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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5-01)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

이사야 35장 1-10절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고난과 슬픔과 문제의 바람은 불어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그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임할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심판이 유다 역사의 전환점이기는 하지만, 여호와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그분의 심판으로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선포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생명을 얻어 아름다운 과수원으로 변합니다. 흩어졌던 자들이 구속함을 받아 광야의 대로를 통해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슬픔과 탄식의 시온이 기쁨과 즐거움의 시온으로 바뀝니다.

기쁨의 선포(1-2)

하나님의 은혜가 악을 행한 열국들에게는 심판이 임합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앙망한 의인들에게는 천국이 약속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실현되는 곳으로, 평화가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그 나라를 미리 보여 주심으로 그곳을 사모하면서 현실의 고난을 잘 이겨 내도록 도우십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1-2)

 

광야와 메마른 땅은 악인들의 통치 아래서 억압받고 탈취당하는 경건한 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으로 사막처럼 피폐하고 황폐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원수들의 멸망으로 압제와 약탈에서 해방됩니다.

 

(1) 꽃이 피는 광야(1)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구원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기쁜 소식이 선포됩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경이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은 즐거워하며 백합화를 피웁니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땅에서 생명이 자라나고, 슬픔과 탄식 만들리던 땅에서 즐거움과 기쁨의 소리가 들립니다. 임신할 수 없는 여자가 아기를 낳고 기뻐하듯 메마른 땅이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하고 기뻐합니다. 광야처럼 황폐해진 가나안 땅이 기름진 땅으로 변하고,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습니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레바논처럼, 과실수가 견실하게 열매를 맺는 갈멜처럼, 곡식들이 풍성하게 영그는 사론처럼 비옥한 땅으로 바귑니다. 레바논의 울창한 산림은 건축 자재의 보고(寶庫)로 특히 백향목이 유명했습니다. ‘과수원’을 의미하는 갈멜은 하이파 남쪽 지중해를 바라보며 낮게 자리한 기름진 산지였고, 사론은 북쪽의 갈멜과 남쪽의 압바 사이의 지중해 해안을 따라 펼쳐진 평야 지대였습니다.

 

(2) 여호와의 영광을 맺는 광야(2)

 

자연의 경이로운 변혁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과 아름다움도 함께 계시됩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것들’은 문법적으로는 1절의 사막과 메마른 땅과 광야를, 실질적으로는 3절 이하에 나오는 심판의 시대를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사는 자들이 광야를 옥토로 변모시키시는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을 목도하게 됩니다. 영광(카보드)과 아름다움(하다르)은 그분의 왕적 위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시 96:6; 104:1). 40:5에서는 모든 육체가 광야의 대로를 통해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여호와의 영광을 봅니다.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3-6a)

낙담과 절망의 근원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 희망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먼저 두려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구려움이 떠나갈 때 다시 강하게 됩니다. 두려움을 온전히 극복하는 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3-6a)

 

하나님께서는 연약해진 백성을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은 고난과 핍박으로 지치고 낙담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현실의 고통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합니다. 믿음마저 흔들입니다.

 

(1) 위로와 권면(3-4)

 

본격적으로 구원을 선포하기에 앞서 예언자는 먼저 청자 ‘너희’에게 용기를 내도록 권면합니다(3).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구원 시대의 도래는 기쁜 소식이었겠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이었습니다. 약속으로 주어진 구원 시대에 참여하려면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약한 손’(축 늘어진 두 손)과 ‘떨리는 무릎’은 대적 앞에서 용기를 잃고 무서워하는 자의 모습으로, ‘너희’가 전쟁에서 패한 자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음을 시사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이 구원의 기쁜 소식에 반응하지 못하게 만들기에 용기를 내서 떨쳐버려야 합니다. ‘강하게 하고 굳게 하라’는 여호수아에게 거듭 주어진 명령이기도 합니다(신 3:28; 31:6-7,23; 수 1:6-7,9,18;10:25). ‘너희’에게 용기를 내도록 권면한 예언자가 4절에서 또 다른 ‘너희’에게 격려하는 사명을 맡깁니다. 아마도 예언자의 선포에 일부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자들이 있어, 그들에게 ‘겁내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라고 명령하는 것 같습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내용상 예언자의 권면과 동일합니다. 새로운 것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시다. 복수가 온다, 하나님의 보복이 온다. 그분께서 친히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오심과 그분의 보복은 먼 미래에나 성취될 약속이 아닙니다. 현재 이뤄지고 있는 그분의 사건입니다. ‘보복이 온다’와 ‘너희를 구원하신다’는 짝으로 하나님께서 오시는 목적을 보여줍니다. 보복의 대상은 달리 언급되지 않지만, 34장의 문맥적 관계에 따라 에돔과 민족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34:8에서도 ‘에돔에 대한 여호와의 보복’과 ‘시온의 송사를 위한 신원’이 하나의 사건으로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대적에 보복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악한 자들에게 그분의 정의를 보여주시는 사법적 행위에 속합니다.

 

(2) 불구의 회복(5-6a)

 

보복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도래가 가져올 구원 시대의 열매가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모든 불구가 고침을 받고 회복됩니다. 맹인의 눈과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고, 다리를 저는 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환호합니다(5-6). 열거된 불구자들의 치료는 비유적-영적 차원을 넘어 문자적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적 개입이 메마른 땅을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키듯(1-2), 저주의 표지 아래 살던 불구자들이 질병에서 벗어나 구원을 경험합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가능해집니다. 맹인과 다리 저는 이는 쫓겨난 자들의 귀향과 관련하여, 못 듣는 이와 말 못하는 이는 귀환의 기쁨과 관련하여 언급된 것 같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맹인과 저는 자가 고침을 받고 안전하게 여행하고, 감정을 표출할 수 없는 못 듣는 이와 말 못하는 이가 고침을 받고 환호함으로 귀향의 기쁨을 마음껏 표현합니다. 비유적 차원에서 읽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그분의 역사를 볼 수 없었던 자들이 (6:9-10) 그분의 말씀을 듣고 영광을 보고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으로 올라가는 길(6b-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망각한 채 우상을 섬겼습니다. 또한 하나님보다 세상을 의지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예배의 삶을 일어가고 있습니다.

 

6b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6b-10)

 

본 단락은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약한 자들을 온전하게 치유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온전하게 보고 들으며 말할 수 있습니다.

 

(1) 물이 흐르는 광야(6b-7)

 

하나님의 정의가 회복되면 자연도 극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6b-7절은 주제와 표상에 있어 1-2절에 연결됩니다. 광야와 사막에 물이 터져 나와 강물이 흐르고(41:18; 43:19-20), 생명을 태워 죽이는 뜨거운 모래밭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샘터가 되고, 승냥이가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부들이 자랍니다. 가나안에서 물은 생존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물이 없어 생명이 살 수 없었던 광야와 사막이 물이 넘쳐흐르는 생명의 땅이 됩니다. ‘솟겠고’는 ‘쪼개다’를 의미하는 동사 ‘바카’의 번역으로, 출애굽 때 광야에서 바위를 쪼개 물이 솟아나게 한 사건을 암시한다. 승냥이는 황무지에 사는 대표적인 동물로 성읍의 파괴나 경작지의 황폐를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한다. 승냥이가 사는, 풀이나 겨우 자라는 황무지가 나일 삼각주처럼 비옥한 곡식 창고가 됩니다.

 

(2) 광야의 대로(8-9a)

 

8-10절은 하나님께서 광야와 사막에 물이 솟아 강물이 흐르게 하시는 목적을 보여줍니다. 강물이 흐르는 광야에 ‘거룩한 길’이라 부르는 ‘대로’가 생깁니다. 대로는 바스러진 암석 조각이나 돌을 깔아 만든 포장도로로, 주로 통상로나 정치-군사적 용도로 이용됩니다. 광야의 대로는 거룩한 길이기에 아무나 다닐 수 없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자’와 ‘우매한 행인’은 지날 수 없고, ‘구속함을 받은 자’만 지날 수 있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제의적으로 부정한 자로 1차적으로는 이방인을, 우매한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도 제의적-윤리적으로 정결한 자만 거룩한 길을 다닐 수 있습니다. 광야의 대로는 여호와께서 만드시는 길이기에 사자나 사나운 짐승이 다니지 않는 안전한 길입니다.

 

(3) 구속함을 받은 자의 귀환(9b-10)

 

여호와께서 마련해주신 안전한 광야 길을 통해 ‘구속함을 받은 자’, 곧 ‘여호와에 의해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연례적인 절기를 맞아 지방의 순례자들이 노래하며 시온으로 올라왔듯이, 출애굽 세대가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왔듯이, 남은 자들이 환호하며 거룩한 길을 따라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머리를 떨구고 살던 자들이 속량함을 받고 머리를 들고 영원한 즐거움을 본다.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시온에 가득 넘친다. '구속하다'(가알 xa)는 구속하는 자와 구속을 받는 자가 피를 나눈 친족 관계에 있음을 전제하는 단어이며, 이는 여호와께서 고엘(기업 무를 자) 자격으로 구원하셨음을 시사하고, ‘속량하다’(파다)는 원래 상법에 뿌리를 둔 개념으로 신학적 맥락에서는 적들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해방 사역을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비록 지금은 환난과 고통이 심할지라도 믿음으로 견디며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임하면 우리는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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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4-01)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34장 1-17절


 

교만한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맹세합니다. 그 심판은 철저합니다. 악의 권세가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억압하는 교만한 열방을 심판하십니다. 심판을 경고하는 본문은 온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교훈합니다.

 

  • 에돔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 민족들의 대표로 등장합니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 의하면 에돔(에서)과 야곱(이스라엘)은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이후의 역사는 서로에게 자주 적대적이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하여 복수하시는 날에 에돔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한 멸망에 떨어질 것입니다. 민족들은 에돔의 파국적 운명을 보고 대적에게 보복하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깨닫고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민족들의 심판(1-4)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사실을 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도, 생명을 다스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1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 2대저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륙당하게 하셨은즉 3그 살륙당한 자는 내던진 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며 4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1-4)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을 내시십니다. 열방에 대한 진노는 죄악 때문입니다. 죄악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열방의 죄가 찰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1) 민족들의 소환(1)

 

하늘과 땅을 대상으로 하는 심판이 선포됩니다. 심판의 범위가 창조 세계를 포함하기에 청자의 범위도 세계적으로 확장됩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은 가까이 와서 귀를 기울여 예언자의 선포를 들어야 합니다(1).

 

(2) 민족들에 진노하신 여호와(2-4)

 

청자로 부름 받은 민족들이 갑자기 심판의 대상으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열방과 그들의 모든 군대에 진노하시고 그들을 진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2). 그 이유를 여기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진노와 분노는 죄에 대한 그분의 부정적 반응입니다. 동사 ‘진멸하다’는 거룩한 전쟁에 속하는 개념이며 예외 없이 모두 멸망에 넘겨질 것을 보여줍니다. ‘살육 당하게 하셨은 즉’은 민족들의 심판이 누군가의 손을 통해 이뤄질 것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에서 살해당한 자들의 시체가 들판에 그대로 버려져 악취가 진동하고,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나듯이 산이 죽은 자들의 피로 녹아내립니다(3). 온 땅이 시체 썩는 냄새와 넘쳐흐르는 피로 가득 찹니다. 고대 세계에서 장례는 가장 중요한 의식에 속했습니다. 정상적인 장례 절차에 따라 조상 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 허락되지 않은 저주받은 죽음에 속했습니다(신 28:26; 삼하 21:10-14; 렘 7:33; 겔 32:5). 민족들을 진멸하는 전쟁이 땅을 넘어 하늘에까지 파국적인 영향을 미칩니다(13:10,13; 66:22).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사라지고, 포도나무 잎과 무화과나무 열매가 시들어 떨어지듯이 ‘하늘의 만상’이 모두 시들어 떨어집니다(4). 하늘이 펼쳐진 휘장이나 천막에 비유되는 경우는 있어도(시 104:2; 사 40:22; 슥 12:1) 글씨가 쓰인 두루마리 책에 비유되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참조. 계 6:14). 멸망의 철저성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하늘의 만상’은 문자적으로는 ‘하늘의 모든 군대’로, 하늘의 별들을 의미합니다. 민족들의 심판은 4절에서 끝나고 5절부터는 에돔이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민족들의 심판과 에돔의 심판은 하나의 사건으로 서로 연결됩니다. 후자가 전자의 예표가 됩니다. 민족들은 심판의 대상이자(2-4) 에돔에 대한 심판의 증인(5-14) 역할을 담당합니다. 동일한 심판이지만 민족들에게는 피할 수 있는 길이 주어집니다. 먼저 심판받는 에돔의 멸망을 보고 여호와의 보복을 깨닫는다면 멸망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에돔의 운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에돔의 심판(5-15)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피에 취하는 끔찍한 날이 될 것입니다. 악과 불경건은 반드시 대가를 치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피에 취하는 끔찍한 날이 될 것입니다. 심판의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보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5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이라 6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숫양의 콩팥 기름으로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를 위한 희생이 보스라에 있고 큰 살륙이 에돔 땅에 있음이라 7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함께 도살장에 내려가니 그들의 땅이 피에 취하며 흙이 기름으로 윤택하리라 8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 9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10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11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12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13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14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숫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에 살면서 쉬는 처소로 삼으며 15부엉이가 거기에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의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각각 제 짝과 함께 거기에 모이리라(5-15)

 

여호와의 심판은 이스라엘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칼은 에돔 위에도 내릴 것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형제 나라였음에도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괴롭혔습니다. 특히 유다가 멸망당할 때 이방인과 함께 제비를 뽑고 예루살렘을 약탈했습니다.

 

(1) ‘여호와의 칼’(5-8)

 

심판의 대상이 민족들에서 에돔으로 바뀝니다. 하늘에서 취하도록 잔뜩 마신 ‘여호와의 칼’이 에돔 위로, 여호와께서 심판에 붙여 진멸하시기로 작정한 백성 위로 내려옵니다(5). 칼은 가장 기본적인 전쟁 무기로, 여호와의 칼은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칼을 가리킵니다(겔 21:3-5). 그분께서 직접 손에 칼을 들고 에돔을 치십니다. ‘칼이 ~ 위로 내려오다’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심판의 철저성을 보여줍니다. 31:4에서는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려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그 언덕 위로 내려오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여호와의 칼이 어린 양과 염소의 피로 흥건하고 수양의 콩팥 기름으로 덮입니다(6). 에돔에 임할 ‘큰 살육’이 여호와께 제사 드리기 위해 희생제물을 잡는 제의적 의식으로 표현됩니다. 에돔 사람들이 제사를 위해 잡는 희생 동물처럼 살육을 당합니다. 어린 양과 염소와 숫양은 하나님께 적합한 희생 동물에 속합니다(민 7:17; 렘 51:40). 살육(희생제사)의 장소로 언급된 보스라는 에돔의 수도로 해발 천 미터 이상 되는 고지대에 있었습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천혜의 요새지만, 여호와께서 직접 칼로 치시기에 살육을 피하지 못합니다. 희생 동물로 작은 짐승뿐만 아니라 큰 짐승도 언급됩니다. 들소와 송아지(젊은 소)와 수소의 피로 땅이 흠뻑 취하고 이들의 기름으로 흙이 뒤덮입니다(7). 송아지와 수소는 희생제물로 드려지지만, 들소는 제사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들소는 힘과 능력의 상징입니다(민 23:22; 신 33:17). 들소조차 여호와의 칼 앞에서는 전혀 저항하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칼이 에돔 위로 내려오기에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도살장에 내려갑니다. 여호와께서 에돔에 보복하시는 날은 ‘시온의 송사를 위해 신원하시는 해’이기도 합니다(8). 그분께서 시온의 법적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에돔에 보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하나님 정의의 부정적 표현입니다. 불법은 징계를 통해 상쇄되고 해소되어야 합니다. ‘신원’도 파괴된 사법 질서를 회복하는 보응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벌을 통해 그분의 정의가 회복됩니다.

 

(2) 들짐승의 소굴이 된 에돔(9-15)

 

에돔의 멸망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해로 함몰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상입니다. 강들은 역청으로, 티끌(흙)은 유황으로, 땅은 불타는 역청으로 변합니다(9).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은 성읍의 멸망과 함께 꺼졌지만, 에돔을 태우는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타오릅니다(10). 완전히 황폐해져 그리로 지나는 사람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초지로도 사용하지 못하고 영원히 들짐승의 차지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에돔 땅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시기에 당아새(올빼미?)와 고슴도치와 부엉이와 까마귀가 에돔 땅의 소유주가 됩니다(11). 줄로 재어 민족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셨던 여호와께서(신 32:8) 황폐해진 에돔 땅을 혼란의 줄로 재서 들짐승에게 나누어주십니다. 땅 분배와 관련해서 추는 소유를 표시하는 경계석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혼란(토후 in)과 공허(보후 na)가 창세기 1:2을 염두에 두고 선택된 표현이라면, 에돔은 창조 이전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 빠집니다. 멸망에서 일부 귀인이 살아남을지라도 왕국을 선포하지 못하고 방백들도 모두 없어집니다(12). 심판으로 폐허가 된 에돔은 재건되지 못하고 영원히 폐허로 남습니다. 허물어진 궁궐과 견고한 성에는 가시나무와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고, 승냥이와 타조와 들짐승(사막 짐승)과 이리와 숫염소(염소 귀신)와 올빼미(릴리트)가 터를 잡습니다(13-14). 권력과 사치를 즐기던 자들로 번잡하던 궁궐과 요새는 황무지가 돼 들짐승의 거주지가 됩니다.

 

심판의 확실성(16-17)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믿지 못합니다. 겸손한 자들은 열국의 심판과 자연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 없는 나라는 없으며, 살피지 않으시는 사람 역시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는 열국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16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17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그의 손으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눠 주셨으니 그들이 영원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에 살리라(16-17)

 

이 예언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말씀들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돔 땅을 들짐승들에게 배분해 주십니다. 이것이 악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대적들은 철저하게 파멸됩니다.

 

(1) 여호와의 책에 기록된 에돔의 멸망(16)

 

본 16절은 구약성경의 가장 난해한 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청자 ‘너희’는 1절의 청자 ‘열국과 민족들’과 구별되는 여호와를 아는 사람, 곧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에돔의 심판 예언이 기록된 ‘여호와의 책’이 이사야의 일부 또는 11-15절의 짐승들이 나오는 오경 또는 다른 예언서를 의미하는지 불분명합니다. 또 ‘이것들’이 받는 대상도 모호합니다. ‘이것들 가운데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는 5-15절에서 예언된 사건들을,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는 11-15절에 나오는 짐승들의 쌍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11-15절에서 열거된 짐승 가운데 14절의 올빼미(릴리트)와 15절의 부엉이는 구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11절의 고슴도치와 14절의 들짐승(사막 짐승)과 이리는 오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에돔의 심판에 관한 신탁은 다른 예언서들에도 나오지만(렘 49:7-21; 겔 35:1-15; 오바다), 아모스의 경우(1:11-12)를 제외하고는 시기적으로 모두 나중에 속합니다. 하나하나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에돔의 심판과 멸망이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2) 들짐승의 몫이 될 에돔(17)

 

본 절은 11-15절의 요약입니다. 거룩한 전쟁을 통해 에돔을 황무지로 만드신 여호와께서 에돔 땅을 들짐승에게 나누어주십니다(17).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나눠주신 것처럼, 그분께서는 제비를 뽑고 줄로 경계를 정해 황무지에 사는 짐승들에게 배분해주십니다. 에돔 땅이 영원히 폐허가 되어 들짐승의 소유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권세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 철저히 멸망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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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3-01)


하나님께서 찾으신 경건한 사람

이사야 33장 1-24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 거룩함은 하나님 백성 됨의 표시입니다. 이런 거룩함은 경건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면 망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삶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 여호와께서 폭력적인 세력(앗수르)을 진멸하시고 예루살렘 왕궁의 어리석은 정치가들이 씌워놓은 속박의 굴레를 벗겨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시온에서 왕으로 통치하시고 예루살렘에 영원한 안전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를 바라보고 그분께 도움을 구하며 현재의 환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시온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1-6)

인생길에는 시도 때도 없이 환난의 비바람이 붑니다. 언제 어떤 환난의 바람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환난을 피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환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바름을 뛰어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환난의 바람이 불 때 여호와를 더욱 경외하시길 바랍니다. 그 환난의 우리를 더 강하게 하는 복이 될 수 있습니다.

 

1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2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3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4황충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 5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6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1-6)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하셨습니다. 환난의 바람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을 지키십니다. 환난 중에도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1) 화의 선언(1)

 

구원의 빛을 만나기 전에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자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학대하며 속이는 자’(파괴하며 배반하는 자)에게 화를 선포합니다(1). 교만한 권력도 허락된 기간이 지나면 파괴와 배반에 넘겨질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정의를 신뢰하고 그분께서 개입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2) 구원의 간구(2-4)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개입해주시길 고대합니다(2). 그분만이 구원하실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을 가리키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라는 이들이 끊임없이 고난에 시달리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분이 개입하시면 적들은 도망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일어나셨다는 소리에 놀라 민족들이 큰 소동을 벌이며 흩어집니다(3). 여호와께 대적하던 자들이 멸망합니다. 메뚜기 떼가 푸른 것을 모두 벗겨 먹듯이 살해당한 자들의 소유물이 남김없이 약탈당합니다.

 

(3) 찬양(5-6)

 

여호와께서 시온의 보호자로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5). ‘높은 곳에 거하시는 여호와’는 땅의 영향을 받지 않고 땅을 지배하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높은 곳에서 홀로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땅의 역사를 경영하십니다. 불의와 불법을 자행하다 심판에 떨어진 예루살렘을 그분께서 정의와 공의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분께서 채워주시는 정의와 공의가 예루살렘의 평안함과 구원을 보장해줍니다(6).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거짓 지혜와 지식이 사라지고 여호와를 아는 지혜와 지식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애굽이나 앗수르를 두려워하지 말고 참된 반석이신 여호와만 경외하고 그분의 지혜에 의존해서 살아야 합니다.

 

높은 곳에 거하시는 분(7-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 됨의 증거로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유다를 향해 하나님은 앗수르를 보내사 그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다.

 

7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8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9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 11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12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 13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14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15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16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7-16)

 

앗수르의 악행은 남 유다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다 왕은 앗수르와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사실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사신들을 슬피 곡하며 돌아와야 했습니다. 유다의 용사들 역시 울부짖습니다.

 

(1) 탄식: 절망적 현실(7-9)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화하여 유다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합니다.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거리로 나와 힘을 합쳐 부르짖습니다. 전쟁터에서 적과 싸워야 할 용사들도 거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고, ‘평화의 사신’도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없어 비통하게 웁니다(7). 유다와 예루살렘을 연결해주는 대로가 적의 수중에 떨어져 상인과 여행자가 끊겼고, 대적은 조약을 파기하고 성읍들을 짓밟습니다(8). 전쟁의 참화로 가나안의 기름진 땅이 모두 메말라 생명력을 상실합니다(9). 예루살렘 멸망은 시간문제입니다. 마지막 순간 ‘높은 곳에 거하시는 분’께서 개입하셔서 ‘우리의 팔’과 ‘우리의 구원’이심을(2) 보여주십니다.

 

(2) 응답: 파괴자들의 심판(10-13)

 

오랫동안 바라보시던 여호와께서 행동에 나서십니다. 세 번 반복 사용된 ‘이제’와 세 개의 동사 ‘일어나며’, ‘높이며’, ‘지극히 높아지리라’는 새로운 신적 사건의 시작과 그 확실성을 최고로 강조합니다(10). 그분의 의지에 거슬러 행동하는 자들은 생명력 없는 겨(마른 풀)를 잉태하여 불쏘시개로 쓰이는 지푸라기를 낳고, 이들의 거친 숨은 멸망의 불을 더 지필 뿐입니다(11). 이들은 등에 마른 지푸라기를 지고 불구덩이로 달려드는 자들과 같습니다. 계획 자체가 실패를 잉태하고 있기에 반드시 멸망합니다. 이들은 불에 타고 남은 횟돌(재)처럼, 불에 던져진 가시나무처럼 될 것입니다(12). 멸망에서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먼 데 있는 자들’(민족들)과 ‘가까이 있는 자들’(시온의 죄인들)은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13).

 

(3) 시온에 거주할 수 있는 자(14-16)

 

하나님께서는 전에도 여러 번 적들을 진멸하기 위해 일어나셨습니다. 그분의 간섭과 능력은 이미 역사 안에 계시되었기에 알려고 하는 자들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민족들과 시온의 죄인들은 너무 늦지 않게 역사 안에 드러난 그분의 권능을 깨닫고 파국적 심판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새로운 예루살렘은 내적으로도 정화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분의 현존은 불의한 자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14).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시는 여호와께서 죄인들에게는 ‘삼키는 불’로 나타나십니다. 오직 악을 멀리하고 의를 행하는 자만 여호와께서 불로 현존하시는 시온에 살 수 있고, 그분의 보호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영히 타는 것’은 제물을 살라 바치는 번제단의 석쇠를 가리킵니다(레 6:9). ‘죄인들’과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시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구원받은 시온에 살 수 있는 자의 자격 조건으로 여섯 항목이 제시됩니다(15). ‘공의에 따라 걷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연대감 속에 이웃과 더불어 사는 자세를,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언어 행위의 의로움을, 토색한 재물은 속임수나 폭력으로 부당하게 취득한 이익을 말합니다. 뇌물은 율법에 의해 엄격하게 금지됐지만(출 23:8) 재판과 상거래에서 빈번하였습니다. ‘피 흘리는 일’은 무죄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모든 폭력적 행위를, ‘악한 일을 보지 않는 것’은 이웃을 해하려는 음모나 모의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악에서 떠난 의인은 외부의 위협에서 벗어나 풍족하게 살게 됩니다(16). 여호와의 현존이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사는 자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양식과 물이 떨어지지 않게 해줍니다. ‘높은 곳’과 견고한 바위로 된 요새는 적이 침략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을 가리킵니다.

 

시온의 왕 여호와(17-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경건하지 않으면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유다 백성도 경건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17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18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19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20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21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 22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23네 돛대의 줄이 풀렸으니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24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17-24)

 

이전에 유다는 앗수르의 포위로 수치의 슬픔의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고, 한 왕이 영광과 존귀를 입습니다. 이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광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1) 아름다운 모습의 왕(17)

 

왕의 출현과 함께 구원 시대가 시작됩니다(17). 시온이 보게 될 ‘아름다운 모습의 왕’이 메시아를 또는 하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구원 시대의 통치자는 화려하고도 위엄 있게 외관을 꾸미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분의 통치에 이스라엘 영토는 끝이 보이지 않게 확장됩니다(창 13:14-15).

 

(2) 사라지는 이방 압제자들(18-19)

 

민족들에 의한 경제적 수탈과 군사적 통제가 과거사가 됩니다(18-19).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떠들며 거만하게 거리를 활보하던 민족(앗수르)을 더는 보지 않게 됩니다(19). ‘(화폐를) 계산하던 자’와 ‘(귀금속을) 계량하던 자’는 조공을 위해 돈을 거둬들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망대를 계수하던 자’는 점령군에 의해 방어 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망대(탑)의 수가 제한됐음을 시사해줍니다.

 

(3) 시온의 샬롬(20-24)

 

해방된 시온에 다시 축제의 기쁨이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은 ‘안정된 처소’,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 됩니다(20).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말뚝을 뽑고 줄을 정리하며 장막을 거두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시는 옮겨지지 않습니다. 풀이 넉넉하고 안전하여 다른 초지로 옮기지 않아도 되듯이, 하나님 백성은 예루살렘에서 안전과 풍요를 즐기며 영원히 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하시며 그 주변에 넓은 강들을 흐르게 해서 적들이 침입할 수 없게 해주십니다(21). 예루살렘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영광과 권능이 강물처럼 성 주변을 흐르니 대적의 접근 자체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절대 안전은 여호와의 왕권에 근거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재판장’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로, ‘우리의 왕’으로 직접 통치하시기에(22), 다시는 불의한 재판장이나 무책임한 지도자나 무능력한 왕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왕이신 여호와께서 홀로 싸우시기에 전쟁을 준비하거나 싸움에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23). 시온은 승리의 기쁨을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누구도 무기를 들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에 다리를 저는 자까지도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9:3)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은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기에 그곳에는 병든 자나 연약한 자가 없습니다(24). 여호와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니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악한 세력도 예루살렘에 발붙일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외부의 위협에서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나 재앙과 같은 모든 부정적 세력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경건의 삶을 삽니다. 경건의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오래 신앙 생활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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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2-01)


공의와 정의로 통치할 의로운 왕

이사야 32장 1-20절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편지라는 의미는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런 편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향기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아름다운 예수님의 향기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나눈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여호와의 계획은 앗수르의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는 것 이상입니다. 구원 시대가 계속될 수 있도록 의로운 통치자들도 예비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왕과 방백들을 세워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게 하실 것입니다. 광야와 아름다운 밭에 정의와 공의가 자리를 잡고, 평화와 평안과 안전을 노리며 살게 됩니다.

 

의로운 왕(1-8)

 

참된 왕은 백성을 사랑합니다. 진리와 공의로 가르치길 원합니다. 공의가 법적으로 형평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정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지는 올바름입니다. 공의가 원리 혹은 방향이라면, 정의는 인간사의 사소한 삶의 맥락과 같은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는 모든 면에 있어서 공평하고 바르다는 것입니다.

 

1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2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3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4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5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6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8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1-8)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로운 왕은 사람들의 피난처가 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을 향해 가난한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통치를 기뻐할 것입니다.

 

(1) 정의와 공의의 통치(1-5)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심판 이후의 구원 시대에는 왕이 공의로 통치하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립니다(1). 방백은 왕의 고위 관료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정의와 공의에 따라 백성을 인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후손들에게 기대하셨던 의로운 통치가 이뤄집니다. 왕과 방백들이 모두 광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났을 때 사람들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피신처가, 메마른 땅에서도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냇물이, 작열하는 태양을 피할 수 없는 사막에서도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시원한 큰 바위 그늘이 됩니다(2).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고 위험한 곳으로 이끌던 이전의 무능력한 지도자들과 달리, 의로운 통치자들은 신실한 목자로 양 떼를 안전하게 보살핍니다. 공의와 정의에 따라 통치하기에 어떤 악한 세력도 백성의 안전과 평안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구원 시대에는 심판을 초래한 한계와 불순종이 극복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던 자들이 보게 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던 자들이 듣게 됩니다(3; 6:10; 29:9-10,18). 하나님께서 들러붙은 눈을 떼어주시고 막힌 귀를 뚫어주셔서 그분의 역사를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왕과 방백들은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고, 백성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여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때는 ‘조급한 자의 마음’이 깨달음을 얻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고 분명하게 말합니다(4). 조급한 자들은 생각 없이 처신하는 자들이며, 그 마음은 통찰력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음이 없기에 저들의 결정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눌한 자(더듬거리는 자)는 말에 솔직함과 명료함과 진실함이 결여된 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조급한 자의 마음이 깨닫는 ‘지식’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필요한 지식도 포함됩니다. 구원시대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3:4-5) 다시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고귀한 이로, 우둔한 자가 존귀한 이로 불리는 경우가 없을 것입니다(5).

 

(2) 어리석은 자와 존귀한 자(6-8)

 

어리석은 자와 존귀한 자를 대조시키는 6-8절은 현재의 문맥에서 5절의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윤리, 종교적으로도 타락한 자를 가리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죄악을 지어내고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여호와를 거슬러 패역한 말을 하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습니다.

권력과 힘을 남용해 제 욕심만 채우고, 공동체의 어려움에는 눈을 감음으로써 여호와께 반역을 일삼는 자입니다.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는 공동체를 여호와에게서 벗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굶주린 이와 목마른 이를 돕지 않고 내치는 자는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곧 사회와 개인의 안녕과 번영을 방해하는 자에 속합니다(58:1-12; 잠 25:21; 마 25:31-46). ‘악한 자’는 그 무기(‘그릇’)가 악하여 악한 일만 계획하고, 또 힘이 있기에 이를 실천에 옮겨 사회적 약자를 착취합니다(7). 가난한 자가 바른말을 해도 거짓말로 이들을 파멸시킵니다. 법정에서 술책과 거짓으로 힘없는 자의 권리를 짓밟습니다. 어리석은 자처럼 악한 자도 공동체의 삶에는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욕심 채우기에만 열심입니다.

‘가련한 자’와 ‘가난한 자’는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빈곤한 자를 가리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고 존귀한 일을 위해 일어섭니다(8). 그는 어리석은 자와 악한 자의 폭력에 노출된 빈곤한 자를 돕고 공동체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헌신합니다. 그는 존경받는 사회적 신분에 속한 자로 자신의 사회 윤리적 책임을 다합니다.

 

한 성읍의 멸망(9-14)

안일한 일상은 하나님을 망각하게 합니다. 그들은 작년처럼 올해도 많은 열매를 수확했기에 내년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연속은 일상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축소시킵니다. 계속된 성공 역시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9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0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 11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14대저 궁전이 폐한 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오벨과 망대가 영원히 굴혈이 되며 들나귀가 즐기는 곳과 양 떼의 초장이 되려니와(9-14)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시는 날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일상의 은혜와 계속된 성공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거룩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1) ‘들을지어다’(9)

 

예언자의 시선이 미래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그는 안일하고 염려 없이 사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애곡하라고 명합니다. 애곡은 죽을 자를 위하여 부르는 노래로, 예루살렘의 멸망이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확정됐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제 남은 일은 죽음을 위해 애도하는 것뿐입니다. 주로 여자들이 애가를 불렀기에(렘 9:16-19) 예루살렘 주민 전체를 대표하여 ‘여인들’이 청자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2) 재앙의 선포(10)

 

태평스럽게 사는 자들은 파국적 재앙이 바로 문 앞에 다가왔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일 년 남짓 지나면’ 이들은 현실화한 재앙 앞에서 당황할 것입니다. 포도와 곡식을 수확할 때가 돌아와도 포도원과 밭에는 거둬들일 포도와 곡식이 없습니다. 흉작이 한 해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기에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3) 애곡(11-14)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가 제의적 행위를 반영하는 표현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는 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평상시에 입던 옷을 벗으라는 말로 보입니다.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행위도 죽은 자를 위한 애도 의식에 속합니다. 가장 비옥한 곳에 땀 흘려 만든 포도원의 파괴는 농부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경작지에는 가시와 찔레가 자라고, 흥겨운 성읍에서는 흥겨움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는 집에서는 기쁨이 사라집니다. 생존의 토대가 모두 파괴됩니다. 궁궐도 버려지고 성읍에는 인적이 끊깁니다. 예루살렘이 영원한 황무지가 되어 들나귀와 가축의 차지가 됩니다. 여호와께 반역한 예루살렘이 그분께서 보낸 전쟁의 참화로 황무지가 됩니다. 오벨은 예루살렘 성전의 남쪽과 다윗 성 사이에 있는 언덕을 가리킵니다.

 

구원 약속(15-20)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계명에 순종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엄밀하게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 백성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가시와 찔레가 납니다. 불순종한 나라의 궁전은 폐허가 되고, 많은 인구가 거하던 성읍도 적막해질 것입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17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18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19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20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15-20)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광야로 전략한 유다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날 ‘아름다운 밭’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1)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영(15)

 

경작지와 집과 성읍이 파괴되지만 영원히 폐허로 남지는 않습니다. 심판하신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의 처참한 운명에 다시 개입하실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부어 주시는 영’에 의해 광야가 아름다운 밤이 되고, 아름다운 밭이 숲으로 여겨집니다(15). 기름진 과수원에서나 볼 수 있는 과실수들이 광야에서 자라고, 과수원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울창한 숲이 됩니다. 사람의 능력과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여호와께서 영을 부어 주셔서 심판의 폐허를 말끔히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2) 정의와 공의의 회복(16)

 

그분의 영은 황폐해진 땅을 비옥한 땅으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정의와 공의가 지배하는 의로운 사회로 만듭니다(16). 통치자들에 의해 유린당했던 정의와 공의가 광야와 과수원에 항구적으로 자리 잡습니다.

 

(3) 정의와 공의의 열매(17-18)

 

정의와 공의가 확립되었기에 사회는 평화와 평안과 안정을 즐기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외부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 안전한 곳에서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참된 평화와 안전은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이 생각하듯이 군사력이나 동맹정치가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가능하게 해준 자연의 풍요와 사회정의가 그 열매로 맺는 것이 평화와 안전입니다. 찔레와 가시로 뒤덮인 땅이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이 됩니다(18). 하나님 백성이 광야심판)의 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쉬는 곳’(머누하)에 들어가 참된 안식을 찾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세력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4) 성읍의 파괴(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숲에 우박을 내려 쓰러뜨리시고 성읍을 파괴하십니다(19).

 

(5)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20)

 

하나님 백성이 다시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구원 약속이 축복의 말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놓아 기르는 너희에게 복이 있으리라’(20). 정의와 공의가 충만한 자연과 사회의 복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위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는 심판이, 의인들에게는 회복과 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쉼과 열매를 가져다준 숲이 우박에 상하고 죄인들의 성읍은 파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들은 결국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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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1-01)

 


공의로 통치할 위대하신 왕

이사야 31장 1-8절


 

살다보면 위기의 순간이 있습니다.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위기의 순간 내가 의지하는 것이 실제 내가 믿는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 우리는 각자 믿는 대로 행동합니다. 평소 믿음은 위기의 순간을 위한 연습이며 훈련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 누가 예루살렘의 보호자입니까? 누가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역사를 주관합니까? 애굽이나 앗수르 같은 강대국이 땅의 역사를 결정합니까? 강대국의 절대 권력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물론 민족들의 운명도 여호와께서 결정하시는데,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도와줄 능력과 의지가 있으신 여호와를 버리고 사람에 불과한 애굽을 의지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1-3)

참된 왕은 백성을 사랑합니다. 진리와 공의로 가르치길 원합니다. 공의가 법적으로 형평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정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지는 올바름입니다. 고의가 원리 혹은 방향이라면, 정의는 인간사의 사소한 삶의 맥락과 같은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는 모든 면에 있어서 공평하고 바르다는 것입니다.

 

1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2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3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1-3)

 

선지자는 장차 한 왕이 나타나 공의와 정의로 통치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 왕은 종교 개혁을 이룬 히스기야를 가리킵니다. 히스기야 이전에 유다는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1) 화의 선언(1a)

 

앗수르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자 유다의 정치가들은 애굽으로 사절을 파견해 도움을 구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바라보거나 찾지 않고 애굽에서 구원자를 찾습니다. 이들은 애굽의 수많은 군마와 병거와 마병에서 실질적인 힘과 도움을 보았습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이 내린 결정에 맞서 유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 백성의 생존을 애굽에 의존하려는 자들의 지혜가 파국적 재앙을 초래하는 어리석음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불신앙을 정죄하시려는 그분의 의지는 확고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2) 여호와의 반응(2)

 

앗수르의 왕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께서 이들에 맞서 일어나셔서 ‘악행하는 자들의 집’뿐만 아니라 형악을 돕는 자들도 치십니다. 유다를 도우려는 애굽마저 여호와의 심판에 넘겨집니다. 여호와께서 등을 돌린 예루살렘 왕궁을 징계하기로 하셨기에, 유다를 도우러 원정에 나서는 애굽도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악행 하는 자들은 예루살렘의 정치가 여호와에게서 얼마나 멀리 떠났는지를 단정적으로 보여줍니다. 정의와 공의를 짓밟고 공동체를 무질서 상태에 빠뜨리는 자들이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이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왕궁에서 정치하기에 멸망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어집니다.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 즉’은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지혜로움을 전제합니다. 정치가들이 참된 지혜자라면, 지혜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의 의지를 알 수 있어야 했습니다. 지혜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께서 이들의 지혜에서 나온 결정을 무력화해 이들의 지혜가 거짓 지혜임을 폭로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이 참된 지혜자였다면, 도움을 청하러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굽인들은 신의 결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사람(아담)이지 운명을 결정짓는 ‘신’(엘)이 아닙니다. 그들의 군마도 덧없는 ‘육체’(바사르)이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영’(루아흐)이 아닙니다.

 

(3) 애굽의 실체(3a)

 

사람과 육체에 불과한 애굽인과 그들의 군마에 의지하는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어리석음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응답하십니다. 홍해에서 오른손을 펴서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를 진멸하셨던 분께서(출 15:12), 이스라엘의 거듭된 불순종에 펴신 손을 거두지 않으셨던 분께서(9:12,17,21; 10:4) 이제 권능의 손을 펴서 돕는 자(애굽)와 도움을 받는 자(유다)를 치시기에 둘 다 쓰러져 멸망을 당합니다. ‘넘어지며’의 ‘카샬’과 ‘엎드러져서’의 ‘나팔’은 자주 전쟁의 패배와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됩니다. ‘육체’는 ‘연약함과 덧없음’을 특징으로 하는 창조된 인간을 가리킵니다.

 

(4) 여호와의 반응(3b)

 

영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생명의 원리로 사람이 활동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주실 때 군마는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28:6).

 

시온의 구원(4-5)

믿음은 선택입니다. 그 믿음으로 순간순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위기의 순간 우리 앞에는 항상 두 가지 선택지가 보입니다. 돈과 권력을 의지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입니까?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선택할 때 구원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진리를 따라 행하는 의로운 왕의 통치는 모든 사람을 살게 합니다.

 

4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5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4-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감기지 않고, 귀는 우리의 작은 소리에도 아주 민감합니다. 세상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켜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스리시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1) 먹이를 지키는 사자의 비유(4)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한 당신의 의지를 일상적 경험 세계에 속한 비유에 담아 보여주십니다. 사자의 비유에서 사자에 움켜잡힌 먹이는 이중적 역할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에 의한 예루살렘의 징계/심판의 의미를 갖습니다. 사자의 으르렁 거림은 먹잇감을 살려주려는 애씀이 아니라, 자기 먹잇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위협적인 울부짖음입니다. 사자의 먹잇감이 된 양처럼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의 보호 아래 있는 예루살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먹잇감이 사자의 소유이듯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소유입니다. 목자들이 사자에 사로잡힌 양을 구해낼 수 없듯이 아무도 여호와에게서 예루살렘을 빼앗지 못합니다. 목자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워도 사자가 자기 먹잇감을 포기하지 않듯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침략자들의 위협에서 지켜주십니다. 목자는 고대 근동에서 통치자의 상징으로 사용됐습니다. 사자에게서 먹잇감을 빼앗으려는 목자들은 유다에 대한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앗수르의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사자 비유는 예루살렘이 독점적으로 여호와께 속했음을 전제합니다.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독점적 권리를 무시하면 심판의 대상이 되지만,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그걸 뺏으려는 외부 세력으로부터는 보호를 받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려오셔서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목자들에 맞서 싸우십니다. ‘강림하여’는 1절의 ‘내려가는’과 같은 동사 ‘야라드’의 번역입니다.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은 여호와를 찾지 않고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고, 여호와께서는 앗수르의 침략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시려 시온 산에 내려오십니다.

 

(2) 먹이를 지키는 새의 비유(5)

 

여호와께서는 앗수르에 의한 징계를 통해 당신을 앙모하지 않는 자들에게 예루살렘이 당신께 속한 도성임을, 예루살렘의 보호자가 애굽이 아니라 당신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5)는 대개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새의 모습(신 32:11; 시 36:7; 91:4)을 보여주지만, 원문은 단순히 ‘맴도는 새들’입니다. 사자의 비유와 관련이 있다면, 본문의 새는 사자가 먹다 남긴 잔해를 자기 것으로 지키기 위해 그 위를 맴도는 맹금을 가리킵니다. 제 먹이를 지키는 맹금처럼 여호와께서 (사자의 먹이처럼 심판에 떨어져 거의 죽게 된) 예루살렘을 보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불러 당신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치게 하시지만, 이들의 손에 완전히 넘기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에 구해주십니다(14:24-27; 22:1-14; 29:1-8; 30:27-33). 후반절은 전반절의 동사 ‘보호하다’를 다시 사용하면서 거기에 유사한 의미의 세 동사를 더해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최상급으로 강조합니다. ‘그분께서 보호하시고 건지시며 아끼시고 구원하시리라’(사역). 정치가들의 지혜나 이들이 의존하는 애굽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당신 도성으로 선택하신 여호와께서 보호해주십니다.

 

앗수르의 심판(6-9)

죄는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를 변질시키고 왜곡시킵니다. 의로운 왕은 그것을 바로 세웁니다. 때로 부와 권력은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를 조종합니다. 우둔한 자가 존귀한 자로 둔갑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왕의 통치를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아 줍니다.

 

6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7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우상, 금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 버릴 것이며 8앗수르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켜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의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9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6-9)

 

악한 자들이 통치하는 세상에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자들이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악하고 부패하여 탐욕이 강한 자들이 높임을 받습니다. 경건함이 없는 곳에서 악인들은 계속해서 악한 일을 계확하고 실행합니다.

 

(1) 권면(6)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보호자이시기에 이스라엘은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6). 앗수르의 위기는 이스라엘의 배반을 징벌하는 심판이기에, 이들이 시온 산에 거하시는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분을 앙모하고 구하면 해결됩니다.

 

(2) 버려지는 우상(7)

 

회개는 구체적으로 우상숭배에서 떠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7). 자기 손으로 은 우상과 금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 우상숭배가 노골적이고 의지적이었음을 시사합니다. 회개와 우상 제거가 구원의 전제 조건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구원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앗수르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구원은 여호와의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14:26)에 따른 것입니다.

 

(3) 앗수르의 멸망(8-9)

 

앗수르는 사람의 칼이 아닌 (다른) 칼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8).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를 쳐서 쓰러뜨리시는(3) 여호와께서 이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칼에 넘겨 쓰러지게 하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어야 할 앗수르 왕과 고관들이 놀라 도망합니다(9). 앗수르의 반석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의 반석(여호와 하나님)에 질겁하여 물러갑니다. 시온에 불을, 예루살렘에 풀무를 가지신 여호와의 말씀이기에 예언자의 선포는 반드시 성취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갖고 계신 불과 풀무는 성전과 제단 위의 불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이 등을 돌린, 시온 산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앗수르를 멸망시키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십니다.


공의와 정의의 왕은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희망과 소망이 됩니다. 히스기야는 타락한 남 유다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공의와 정의의 세상은 메시아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참된 소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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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0-02)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사야 30장 18-26절


 

완전히 망한 듯 보여도 회복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과 사람의 기다림, 그 두 가지의 기다림이 회복의 희망입니다. 어떤 절망스런 상황을 만나더라도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기다림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회복이 됩니까?

 

  • 하나님께서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심판에 넘기십니다. 출애굽에서 시작한 그분과 그분 백성의 관계가 파탄에 직면합니다. 심판 이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완악함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가능합니까? 이사야는 새로운 출발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기에 구원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18-26)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황하던 백성을 그분의 뜻대로 지도할 선생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른길로 가도록 백성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으려면, 모든 우상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 앞에 나아와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18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9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20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21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22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23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24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25크게 살륙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에 고산마다 준령마다 그 뒤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26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18-26)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도 유다 백성이 돌아오도록 기다리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1) 구원의 때(18-19)

 

심판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답변은 아니었습니다. 기다림의 기간이 끝나면 그분께서 개입하실 것입니다(18). 그분께서 파국적 재앙에 떨어져 신음하는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가엾이 여기셔서 멸망에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이사야가 내다보는 미래의 구원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는 고백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한 그분의 정의가 절망에 처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사야는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정의의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의로움을 드러내 보여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자는 그분의 의로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불순종의 심판으로 단절됐던 관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절망적으로 탄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죄로 상달될 수 없었던 예루살렘 주민들의 부르짖음이 다시 그분의 귀에 들리고 이들의 통곡에 응답하십니다(19). 이에 예루살렘은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됩니다.

 

(2) 스승이 되신 하나님(20-22)

 

구원 시대의 물질적 전망과 영적 전망이 대조적으로 기술됩니다(20).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은 죄수들에게 주는 최소한의 음식입니다(왕상 22:27). 구원 시대에도 양식 부족은 여전하겠지만 굶주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생존에 필요한 만큼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십니다. 물질적 어려움과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는 온전히 회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스승으로 현존하시기에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렘 31:33-34; 욜 2:28-32).

예루살렘 주민은 두 눈으로 여호와를 보고 그분의 의지를 직접 알게 됩니다. 목자가 뒤에서 양 떼를 따르며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21).

그분의 지시에 따라 좌우로 지나치지 않고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예루살렘 주민은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제 가운데 동행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가기에 다시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불결한 물건’(생리대)을 버리듯이 단호하게(‘나가라’) 내던져버립니다(22).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질 구원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은 그분의 진노 아래 살았던 이전 시대와 완전히 결별해야 합니다. 구원 시대의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19)과 심판 시대의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9)의 대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3) 땅의 축복(23-24)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면서 물질적 부족함도 해결됩니다. 그분의 저주로 황폐해졌던 땅이 그분의 축복 아래 기름진 땅으로 바뀌어 풍족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분이 비를 내려주셔서 비옥해진 땅에 곡식이 풍성해지고, 광활한 푸른 목장에서는 가축이 풀을 배불리 뜯어 먹습니다(23). 가축도 구원 시대의 풍요로움을 누립니다. 밭일하는 소와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불러 맛있게 만들어진 사료를 먹습니다(24).

 

(4) 살육의 날(25)

 

하나님 백성이 구속받는 날은 이들을 억압하였던 적이 살육을 당하는 날이요, 인간의 교만(망대)이 무너지는 날이요, 함께 신음하던 자연까지도 해방을 받는 날입니다(25). 이스라엘의 해방과 자연의 회복이 ‘하나의’ 구속 사건이 됩니다. 땅이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고 높은 산과 언덕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이 생깁니다. 물이 부족했던 산악 지대에도 개울과 냇물이 흘러 푸른 나무와 풀이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산악지역마저 농사에 적합한 기름진 환경으로 변화시켜줍니다.

 

(5) 치유의 날(26)

 

그날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해주시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치셨기에 누구도 돌봐줄 수 없었던 상처를 그분께서 직접 싸매주십니다(26). 그분께서 이전의 일곱 배나 더한 은총의 빛으로 상처를 치료해주십니다. 구원 시대에는 그분 치유 능력이 온 세상에 충만해서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앗수르의 심판(27-33)

심판주 하나님의 열정적이고 강력한 모습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통과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통과 억울함을 다 보고 또 알고 계시지만, 때가 되기까지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킨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27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의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의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28그의 호흡은 마치 창일하여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 같은즉 그가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며 여러 민족의 입에 미혹하는 재갈을 물리시리니 29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 피리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 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32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탈 것이며 그는 전쟁 때에 팔을 들어 그들을 치시리라 33대저 도벳은 이미 세워졌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에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27-33)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대적이 당하게 될 심판을 생동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대적의 위협 앞에 떨고 있는 백성을 위로합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해서 상처를 싸매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의 온화한 모습과 자기 백성의 대적에 대해서는 맹렬한 물로 태우실 것입니다.

 

(1) 멀리서 오시는 여호와(27-28)

 

당신 백성을 심판에 내맡기고 멀리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구해주려고 돌아오십니다. 이스라엘에 진도하셨던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민족들에 진노하십니다. 그분의 진노와 분노가 연기 자욱하게 불처럼 타오릅니다(27). ‘분노로 가득한 입술’과 ‘맹렬한 불과 같은 혀’는 재앙을 일으키는 저주를 시사해줍니다. 그분의 말은 그분의 의지가 담긴, 사건을 만들어가는 신적 능력입니다. 그분이 거친 숨을 내쉬며 적들과 싸우는 용사처럼 민족들을 진멸하십니다(28).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앗수르)를 불러 반역한 유다의 ‘목에까지 미치게’하신(8:7-8) 여호와께서 ‘창일하여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와 같은 당신 호흡으로 민족들(앗수르)을 심판하십니다(28). 여호와의 도구로 유다를 침략했던 앗수르가 여호와에 의해 동일하게 징벌을 받습니다. 그분께서 ‘멸망하는 키’민족들을 까부르시고 그들의 입에 ‘미혹하는 재갈’을 물리십니다.

원래 알곡과 잔돌을 구분해내는 키가 멸망의 키로 사용되면서 알곡이나 돌이나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모든 민족이 예외 없이 멸망에 넘겨집니다. 미혹의 재갈이 입(턱)에 물렸기에 민족들은 자진하여 멸망의 길을 택합니다. 승리에 도취한 교만한 민족들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약탈 전쟁에 나섰다가 멸망을 당합니다.

 

(2) 노래하며 기뻐하는 자들(29)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크게 살육하는 날’은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민족들에게 억압당하던 이스라엘에 축제의 기쁨과 즐거움이 다시 돌아옵니다(29). 저녁에 시작하는 축제의 절기에 사람들은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여호와께서 계신 시온 산으로 순례 행진에 나섰는데, 다시 넘치는 기쁨으로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3) 앗수르를 치시는 여호와(30-32)

 

예언자의 시선이 다시 심판의 대상인 앗수르를 향합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앗수르를 치십니다. 그분께서 진노하사 팔을 휘두르시고 천둥(목소리)과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대적을 치십니다(30).

앗수르가 제 손의 힘과 지혜로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버리고 버려진 알을 거둬들이듯이 온 세상을 거둬들인(10:13-14) 초강대국일지라도 진노하신 여호와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목소리’를 수식하는 ‘장엄한’(호드)은 자주 왕적 위엄을 나타낼 때 쓰이며(합 3:3; 시 8:1; 145:5; 148:13), 여호와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실 것을 시사합니다. 천둥을 의미하는 목소리와 함께 사용된 ‘치시는 팔’은 번개를 가리킵니다. 잔혹함과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많은 나라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앗수르가 공포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습니다(31). 여호와께서 직접 막대기로 앗수르를 치십니다. 여호와의 손에 들린 ‘진노의 막대기’였던 앗수르(10:5)가 여호와께서 휘두르는 막대기로 매를 맞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누가 막대기(왕홀)의 진짜 주인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앗수르의 멸망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한계를 벗어난 교만한 권력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분께서 앗수르와 싸우시는 날은 예루살렘이 기쁨의 축제를 즐기는 날입니다(32).

 

(4) 마련된 소각장(33)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홀로 앗수르를 진멸하시기에, 이스라엘은 소고를 치고 수금을 타면서 그분의 승리를 즐거워하기만 하면 됩니다. 앗수르를 멸망시킬 모든 준비가 마쳐졌습니다. 앗수르와 그 왕을 태워버릴 도벳(소각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마련됐습니다(33). 불구덩이는 넓고 깊게 만들어졌고 불과 나무도 충분히 갖춰졌습니다.

‘여호와의 호흡’이 소각장의 불을 사르기에 그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심판의 장소 도벳은 앗수르를 조롱하기 위해 선택된 장소 같습니다. 우상을 섬겼던 앗수르가 더럽고 가증스러운 희생제물처럼 멸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절한 파괴가 아니라, 아름다운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악한 나라들은 망하고 주의 백성은 반석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놀라운 회복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갈망을 가지고, 올바른 가르침을 찾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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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0-01)


애굽과 동맹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30장 1-17절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붙들어야 합니다. 돌이킬 기회가 있을 때 돌이켜야 합니다. 기회가 다 지나갈 때까지 끝까지 거부한다면 결국 망할 뿐입니다. 내 앞에 놓인 기회는 무엇입니까? 기회를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회복의 기회를 거부하고 헛된 것을 의지하진 않습니까?

 

  • 하나님께서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심판에 넘기십니다. 출애굽에서 시작한 그분과 그분 백성의 관계가 파탄에 직면합니다. 심판 이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완악함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가능합니까? 이사야는 새로운 출발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기에 구원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바로를 찾는 자들(1-7)

환난의 시기에는 그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으로 피난처를 삼는지가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애굽’은 이 세상 세력과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강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애굽’을 자신의 도움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그분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의 재물과 권세와 지식과 연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의 힘과 피난처로 삼으라고 권고합니다.

 

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2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3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4그 고관들이 소안에 있고 그 사신들이 하네스에 이르렀으나 5그들이 다 자기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민족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니 그 민족이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도 못하고 수치가 되게 하며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 6네겝 짐승들에 관한 경고라 사신들이 그들의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싣고 그들의 보물을 낙타 안장에 얹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갔으나 7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1-7)

 

국가적 어려움에 처했음을 때 정치가들은 대체로 주변 강대국의 동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합니다. 이사야 당시에 유다의 지도자들도 앗수르의 위협에 직면하여 이 같은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애굽과의 군사 동맹으로써 곤경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1) 화의 선포(1-3)

 

여호와를 버리고 바로를 찾는 자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 시대의 애굽 의존적 동맹정치를 고발합니다. ‘패역한 자식들’은 유다의 대외 정치를 주관하는 자들로(1), 28:14의 ‘오만한 자’와 내용상 일치합니다. 왕궁의 정치가들은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동맹자이신 여호와를 무시하고 다른 정치 세력과 동맹을 맺어 생존을 도모했습니다. 여호와의 의지는 이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에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들의 계교(계획)와 맹약(동맹)은 여호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죄악이 됩니다. 패역한 자식들의 계교와 맹약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이들은 이사야의 선포를 거절하고 애굽의 바로에게서 도피처를 찾았습니다(2).

‘보호(세력), 도피처, 그늘, 피난처’는 시편에서 시온에 계신 여호와께 도움을 구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입니다. 이사야는 의도적으로 예배자들의 언어를 사용해 애굽과 바로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왕궁의 정치가들이 애굽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애굽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도피처와 피신처를 보지 못하고 헛된 곳에서 찾았습니다. 영적 맹인입니다(29:9).

여호와의 보호와 그늘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바로의 그늘에서 보호를 찾는 자들은 우상숭배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을 찾아 바로에게 내려가는 자들에게 직접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바로의 보호가 수치가 되고, 애굽의 그늘에서 찾은 피신처는 수욕이 될 것입니다(3). 구원을 기대하며 바로의 보호와 애굽의 그늘 아래로 피하지만 치욕적 결말로 끝날 것입니다.

 

(2) 구체화한 심판의 위협(4-5)

 

앗수르에게 사로집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끌려갈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유다의 시신들은 나일 삼각주 북동쪽에 위치한 소안과 하네스에서 바로의 고관들과 사신들과 협상을 벌입니다(4).

본문이 애굽 군대가 엘드게(Eltheke)에서 앗수르 군대와 싸우기 전에 선포된 말씀이라면, ‘패역한 자들’의 계교가 전혀 성과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애굽은 거짓 피난처에 불과합니다(28:15). 애굽이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엘드게에서 대파당한 후 애굽은 유다를 돕기 위해 다시는 국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의 출발지로 간주되는 소안(시 78:12,43)의 언급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소안에서 바로를 굴복시킨 여호와의 능력을 경험했는데, 그 후손은 여호와를 버리고 도와줄 능력이 없는 바로에게로 내려가 도움을 찾습니다. 출애굽의 여호와를 잊은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수치뿐입니다. 5절은 내용상 3절의 반복으로, 패역한 자식들에게 선포된 수치와 수욕의 심판이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됩니다.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도움을 찾으려 하기에 이들의 계교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3)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6-7)

 

사신들이 나귀와 낙타에 짐을 싣고 위험하고 곤고한 땅,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날아다니는 불뱀의 땅 네겁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갑니다(6). 가나안과 애굽을 이어주는 주요 통상로는 원래 해안 길로 해서 나일 삼각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사신들이 네겝을 지나는 험한 길을 선택했음은 해안길이 이미 앗수르에 의해 봉쇄되었음을 전제합니다. 대상들처럼 나귀와 낙타에 짐을 싣고 가지만, 실린 짐이 특별합니다. 유다의 특산품이 아니라 재물과 보물을 싣고 갑니다.

예루살렘은 바로의 호의를 긴급하게 얻기 위해 값비싼 선물을 보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예루살렘 왕궁은 가까이 계신 여호와를 바라보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는 애굽에 매달리지만,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할 뿐입니다. 덧없이 사라지는 입김과 같아서 도와줄지라도 아무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7).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눈에는 대단하게 보이겠지만, 애굽은 ‘가만히 앉은 라합’에 불과하다. 여호와께서 애굽의 실체를 알려주십니다. 겉보기에 무서운 괴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능력을 박탈당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괴물이다. 예루살렘은 ‘가만히 앉은’(샤바트) 라합에 의존하다가 ‘수치’(보셰트)를 당한다. ‘라합’은 여호와께서 태초에 칼로 베고 깨뜨린 원시 괴물의 이름입니다(사 51:9; 시89:10; 욥 26:12). 정치가들의 어리석음과 교만이 유다를 라합처럼 칼로 베임을 당하게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백성(8-17)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애굽을 의뢰하는 유다 백성의 죄악이 정죄되고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고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산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시면서 회개와 신앙을 촉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심판자가 죄인을 다루시는 방법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8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9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10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12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13이 죄악이 너희에게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게 되리라 하셨은즉 14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 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15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 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8-17)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계획대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패역한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특히 8-14절 부분은, 먼저 재판장이 피고에게 돌려진 죄를 진술하고(9-11) 그 다움에 죄에 대해 판결을 내림으로써(12-14) 전통적인 재판의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1) 패역한 백성(8-11)

 

하나님께서는 훗날의 증거를 위해 서판에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8). 그의 선포가 청자들에 의해 거절됐음을 전제합니다. 기록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우선은 거절당한 예언의 신적 정당성을 후에 입증하기 위해서이고, 다음은 후세대를 위해서입니다. 이사야의 선포는 그 시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영원히’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책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었습니다(9). 이사야의 선포가 긍정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그들이 너무 악했습니다. 이들의 거절은 귀를 닫는 것을 넘어 강제적이기까지 합니다. 선견자들에게 듣고 싶은 말을 선포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사야는 이들의 주장을 풍자적으로 인용하면서 자신의 예언자적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참된 계시 선포보다 거짓말을 더 즐겨 듣는 자들입니다. 듣기에 거북한 ‘바른 것’(‘여호와의 법’)보다는 귀에 거슬리지 않는 ‘부드러운 말을 좋아합니다(10).

선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들의 눈에는 오히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11). 전통적인 구원신앙에 사로잡힌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대적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2) 철저한 멸망(12-14)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제 악한 생각에 의지하는 자들에게 예기치 않은 순간 갑작스럽게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12). 현재 문맥에서 ‘압박과 허망’은 여호와 대신 애굽에 의지하는 이들의 반역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교만과 불순종은 마치 속에서 균열이 생긴 성벽과도 같습니다. 갈라진 성벽이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무너지듯이 하나님을 버린 예루살렘 정치도 몰락할 것입니다(13). 운명처럼 피할 수 없는 파괴적 힘으로 죄가 멸망으로 이끕니다. 아무도 이 파멸적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 이후의 이스라엘은 산산조각이 난 옹기그릇과 같게 됩니다(14).

 

(3) 구원을 원치 않는 자들(15-17)

 

크게 부서진 조각은 불을 담거나 물을 퍼내는 데에라도 쓸모가 있는데, 유다는 바스러진 옹기그릇처럼 철저하게 멸망합니다. 패역한 자들은 적의 침략에 직면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와 구원을 찾지 않고, 날랜 말에 의지하여 생명을 구하려 합니다(15). 구원의 조건은 ‘돌아옴과 평안함’(‘돌이켜 조용히 있어야’)입니다. 돌아옴은 여호와를 찾음을 의미하고(9:13), 평안함은 돌아옴의 결과입니다. 그분께로 돌아온 자는 그분 안에서 평안함(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그분께로 돌아옴이 ‘침착함과 신뢰함’(‘잠잠하고 신뢰하여야’)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분께로 돌아온 자에게는 그분께서 힘을 주시기에 흔들리지 않고 그분만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나 완악한 하나님 백성은 그분께로 돌아와 구원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불신앙과 결과는 앗수르의 위기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죄에 사로잡혀 고집스럽게 저항하다가 파멸을 자초합니다. 정치가들이 백성을 안심시키며 자랑하던 군사력(말)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말은 도망하는 데나 사용되지만, 추격하는 적의 달이 더 날래서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16).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심판에 넘겨주시기에 극심한 공황에 사로잡힙니다. 한 사람의 적이 소리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천 명이 도망합니다(17). 침략군에 죽임을 당하거나 도망하고 유다에는 극히 소수만 살아남습니다.


강한 나라를 의지하고 압박과 허망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말씀은 무시하는 건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회복의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회복을 얻을 기회입니다. 그 기회가 있는 동안에 거부하지 말고 그 말씀을 달게 들어야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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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9-02)


회복되는 이스라엘

이사야 29장 15-24절


 

말씀을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소망이며 탈출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기이한 일을 펼쳐 가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이 펼쳐질 때 어떤 변화들이 나타날지 선포합니다.

 

  • 정치지도자들은 유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이들의 교만은 민족의 생존에 치명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혜와 결정에 의거해서 역사를 결정할 수 있다고 과신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정치 무대에서 은퇴시키고 주인공으로 처신했습니다. 이들의 교만과 어리석음이 하나님 백성을 불순종과 멸망의 길로 내몹니다.

 

여호와를 무시하는 정치(15-16)

인간의 가장 큰 착각은 은밀한 계획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인간은 교만한 일, 오만한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고 정직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15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5-16)

 

토기장이 진흙의 비유만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잘 설명한 비유도 없습니다. 이 비유가 가장 적실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자주 불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임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1) 자기 계획을 숨기는 자(15)

 

예언자는 여호와 모르게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꾸미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합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주변 나라 은밀하게 정치적 거래를 도모하는 정치가들을 가리킵니다(28:14-15). 이들은 왕의 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실질적으로 유다의 정치를 결정하고 집행했습니다. 지혜자들로 인정받는 왕궁정치가들이 앗수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같은 처지에 있던 나라들과 연합을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의 감시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은밀하게 일을 꾸몄습니다. 이사야가 문제로 삼은 것은 이들의 비밀스러운 태도나 동맹정치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여호와 몰래 추진한 불신앙이었습니다. 시온산에 계시는, 다윗 왕조의 영원한 통치를 약속하신 여호와를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에 여호와는 철저히 국외자였습니다.

 

(2) 스스로 결정권자가 되려는 자(16)

 

‘어두운 데’(어둠)의 ‘마흐샤크’는 구약성경에서 죽음의 자리로(시 74:20; 88:6,18; 143:3; 애 3:6), 자기 지혜와 판단에 의존한 이들의 계획이 멸망으로 끝날 것을 시사합니다.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는 시편에서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시 64:5-6; 94:7), 예루살렘 정치가라는 자들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악자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전도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보다 사람의 지혜를 우선시하고 창조주의 능력보다 피조물의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지혜와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하나님께 묻거나 의지해야 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사야는 이들의 오만을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로 고발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과 같을 수 있습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빚어진 것이 자기를 빚은 자를 두고 ‘그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치가들의 행태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능력을 부정하고, 대신 자신을 창조주의 자리에 놓는 것과 같았습니다. 어리석음을 지혜로 자랑하고 교만을 능력으로 주장하는 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잉태한 계획이기에 파국적 결말은 필연입니다.

 

여호와의 응답(17-21)

모든 변화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표면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깊은 중심부터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변화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17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 18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19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20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21그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17-21)

 

인간의 은밀한 계략과 비밀스런 계획은 모두 실패하고 교만이 드러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패역과 불순종을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도록 만드십니다. 이 변화는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바뀌고 다시 기름진 밭이 숲으로 바뀌는 것처럼 엄청나고 놀랍습니다.

 

(1) 구원 시대의 변혁(17-18)

 

예루살렘 정치가들의 어리석은 지혜가 전도시켜놓은 것을 여호와께서 바로잡으십니다. 유다의 안전과 번영은 오만한 정치가들의 손에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대전환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분께서 창조주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고 기름진 밭은 숲으로 여겨질 것입니다(17; 32:15).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울창한 숲처럼 산림 지대가 과수원으로 뒤덮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땅이 생존에 필요한 것을 풍족하게 공급합니다. 자연의 변혁은 그분께서 열어주실 구원 시대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영적 무지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못 듣는 사람이 듣고 맹인이 보게 된다(18). 막혔던 귀가 뚫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들러붙은 눈이 열려 그분의 놀라운 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죽음과 저주의 영역에서 생명과 축복의 영역으로 옮겨집니다. ‘책의 말’은 이사야의 선포가 문서로 기록되었음을 전제합니다. 예언자의 선포가 청자들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일부 지지자들에 의해 문서로 기록되어 그 성취를 기다립니다. 앞으로는 사람들이 이사야의 예언이 기록된 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현재 문맥에서 ‘책의 말’은 11-12절에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봉한 책의 말’처럼 되어버려 읽을 수 없었던 심판 시대가 끝나고 봉인이 풀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구원 시대가 열립니다.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는 장애의 극복 이상을 의미합니다. 눈이 열릴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배후를 꿰뚫어 볼 수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어두운 데에서 꾸미는 계획도 다 볼 수 있어 다시는 어둠 속에서도 실족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에 의한 자연의 변혁과 영적 갱신이 삶의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도 창조질서가 회복됩니다.

 

(2)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기쁨(19)

 

사회적으로 억눌린 ‘겸손한 자’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19). ‘겸손한 자’와 ‘가난한 자’는 1차적으로는 사회적 범주에 속한 개념이지만, 특히 예언자들의 선포에서는 종교적 의미도 갖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앞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자들, 곧 여호와 외에는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강자에게 억눌리고 빈곤하게 살지만, 여호와 신앙에 신실한 자들입니다. 구원 시대에 이들의 성실함이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시온 산에서 하나님 현존의 놀라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3) 강포한 자의 종말(20-21)

 

반면에 여호와께 경건한 약자를 억압하던 ‘강포한 자’와 ‘오만한 자’(비웃는 자)는 심판을 받아 제거될 것입니다(20). 이들은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 곧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죄짓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파렴치한 행태는 송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가진 힘과 능력으로 법을 조작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게 합니다(21). 소송에서 임의로 판결하고 죄 없는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것도 부족해서 약자의 권리를 위해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무를 놓아 침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법과 정의를 무시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임박한 구원 시대에 참여하지 못하고 모두 멸망 당합니다.

 

요약하자면, 구원 시대에는 여호와께서 이루실 변혁에 의해 종교와 사회와 자연의 선순환 구조가 마련됩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기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여호와의 말씀을 알기에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살고, 정의와 공의가 충만하기에 자연이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야곱의 구원(22-24)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그릇은 깨어질 것이고, 겸손한 그릇은 귀하고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사람의 지혜로움보다 더 지혜로운 법입니다(고전 1:25). 감히 하나님의 지혜를 폄하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겸손이 피조물의 지혜 중 최고입니다.

 

22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22-24)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레바논을 기름진 밭으로, 기름진 밭은 숲으로 바꾸시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듣게 되는 것,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맹인의 눈이 보게 되는 것, 가난한 자가 즐거워하고, 오만한 자가 소멸되는 것은 하나님께 손바닥을 뒤집듯이 쉬운 일입니다.

 

(1) 동터오는 구원 시대(22)

 

‘그러므로’로 이어지지만, 앞 단락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구원이 주제로 등장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야곱 족속의 구원과 회복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야곱 족속’은 하나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한 조상 야곱에게서 나왔다는 혈연적 동질감과 일치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앞으로 있을 회복에 유다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도 포함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23)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도 주목할 만한 표현입니다. 이사야 전반부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언급은 여기에만 등장합니다(41:8; 51:2; 63:16; 렘 33:26; 겔 33:24; 미 7:20). 또 ‘아브라함의 구속’은 구약성경에서 여기가 유일합니다. 아마도 창세기 12:10-20과 20장과 관련해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애굽 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서 구속받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질 구속의 예표가 됩니다. 두 번 반복되는 ‘이제’란 표현은 구원 시대가 임박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 자손은 여호와의 손이 행하실 제2의 출애굽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3) 불순종의 극복(24)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다’는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여호와께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민 20:12; 27:14). 이스라엘은 그분의 구속 행위를 보고 그분을 경외함으로 순종합니다. 출애굽 세대가 마음이 혼미해져 여호와께 불평하다가 광야의 심판을 받았던 것처럼 그의 후손들도 불순종 때문에 심판을 받지만, 구원 시대에는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이 총명을 알게 되고 ‘원망하던 자들’이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듣고 맹인이 어둠과 흑암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이 총명을 되찾고 교훈을 받아들이기에, 다시는 미혹에 빠져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의 밥그릇이 커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는 실수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생각이 커지면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실수하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과 상황이 사실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지혜, 외모, 형편 등 모든 것에 감사하며 겸손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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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9-01)

 


예루살렘을 향한 슬픔의 노래

이사야 29장 1-14절


간혹 음주 단속에 걸린 사람들이 길을 걷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길 위에 그어진 선 위를 걷는데, 흔들흔들하고 삐뚤삐뜰 걷습니다. 그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사람들입니다. 술을 많이 마신 사람들은 똑바로 걷지 못합니다. 술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지배해서 비틀거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앙에도 이런 비틀거림이 있습니다.

 

 

  • 사망과 맺은 언약이 예루살렘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스올과 맺은 협약이 예루살렘을 스올로 내려가게 합니다. 사망과 스올에 사로잡혔기에, 이미 스올의 문을 디뎠기에 예루살렘이 빠져나올 길은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다윗과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스올로 내려가는 예루살렘을 건져내십니다.

예루살렘의 곤궁과 구원(1-8)

자만하며 교만했던 이들이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당황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해 애곡할 것입니다. 선민사상에 경도되어 방종한 삶을 살았던 예루살렘 거민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인생들에게 예상을 빗나가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1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3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4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 5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날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 6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7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요새를 쳐서 그를 곤고하게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8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1-8)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인생들에게 예상을 빗나가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22:1-11). 선지자는 아리엘에 대한 슬픔을 표출하며 시작합니다.

 

(1) 예루살렘의 심판(1-4)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아리엘’과 ‘다윗이 진을 친(쳤던) 성읍’으로 부르며 화를 선포합니다(1). 구약성경은 여기서만 예루살렘을 아리엘로 부릅니다. 아리엘이 여호와의 성전과 관련된 이름이라면,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성전 주인 여호와에 의해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성전의 존재가 예루살렘의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의 남다른 지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이름입니다.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이 여호와의 공격을 받아 함락 위기에 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신 영원한 통치권의 약속(삼하 7장)이 예루살렘을 무조건 지켜주지 않습니다. 유다가 자랑하는 구원사의 두 중심축인 성전과 다윗 왕조의 의미가 상대화됩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화를 선포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계속 축제나 즐기라고 신랄하게 풍자합니다. 눈앞에 위기가 닥쳤음에도 예루살렘 주민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제의적 축제에만 열심을 냅니다.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생명의 축제가 죽음을 예비하는 축제가 됩니다.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때는 끝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슬픔과 애곡으로 가득 찰 때까지 아리엘(예루살렘)을 괴롭게 하시기에 아리엘(예루살렘)이 그분께 아리엘(제단) 같이 됩니다(2). 여호와의 성전과 다윗 왕조가 있는 예루살렘을 여호와께서 직접 압박하시고 곤경에 처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번제물을 사르는 성전의 제단처럼 됩니다. 번제단의 화덕에 올리는 희생제물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2) 예루살렘의 구원(5-8)

 

1-4절에 따르면 여호와의 공격 대상인 예루살렘이, 5-8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민족들이 번제단의 희생제물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은 돌’(28:16)을 신뢰하지 않은 예루살렘과 공격하는 민족들이 모두 여호와께 희생제물로 드려집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예루살렘을 당신의 번제단에 올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성 둘레에 진을 치시고 성벽을 뚫기 위해 누벽과 공성 보루를 쌓으십니다(3). 고대 세계에서 성을 공략할 때의 전형적 모습입니다(겔 4:2). 여호와의 공격 앞에 예루살렘은 절망적 상태에 빠집니다. 축제의 즐거움에 빠져 있던 자들이 죽은 자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신음합니다(4). ‘땅에서’와 ‘티끌에서’는 사망과 스올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 스올의 손에 넘겨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은 자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축제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소란스럽던 예루살렘에 스올에 사는 자들이 웅얼거림 같은 희미한 신음만 들립니다. ‘신접한 자’는 ‘죽은 자의 영’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죽은 자는 최소한의 생명력만 남겨진 자이기에 말할 때 분명하게 발음하지 못하고 웅얼거립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 아리엘의 운명이 극적으로 반전됩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대적의 무리가 바람에 날려가는 티끌이나 겨처럼 한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립니다(5). 이미 스올의 문턱을 넘은 예루살렘이 구원을 받고, 성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적은 무엇엔가 홀린 듯 갑자기 포위를 풀고 도주합니다. ‘순식간에 갑자기’는 이러한 반전이 예루살렘의 능력이나(22:2-3) 대적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초자연적 힘에 의해 일어날 것을 시사해줍니다. 침략군 편에서 예루살렘을 치시던 여호와께서 갑자기 진영을 바꿔 예루살렘 편에서 침략군을 치십니다(6).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던 분께서 예루살렘의 구원자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자들과 싸우십니다. 그분의 개입에 의한 반전이 너무도 갑작스럽고 극적이기에 사람들은 미처 현실로 깨닫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눈앞에 보이던 그 많은 적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을 보고 꿈을 꾸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7).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추호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기에 눈앞의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마치 꿈속에서 푸짐한 잔칫상에 앉아 배불리 먹고 마시지만 깨어나면 허기지고 목마른 것처럼, 예루살렘의 침략이 허망하게 끝납니다(8). 37:36-37에 따르면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를 쳐서 산헤립이 포위를 풀고 제 나라로 돌아가게 합니다.

 

분별력 없는 백성(9-14)

많은 성도들에게 성경은 이미 봉해진 책과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짧은 설교를 들을 때 외에는 성경을 항상 덮어 둡니다.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희귀해집니다. 또한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사람의 말로 듣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면 말씀대로 똑바로 걸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길 때 말씀을 따라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9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11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13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9-14)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에 형식적으로 반응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신 것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심판은 유기입니다. 어두운 마음이 계속 어두워지도록 하십니다.

 

(1) 스스로 장님이 되는 자들(9-10)

 

첫째 단락(9-10)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거절하고 오직 멸망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이해할 수 없는 완악함을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을 전할수록 이스라엘은 더 등을 돌리고 완고하게 제 길을 갑니다. 이들은 맹인이 아닌데도 눈먼 자처럼 더듬고,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술 취한 자처럼 비틀거립니다. 눈앞에 전개되는 사건에 놀라 당황해할 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서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읽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의식이 완전히 차단되는 깊은 잠에 빠뜨리셨기에, 이스라엘이 영적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하나님 구원 능력의 한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심판의 확정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스스로 택한 불순종의 완악함에 넘겨주시고, 이러한 불순종의 굴레가 이들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압니다(6:9-10). ‘깊은 잠’은 의식이 완전히 차단되는 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여 그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창 2:21), 아브라함을 깊이 잠들게 해 언약을 세우십니다(창 15:12; 삼상 26:12).

 

(2) 거절된 예언자의 선포(11-12)

 

완악함의 사슬에 매인 자들에게 예언자의 선포는 ‘봉한 책의 말’이었습니다(11-12). 글을 아는 자는 뜯어볼 수 없도록 봉인되었기에 읽을 수 없고, 글을 모르는 자는 봉인과 상관없이 해독 능력이 없기에 읽지를 못합니다.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한가지입니다(렘 5:1-5). 누구도 하나님의 의지를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부으신 ‘깊이 잠들게 하는 영’(깊은 잠의 영)으로 모든 사람의 귀가 막혀서 예언자의 선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교통이 완전히 차단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9-12절은 기적적인 구원 경험(1-8)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극적 간섭에 의한 예루살렘의 구원이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심화시켜 완전한 멸망으로 내몹니다(22:12-14).

 

(3) 피상적 신앙에 대한 경고(13-14)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경건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찾는 위선적-형식적 경건이었습니다(13-14).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고 찬양과 감사 또는 탄식의 노래를 부르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습니다. 제의적 경건 때문에 성전을 찾지만, 삶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경외는 제의적 가르침(교리)을 통해 습득한 지식에 과했습니다. ‘사람의 계명’은 제의와 관련한 규정입니다. 제의 규정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제의적 경건이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버렸습니다. 제의 준수의 열정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가 됐습니다. 제의 규정 준수에만 열정적인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기이한 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당신 능력을 과시하는,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출애굽과 같은 신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징벌을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지혜자들의 지혜가 사라지고 슬기로운 자들의 슬기가 감추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은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 사이의 연관성을 전제하는데, 이 양자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그분의 기이한 일을 깨달아야 하는데,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의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지혜자들의 지혜의 어리석음을 폭로합니다(고전 1:18-3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실지라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없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징계와 심판의 양면이 있습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백성을 때로 징계하시고 심판하시지만 결국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극적으로 구원하시며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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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8-02)

 

 


예루살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이사야 28장 14-29절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보이는 형상, 즉 우상으로 만들지 못하게 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나 계시고, 만질 수 없으나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손이며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이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 무능력과 타락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의 정치가들도 제 역할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애굽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애굽과 조약을 맺었기에 안전하다고 떠벌이며 백성에게 거짓 믿음을 신뢰하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시온의 모퉁잇돌(14-2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열매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실 때, 심심풀이로 하시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열매를 맺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든 최고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드리려 최선을 다시기 바랍니다.

 

14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5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16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17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18너희가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스올과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19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지나가며 주야로 지나가리니 소식을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20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21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의 일을 행하시리니 그의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의 사역을 이루시리니 그의 사역이 기이할 것임이라 22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14-22)

 

술독에 빠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한편으로 동맹정치를 믿고 헛된 자기안전감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선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이중적인 형태를 보였습니다.

 

(1) 예언자의 고발(14-15)

 

이사야의 고발이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에서 정치지도자들로 향합니다. 말만 앞세우고 허풍 떠는 자들이 예루살렘의 정치를 책임진 자들이었습니다(14). 종교지도자들은 술독에 빠져 비틀거리는 주정뱅이였고, 정치지도자들은 자기기만에 사로잡힌 허풍쟁이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허황한 자만에 사로잡혀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동맹정치에 의존해 예루살렘의 안전을 자신했습니다(15). 이사야는 이들이 자랑하는 애굽과의 동맹을 ‘사망과 맺은 언약, 스올과 체결한 협약’이라고 풍자적으로 고발합니다. 위정자들은 유다의 정치적 후견인이 된 애굽이 앗수르의 위협을 막아주리라 자신하였지만, 이는 헛된 기대일 뿐입니다. 애굽과 체결한 조약은 문자 그대로 사망/스올과 맺은 조약입니다. 애굽과 조약을 체결한 유다는 죽어 스올로 내려가야 합니다. 애굽과의 동맹은 사망과 스올에 자신을 맡기는 자기파멸적 결정이기에 사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애굽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재앙에서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숨겨주는 피난처라고 주장하지만, 애굽은 거짓 피난처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2) 여호와의 심판선언(16-19)

 

동맹정치에 의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고발의 말씀 다음에 ‘그러므로’로 연결된 16절은 심판뿐만 아니라 구원의 말씀으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시온의 기초석은 동사 ‘삼다’의시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과거로 옮기면(삼았노라) 여호와께서 시온에 초석으로 두신 돌은 성전이나 시온이나 다윗 왕조를 가리키고, 현재 또는 미래로 옮기면(‘삼으리니’) 메시아, 하나님 나라, 남은 자, 믿음의 공동체 또는 믿음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자는 시온산에 계시는 여호와이시지 정치가들이 떠드는 애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보루로 주신/주실 것을 믿는 자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걸려 실족하지 않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이사야 자신이 ‘믿는 이’의 본보기가 됩니다. 이사야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다급하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의 측량줄과 공의의 저울추를 갖고 사망과 언약을 맺었다고 자만하는 자들을 샅샅이 검사하셔서 멸망에 넘기실 것입니다(17). 측량줄과 추를 사용해서 건물을 짓거나 수선하듯 정치가들의 허풍과 자만심을 낱낱이 검사해 감춰진 거짓과 속임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의 측량줄과 공의의 저울추로 조사해본 결과 예루살렘의 심판은 필연입니다. 거짓의 피난처와 은신처에 몸을 숨긴 자들을 우박과 물로 진멸하실 것입니다.

사망과 맺은 언약과 스올과 체결한 협약은 여호와의 징벌 앞에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18). 여호와께서 ‘흉흉하고 창일한 큰 하수’(8:7) 앗수르를 불러 유다를 징계하실 때, 애굽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유다와 함께 멸망 당합니다(30:1-7; 31:1-3). 매일(‘아침마다’) 시도 때도 없이(주야로)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19). 사납게 넘실대는 홍수처럼 심판이 닥친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분께서 결정하신 재앙에서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3) 예언자의 심판선언(20-22)

 

‘오만한 자들’이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 준비해놓았다고 자랑하는 대책은 ‘짧은 침상, 좁은 이불’에 불과합니다(20). 침상이 작아서 누울 수 없고 이불이 좁아서 덮을 수 없듯이, 애굽과의 조약은 예루살렘을 멸망의 홍수에서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위정자들의 자만에는 나름 신학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오직 구속사의 전통 안에서만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과 축복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정치적 신학적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자랑스러운 구속사를 역으로 이용하여 심판을 선언합니다. 블레셋의 위협에서 다윗과 예루살렘을 구해주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삼하 5:17-25), 이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의 심판자가 되십니다(2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고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낯선 존재가 되십니다. 당신 백성의 배반과 불의에 질투하시고 진노하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분의 일은 비상하고 그분의 사역은 기이합니다. ‘비상’과 ‘기이’로 번역한 ‘자르’와 ‘노크리’는 원래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하나님께서 당신께 의존하기를 거절하는 후손들에게 이방인이 되십니다. 심판을 선언한 이사야는 다시 허풍 떠는 자들에게 회개를 요청합니다(22). 온 땅을 멸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이스라엘은 큰소리치지 말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계속 허풍을 떤다면 결박이 더욱 무거워질 것입니다. 결박은 15절의 사망과 맺은 언약과 관련됩니다. 이스라엘이 의존하는 정치적 동맹은 죽음의 결박으로 더욱 세게 조여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이 이미 결정되기는 했지만, 그 재앙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자기 계획과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겸손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죽음의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선포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며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 이스라엘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임박한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농부의 비유(23-29)

어떤 사람은 조금만 이야기해도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세게 맞아야 정신을 차립니다. 이렇듯 징계의 방법은 달라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껍질 없는 악곡을 원하십니다. 쓸모없는 껍질이 벗겨지고 알곡만 남도록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다루십니다.

 

23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4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26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27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29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3-29)

 

예루살렘이 살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계획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만이 아니라 심판에 있어서도 용의주도하실 것입니다.

 

(1) ‘내 말을 들으라’(23)

 

보내신 분과 보냄을 받은 자 사이에 내적 일치가 존재하기에 예언자는 자신의 말(‘내 목소리’, ‘내 말’)로 선포합니다(23).

 

(2)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24-26)

 

밭을 가는 자가 씨를 뿌리기 위해 온종일 밭만 갑니까? 땅을 파 뒤집고 온종일 써레질만 합니까? 밭을 갈고 땅을 고르게 하는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씨를 뿌리기 위한 준비 작업에 속합니다(24). 농부는 씨를 뿌려 결실을 맺으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밭을 갈고 땅을 고릅니다. 땅을 파 뒤집어 흙을 부드럽게 하고 밭을 잘 고른 후에 씨를 뿌릴 때도 아무렇게나 뿌리지 않습니다(25). 소맥(밀)과 대맥(보리)과 귀리는 정성껏 심고, 향신료로 사용되는 식물인 소회향(검정품)과 대회향(회향)은 씨를 흩뿌립니다. 소맥과 대맥에 비교해서 귀리의 알곡은 잘 떨어지지 않기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밭 가장자리에다 심는다. 농부는 곡물의 종류에 따라 적합한 방법을 선택해서 그 곡물에 가장 적합한 자리에 씨를 뿌리거나 심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농사법에 따라 농사를 지을 때만 풍부한 수확이 보장됩니다(26).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농사법에 따라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에서 농부는 말씀의 씨를 뿌리는 예언자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3) 추수하는 농부의 비유(27-29)

 

다음에는 추수 과정을 활용해 가르침을 줍니다. 곡식을 풍족하게 거둬들여도 타작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큰 손실이 발생합니다. 소회향과 대회향의 알곡을 거둬들일 때는 타작기(도리깨)나 수레바퀴가 아니라 막대기와 작대기를 사용합니다(27). 단단한 알곡을 탈곡할 때와 약한 알곡을 탈곡할 때 같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알곡에 따라 탈곡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타작마당에서 밀과 보리와 귀를 타작할 때도 지혜가 필요합니다(28). 알곡을 펼쳐놓은 타작마당 위로 수레바퀴를 너무 오랫동안 굴리거나 수레바퀴를 끄는 말의 발굽에 너무 심하게 짓밟히면 곡식들이 바숴져서 손실이 커집니다. 밀알을 떨 때도 적합한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도 무작정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형편에 상응하는 방법을 찾아 강도를 조절하며 하십니다. 농부가 알곡을 거두기 위해 타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새로운 출발을 위해 이스라엘을 심판에 넘기십니다. 그분의 경영(의지)과 지혜는 사람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습니다(29; 55:8-9).


허영심과 탐욕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자세히 듣기 바라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데 쓰인 유일한 도구였던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헛된 욕망을 비워 내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구합시다. 하나님이 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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