러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십니다. 그분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예견 능력만으로는 신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참된 하나님입니다. 유배민은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계획이 눈앞에서 구체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까운 구원을 회의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당신께서 결정하신 구원의 때가 임박했음을 선포하십니다.

 

(3) 가까이 온 구원(12-13)

 

12절의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는 고레스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에 회의적이거나 거절한 자들입니다. ‘공의(처다카)는 구원 또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구원 약속을 신뢰하지 않음으로써 값없이 주신 구원에서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뢰를 거절한 자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다시 가까이 온 구원을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옛적부터 당신 계획을 미리 알려주시고 그대로 이루신 분께서 그분의 공의와 구원(도움)이 가까이 왔음을 거듭 말씀하십니다(13).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생각하듯이 그분의 구원은 먼 미래에 속하지 않습니다(참조. 5:19; 겔 12:21-28).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까이 가져오셨기에 지체하지 않고 이뤄질 것입니다. 현재 바벨론 제국의 북동쪽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격변 가운데 이미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구원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공의를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그분의 구원 약속이 지체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참조. 56:1). 이스라엘이 약속을 붙잡으면 구원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해 시온에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분께서 시온의 구원을 통해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영화를 통해 당신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제국의 현실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끝까지 하나님만 신뢰하며 버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 신 앞에 거짓 경배하며 복종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대상을 붙들며 운명을 내맡길 수도 없습니다. 안고 입어 오늘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힘을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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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5-03)


숨어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혜

이사야 45장 18-25절


 

유배 상황을 살다 보면 세상의 신은 커 보이고 하나님은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행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아 감추어진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세상 앞에서 초라해질 때,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여호와께서는 땅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세우신 질서의 범위에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도 포함됩니다. 창조질서의 유지가 여호와의 의지이기에 땅을 혼돈에 빠뜨리는 세력은 그분의 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땅을 황무지로 만든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땅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개입하십니다.

 

유일하신 여호와(18-19)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다 백성들은 이미 형식적인 종교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안만큼 섬기고 예배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19나는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한 것을 알리느니라(18-19)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창조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 범죄 때문에 무가치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 그 한 분만이 참 신이시고 역사를 뜻대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분이라고 선지자는 소개합니다. 말씀 선포에 앞서 여호와를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특히 땅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합니다. 창조에 관한 단순한 신학적 진술이 아닙니다. 논쟁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1) 창조 질서를 정하신 분(18)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창조하신 분’, 곧 우주적 질서를 세우시고 빛과 어둠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7).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별은 그분께서 만드신 것들에 불과합니다. 점성술사들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해 신들의 의지를 읽어내지만(47:13), 하늘과 별은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낼 뿐입니다(시 19:1). 땅의 운명은 하늘을 지으신 분께서 결정하십니다. 하늘과 별을 창조하신 분께서 땅을 견고하게 빚어 만드셨기에 땅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땅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빚으셨습니다. 땅의 견고함과 질서의 유지가 창조주의 의지에 속하기에 사람들이 땅 위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정복자 고레스의 등장과 승리가 땅을 혼돈에 빠뜨려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들 뿐이라는 이스라엘과 민족들의 비판(9-13)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무서워 떠는(41:5) 바사 왕 고레스는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땅의 질서를 보장해주시는 분께서 혼돈에 빠진 땅의 질서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 역사 무대에 등장시킨 인물입니다. 바벨론이 땅의 질서를 파괴하였기에 창조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불러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질서와 공의를 다시 세우십니다(8).

 

(2) ‘정직한 것’을 알리시는 분(19)

 

본 절은 하나님의 언어 행위(계시의 전달)의 고유성과 특징에 초점을 맞춥니다. 세 개의 동사(말하다, 이르다, 알리다)가 사용됐는데, 부정문의 완료(‘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르지 아니하였노라’)로 시작해서 무시간적인 현재분사(말하고, 알리느니라)로 끝납니다. 처음 두 번의 완료는 말씀의 양태에 관한 언급이고, 나중 두 번의 현재분사는 말씀의 확실성에 관한 언급입니다. 그분은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하지 않으셨고, 야곱 자손에게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도 않으셨습니다. ‘감추어진 곳’의 ‘바세테르’는 '은밀하게’, ‘숨어서’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비밀히(바세테르) 말하지’ 아니하셨습니다(48:16). 그분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으로(15) 그분의 활동은 신비스럽고도 놀랍지만, 언제나 당신 계획을 분명한 말씀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우상숭배는 은밀히 이뤄지지만 그분은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 의지를 공개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캄캄한 땅”은 음부보다는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역사의 가장자리에 속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역사의 중심부에서 활동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혼돈하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셨기에, 그분은 야곱 자손에게 “혼돈 중에서” 당신을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을 의미하고, 혼란과 멸망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으로 이끕니다. 그분께서 처음 세우신 창조질서는 역사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유지됩니다. 그분은 “의”를 말씀하시고 “정직한 것”을 알리십니다. ‘의’(체데크)는 ‘공의’, ‘구원’, ‘승리’, ‘진리’의 폭넓은 영역에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8절의 경우처럼 구원을 의미합니다. ‘정직한 것’(메샤림)은 창조주께서 약속하신 구원 사건의 확실성과 그 결과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약속은 옳은 것이기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20-21)

세계적인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대작 ‘역사의 연구’에서 바벨론에 의해 망한 유다의 신 여호와의 이름은 20세기의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정작 그들을 정복한 바벨론의 신 마르독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는 사실을 주목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20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0-21)

 

하나님만이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 어떤 신도 구원을 베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공의’와 맞물려 있습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른 생명의 법칙입니다.

 

(1) 여전히 무지한 자들(20)

 

여호와의 시선이 야곱 자손에서 민족들에게로 향합니다.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은 이스라엘의 유배민보다는 바벨론이 멸망할 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이방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십니다. 이들이 소송을 당하는 이유는 여전히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벨론이 멸망할 때 우상들이 자신들을 구해주었다고 믿으며 ‘나무’에게 기도합니다. 바벨론의 멸망 가운데 드러난 여호와의 ‘의와 정직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무지한 자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십니다. 땅의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을 우상들이 결정했다는 증거를 찾아 함께 의논해보도록 권하십니다. 여호와를 제외하고 아무도 고레스의 등장과 승리를 ‘옛적부터’ 들려주고 ‘이전부터’ 알려준 신이 없었습니다. 민족들을 재판정에 불러 무지를 고발하지만, 심판을 위한 소송은 아닙니다.

 

(2)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21)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스라엘에 한정됐던 공의와 구원이 민족들에게로 확장됩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이 땅에서 살 수 있게 해주셨기에, 그분은 민족들에게도 의로우신 하나님과 구원자가 되십니다.

 

민족들의 하나님 여호와(22-25)

부끄러운 삶과 자랑스러운 삶의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아무리 이름을 크게 떨쳤어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부끄러운 삶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2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23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 24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25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22-25)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때 먼저 말씀을 보내십니다. 선지자의 입을 통해 선포된 말씀은 능력이 되어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존재이고 행동이며, 능력입니다.

 

(1) 돌이킴의 권면(22)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구원의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당신 종을 통해 민족들에게 정의를 베풀기로 하신(42:1-4) 여호와께서 이들에게도 돌아와서 구원을 받도록 권면하십니다(22). “땅의 모든 끝”은 그분께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창조한 땅(18)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2) 공의로운 말의 성취(23)

 

23절의 “내가 나를 두고 명세하기를”은 민족들을 구하시려는 확고한 의지를 표현합니다.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는 땅 위에 공의와 창조질서를 회복시키시려는 계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여줍니다(참조, 55:11), 민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여호와의 맹세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께 순종하게 만듭니다.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께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해야 합니다.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이 우상이 헛것임을 깨닫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분 외에 다른 이가 없음을 고백하고 경배합니다. ‘무릎을 꿇다’가 여호와를 구원자로 인정하는 행위라면, “혀의 맹세”는 그분의 공의와 구원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3) ‘공의와 힘’의 하나님(24)

 

일부가 여호와의 1인칭으로(내게 대한) 나오지만, 24절에서는 화자가 예언자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반절의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는 신학적 진술이자 고백입니다. 복수의 ‘공의’(처다코트)는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구원 행위들을(참조. 삿 5:11; 삼상 12:7; 미 6:5; 시 103:6), ‘힘’(오즈)은 그 구원 행위를 실제화 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께서는 구원 약속의 성취를 당신의 의무로 삼으십니다. 후반절은 경고와 위협의 말입니다. 여호와의 초대에 모든 사람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초대를 거절하고 그분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선언됩니다. 여호와의 공의와 힘을 신뢰하는 자들과 달리 그분의 통치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자들은 그분께 와서 재판을 받고 수치를 당합니다(참조. 45:16;66:24).

 

(4) ‘의롭다 함’을 얻는 이스라엘(25)

 

25절은 ‘야곱 자손’에게 주어진 18-19절의 경우처럼 ‘이스라엘 자손’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는 자들과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 안에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17). 현재 수치를 당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만 있는 공의와 힘’으로 수치에서 벗어나 영화를 얻습니다.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나타난 여호와의 공의와 권능을 보고 그분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은 크고 위대한 성취에 있지 않습니다. 힘과 화려함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창조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의로운 길을 걷는 데 있습니다. 눈을 떠서 의롭고 정직하여 권능으로 권을 베푸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너머의 크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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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5-02)


숨어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

이사야 45장 8-17절


 

이해할 수 없다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내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불평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서 계시는 분입니다. 창조주이시자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여겨질 때, 정작 보아야 할 진실은 무엇입니까?

 

  •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로 바사 왕 고레스를 선택한 여호와의 결정(44:24-45:7)에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의 권한과 권위로 이들의 이의 제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창조주의 결정에 반발하는 자들은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며 대드는 질그릇 조각이나 진흙돠도 같습니다.

 

구원을 창조하시는 여호와(8)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들어 메시야로 삼으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위햐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세속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님께 아뢰고, 그분께 의탁하며 그 섭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8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8)

 

빛과 어둠과 평안과 환난을 지으시는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구속사의 범위가 이스라엘을 넘어 온 땅으로 확장됩니다. 하늘과 구름이 이슬과 비를 내려 땅이 풍족한 결실을 보게 하듯이(55:10), 여호와께서 의의 비를 내리셔서 땅이 공의의 싹을 틔우고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구원과 공의를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명령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공의’는 승리나 구원을 의미하는데, 구름이 흘려 내리는 공의(체데크)와 땅이 싹트게 하는 공의(처다카) 사이에는 양태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공의(구원)의 결정’이고, 후자는 ‘공의(구원)의 상태’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을 결정하시고 땅에 구원이 편만하게 하십니다. “창조하였느니라”는 예언자적 완료로 주체가 “나 여호와” 이기에 반드시 이뤄질 것을 보여줍니다. 동사 ‘창조하다’는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땅의 구원이 새로운 창조 행위에 해당함을 시사해주기도 합니다. 창조주 여호와의 남다른 개입에 의해 공의가 통치하는 새로운 구원 시대가 온땅에 임하게 됩니다. 현재 문맥에서 보자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부르신 고레스가 그분의 구원 결정에 따라 땅에 공의도 세웁니다.

 

여호와의 절대주권(9-13)

우리의 작은 지혜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을진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따질 수 있겠습니까? 가끔 하나님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있음을 맏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못해 보이고 불신자들이 성도들보다 더 형통해 보여도, 그 뒤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복 주심을 깨닫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9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10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진저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3내가 공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9-13)

 

하나님께서는 절대타자로서 존재하십니다. 땅의 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늘의 일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땅의 사람뿐 아니라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12)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없이 된 일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땅과 하늘의 모든 일의 주체이시며, 그 일을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이십니다.

 

(1) 창조주의 결정에 이의 제기하는 자들(9-10)

 

처음 두 절은 화의 선포입니다.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에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에게 토기장이의 비유를 사용해 화를 선포합니다. 질그릇 한 조각에 불과한 자가 자기를 빚으신 분과 다툴 수 있겠습니까? 진흙이 자기를 빚으시는 분께 ‘당신은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거요’, ‘당신이 만든 것에는 손이 없지 않소’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질그릇도 아닌 질그릇 한 조각이, 한 조각도 아닌 그 재료가 토기장이에게 자신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진흙으로 질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는 진흙과 그 진흙으로 만드는 물건에 절대 권한을 행사합니다. 여호와와 사람의 간격은 후자에 의해 도전받거나 문제시될 수 없는 무한 간격입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땅의 흙으로’(창 2:7) 빚어졌기에 흙으로 돌아갈(창 3:19) 수밖에 없는 사람이 그를 빚어 만드신 분께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출산의 비유는 황당함과 부조리함을 더욱 인상적으로 고발합니다. “아버지에게 ‘무엇을 낳고 계십니까?’하고, 또 여자에게 ‘무엇 때문에 산고를 겪고 계십니까?’하고 말하는 자에게 화가 있어라.” 문제 제기가 이번에는 시간상으로 너무 빨랐습니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자신의 출생에 관해 아버지와 어머니(여자)에게 따집니다. 사람이 창조주 여호와의 역사 경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자신의 출산에 관여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론적 한계에 따라 진흙이 토기장이의 창조 의지에, 자식이 부모의 창조 의지에 조금 관여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여호와의 계획과 결정을 향해 발언권이 없습니다.

 

(2) 거절하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11)

 

현재 문맥에서 11-13절은 여호와의 역사 경영에 이의를 제기한 자들에게 주는 답변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수의 청자 ’너희‘를 책망하십니다(11). ’너희가 내 아들들에 관하여 장래 일나에게 물으려느냐? 내 손의 작품에 관하여 너희나에게 명령하려느냐?‘ 동사 ’묻다‘(샤알)는 원래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지만, 여기서는 병행하는 ‘명령하다’가 보여주듯이 ‘따지다’, ‘살펴보다’의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내 아들들’과 ‘내 손의 작품’은 이스라엘을, 청자 ‘너희’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의 역사 경영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로 1차적으로는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내 아들들의 장래 일’은 여호와께서 지으신 이스라엘의 구원 계획으로, 13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은”(40:15) 민족들이 홀로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40:23-24) 분의 역사 경영에 끼어들어 창조주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은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3) 창조하시고 명령하시는 분(1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지 명령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땅을 만드시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늘을 펼치시고 그 안의 모든 군대(별들)에게 명령하신 분입니다(12). 이스라엘은 하늘을 펼친 손으로 만든 작품일 뿐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섬기는 민족들이 하늘의 별들에게 명령을 내리신(참조. 40:26) 분께 명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 여호와께서 택한 고레스(13)

 

고레스의 선택과 승리는 땅과 하늘과 그 안에 있는 사람과 별들을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당신 아들들을 위해 결정하신 것입니다(13). 그분께서 고레스를 일으켜 그의 원정길을 평탄하게 해주시고(참조. 41:2-3, 25; 45:2), 그를 통해 그분 아들들의 장래 일을 성취하십니다. 고레스가 여호와의 성읍(예루살렘)을 건축하고 그분의 사로잡힌 자들을 놓아줄 것입니다. 성전 재건을 내다보는 44:28과 달리 유배민의 귀향이 약속됩니다. “값이나 갚음이 없이”는 유배민의 해방이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반드시 성취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공의로”는 현재 문맥에서 고레스의 승리를 8절에 연결시켜 주기도 합니다. 땅에 공의를 세우기로 하신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통해 땅에 공의가 싹트고 구원이 열매 맺게 하십니다.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14-17)

사람은 어쩌다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귀중한 존재입니다. 만일 우리가 목적 없이 지어진 존재하면, 지금 처해 있는 형편은 한없이 답답하고 불행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1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이 네게로 건너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15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16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17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14-17)

 

역사와 인간은 인과율의 법칙을 뛰어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타자로서 역사를 초월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최고의 부와 명성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심지어 강대한 나라들이 굴복하고 간구할 것입니다.

 

(1) 시온의 회복(14)

 

시온이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그분의 성읍으로 회복됩니다.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이 시온(이스라엘)의 소유가 됩니다(14; 참조 43:3). 애굽은 노동하여 얻은 결실을, 구스(에디오피아)는 무역하여 얻은 소득을, 스바는 인력을 제공합니다. 애굽과 구스가 재정을 담당하고 스바가 노동력을 제공해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 재건됩니다. 재산과 소득을 민족들에게 약탈당했던 시온의 운명이 보상을 받습니다.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라는 표현은 소유주와 종의 운명이 뒤바뀔 것을 시사해줍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종이 되었던 시온이 주인이 되어 종들을 부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고백보다는 인정입니다. 이들은 파괴되었던 시온에 여호와께서 현존하심을 시인하고 그곳이 다시 예배 처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 땅에 공의를 세우시는 여호와의 권능을 경험한 민족들은 시온의 여호와께서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2) 이스라엘의 구원자(15)

 

예언자가 등장해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스스로 숨어 계시는(자신을 숨기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15). ‘자신을 숨기신 하나님’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심판을 의미하기에 유배와 관련지어 유배 기간 동안 진노 가운데 얼굴을 감추신 분으로 이해하거나, 때로는 여기서 숭배자들도 구해주지 못하는 눈에 보이는 우상과 보이지는 않지만, 능력으로 당신 존재를 과시하시는 하나님을 대조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땅의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길과 방법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현재 문맥에서는 아마도 여호와께서는 숨기심(심판) 중에도 구원자이심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심판 중에도 구원을 결정하시고 이를 실행하시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참조. 8:17). 그분의 구원계획에 따라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부끄러움과 욕에 떨어지고(참조. 44:9-20),

 

(3) 수치에서 벗어나는 이스라엘(16-17)

 

민족들에 의해 부끄러움과 욕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습니다(16-17). 민족들의 눈에는 패배하고 “스스로 숨어 계시는” 것처럼 보였던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에는 영원한 구원을 베푸십니다. 또 이스라엘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힘을 공급받아(40:28-29)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우상 사회의 거짓 안전과 행복에 기대어 사는 자는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창조와 역사의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자는 실패와 좌절을 맛볼 것입니다. 그렇지만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신뢰하며 공의로 행하는 자는 반정의 기쁨을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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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5-01)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하나님

이사야 44장 21절-45장 7절


 

모든 약속을 지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많은 약속을 하지만 이를 모두 지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충분한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 우상은 장인의 손이 만든 작품에 불과하고 여호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역사에 개인해 누가 역사를 지배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분께서 고대 근동에 잘 알려진 바벨론의 종교와 지혜를 무력화하고 당신의 예언을 성취하십니다. 바사 왕 고레스를 불러 당신의 모든 뜻을 이루게 하시고, 이를 통해 당신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21-23)

이스라엘에게 우상숭배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원래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여호와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이제 그 누구보다 자신을 창조하신 여호와의 종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종을 항상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실 날만 기다립니다.

 

21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22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23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21-23)

 

앞서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이 만든 우상에게 인간이 의지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여호와 경배의 합당함을 대조하시는 겁니다.

 

(1) 야곱을 잊지 않으신 여호와(2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이 일”(이것들)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십니다(21). ‘이 일’은 문맥에 따르면 9-20절에 나오는 우상을 만드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기억하다’는 깨달아 마음에 간직하는 능동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실존에 개입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그분께서 빚어 만든 종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는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잊으셨다고 탄식하며 불만을 제기하는(참조. 40:27; 49:14-15; 50:1; 54:8) 이스라엘에게 주는 답변입니다.

 

(2) 야곱을 구속하신 여호와(22)

 

당신의 종을 항상 기억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죄사함을 선언하십니다(22; 참조. 43:25). 구름과 안개는 자주 덧없음과 일시적임을 상징하지만(참조. 호 6:4;13:3; 욥 7:9; 30:15), 여기서는 용서의 완결성과 철저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됩니다. 습기를 머금은 구름과 안개가 햇빛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남김없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용서와 구원이 결정됐기에 이스라엘은 그분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이 쌓아놓은 모든 장애물을 직접 제거하시고 당신께 돌아오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십니다.

 

(3) 여호와의 영광(23)

 

23절은 42:14부터 시작된 긴 단락을 마감하는 찬양입니다(참조. 42:10-13). 하늘과 땅을 포함한 온 우주가 여호와의 구원을 기뻐하며 함께 찬양하도록 초대를 받습니다. 여호와에 의한 이스라엘의 구속이 자연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모든 피조 세계가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된 그분의 왕적 능력을 보고 그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재건(24-28)

기억은 우리의 신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는 애굽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사는 날까지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우리의 영적 삶이 무너집니다.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25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점 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 26그의 종의 말을 세워 주며 그의 사자들의 계획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에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27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28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24-28)

 

여호와 하나님보다 지혜로운 존재는 없습니다.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존재의 본질을 하시며, 형상의 의미를 꿰뚫고 계십니다. 점치는 자들이 미래를 안다고 하지만, 미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꼐서는 그들을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

 

(1) 여호와의 자기소개(2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자신을 “네 구속자”와 ‘모태에서 너를 지은 분’(24; 참조. 44:2; 49:1,5; 렘 1:5; 시 22:10)으로 소개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모태에서부터 빚어 만드셨기에 그분은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되십니다. 이스라엘의 실존이 그분께 의존적임을, 양자의 관계가 어떤 경우에도 파기될 수 없는 부모와 자식의 본질적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구속자가 되신 여호와께서는 ‘만물’(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기도 합니다. ‘만물’에는 자연은 물론 역사까지도 포함됩니다. 하늘과 땅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홀로 천지를 만드셨기에 홀로 역사를 경영하십니다. 바벨론은 수메르로부터 이어지는 종교를 계승한 나라로 신탁과 점으로 유명했습니다.

 

(2) 바벨론 예언의 무력화(25)

 

이제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점성술을 무력화하십니다(25). “헛된 말을 하는 자들”(신탁제사장들)과 “점치는 자들”(예언자들)이 징조를 보고 예견하지만, 여호와께서 그 연결고리를 부서뜨리셔서 이들의 해석과 예언을 우스꽝스럽게 만드시고, “지혜로운 자들”(정치인과 종교인)이 지혜에 의존해 미래사에 끼어들려고 해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미래 사건을 이끄시어 그 지식을 어리석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종교와 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역사의 결정권자가 바벨론 신들이 아니라 당신임을 알게 하십니다. 바벨론 종교 전문가들의 모호하고 임의적인 징조 해석이나 점과 달리 여호와의 말씀과 계획은 오해의 여지없이 분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종을 통해 선포한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사자들을 통해 전한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3) 예언을 성취하시는 여호와(26-28)

 

26b-28절은 여호와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선포하신 구원사의 내용을 네 가지로 요약해줍니다. 처음 둘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된 약속입니다. 예루살렘에는 다시 사람들이 살고 유다의 성읍들이 재건되고 그 황폐한 곳이 복구됩니다. 세 번째는 바벨론 심판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깊음(깊은 물)과 그 강물들을 마르게 하십니다.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애굽 군대를 몰살하셨던 것처럼(43:16-17) 유브라데를 말려 바벨론을 멸망시키십니다. 네 번째는 고레스에 관한 말씀으로, 고레스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것(계획)을 모두 성취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통해 “그의 종의 말”과 “그의 사자들의 계획”(26)을 이루십니다.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다시 살게 하시려는 그분의 계획에 따라 고레스가 예루살렘 재건과 성전 건축을 허락합니다. 놀랍게도 여호와께서 당신 약속을 성취할 고레스를 “내 목자”로 부르십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고레스(45:1-7)

사람은 태어날 때, 자신의 형편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므로 자신을 한탄하거나 비관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비관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을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2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5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6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1-7)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열방의 왕들을 세우고 폐하는 권능이 주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소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고레스에게 기름 부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기이합니다.

 

(1) 고레스를 소개하는 여호와(1)

 

여호와께서 먼저 유배민에게 고레스의 등장과 그의 승리에 나타난 당신의 역사 의지에 관해 설명해 주십니다(1). 고레스는 여호와께서 구원계획을 실행하시려고 특별히 선택한 왕입니다. 그는 여호와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분의 도움을 받아 민족들을 정복합니다. 44:28의 “내 목자와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표현은 고레스가 다윗에 비견하는 인물로 여호와에 의해 택함 받았음을 시사해줍니다.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는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역사 무대에 등장시키셨음을 보여주고 고레스의 등장이 여호와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계획을 실천할 자로 부른 고레스에게 승리를 약속해주십니다. 민족들의 왕들이 혼비백산하여 싸워보지도 못한 채 허리띠를 풀고 항복하게 하십니다. 성문을 열고 저항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2) 고레스에게 승리를 주시는 여호와(2-4)

 

고레스가 신속하게 원정에 나설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어 평탄한 길을 열어주시고, 뚫고 들어올 수 없도록 쇠빗장으로 막아놓은 청동 문을 깨부수십니다(2). 고레스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승리를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숨겨놓은 보화와 보물도 고레스에게 다 주실 것입니다(3). 바벨론이 약탈해 숨겨놓은 보물이 이제 고레스의 손에 넘겨진다. “흑암 중의 보화”(어둠의 보화)는 바벨론의 보화가 재앙을 불러오는 불의한 재물임을 시사해줍니다. 고레스의 승리는 그가 섬기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알지 못하는 고레스를 불러 승리를 허락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때문입니다(4).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고레스를 승리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정복자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원정을 떠나 싸운다. 여호와께서 고레스에게 준 ‘칭호’(명예로운 이름)는 대관식 때 주어지는 이름으로(9:6), 여기서는 1절의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 44:28의 ‘내 목자’를 가리킵니다.

 

(3) 홀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5-7)

 

여호와 외에 어떤 신도 고레스의 승리를 약속하지 못했습니다(5-6). 여호와만이 땅의 역사를 결정해 미리 알려주셨고 또 실행하셨습니다. 역사를 결정할 수 없는 민족들의 신들은 신일 수 없습니다. 고레스의 승리를 통해 온 세상 사람들은 여호와만이 역사를 주관하심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평안뿐만 아니라 환난까지도 지으시고 창조하신, ‘이 모든 것을 만드신’(이 모든 일들을 행하시는’) 분입니다(7). 빛과 어둠은 여호와의 창조 사역을 보여주는 자연계의 대표적 현상이고, 평안과 환난은 역사 안에서 그분의 활동을 보여주는 포괄적 표현입니다. 현재 문맥에서 빛과 어둠의 창조는 태초의 창조를 넘어 낮과 밤의 반복적 교체로 상징되는 창조주의 지속적인 보존 활동까지 포함합니다.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땅을 넓히신 여호와께서 피곤함과 곤비함을 모르시고(40:28) 창조 질서를 지켜주십니다. 평안과 환난은 땅 위의 모든 사건을 포함하지만, 현재 문맥에서 평안과 환난은 각각 이스라엘의 구원과 바벨론의 멸망을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구속자가 되신(44:21, 2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고레스에게는 승리를 주시고(4),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바벨론에는 멸망의 환난이 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빛만 아니라 어둠도 만드셨습니다. 형통과 평안을 주실 뿐 아니라 고난과 아픔도 주십니다. 교회만 아니라 세상 권세자도 들어 쓰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어려운 상황 또한 그분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그의 사랑을 기억하고, 주권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해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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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4-01)

 


홀로 유리하신 하나님

이사야 44장 1-20절


 

세속적 학자들을 중심으로 신을 인간 욕망의 투영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 신과는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신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독특성은 무엇입니까?

 

  • 유다의 멸망과 유배는 이스라엘의 반역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이었습니다. 허물을 씻어주시는 분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기억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으로, 이스라엘의 왕과 구원자로 이들의 절망적 처지에 개인하시기에 이스라엘은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축복(1-5)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에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서 야곱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야곱 안에서는 선택의 주권적인 의지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1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1-5)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참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들으라’고 하십니다.

 

(1) 두려워하지 말라(1-2)

 

심판과 저주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과 축복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들으라”는 구원 시대가 들음에서 시작됨을 시사해줍니다. 귀먹고 눈먼 이스라엘은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거절했습니다(참조. 42:18-25;43:8-13, 22-28). 이스라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명철(40:28)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놀라운 약속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귀를 기울이도록 권면한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 계신 여호와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모태에서부터 지으시고 도와주시는 분입니다(2). 이스라엘을 ‘만드신 분’과 ‘지으신 분’은 동의어로 이스라엘의 실존이 여호와께 달려있음을 보여줍니다. “모태에서부터”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기에 이스라엘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지으신 분과 지음을 받은 자의 관계가 중단됨이 없이 지속되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영과 복의 약속(3-4)

 

3-4절은 들어야 할 위로와 격려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41:17-20의 경우처럼 유배민의 귀환보다 광야의 기적적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호와께서 메마른 땅에 넘치는 물을 약속해주십니다. 물이 없어 식물이 자랄 수 없었던 곳이 변하여 생명의 땅이 됩니다. 비가 내려 촉촉이 적셔진 땅에서 씨가 싹을 트이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과 복을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부어주어 무성히 자라나게 해주십니다. 현 세대가 아니라 이후 세대가 축복의 대상이 됩니다. 멸망 이후 이스라엘의 인구가 현격히 줄어들었기에 땅의 축복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후손의 번성 없이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과 복을 부어주어 초라해진 백성을 다시 번성하게 해주십니다. 여호와의 영은 생명의 원리이며 피조물에게 주어진 ‘호흡’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42:5). 그분의 ‘복’은 물질적 영역을 넘어 윤리적 영적 차원에서도 활동하며 주님의 구원을 이뤄나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3) 여호와를 고백하는 자들(5)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자들이 마침내 보고 듣게 된다. 여호와께로 돌아와 신앙을 고백합니다(5).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여호와께 속했다고 말하며 여호와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이름을 ‘야곱’으로,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부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처럼 명예로운 호칭으로 사용됩니다. 또 남들이 볼 수 있게 자기 손에다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이라고 쓰고 그분께 대한 헌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과 축복이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이 온전하게 그분께로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6-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구원자이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 다스리는 왕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나라와 민족의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6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 8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6-8)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존재의 근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세우기도 하시고,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

 

(1)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6)

 

여호와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과 구원자로 소개하십니다(6). 겉보기에는 바벨론 왕의 지배 아래 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변함없이 여호와이십니다(41:21; 43:15).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께서 바벨론으로 끌려와 종살이하는 당신 백성을 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당신 백성을 위해 스스로 짊어진 그분의 연대감과 책임감을 보여줍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그분의 절대 능력과 주권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당신 백성을 구속하십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는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참조. 요 8:28; 계 1:17; 2:8; 21:6; 22:13). 이러한 여호와의 주장은 물론 입증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그분께서는 시대사적 사건의 예견과 그 성취를 통해 역사를 지배해 오셨습니다. 그분만이 역사 가운데 신적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2) 나와 같은 자 누구냐(7)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진짜 신이라면 여호와처럼 “장차 올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를 펼쳐 보이면 됩니다(7). 역사를 결정하고 지배하는 능력을 보여준다면 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무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만이 처음부터 역사를 예견하고 이뤄오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멸망과 유배의 초라한 모습이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바벨론에 일시적으로 승리를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3)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8)

 

이스라엘은 이들의 번성과 폭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여호와에게서 반석을 찾고, 능력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8).

 

제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9-20)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의지와 순종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는 그분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얻으시고, 인간은 만족을 누립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거질할 때 우상이 탄생합니다.

 

9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10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 11보라 그와 같은 무리들이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12철공은 철로 연장을 만들고 숯불로 일하며 망치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며 그의 힘센 팔로 그 일을 하나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고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피로하니라 13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14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15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16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18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19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20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9-20)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우상처럼 모순적이며 무의미한 것이 없습니다. 우상 숭배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려는 헛된 몸짓이며,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탄의 검은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1) 수치를 당하는 우상숭배자들(9-11)

 

우상이 헛것인 것처럼 우상을 만드는 자들(우상숭배자들)도 모두 헛것으로 수치를 당할 뿐입니다(9-11).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값비싼 귀금속으로 치장한 우상들을 가리킵니다. 숭배자들의 눈에는 귀하고 값져 보이지만 아무 유익 없는 헛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의 증인들”은 우상숭배자들로서 우상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우상숭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일을 보고 알며 신실한 증인이 되지만(8), 우상숭배자는 우상이 알려준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사람인 장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집니다. 대장장이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무익한 헛것을 만들어 신봉하는 자들은 수치에 떨어질 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수치에서 구해주시는 여호와와 대조됩니다.

 

(2) 우상의 제작 과정(12-13)

 

우상은 금속이나 나무 또는 나무에 얇게 편 금속을 덧입혀 만드는데, 12절과 13절은 각각 금속과 나무로 우상을 만드는 과정을 사실적이고도 풍자적으로 기술합니다. 우상은 철공이 쇠를 뜨겁게 달구어놓고 하는 작업이기에,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허기를 이겨가며 만든 것이며 목공이 풍채 좋은 사람을 모델로 해서 만든 작품일 뿐입니다.

 

(3) 같은 나무에서 나온 땔감과 우상(14-17)

 

14-17절은 나무 우상의 재료에 주목해 우상을 조롱합니다. 목공이 “자기를 위하여” 베거나 숲에서 잘 자라도록 돌보거나 직접 심은 나무가 자라 우상이 됩니다. 어린 시절 목공의 돌봄을 받고 자란 것이 우상입니다. 나무를 재료로 했다는 점에서 우상이나 땔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나무로는 불을 피워 몸을 덥히거나 떡을 굽기도 하고 또 어떤 나무로는 우상을 만들어 엎드려 경배합니다. 여러 나무의 쓰임새에서 한 나무의 다양한 용도로 옮겨지면서 풍자가 더 신랄해집니다. 나무를 반으로 나누어 반 토막은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고 나머지 반 토막은 우상을 만듭니다. 작업하다가 지치면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한 나무의 일부로 피운 불에 고기를 구워 배불리 먹고 몸을 덥히며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기운이 나면 나머지 나무로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의 유익이 전혀 없지는 않다. 우상은 땔감으로는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어리석게도 땔감으로 쓰고 남은 “그 나머지”로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자기의 우상”은 우상이 만든 자의 소유임을 보여줍니다. 신을 만든 자가 자기가 만든 신에게 구원을 간구합니다.

 

(4) 우상숭배자들의 무지(18-20)

 

18-20절은 우상을 만든 자들의 무지를 고발합니다. 우상을 자기가 만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앞에 엎드리니 말입니다. 우상과 땔감이 그 본질에 있어서 같기에, 우상의 마지막이 땔감의 마지막과 다를 수 없습니다. 불에 타면 재만 남는 나무를 섬기는 자들은 결국은 재처럼 멸망할 뿐입니다. “오른손”은 연장을 사용하는 손이며, 우상은 장인이 “힘센 팔”(12)로 만든 물건에 불과합니다. “거짓 것”은 우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9절의 “무익한 것”과 일치합니다. 우상에게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고(17) 기도하지만, 우상은 본질상 재가 될 수밖에 없기에 그 숭배자들은 재(멸망)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우상처럼 차조 사랑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특정한 사람입니까? 특정한 사람입니까? 제도나 과학입니까?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 자유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랑할수록 오히려 끌려다닙니다. 부와 힘의 우상 사회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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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3-02)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3장 14-28절


구원은 항상 하나님 편에서 시작됩니다. 출애굽 구원도, 바벨론에서 구원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베푸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어떻게 새롭게 창조해 가십니까?

 

  • 이스라엘에게 ‘나의 증인’이 될 것을 권면하신 여호와께서 증언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거룩하신 분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유배민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바다 가운데 길을 내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탈출시키고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를 몰살시킨 출애굽의 여호와께서 이전 일을 압도하는 새 일을 행하십니다.

 

여호와의 새 일(14-21)

역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건은 하나님의 지혜로 통치하시는 역사의 가지들입니다. 영원할 것 같던 세상은 한순간에 몰락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시고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4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14-21)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없을 때 길을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내시는 길은 어떤 길보다 안전하고 빠릅니다. 그러므로 길이 없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길이기 때문입니다.

 

(1) 바벨론의 멸망(14-15)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는 이 두 절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첫째, 이사야 후반부에서 바벨론과 갈대아가 처음 등장합니다(참조, 47:1,5; 48:14,20). 이사야는 39:6에서 바벨론이 유다의 모든 재물을 빼앗아 가고 히스기야의 일부 후손이 바벨론 왕궁에서 환관이 될 것을 선포했는데, 이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유배당한 백성을 구하십니다. 둘째, 여호와의 다양한 호칭이 심판 메시지 앞과 뒤를 감싸면서 메시지보다 호칭에 더 집중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시는 여호와가 ‘너희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희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창조주, 너희의 왕’으로 소개됩니다. 구속자(고엘는 집안의 일원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부당한 죽임을 당했을 때 도와주거나 ‘피의 복수’를 해주는 친척입니다. 예언자들에게 여호와의 거룩함은 역사를 경영하는 그분의 역동적 능력입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개인적 소유물임을, ‘너희의 왕’은 여호와께서 이들의 통치자와 보호자임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바벨론에 [누군가를] 보내 모든 갈대아 사람들로 도망치게 하십니다. 원문에는 “너희를 위하여”가 문장 첫머리에 나오고 동사 ‘보내다’의 목적어는 생략됩니다. 유배민의 구출이 바벨론을 치는 목적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45:1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보내 바벨론을 침략하게 하십니다. “연락하던 배”는 축제 때 바벨론 신상들을 태우고 유브라데 강을 오르내리던 배들일 것입니다. 침략군에 쫓긴 갈대아 사람들이 신상을 배에 싣고 도망합니다.

 

(2) 출애굽의 하나님(16-17)

 

처음 두 절은 이스라엘의 구원보다 추격하던 애굽 군대의 멸망에 초점을 맞춰 여호와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왕이신 여호와께서는 ‘바다 가운데 길을, 사나운 물 가운데 통로를 내시는 분, 병거와 말과 군대와 용사를 나오게 하신 분’입니다(참조. 출 14:21-29).

17절의 ‘이끌어 내다’(나오게 하다)의 주어는 ‘여호와’입니다. 바다에서 애굽 군대를 쳐서 멸망시킨 것도 여호와의 의지이며 마음을 바꿔 추격군을 파견한 바로의 결정도 여호와의 심판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참조. 출 14:5-8; 겔 38:4). 역사의 무대에서 여호와만 주체로 활동하시고, 민족들은 그분께서 맡겨주신 역할만 담당할 뿐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바다에 수장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바벨론 유배민을 위해 이스라엘 구원사의 출발점이자 정점인 출애굽을 압도하는 경이로운 사건을 준비하십니다.

 

(3) 출애굽을 대체할 새 일(18-20)

 

앞으로는 이전 일들을 기억하거나 옛날 일들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18). 앞으로는 이전 일들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참조. 46:9; 신 5:15; 15:15; 16:3,12).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새 일’(18)의 경이로움과 놀라움이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새 일에 비춰볼 때 이전 일은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전 일들’과 ‘옛날 일들’은 이스라엘이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해방 사건들, 특히 앞에 나온 홍해의 기적을 가리킵니다. 42:9에서는 알려지기만 하고 아직 행해지지 않은 새 일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19b-20절은 새 일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광야에 길을 내어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사막에 강을 내어 목마르지 않게 해주십니다(참조. 11:16; 35:8; 49:11). 새 일이 앞에 언급된 출애굽 사건의 구조와 유사한 구조로 선포됩니다. 생명에 적대적인 바다와 광야가 배경이 되고, 그 가운데 난 길이 사건의 무대가 됩니다. 출애굽 때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던 여호와께서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십니다. 바다 가운데 길과 물이 애굽 군대의 심판을 위해 마련됐다면, 광야의 길과 물은 여호와께서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해 마련됩니다. 추격하던 애굽의 병거와 말과 군대와 용사는 바닷물에 잠겨 다 죽고, 사막에 사는 들짐승은 창조주의 경이로운 능력을 보고 그분을 존경하게 됩니다. 구조는 유사하지만, 심판과 재앙의 시점에서 기술된 이전 일과 달리 새 일은 축복과 구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전에 예루살렘에게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셨던 여호와께서(51:17) 이제 생수를 주십니다(참조, 민 20:8; 시 78:15). 진노의 시대가 끝나고 보호와 축복이 약속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리고, 구원을 경험한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지음을 받은 백성(1) 이상입니다.

 

(4) 여호와를 찬송할 이스라엘(21)

 

이들은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지으신 백성입니다(21). 이스라엘의 존재와 실존이 그분 계획에 편입됩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새일을 전할 목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택함을 입었습니다(10).

 

야곱과 논쟁하시고 소송하시는 여호와(22-28)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우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삶은 죄악으로 하나님을 괴롭게 합니다. 그들은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토설하지 않았고 뻔뻔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을 용서하십니다.

 

22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24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25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26너는 나에게 기억이 나게 하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는 말하여 네가 의로움을 나타내라 27네 시조가 범죄하였고 너의 교사들이 나를 배반하였나니 28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을 욕되게 하며 야곱이 진멸 당하도록 내어 주며 이스라엘이 비방 거리가 되게 하리라(22-2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시작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풍성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셨습니다.

 

(1) 여호와를 부르지 않은 야곱(22)

 

42:18-25에서처럼 회고적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줍니다. 먼저 22-24절은 제의와 관련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논쟁의 문학적 양식은 이스라엘의 이의 제기가 먼저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정 시대에 열심히 제사를 드렸다고(참조. 1:11-15) 주장하면서 멸망의 잘못을 여호와께로 돌린 것입니다. 이에 맞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제의적 경건이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변호하십니다. 제의적 모임과 축제가 끊이지 않았지만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22a).

 

(2) 여호와를 괴롭게 한 야곱(23-25)

 

번제의 양을 가져왔지만 여호와께로 가져오지 않았고, 제물을 드렸지만 여호와를 공경하지 않았습니다(23a). 돈을 많이 지불하고 먼 나라에서 가져온 값비싼 향품을 샀지만 여호와를 위해서 사지 않았고, 희생의 기름을 드렸지만 여호와를 흡족하게 하지 않았습니다(24a).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괴롭게 여길 뿐이었습니다(22b). 23b절과 24절은 ‘수고롭게 하다’와 ‘괴롭게 하다’의 두 동사를 사용해 여호와와 이스라엘을 인상적으로 대조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소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수고롭게 하지도 않았는데 이스라엘은 “죄짐으로” 여호와를 수고롭게 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지도 않았는데 이스라엘은 “죄악으로” 여호와를 괴롭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자신들이 죄지음과 죄악으로 여호와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3) 야곱에게 변론을 요구하시는 여호와(26)

 

26-28절에서는 소송의 양식을 사용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다툼을 이어가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스스로 변호해보도록 기회를 주십니다(26).

 

(4) 고발과 심판 선언(27-28)

 

여호와의 주장에 맞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이면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이들의 죄악이 근원적이었음을 지적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시조가 죄를 범하였고, 그의 교사들도 여호와께 반역하였습니다(27). 이스라엘의 시조는 야곱을, 교사들은 아마도 공동체를 대변하는 지도자들, 특히 28절과 관련해 보면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의지를 바르게 대변해야 할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여호와를 배반했습니다. 그분은 우두머리 제사장들이 더럽힘을 당하고 야곱이 진멸당하고 이스라엘이 능욕거리가 되게 내어주셨습니다(28). 이스라엘의 타락이 이스라엘의 멸망과 바벨론 유배를 초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소송은 단순히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소송에 앞서 여호와께서는 ‘나는 나를 위하여 네 죄를 도말하는 자’로 소개하십니다(25). 소송의 목적이 죄사함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발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살던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하셨습니다.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눈감으셨으며, 우리를 위한 구원의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아직도 그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고난이 원망스럽습니까? 닥친 어려움보다 무너진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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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43-01)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증언하라

이사야 43장 1-13절


 

이스라엘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데 그 백성을 소유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며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한없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소유 삼으시고, 끝없이 사랑하시고, 구원의 증인 삼으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 멸망과 유배를 경험했음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영적 불구자로 온 땅에 온 땅에 흩어져 살아갑니다. 여호와께서는 깨달음이 없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이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에 의한 구원을 약속하시고 증인의 역할까지 맡기십니다. 여호와의 구원 능력을 경험하는 자들은 그분만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구원자이심을 증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여호와(1-7)

우리의 구원 속에 주님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신실한 사랑, 그리고 그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를 잘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떠나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을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역사 내내 그들을 창조해 오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고토로 돌아오는 길도 주께서 친히 호위하실 것입니다.

 

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1-7)

 

야곱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실 것입니다. 물 가운데로 지날 때도, 깊은 강을 건널 때도,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고난의 떼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재에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1) 야곱을 창조하신 여호와(1)

 

여호와께서 예언자를 통해 유배민에게 구원 신탁을 주십니다. ‘지금’(그러나 이제)은 벌써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야곱을 창조하고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은 수사적 표현 이상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개인적 피조물로 그분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창조하셨기에 이스라엘의 역사도 주관하십니다. 창조는 태초에 있었던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분의 창조 능력은 역사 안에서 거듭 계시됐습니다. 이제 창조 능력이 바벨론의 지배에서 유배민을 해방시키는 구속사에서도 드러납니다. 창조주의 능력으로 이들을 구속하실 것이니 동풍 앞에 풀과 같은 바벨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장 가까운 친족의 자격으로 바벨론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되찾아 데려가십니다. ‘지명하여 부르다’는 ‘이름을 불러 [바벨론에서] 불러내다’를, ‘너는 내 것이라’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개인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창조해 그분의 개인적 소유물로 삼은 백성일 뿐만 아니라 보호 대상이기도 합니다.

 

(2) 귀향길에 함께하시는 여호와(2)

 

유배지에서 당신 소유 이스라엘을 불러내 신 여호와께서는 이들이 무사히 고토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귀향길도 책임져주십니다. 이들과 함께하시면서 물과 강과 불의 위험에서 지켜주십니다(2). “물 가운데로”는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암시해줍니다. ‘강(득)’은 유비라데아 그 지류를 가리킵니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만들어 걸어 건너게 하셨던 것처럼(출 14:21-22) 바벨론을 떠난 유배민이 1절과 연결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는 유브라데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해주십니다(참조.11:15). “불 가운데로 지날 때”는 유배민이 지나게 될 폭염과 뜨거운 바람이 부는 사막을 생각나게도 하지만, 불은 물과 함께 위험의 전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것 같습니다.

 

(3) 여호와의 남다른 사랑(3-4)

 

3-4절에서 여호와께서 사적으로 한 번 더 약속의 성취를 확실하게 해주십니다.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는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 자주 사용되는 표현으로(출 20:2; 호 12:9;13:4) 바벨론 유배민에게 구원 약속을 주신 분이 이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여호와이심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편에서 홀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고레스에게 주어질) 속량물로 한 번은 ‘애굽과 구스와 스바’가, 한 번은 ‘사람들과 백성들이’ 언급됩니다. 이 말은 물론 법률적 진술이 아닙니다. 창조주 여호와의 통치 능력과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넘치는 사랑을 보여주는 언급입니다. 아프리카의 세 나라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을 주고서라도 구하실 만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롭고 귀한 존재입니다.

 

(4) 돌아오는 모든 흩어진 자들(5-7)

 

5-6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시금 이방 땅에 흩어져 힘겹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해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도록 권면하십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동방과 서방과 북방과 남방은 온 세상을 가리키는 방위로(참조. 24:14-16), 사방으로 흩어져 유배민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귀향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먼 곳과 땅 끝’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강조합니다.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은 4절의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이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서 나왔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지으셨기에 그분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고,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 그분의 아들딸이 됩니다. 7절은 표현과 내용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소유임을, 그분의 자녀들임을 보여줍니다. 민족들의 지배 아래 살지만, 여호와를 제외하고 아무도 이스라엘에게 권리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내 영광을 위하여”는 이스라엘의 창조와 존재 목적을 보여주는 언급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자녀로 창조한 이스라엘은 역사 안에서 경험한 그분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증거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가운데 영광스럽게 해주시며, 이스라엘은 그분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호와의 증인(8-13)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지만 우상은 인간에게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 전에 지음 받은 신이 없고 후에도 없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단독자’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앞날을 예건하고 실행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아무도 절대 주권자 여호와의 증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가 이스라엘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8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9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 1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8-13)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만물이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려지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비록 보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부르고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1) 여호와의 재판장(8-9)

 

안타깝게도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자녀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었습니다(8; 참조. 42:18-20). 이스라엘은 보고 들은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깨닫는 데 실패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 이스라엘과 세상의 모든 민족을 재판정으로 불러 소송을 진행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를 책망하거나 민족들의 우상숭배를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주기 위해 소환하시고 소송을 하십니다. 우상들은 현재 사건들에 관해 예견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예견한 것 중에 하나라도 이뤄진 것이 있는지 알려서 자기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합니다(9; 참조. 41:22-23). 민족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참된 신임을 증인들에게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그들(9)은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이 일’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고레스의 원정과 승리를, ‘이전 일들’은 ‘이 일’보다 앞서 일어난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민족들은 우상에게서 들은 것이 없기에 증인이 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통해 거듭 들은 것이 있기에 역사 안에 계시된 여호와의 의지에 관한 증인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합니다. 구원 약속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두 눈과 두 귀로 보고 들은 것은 있습니다. 아직 깨닫지는 못했지만 여호와의 의지가 담긴 말씀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믿을 만한 증인이 될 자격을 갖췄습니다.

 

(2) 증인 이스라엘(1)(10-11)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종으로 그분께서 하신 일을 증언해야 합니다(10). 종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하듯이 이스라엘은 종의 사명을 바르게 깨닫고 실행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택하신 목적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10)는 말은 족보로 연결된 바벨론 신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민족들의 신들과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출생한 신도 아니고 중간에 등장한 신도 아닙니다. 그분은 처음 이전부터 단독자로 존재하시면서 홀로 창조와 역사를 주관해 오셨습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는 그분의 절대 권력과 주권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역사를 결정하고 이끌어 오신 분입니다. “나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는 구원의 능력과 의지가 여호와께 독점적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구원자이심을 증언해야 합니다. 이방 신들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적 사건을 미리 알려주거나 들려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재판정에 증인으로 소환된 민족들은 무능력한 우상에게서 들은 것이 없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려주시고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예견하신 대로 이뤄지게 하셨습니다.

 

(3) 증인 이스라엘(2)(12-13)

 

이스라엘은 사건들을 예견하고 실행했다고 주장하는 다른 어떤 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12). 지금까지 능력으로 역사를 이끌어 오신 여호와께서 앞으로도 변함없이 역사를 결정하고 이를 집행하실 것입니다. 우상들의 무능력은 이미 입증되었기에 그분의 계획은 방해받지 않습니다(13).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라는 표현 역시 그분의 절대적-독점적 권력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 또는 재앙을 임하게 하실 때 누구도 그분 앞에 막아설 수 없습니다.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바벨론을 멸망시키시려는 그분의 계획은 유일하신 권력자의 결정이기에 반드시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고, 당신의 소유로 택하여 신실한 은혜를 베풀어오셨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궁극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권세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신실한 사랑에 대한 깊은 확신 가운데 담대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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