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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0-01)


애굽과 구스의 수치에 대한 예언

이사야 20장 1-6절


 

‘말’만으로는 충분히 전할 수 없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모피 반대 등 동물 보호를 위해 길거리에서 ‘알몸 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뉴스에서 본 적 있을 것입니다. 그런 ‘낯선 방식’은 듣는 이들을 멈추게 하고 귀 기울이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 배후에서 반아수르 봉기를 부추긴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패하고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겉보기와 달리 애굽과 구스는 앗수르의 공격에서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허약한 존재입니다. 유다는 여호와께서 애굽과 구스의 패배와 앗수르의 승리를 결정하셨음을 알고 그분의 의지에 반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피해야 합니다.

 

시대적 배경(1)

현 시대를 일컬어 황금만능의 시대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자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심저이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할 것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재물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겠습니까?

 

1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1)

 

본문의 시대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6:1;14:28). 땅 위에서 민족들이 주도권을 놓고 싸우지만, 이를 결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시온 산에 계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물론 민족들의 역사에도 개입하십니다.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대해 남유다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 사르곤(주전 722-705년)이 파견한 다르단(군사령관)이 아스돗을 쳐서 점령하던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주어집니다. 블레셋의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인 아스돗은 히스기야 시대에 주도적인 반앗수르 세력이었습니다.

20장은 주전 714/713-711년의 팔레스티나를 배경으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주전 714년 또는 713년 애굽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티나에서 앗수르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발생했습니다. 봉기의 거점은 아스돗이었습니다. 아스돗의 통치자 아주리(Azuri)가 앗수르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블레셋과 유다와 에돔과 모압과 키프로스(?)를 끌어들여 반앗수르 연합을 시도했습니다.

반역의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주전 716년 애굽 국경 가까이에 있는 라피아(Raphia) 주변에 만들어진 앗수르의 식민지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이 통제됐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앗수르는 처음에는 아주리를 그의 형제 아히미티(Ahimiti)로 교체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아스돗의 지배 계층이 이를 수용하지 않고 야마니(Jamani)를 통치자로 세웠습니다. 야마니는 아주리의 반앗수르 노선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주전 712/711년 사르곤은 앗수르 군대를 팔레스티나 남부로 보내 아스돗을 점령하게 했습니다. 블레셋의 지배 계층을 유배시키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이주시켜 앗수르의 지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야마니는 애굽으로 도피했지만, 앗수르와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던 구스(애굽) 왕 사바카는 야마니를 앗수르에 넘겨줬습니다. 아스동의 봉기에 가담했던 유다의 히스기야는 너무 늦지 않게 발을 빼고 앗수르의 지배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아스돗의 봉기에 가담해 정치적 모험의 길로 나아가려 했을 때, 아스돗을 배후에서 부추긴 구스와 애굽이 앗수르에 패하고 백성이 포로로 사로잡혀갈 것을 선포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반앗수르 연합에 가담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유다는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승리와 애굽과 구스의 패배를 결정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치를 당할 애굽과 구스에 의지한다면 유다도 수치를 피할 수 없습니다.

 

표적행위(2-5)

사람이 세상 권력을 통해 안전과 평안을 보장받으려 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기대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있는 권력을 소유하려는 욕망의 이면에는 자신이 스스로 서서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내제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려는 남 유다에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멸망을 보여주십니다.

 

2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4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5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2-5)

 

하나님께서는 당시 강대국인 애굽과 구스에게도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이사야에게 3년 동안 옷과 신을 벗고 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 포로에게 수치심을 주고자 옷과 신을 벗게 하십니다. 이러한 행동은 애굽과 구스가 엇수르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징조와 예표가 되었습니다.

 

(1) 표적행위의 명령(2a)

 

그 때에, 곧 앗수르 군대가 아스돗으로 원정을 떠나기 전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매우 파격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2).

 

(2) 표적행위의 실행(2b)

 

예언자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스캔들에 노출시켜 메시지로 만드십니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허리에 두르는 베(자루옷)는 원래 슬픔이나 재앙을 당해 탄식할 때 입는 옷인데, 여기서는 예언자의 평상복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평상시에 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신을 벗고 맨발이 되는 것은 원래 애도 행위에 속했는데(삼하 15:30; 겔 24:17), 여기서는 맨몸이 됐음을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예루살렘을 다녔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담긴 의미는 3-5절에서 주어집니다. 벌거벗고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는 예언자의 모습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충격적입니다. 이사야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라는 명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행했는지는 알 수 없슨비다. 완전히 알몸으로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다수는 웃옷은 벗고 하의만 입고 맨발로 다녔으리라 추측합니다. ‘벗은 몸’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롬’은 불충분한 옷차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욥 22:6; 24:7; 사 58:7; 암 2:16), 고대 세계에서 알몸과 맨발은 전쟁 포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3) 표적행위의 해석(3-5)

 

여호와께서 파격적인 표적행위의 의미를 해석해 주십니다.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닌 것이 애굽과 구스에 대한 징조와 예표가 됩니다(3).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이사야는 사로잡혀 앗수르로 끌려가는 애굽과 구스 사람들의 상징적 모습입니다.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패하고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엉덩이까지 드러낸 채 알몸과 맨발로 끌려갈 것입니다(4).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며 고대 근동의 패권을 주장하였던 애굽이 앗수르에 의해 그 치부를 드러내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예언자를 ‘내 종’으로 부르는 경우는 예외적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여호와와 이사야에게 적용됩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이사야도 주인이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해서 맨몸과 맨발로 예루살렘 거리를 다녔습니다. ‘애굽과 구스’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구스왕 사바카는 주전 715년 애굽 전역을 장악하고 애굽 25왕조(주전 715-664년)를 창건했습니다.

이사야는 상징행위를 통해 애굽과 구스에 닥칠 파국적 운명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극적이고도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3년 동안 옷을 벗고 지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신탁의 의도를 벗어난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적게는 열네 달을 의미할 수 있는 삼 년은 상징적인 수보다는(16:14; 37:30) 아스돗이 앗수르에 봉기하였다가 멸망하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아스돗이 앗수르 군대에의해 함락당할 때까지 이사야는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봉기의 배후 세력인 애굽과 구스의 무능력을 고발하고, 이들에게 의지하려는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경고를 발하였습니다. 그의 벌거벗은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기에 아무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왕궁에서 통치자들이 은밀하게 논하던 앗수르 문제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의 도발적 행동이 왕궁의 정치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애굽과 구스가 지원하는 반앗수르 연합에 가담하였던 히스기야는 앗수르 군대가 원정을 떠나기 전후에 발을 빼고 앗수르에 굴복했습니다.

애굽과 구스의 수치가 유다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이 앗수르에 패하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은 놀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5). 애굽과 구스의 수치스러운 운명은 이들에게서 보호자를 찾던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좌절감과 낭패감을 안겨줍니다. 애굽과 구스의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자신들의 계획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전통적으로 애굽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애굽에 의존하여 메소포타미아에서 오는 위협을 피하려 했습니다. 북왕국은 애굽의 도움을 믿고 앗수르에 반역했다가 주전722년 멸망을 당했고, 유다의 히스기야도 주전 705701년 애굽의 지원을 기대하고 앗수르에 반역했다가 거의 멸망 직전에까지 내몰렸습니다.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할 때도 애굽은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시드기야 시대에 친애굽파가 왕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가 파국을 맞았습니다.

 

해변 주민의 깨달음(6)

하나님께서는 세계 모든 열방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나 강대국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만물과 만국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통치하실 계획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세상에게 고지(告知)하십니다. 세상의 영웅호걸도 죽고 살아져 갑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역사를 주관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6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6)

 

‘그 날에’로 시작하는 6절은 아스돗의 멸망을 넘어이들이 의지했던 애굽과 구스의 멸망을 내다봅니다. 이사야는 아스돗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을 인용해 거듭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이 오판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해변 주민’은 아스돗을 포함한 블레셋 주민들을 가리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애굽과 구스가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고 탄식합니다. 도움을 구했던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게 패했다면 아스돗의 운명은 멸망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앗수르가 아스돗을 침략했을 때 애굽이 군사적으로 도와주려 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앗수르 왕 사르곤은 아스돗을 점령한 후 앗수르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나라는 의지의 대상이 아닌 패망의 대상입니다. 유다는 어리석게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나라, 믿을 수 없는 나라, 의지해서는 안 되는 나라를 피난처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심판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세상에 대한 기대도 깨고, 남은 환상도 미련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역사를 주관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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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9-02)


애굽에게도 역사하시는 여호와

이사야 19장 16-25절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각자의 방식대로 그 문제를 해결해 갑니다. 각자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고 시도한 데, 그 나름대로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이 말에는 새로운 무거운 숙제가 발생합니다. 믿음의 방법인 세상의 방법과 비교했을 때 요령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여호와를 따라가는 방법이 방황하지 않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 이 단락은 ‘그 날에’로 시작하는 다섯 개의 신탁으로 이뤄졌습니다. 애굽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첫 번째 신탁(16-17)은 앞 단락의 종결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제에 의해 연결되는 나머지 네 신탁은 심판을 넘어 애굽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봅니다. 종말에 애굽뿐만 아니라 앗수르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와 함께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첫 번째 ‘그날에’ 두려워 떠는 애굽(16-17)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랑하시기에 돌아오도록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말씀의 신실성과 창조성을 확인하는 삶입니다. 그 증거들이 쌓이고 쌓여 말씀의 능력에 자신의 목숨을 의탁하기에 이르면 작은 예수로 세상 앞에 두려움도 되고 소망도 될 것입니다.

 

16그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17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계획으로 말미암음이라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리라(16-17)

 

본문은 계속적으로 애굽에 대한 말씀입니다. 앞으로 여호와께서 임하셔서, 강한 힘을 상징하는 애굽, 풍요를 상징하는 애굽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애굽은 떨 것입니다.

 

(1) 두려워 떠는 애굽(16)

 

현재 문맥에서 16-17절의 ‘그날에’는 1절의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는’ 때와 연결됩니다. 애굽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지는 이유는 언급되지 않는데, 이사야의 문맥에서 보자면 애굽은 여호와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후견인 노릇을 하려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을 심판하실 때 애굽 사람들이 ‘부녀처럼 떨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떱니다. 특이하게도 애굽이 ‘부녀’에 비교됩니다. 출산할 때의 두려움과 관련하여 애굽을 여자에 비교한 것 같습니다. 그분께서 애굽의 역사에 개입하실 때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치기 위해 드셨던 손(5:25;9:12,17,21;10:4)을 이번에는 애굽 위로 흔드십니다. 출애굽 때 ‘강한 손과 편 팔’(신 4:34;5:15;7:19;11:2:26:8; 렘 32:21; 시136:12)로 애굽 바로를 굴복시키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손을 휘둘러 당신 능력을 애굽에 과시하십니다.

 

(2) 애굽에 대한 정한 계획(17)

 

여호와께서 애굽을 심판하실 때 '유다의 땅이 애굽의 두려움이’됩니다. 유다 땅이 어떤 의미에서 애굽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유다에 의한 애굽의 침략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생각하기 어렵고, 유다에 실행된 여호와의 계획이 애굽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뜨리게 될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유다에 선포된 예언(그분 계획)이 그대로 성취됐다면 애굽에 선포된 예언(그분 계획)도 마찬가지로 성취될 것이기에 유다 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애굽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온 세상에 대하여 정하신 계획에 따라 모든 민족 위로 손을 펴신(14:26) 분께서 ‘그 날에’ 세우신 계획에 따라 애굽 위로 손을 휘두르십니다.

 

두 번째 ‘그 날에':애굽 땅의 다섯 성읍(18)

심판 이후에 사람들은 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주저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배하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18그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18)

 

두 번째 신탁부터 ‘그 날에’는 심판 이후의 미래를 전망합니다. 애굽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 중 첫 내용은,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으로 하나님께 맹세하는 성읍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하고 여호와께 충성을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입니다. 애굽에 흩어져 사는 유대 공동체보다는 여호와께로 개종한 애굽 사람들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성읍을 한정하는 ‘다섯’이 완전수로 사용된 경우가 없기에 구체적인, 아마도 이스라엘인이 많이 살고 있던, 다섯 성읍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가나안 방언’은 ‘히브리어’를 의미합니다. 개종한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히브리어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의 이름인 ‘멸망의 성읍’은 ‘태양의 성읍’을 의미하는 헬리오폴리스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의도적으로 태양신 제의의 중심지인 헬리오폴리스를히브리어로 발음이 거의 유사한 ‘멸망의 성읍’으로 부릅니다. 태양신을 섬기는 헬리오폴리스가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그 대신 만군의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이 살게 됩니다.

 

세 번째 ‘그 날에': 여호와를 알게 되는 애굽(19-22)

심판으로 치시는 하나님의 손에는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연단의 고통을 넘어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게됩니다.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응답하시나요?

 

19그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21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22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19-22)

 

세 번째 ‘그 날에’는 전체 애굽이 여호와의 구원사 안에 완전히 들어오는 날을 내다봅니다. 애굽의 회복에 대한 두 번째 내용으로 애굽 땅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과 기둥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1) 여호와께 드려지는 애굽(19)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는 애굽 사람들이 모두 여호와께로 돌아왔음을,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는 애굽 전체가 그분의 통치 영역에 속하게 됐음을 보여줍니다(19).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예루살렘에 여호와를 위한 성전이 있는 것처럼 애굽 한 가운데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있어 모든 애굽 사람이 여호와께 나아와 제사 드릴 수 있게 되고, 가나안이 여호와의 땅인 것처럼 애굽이 그분의 땅이 됩니다. 우상 숭배하던 애굽이 여호와께로 돌아와 이스라엘처럼 그분의 통치 아래 살게 됩니다.

 

(2) 애굽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여호와(20)

 

국경에 세워진 기둥이 만군의 여호와를 위한 징조와 증거, 곧 애굽 땅이 그분께 속했음을, 그리고 애굽이 그분의 구속사에 편입됐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20). 애굽이 제2의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여호와의 놀라운 일을 애굽도 경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모세와 사사들을 보내 구원해주셨던 것처럼, 애굽 사람들이 압제자들로 인해 부르짖으면 ‘한 구원자’를 보내 그들을 보호하시고 구해주실 것입니다.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원 약속이 애굽에도 마찬가지로 주어집니다. 출애굽의 구원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알리신 여호와께서 애굽에게도 구원사의 경험을 통해 당신을 알리십니다.

 

(3) 여호와를 아는 애굽(21)

 

그날에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고 제물과 예물을 드리고, 그분께 서원하고 이를 그대로 이행합니다(21).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듯이 애굽 사람들이 그들의 땅 한가운데 있는 여호와를 위한 제단에서 제물과 예물을 봉헌하면 여호와께서 이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원하고 실행하면 여호와께서 서원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처럼, 애굽 사람들이 서원하고 실행하면 이들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사적 관계가 애굽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의 하나님이 되시고, 애굽은 그분께 신실한 백성이 됩니다.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범죄에 교육적 목적의 징계로 응답하셨던 것처럼, 애굽의 잘못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행하십니다. 애굽이 잘못하면 치시겠지만, 치신 후에는 곧 고쳐주십니다. 애굽이 여호와께 돌아오고, 그분께서는 이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들을 고쳐주십니다(22). 관계 회복이 하나님 경의 최종 목표가 됩니다.

 

네 번째 ‘그 날에' : 여호와로 인해 화해하는 애굽과 앗수르(23)

주님의 날이 되면, 주님이 이 땅 가운데 어그러진 것들을 고치셔서 주님을 위한 제단과 기둥이 세워지는 역사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진정한 구원자요 보호자이신 주님을 제가 더욱 깊이 알고 전심으로경배할 것입니다. 당신을 통해 열방에 하늘의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되기를 바랍니다.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23)

 

네 번째 ‘그 날에는’ 애굽 국경을 넘어 앗수르까지 내다봅니다. 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가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가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여호와께 예배드립니다. 애굽에서 시작된 전면적 개종이 앗수르에서도 일어납니다. 근동의 주도권을 놓고 첨예하게 맞섰던 애굽과 앗수르가 여호와께로 돌아와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게 됩니다. 국가적 이해관계와 민족적 갈등이 여호와 신앙에 의해 완전히 극복됩니다. 약탈과 점령을 위해 다니던 원정길이 평화의 길로 바뀝니다. 변방에 속한 유다의 예언자 이사야는 강대국의 폭력과 피로 얼룩진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세우신 계획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낼 평화적 공존과 번영을 내다봅니다. 패권국가가 아닌, 여호와를 중심으로 땅 위에 평화가 이뤄집니다(눅 2:14). 2:2-4에서도 민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 시온 산으로 순례를 오고, 쓸모없어진 칼과 창으로 낫과 보습을 만드는 평화의 시대를 선포한 바 있습니다.

 

다섯 번째 '그 날에':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축복(24-25)

메시아의 통치 아래 이루어질 완전한 연합의 나라, 온전히 회복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이해관계를 넘고, 지역적 경계를 넘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나누며 예배자를 세웁니다. 원수 관계였던 애굽과 앗수르가 하나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스라엘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을 받아 세상에 그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24-25)

 

다섯 번째 ‘그 날에’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선포합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은 애굽과 앗수르와 함께 세 번째가 되어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이 됩니다(24). 창세기 12:3에서 여호와께서 족장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이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를 통해 성취됩니다. ‘세 번째’(개역개정의 ‘셋’)는 서열을 가리키기보다 대등함을 의미합니다. 약소국 이스라엘이 전통적인 강대국애굽과 앗수르에 비견할 만한 나라가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을 내 백성’으로,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은 (것)으로, 이스라엘을 ‘나의 기업’으로 부르시며 이들에게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25).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입술이라도.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던 마음도, 아무리멀리 떨어진 나라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하시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뒤엎는, 말도 안 되는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 누구든 돌아오라고 대로(大路/23)를 열어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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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9-01)


애굽을 심판하시는 여호와

이사야 19장 1-15절


 

한 사회가 붕괴되는 것은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 붕괴까지 오랜 기간 축적된 모순과 부패, 내분과 내란이 그 저변에 있습니다. 강성한 나라 애굽의 멸망은 총체적인 부패와 무능이 낳은 총체적인 난국이고, 파국입니다. 그들뿐입니까, 우리 사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 애굽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내부 분열로 정치적 파단에 멀어지고, 자연재해로 경제적 파국에 직면합니다. 통치자들은 지혜를 자랑하지만, 실상은 제 운명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애굽의 운명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결정하십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에 수치와 수욕만 가져다둘 뿐입니다.

 

애굽의 정치적 혼란(1-4)

아무리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과학 지식이 늘어나더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입니다. 온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로서 세상 모든 나라의 일들을 주관하시고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1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2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3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의 계획을 내가 깨뜨리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 4내가 애굽인을 잔인한 주인의 손에 붙이리니 포학한 왕이 그들을 다스리리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애굽은 먼저 심각한 정치의 쇠퇴와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나라 곳곳에서 내란이 일어나고 잔인한 폭군이 등장함으로써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애굽 백성들은 무엇인가 희망을 갖기 위해 우상과 미신에 빠져들 것이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합니다.

 

(1) 애굽을 치시는 여호와(1-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의 역사에 간섭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으로 가십니다(1; 시 18:10). 애굽의 우상들이 그분 앞에서 흔들리고, 애굽 사람들의 마음이 속에서 녹아 내립니다. 그분의 강림이 우상들의 실체를 폭로하고, 우상을 믿고 의지하던 애굽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뜨립니다.

이사야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포함해 고대 근동에 잘 알려진 애굽의 우상들을 여호와 앞에 세워놓고 그 헛됨과 무능력을 고발합니다. 애굽의 신들은 헛것에 불과합니다. 시온 산에 계신 여호와께서 애굽의 운명 또한 결정하십니다. 그분 심판의 대상인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결정은 파국을 초래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인을 부추겨서 서로 싸우게 만드십니다(2). 내부분열과 내란은 애급을 심판하시려고 그분께서 택하신 방법입니다.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는 애굽의 여러 지방이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내전에 빠질 것을 예고합니다. 제 22왕조의 오소르콘(Osorkon) 4세가 애굽의 바로로 통치할 때(주전 730-715년), 특히 주전 720-716년 사이에 애굽은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적어도 열여덟 명의 독립된 제후들과 왕들이 등장해 서로 싸웠습니다. 거듭된 정치적 분열과 반목이 애굽을 거의 해체 직전까지 나몰았습니다.

 

(2) 애굽 종교의 무능력(3)

 

통치자들의 이기적 -당파적 분열과 다툼이 백성의 영적-도덕적 해이를 초래합니다(3). 이들은 외부의 적에 맞서 싸울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여호와께서 깨뜨릴 애굽의 ‘계획’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애굽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놓은 대비책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계획은 역사를 결정하시는 여호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애굽을 구하지 못합니다. 애굽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살길을 묻지만, 이들의 신들은 여호와 앞에서 벌벌 떨 뿐입니다. 우상들과 죽은 자의 영에 의존하여 파국적 재앙을 면하려는 시도는 애굽 종교의 한계와 무능력만 폭로해줄 뿐입니다.

 

(3) 포악한 왕의 지배(4)

 

국가적 분열과 내전에 직면해 우상들에게 길을 묻는 애굽을 여호와께서 ‘잔인한 주인의 손’에 붙이실 것입니다(4). 애굽을 다스릴 ‘포악한 왕’은 구스왕 사바카를 가리킵니다. 이방 지배자를 수식하는 형용사 ‘잔인한’과 ‘포학한’은 애굽 사람들이 폭력적인 통치자 아래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민족들 위에 군림하였던 애굽이 이방 통치자의 지배 아래 억압을 당합니다.

 

경제적 파탄(5-10)

하나님께서는 부요와 축복의 근원이 고통과 재앙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들이 자신들의 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더 늦기 전에 불안과 불신이 만들어낸 우상을 어서 치워야 합니다. 무엇이 더 무너져야 오만함을 꺾고 하나님께 돌아오겠습니까? 강대국의 허상을 보고 있습니까? 재벌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대한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7나일 가까운 곳 나일 언덕의 초장과 나일 강 가까운 곡식 밭이 다 말라서 날려가 없어질 것이며 8어부들은 탄식하며 나일 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마다 슬퍼하며 물 위에 그물을 치는 자는 피곤할 것이며 9세마포를 만드는 자와 베 짜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며 10그의 기둥이 부숴지고 품꾼들이 다 마음에 근심하리라(5-10)

 

하나님의 심판으로 애굽의 경제가 피폐해지고 몰락할 것이라는 사실이 ‘나일 강의 마름’과 관련해서 강조되었습니다. 바싹 말라서 더 이상 범람치 않는 나일 강이야말로 애굽 위에 내린 생생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1) 말라버린 나일강(5-6)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가 애굽을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나일강이 애굽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했습니다. 특히 애굽 번영의 밑거름이 된 농업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나일강에 의존적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적도 부근에 내리는 폭우로 6월 중순부터 10월 중순 사이에 발생하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주변 땅에 유기물이 풍부한 퇴적층이 쌓이고, 여기에 뿌려진 씨는 풍요로운 결실을 보장해주었습니다. 실로 나일강의 주기적 범람(렘 46:7-8; 암 8:8)은 신의 선물이라 부를만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개입으로 애굽의 풍요는 끝납니다. 여호와께서 나일강의 범람을 막아 애굽 경제를 그 뿌리부터 뒤흔들어버리십니다(5-6; 겔 30:12).

 

(2) 농업의 붕괴(7)

 

애굽의 젖줄인 나일강이 바싹 메마르고 그지류들에서는 악취가 나며, 강가의 갈대와 부들이 시들어버립니다(출 7:20-21; 시 78:44). 우상에 의지하는 애굽은 이방 통치자의 손에 넘겨질 뿐만 아니라 파국적인 자연재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닷물’과 ‘강’은 나일강을, ‘강들’은 나일강의 지류를 가리킵니다. 농업경제의 대동맥인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으면 흉작은 피할 수 없습니다.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강 주변에 있는 밭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모조리 말라버리고, 씨들이 싹을 틔우지도 못하고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7). 애굽이 자랑하던 곡창 지대가 황폐해집니다. 농업뿐만 아니라 애굽의 모든 산업이 나일강의 물이 마르는 극심한 가뭄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습니다.

 

(3) 수산업의 붕괴(8)

 

강이 바싹 말라 물고기가 사라져 생계 수단을 잃은 어부들은 탄식하고, 나일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들은 모두 슬퍼하고, 물에 그물을 치는 자는 생기를 잃습니다(8). 갈릴리 호수 주변에만 직업적인 어부들이 있었던 이스라엘과 달리 애굽에서는 어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직업적으로 물고기를 잡아 팔았고, 상류층은 일찍부터 나일강에서 취미로 낚시를 즐겼습니다.

 

(4) 섬유산업의 붕괴(9-10)

 

고대 근동에서 유명했던 애굽의 섬유산업도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나일 강변에 무성했던 갈대와 부들이 사라지면서 애굽의 기간 산업에 속하는 세마포와 삼베를 생산하는 직물 산업이 직격탄을 맞습니다. 세마포를 만드는 자들과 베 짜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기둥들’은 부서지고(‘직조공들’은 크게 실망하고?) 품꾼들은 모두 낙심합니다(9-10). 살길이 막막해진 자들이 모두 낙담합니다. 애굽이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에 직면해 생존의기로에 서게 됩니다. ‘수치를 당하다’(부끄러워하다)는 자신의 사명이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못한 사람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수치를 당합니다.

 

애굽 지혜자들의 어리석음(11-15)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인간의 지혜 곧 이 세상의 지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우준하며 혼미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같은 세상 지혜를 믿고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려 합니다. 성경은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을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소안의 방백은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책략은 우둔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12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말할 것이니라 13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종족들의 모퉁잇돌이거늘 애굽을 그릇 가게 하였도다 14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어지러운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을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15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며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가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11-15)

 

애굽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정치의 쇠퇴와 경제의 몰락에 이어, 고대 세계에서 그들의 큰 자랑이었던 지혜와 문화, 곧 그들의 정신적 세계가 어리석게 되어 마침내 붕괴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세상 지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1) 어리석은 지혜자들의 어리석음(11-13)

 

애굽의 아시아 정책을 주도적으로 담당하는 정치 세력의 무능력을 고발합니다.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기만 하고, 지혜를 자랑하는 바로의 자문관들도 우둔하기만 합니다(11). 애굽에서는 지혜가 옛 왕들에게서 나왔다고 간주되기에 지혜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자신을 ‘옛 왕들의 후예’로 자랑했습니다. 소안은 놉과 함께 구약성경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성읍입니다. 소안의 방백들은 애굽의 아시아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데 바로의 자문관으로 참여했습니다. 시리아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문제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지대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지혜를 자랑하며 바로에게 자문하지만, 실제로는 우둔한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의 지혜는 당면한 위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소안의 방백들이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이라면 ‘여호와께서 애급에 대하여 정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습니다(12). 그러나 이들의 어리석은 지혜는 애굽의 운명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소안의 방백들은 바보들이었고, 놉의 방백들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정치가들의 우둔한 결정이 애굽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리스어로 멤피스로 알려진 놉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대략 20km 떨어진 곳으로 하(下)애굽의 옛 수도였습니다. ‘모퉁잇돌’은 건축물에 비유된 종족들을 이끄는 지배 계층을 가리킵니다.

 

(2) 피할 수 없는 열망(14-15)

 

여호와께서 애굽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들어 이들의 정책이 파탄에 이르게 하십니다. 소안과 놉의 방백들이 진짜 지혜자들이라면 여호와께서 애굽을 심판하기 위해 섞어놓으신 ‘혼란의 영’('어지러운 마음')을 구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14). 어떤 길이 멸망의 길이고, 어떤 길이 생명의 길인지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했습니다.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지혜는 참된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지혜로 이름을 떨치던 애굽이 자신들이 자랑하던 지혜로 인해 멸망에 떨어집니다. 애굽은 지혜자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길로만 갔습니다. 애굽의 지혜자들은 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에 있어 지혜로운 자들이었습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통치자들이 실상은 어리석고 우둔한 자들인데, 일반 백성이 다를 수는 없습니다.

위나 아래나 한가지로 어리석기에 혼란에 빠진 애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15). 온 세상을 경영하시는 여호와의 의지를 모르는 자들이 통치하였기에 애굽은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유다의 희망이던 애굽의 초라하고 허망한 말로를 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형편없는 나라입니까? 결국 무너질 나라를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깃입니다. 수치와 수욕만 안겨줄 뿐입니다. 세상에는 절대 권력도, 영원한 권력도 없습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나라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동안만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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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8-01)


조용히 감찰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18장 1-7절


 

심판이 임하기 전에는 자신을 돌아보기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리석게도 우리는 작정된 심판을 다 거치고 나서야 하나님을 찾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무지가 아니라 우리의 회개를 위한 인내였고 인자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 여호와께서 유다의 노릇하는 구스(에티오피아)을 심판하기로 하셨기에 구스와 연합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처신이 됩니다. 유다가 멸망이 결정된 구스에 의지해서 앗수르에 맞선다면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유다는 앗수르와 구스의 운명을 결정하신 여호와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기다리면 됩니다.

 

구스에 대한 화의 선포(1-2)

고난의 순간에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도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합니다. 오늘 당신을 향해 다정히 손 내미는 구스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지우려는 매력적인 제안은 무엇입니까? 어서 돌려보내야 합니다. 미련을 갖지 말고 어서 쫓아버려야 합니다.

 

1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2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1-2)

 

본문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가운데서 바벨론(13:1-14:23), 앗수르(14:24-27), 블레셋(14:28-32), 모압(15:1-16:14), 아람과 북 이스라엘(17:1-14)에 이어 여섯 번째로 구스를 지목합니다. 구스를 자연 환경과 관련된 특징적인 표현으로 소개합니다.

 

(1) 구스에 대한 소개(1-2a)

 

민족들의 신탁에서 선포 대상은 일반적으로 이름만 소개되는데, 구스의 경유에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종적 특색이 특별히 언급됩니다. 당시 애굽 아래 있던 구스는 남쪽의 끝에 해당했습니다. 지금의 에티오피아에 속합니다.

‘구스의 강(들)’은 아트바라(atbara) 강과 청나일과 백나일을 가르키는 것 같습니다. 수단의 습지를 지나 그 수도인 하르툼까지를 백나일이라 부르고, 이 백나일은 에티오피아에서 흘러나오는 청나일과 하르툼에서 합류하여 나일강이 되어 흐르다가 중도에 에티오피아에서 흘러나오는 또 하나의 지류인 아트바라와 합류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구스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가 됩니다.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은 구스에 벌레들이 서식하기에 적합한 습지가 많아 생긴 표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애굽을 점령하고 주변 나라들을 두려움에 빠뜨린 구스에 대한 평가절하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대단하게 보이지만, 유다가 의지하려는 구스는 벌레가 우글거리는 나라일 뿐입니다.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도 1차적으로는 나일강을 분주하게 오가는 배들의 모습을 반영한 표현이지만, 이사야의 비관적 음성을 듣는 것도 가능합니다. 유다는 자기 유익을 위해 이웃 나라로 사절들을 열심히 파견하는 나라가 구스임을 알아야 합니다.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키가 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백성’)은 구스 사람의 외모를 특징짓는 표현입니다. 구스 사람들의 늘씬하고 훤칠한 몸때와 (기름을 발라)윤기 나는 검은 피부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구스인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어디에서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민족, (모든 것을) 내리 짓밟아버리는 백성’)은 이사야 시대 구스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2) 사신들에게 주는 명령(2b)

 

2절 후반은 이사야가 예루살렘에 온 구스의 ‘민첩한 사절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이들에게 갈대 배를 타고 민첩하게(빨리) 왔던 것처럼 민첩하게(빨리) 자기네 나라로 갈 것을 명합니다.

구스의 사절들이 어떤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왔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수가 추측하듯이 주전 705-701년 사이에 선포된 말씀이라면, 반앗수르 연합을 협의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들이 됩니다. 이사야 37:8-9에 의하면 앗수르 군대가 립나를 치고 있을 때 구스 왕 디르하가가 유다를 돕기 위해 출정합니다. 또 앗수르의 자료에 의하면 아스돗에서 북동쪽으로 16km 떨어진 엘드게에서 앗수르 군대가 애굽 군대와 싸워 승리합니다. 애굽이 앗수르에 맞서 원정군을 파견했음은 히스기야가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을 때 애굽의 지원 약속이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방 나라의 사절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사야가 말씀을 전하는 경우는 두 번 더 나옵니다. 14:28-32에서 블레셋의 사절들이 히스기야를 찾아왔을 때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32)고 전하게 합니다. 시온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위협에서 시온을 구해주시지, 동맹정치가 시온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39:1-8에서 이사야는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이 파견한 사절들과 반앗수르 연합을 모의한 히스기야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일관하여 여호와께 묻지 않는 동맹정치를 배교 행위로 고발했습니다. 구스가 사절들을 파견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협상을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온 구스의 사신들에게 그냥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은 반앗수르 동맹을 구축하려는 구스의 제안을 거절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은 시온 산의 여호와께서 결정하시기에 유다는 그들과의 동맹을 우선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역사 경륜(3-6)

하나님의 침묵은 방임이 아닌 무능에서 나온 외면도 아닙니다. 가장 강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만 하실 수 있는 기다림이고, 회개를 위한 기회입니다. 기고만장한 구스의 번성과 강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해고 있었습니다. 구스의 멸망이 분명하다면 그를 의지할 유다의 미래도 얼마든지 내다 볼 수 있습니다.

 

3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사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 4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5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 6산의 독수리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던져 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여름을 지내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겨울을 지내리라 하셨음이라(3-6)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직접적으로 선언하십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결정적인 순간에 앗수르를 멸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스와 사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1) 증인으로 부름 받는 세상 거민들(3)

 

구스의 사절들에게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한 이사야가 세상 모든 주민을 향해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보고 나팔을 불거든 들으라고 말합니다(3). 그는 구스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을 땅에 사는 자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공개합니다. 땅의 모든 사람이 여호와께서 구스에 행하실 일의 증인이 됩니다. 은밀하게 협상을 추진하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들과 구스의 사절들(29:15; 30:1)과 달리 여호와께서는 당신 계획을 미리 알려주시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산에 기치를 세우고 나팔을 부는 행위는 자주 임박한 전쟁을 위해 군대를 소집하는 표상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공적 선포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멀리서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기치를 세우고 나팔을 불어 세상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당신께서 하실 일을 이들에게 알려주십니다.

 

(2) 때를 기다리시는 하나님(4-5)

 

하나님의 침묵은 방임이나 무관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늘에 있는 당신 처소에서 모든 것을 조용히 바라보시고 개입할 때를 기다리십니다(4). 유다와 구스가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서 협상을 벌이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조용히 바라보며 때를 기다리시는 그분의 활동을 자연현상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더위 (열기)는 볼 수 없지만, 햇볕에 뜨거워진 공기의 반짝거림은 볼 수 있습니다. 저녁에 지중해에서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점차 빠르게 올라오는 운무는 다음 날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도 여전히 산 위에 머물러 있지만,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분의 역사 개입이 그러합니다. 때가 무르익으면 그분께서 계획을 실행에 옮기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포도 농사의 과정을 활용해 구스의 심판을 기술합니다(5). 포도원 농부가 아무 때나 전지용 칼로 가지와 덩굴을 잘라내지 않습니다. 꽃이 지고 포도가 여물어갈 때 열매가 잘 자라도록 전지합니다. 곡식을 수화하는 오월쯤에 꽃이 진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포도원 농부는 전지가위(낫)로 열매를 맺지 못한 싹과 잎사귀와 가지를 잘라내서 건실하게 여문 포도가 잘 자랄 수 있게 해줍니다. 여호와께서도 기다리시다가 때가 무르익어 남길 것과 잘라버릴 것이 분명해졌을 때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때가 되면 대적을 쳐서 그 가운데 일부를 잘라내실 것입니다.

 

(3) 맹수의 먹이가 되는 잘린 가지(6)

 

잘린 싹과 가지는 산에 사는 맹금들과 들의 맹수들에게 넘겨집니다(6). 때가 무르익으면 여호와께서 구스를 심판하여 사나운 적의 먹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유다와 주변 나라들을 끌어들여 반앗수르 연합을 획책하는 구스의 운명은 앗수르의 먹이로 정해졌습니다. 이 비유는 멸망이 결정된 구스와 손잡고 앗수르에 대항하려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심판이 결정된 구스와 연합한다면 유다도 구스와 함께 파멸적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반절은 심판의 철저성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잘린 가지에 생명력이 남아 있을지라도 맹금들과 맹수들이 그것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것이기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을 받는 구스에게는 미래가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구스(7)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자녀들에게 큰 그림을 보여주십니다. 구약 당시에는 허황된 꿈이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회개하고 돌아와 이스라엘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입니다. 복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스까지도 하나님께 돌아와 에물을 드릴 것입니다.

 

7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7)

 

이사야는 민족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세상 저 남쪽 끝에 있는 구스가 만군의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먼 미래를 내다봅니다(사 45:14; 습 3:10; 시 87:4).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사절들을 시온으로 파견한 구스가 언젠가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기 위해 시온을 찾을 것입니다. 심판을 통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시온 산에 계신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운명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 관대한 것과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용납하지 않지만 죄인에 대한 희망은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 복음이 우리를 예배로 이끕니다. 헛된 욕망을 거절하고, 거룩한 예배로 나아가게 합니다. 세상의 부러움이 아닌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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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7-01)


아람과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이사야 17장 1-14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에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영광도 쇠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도 믿음으로 남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남는 자는 누구입니까?

 

  • 여호와의 의지에 거슬러 행동하는 아람의 다메섹과 북왕국 이스라엘에 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다메섹은 완전히 멸망하여 양 떼가 눕는 곳이 되고, 이스라엘은 멸망은 면하지만, 극히 적은 수만 남게 됩니다. 땅의 역사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홀로 결정하십니다. 그분 결정에 반하는 세력은, 이스라엘이건 이방 민족이건,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심판(1-6)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간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에 그들을 남겨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십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수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은 인생을 지키는 것이요,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1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2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3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5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6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반앗수르 동맹을 추진하며 생존을 도모하지만,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께 나온 계획이 아니기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군사의 많음과 정치적 능력에 의존하는 민족은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1) 폐허가 되는 다메섹(1-3)

 

‘다메섹에 관한 경고’는 18장까지 포함하는 머리글입니다. 신탁에는 이스라엘도 포함되지만, 다메섹만 언급합니다. 당시 시리아와 가나안의 작은 나라들이 반앗수르 연합을 결성할 때 다메섹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를 반영한 것 같습니다. 시리아 중북부 지방의 가장 큰 도성 다메섹이 허물어져 돌무더기가 되고, 아로엘의 성읍들은 버려져 짐승의 차지가 됩니다(1-2). 도성과 성읍들이 폐허가 되고 주민들이 모두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살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파괴됐기에 목자들이 다메섹과 주변 성읍에서 양 떼를 쳐도 쫓겨나지 않습니다. 아로엘은 아마 다메섹 근처의 성읍 이름인 듯합니다. 다메섹은 물론 함께 유다를 위협했던 에브라임도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에브라임에서 요새가, 다메섹에서 왕국이 없어지고, 아람의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영화와 같은 형편이 됩니다(3). ‘에브라임의 요새'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도 사마리아를 가리킵니다. 다메섹과 에브라임이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다메섹의 왕조가 몰락하고 에브라임의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당합니다. 아람의 남은 자들이나 이스라엘 자손이나 모두 옛 영화를 잃어버리고 지극히 초라한 존재가 됩니다.

 

(2) 사라지는 여곱의 영광(4-6)

 

4절부터는 시선이 다메섹에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떨어진 북왕국의 처참한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한때 유다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72) 야곱의 영광이 보잘것없어집니다. 살진 사람이 갑자기 병들어 몸이 파리해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몸에서 기름기가 다 빠집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병자처럼 이스라엘은 국력이 소진되어 볼품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733년 앗수르에 대략 영토 3분의 2를 빼앗기고 에브라임 산지와 사마리아만 남겨진 채 겨우 목숨만 부지하게 됩니다. 두 단계로 진행되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파국적 몰락을 기술합니다. 추수꾼이 먼저 낫으로 베어 곡식을 거둬들이고, 뒤이어 이삭을 줍는 자들이 남겨진 것들을 모아들이기에 들판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곡식으로 가득 찼던 넓은 들판이 추수와 이삭줍기가 끝나고 빈 들이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몰락이 그러합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 근교에 자리한 비교적 넓은 들판을 가리킵니다(수 15:8; 18:16; 삼하 5:18,22; 23:13). 이스라엘은 주전 733년의 추수와 주전 722년의 이삭줍기로 완전히 멸망합니다. 감람나무의 추수 비유도 동일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감람나무 열매를 수확할 때 손이 닿지 않거나 잘 안 보여서 가지 끝이나 꼭대기에 몇 알 남겨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운명도 그러합니다(6). 주민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 살아남아 소망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상숭배에서 떠나는 날(7-8)

인생의 벼랑 끝자락은 끝이 아니라 이전의 나약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끊을 수 없는 지점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고비에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유혹이 순간에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역경의 순간에 믿음의 도약할 때, 역경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7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8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7-8)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이사야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소망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여호와의 최종 답변은 아닙니다. ‘그 날에’ 사람들이 자기를 지으신 분을 바라보고, 자기 손의 작품인 제단을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눈을 들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쳐다보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아세라와 분향단을 쳐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보다’(샤아)와 ‘보다’(라아)는 “(성전 제의에 참여해) 예배드리다”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에서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옵니다. ‘사람(아담)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는 회개가 이스라엘에 한정하지 않고 아람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민족 가운데서 폭넓게 이뤄질 것을 시사해줍니다. 우상숭배의 종착역이 멸망임을 뒤늦게 깨달은 자들이 눈을 우상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로 돌립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우상이 헛것임을 볼 수 있게 눈을 열어줍니다. 심판을 통해 사람들은 산당의 풍요제의가 우상숭배였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네 손으로 만들어 세운 제단과 아세라와 분향제단은 모두 산당의 풍요제의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아세라는 풍요제의를 주관하는 여신 이름이 기도하지만, 여기서는 지방의 산당에 마련된 푸른 나무나 세워진 나무 기둥을 가리킵니다. ‘태양상’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함만’의 정확한 의미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요즘은 주로 ‘분향 제단’으로 번역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9-11)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심판의 때에 살게 하는 유일한 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의지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9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10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11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9-11)

 

구원이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긴 결과로 심판을 받지만, 소득이 없지만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다메섹은 멸망을 통해 제 손으로 만든 우상이 헛것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단락은 8절에 잠깐 언급한 멸망의 원인을 보충해줍니다. 이스라엘이 그처럼 완전한 멸망에 넘겨지는(4-6)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 고발(9-10a)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풍요제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가나안 원주민들의 운명과 비교하여 배교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백성의 특권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견고한 성읍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처럼 황폐해집니다(9).

가나안 원주민들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 당했던 것처럼 이들을 대신하여 가나안에 살게 된 이스라엘도 같은 전철을 밟다가 멸망합니다. 여호와를 떠나 이방 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다를 바가 없고, 더 이상 그분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국력이 약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피난처이신 반석)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0a). 이스라엘은 구원의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지 않고, 반석이신 하나님에게서 피난처를 찾지 않습니다. 이들은 도와줄 능력이 있고. 도와주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헛것인 우상에 의존합니다.

 

(2) 풍요의 상실(10b-11)

 

10b-11절은 아마도 지중해 연안에서 인기가 있었던 ‘아도니스 신의 정원’과 관련한 풍습을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접시와 같은 것에 빨리 자라 빨리 시들어 죽는 식물을 심어 아도니스 신에게 봉헌하였는데, 이스라엘도 생명과 풍요를 기대하며 이런 제의 풍습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방에서 들여온 식물과 나뭇가지(새순)를 심으며 풍요를 갈망합니다. 심은 날로 자라게 하고 씨앗을 뿌린 그 아침으로 싹이 트게 하여 신속한 결실을 기대합니다. 풍요에 눈먼 자들에게 풍요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소망하는 결실이 주어진다면 이교적인 것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 달리 풍성한 농작물 대신 ‘근심과 심한 슬픔’이 수확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이교적 풍요제의가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풍요의 박탈과 정치적 멸망뿐입니다.

 

침략자들의 멸망(12-14)

하나님의 음성에 천지가 진동하고 거대한 혼란이 잠잠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열방의 세력은 바람에 나는 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그 어떠한 파도도 잠잠케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공포와 재난에 갇혀 고통스러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십니다.

 

12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이 몰려옴 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 13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이 몰려옴과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 14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들의 몫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들의 보응이니라(12-14)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온 세상을 뒤흔들 것입니다. 마치 쓰나미가 땅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초토화시키듯, 하나님의 심판으로 많은 민족이 소동하고 열방이 충돌할 것입니다. 세상을 뒤흔드는 강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꾸짖으심으로 멀리 도망하고 폭풍 가운데 티끌처럼 흩어질 것입니다.

 

(1) 공격하는 민족들(12)

 

이사야는 민족들의 침략을 바다의 파도에 비유해 묘사합니다. 바다가 노호하듯, 거대한 물이 포효하듯 많은 민족이 함성을 지릅니다. 침략군의 압도적인 세력과 위용에만 관심을 집중합니다.

 

(2) 민족들을 꾸짖으시는 하나님(13-14)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는 거대한 침략군을 여호와께서 직접 상대하십니다. 그분께서 꾸짖으시자 적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납니다. 도망하는 침략군이 바람에 날리는 겨에 비유됩니다. 여호와의 개입으로 전세가 갑작스럽게 역전됩니다. 두려움 가운데 밤을 보냈는데, 아침이 되기 전에 침략군이 사라지고 없어집니다(29:7; 37:36). 14절의 ‘우리’는 민족들이 침략하는 상대가 예루살렘임을 시사합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자들은 갑작스러운 패배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보응’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고랄’은 원래 ‘주사위’를 뜻합니다. 민족들의 패배가 주사위를 던져 확정된 이들의 운명임을 암시해줍니다. 이 단락의 역사적 배경은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 공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군대가 일어나고 환난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번에 멈추게 하십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와 때를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와 때를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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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6-01)

 


교만과 파멸될 모압

이사야 16장 1-14절


 

수많은 모압의 피난민들이 아르논 강나루에 모여들었습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서로 배를 타려고 아우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압의 교만을 엄중하게 징벌하실 때 예루살렘의 다윗 왕조는 모압의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무엇이 인자와 충실, 정의와 공의에 따른 나라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 이사야는 모압에게 시온에서 도움을 찾도록 제안합니다. 예전에 모압이 다윗 왕국의 봉신이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통치하는 다윗 후손에게서 피난처를 찾는다면 모압은 파국적인 멸망을 피할 수 있습니다. 모압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윗의 보좌에 앉아 정의와 공의로 통치할 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압에 주는 권면(1-5)

다윗 왕권의 회복에 대해 예언한 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복음에 근거하여 세워질 신약 교회에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다 포함될 것임을 예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형제국인 모압에 대해서는 다른 열방들의 예언과는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주어집니다.

 

1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 2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3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도망한 자들을 발각되게 하지 말며 4나의 쫓겨난 자들이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들에게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5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1-5)

 

다른 열방에 대해서는 심판의 메시지만을 선포한 선지자가 모압에 대해서는 심판의 날에 재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배려는 이스라엘과 모압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예언자의 권면(1-2)

 

이사야가 모압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청자 ‘너희는 모압의 통치자들이고, 이 땅 통치자’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왕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는 모압의 통치자들에게 도움이 시온에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시온산으로 양을 보내도록 권고합니다. 살기를 원한다면 모압은 조공을 보내고 유다의 봉신이 되어야 합니다(왕하 3:4).

예전에 다윗 왕국의 봉신이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통치하는 다윗의 후손에게서 도움을 찾는다면 모압은 완전한 멸망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윗 왕조의 보호 아래 들어온다면 모압은 여호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곤고한 자들’의 피난처로 세우신 시온(14:32)이 칼에 쫓겨 떠도는 모압 난민들에게도 피난처가 될 수 있습니다.

모압 사절단의 출발지로 언급된 ‘셀라’가 고유명사인지 보통명사(바위)인지 불확실합니다. 에돔의 수도를 제외하고 셀라로 불리는 성읍 이름이 없기에 보통명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서운 적이 침략하자 모압의 통치자들이 바위로 뒤덮인 국경 지대의 광야로 피신한 것 같습니다. 15:5-7에 나온 모압 피난민들에 관해묘사가 다시 이어집니다.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처럼 ‘모압의 딸들’이 아르논 강의 건널목을 헤맵니다(2).

적에게 점령당한 성들의 주민들이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납니다. 굶주림과 공포에 기진한 피난민들은 아르논 강을 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죽어갑니다. 모압의 통치자들이 빨리 시온으로 사절을 보내 도움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모압의 피난민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2) 도움 요청의 구체적 메시지(3-4a)

 

이사야는 멸망을 모면할 수 있는 방책을 알려주며, 모압 사절이 유다 왕을 찾아가서 호소할 말도 가르쳐줍니다(3-4a). ‘(왕 이시여, 우리에게 당신) 생각을 알려주소서. 결정을 내려주소서. 한낮에 당신의 그늘을 밤처럼 펼쳐주소서. 쫓겨난 자들을 숨겨주시고 도망치는 자들을 들키지 않게 해주소서. 모압의 쫓겨난 자들이 당신 곁에 머물 수 있게 해주소서. 그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소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주변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난민들의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을 봉쇄했습니다. 모압 사신들은 유다가 국경을 열고 전쟁을 피해 떠도는 자국의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도록 호소합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내다보며 무서운 적에게 침략당한 모압의 난민들을 받아들일 것을 예루살렘 왕궁의 정치가들에게 충고합니다.

 

(3) 구원 선포(4b-5)

 

‘억압이 그치고 파괴가 끝나압제자들이 그 땅에서 사라지면 다윗의 장막에 한 보좌가 인애로써 굳게 세워지고, 정의를 추구하고 공의를 신속히 행하는 한 재판관이 진실함으로 그 위에 앉으리라’(4b-5). 다윗 왕조가 모압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모압을 억압하던 자들이 떠나면 은혜를 입은 모압이 유다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억압과 파괴로 고통당하는 모압이 다윗의 보좌에 앉아 인애와 진실을 따라 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통치자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다윗 시대처럼 모압이 다시 이스라엘의 봉신이 됩니다.

 

두 번째 탄식(6-12)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한 원인이 된 죄를 찾아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로써 이 연단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하게 경험하고 감사할 수 있는 자리로 다시금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할 경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징계하셔서 그들의 죄에 대해 보응하시며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도록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6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7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되 다 통곡하며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리니 8이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 전에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 이제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9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네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 10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11이러므로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 내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 12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6-12)

 

이 본문에서는 15장과 같이 모압에 대한 파멸의 심판이 강력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의 적절한 충고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즉 모압은 유다 와에게 공물을 보내어 도움을 간청함으로써 유다 땅에서 피난처를 구하라는 이사야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1) 모압의 탄식과 그 원인(6-8)

 

모압에 파국적 재앙이 임하는 이유가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모압의 교만과 오만함이 모압의 멸망을 초래합니다(6). 모압의 허풍을 들은 ‘우리’의 신분은 감춰져 있습니다.

 

(2) 예언자의 탄식(9-12)

 

9절과 11절은 이사야의 1인칭 문장이고, 10b절은 여호와의 1인칭 문장이기에 여호와를 포함한 예언자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의미를 갖는 다섯 개의 단어(교만, 심히 교만하도다, 거만, 교만, 분노)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모압의 교만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처음 네 개는 ‘높다’를 의미하는 동사 ‘가아’에서 파생한 단어로, 자기 힘과 능력과 업적에 의존해 자신을 높이는 행위가 교만의 본질임을 보여줍니다.

다섯 번째 ‘분노’ ‘에브라’는 한계 또는 정도를 넘은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평정심의 한계를 넘으면 노여워함으로,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넘으면 교만함으로 나타납니다. 모압의 교만과 헛된 자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자신들의 군사력과 적이 접근하기 힘든 지형적 장점을 과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압을 심판하는 주체가 여호와이시기에 이들의 자랑거리가 무용지물이 됩니다.

 

고발의 말씀 다음에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심판의말씀이 뒤따르는데, 여기서는 탄식이 나옵니다. 심판이 이미 이뤄진 것을 전제합니다. 심판이 돌이킬 수 없게 확정됐음을 보여줍니다. 모압이 어느 날 갑자기 풍요를 빼앗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통곡합니다(7). 이들은 길하레셋의 건포도 떡을 생각하며 슬피 웁니다. 전에 맛있게 먹던 건포도 떡을 구경하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건포도 떡은 제의적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지만(삼하 6:19; 호 3:1), 여기서는 모압의 풍요롭고도 자랑스러운 농산물의 대표로 언급됐습니다. 길하레셋(오늘의 케락)은 사해에서 동쪽으로 대략 20km 정도 떨어진, 아르논과 제레드의 중간쯤에 위치한 모압의 성습인데, 현재 문맥에서는 모압을 대신합니다. 수출품으로 유명했던 모압의 포도 농사를 배경으로 멸망을 기술합니다. 포도 산지로 유명한 헤스본과 십마와 야외 극상품 포도나무가 말라 황폐하게 됩니다(8). 전쟁 또는 자연재해로 포도 농사를 완전히 망쳐 거둬들일 것이 없게 된다. 초라해진 현재가 영화로웠던 과거에 대비됩니다.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는 모압이 크게 확장됐던 과거를 돌아보는 언급입니다. 모압은 한때 북쪽으로는 암몬 경계의 야셀까지, 동쪽으로는 광야까지, 서쪽으로는 사해까지 미쳤습니다. 전에 사방으로 뻗어나갔던 포도나무의 가지가 민족들의 통치자들에 의해 잘렸습니다. 모압의 임박한 심판을 바라보며 이사야는 다시금 이들의 파국적 운명에 동참합니다. 수확하는 즐거움이 사라진 포도밭과 과수원을 내다보며 격정적으로 반응합니다(9). 마지막에 나오는 엘르알레를 제외하고 8절에 나왔던 지명을 역순으로 언급됩니다. 폐허가 된 포도밭과 과수원에서는 수확하는 즐거움이 사라지고 적막감만 감돕니다. 모압의 황폐함은 물론 여호와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의 교만(1)을 징계하시려고 추수의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십니다(10; 15:9). 폐허가 된 헤스본과 엘르알레가 이사야의 눈에서 눈물을 한없이 쏟아지게 하고(9b), 멸망에 떨어진 모압과 길하레셋이 그의 마음과 창자를 수금 소리처럼 떨게 하지만(11), 그는 여호와께서 모압에 행하시는 심판의 공의로움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당에 올라가 신에게 열심히 제사를 지내고 성소에서 기도를 드릴지라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12). 모압의 신 그모스가 진노해서 내린 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모압의 교만을 징벌하기로 하셨기에, 모압은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모압의 재앙은 이들이 숭배하는 신의 무능력을 더욱 드러낼 뿐입니다. 중립적으로 언급된 15:2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모압의 종교가 부정적으로 평가됩니다.

 

맺는말(13-14)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사자라는 고귀한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자들을 통하여서도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로 인하여 영광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압 인들에게 자국으로 피난한 남유다 백성들을 선대하라고 명하신 것은 사랑하시는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배려일 뿐만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13이는 여호와께서 오래 전부터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거니와 14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것없이 되리라 하시도다(13-14)

 

선지자는 모압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마무리합니다.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3년 내에 이 모든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지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두 가지입니다.

 

(1) 결정된 모압의 멸망(13)

 

모압의 멸망은 여호와께서 오래전에 결정하신 그분 계획에 속합니다. 모압의 파멸을 선고한 15:1-16:12의 내용은 이미 오래 전에 선포된 것으로서, 이제는 그것이 성취될 일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오래 전에 이 메시지가 선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메시지가 선포된 지 오래이며 이미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는 점입니다.

 

(2) 3년 안에 성취될 모압의 멸망 예언(14)

 

앞으로 3년이 지나면 모압의 안녕과 번영은 끝장납니다. 수많은 사람이 사라지고 극히 적은수의 사람만 살아남아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됩니다.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의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계약 기간이 법적으로 정해지는 것처럼 모압의 남은 기간이 정확하게 3년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삼 년은 자주 새로운 사건을 기다리는 기간으로 사용됩니다(삼하 13:38; 왕상 22:1; 왕하 17:5;18:10; 사 20:3).


피할 걸도, 피할 곳도, 그리고 지금이 피할 때라는 것도 알려주십니다.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건 얼마나 소중합니까? 남은 기회를 다 소진해버려 돌아갈 시간도, 돌아갈 품도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믿어서는 안 될 것에 마음 다 주지 말고 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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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5-01)


재앙 앞에서 우상을 찾는 모압

이사야 15장 1-9절


 

심판이 임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기란 얼마나 어려 웁니까? 더욱이 심판의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어리석게도 작정된 심판을 다 겪고 나서야 하나님을 찾는 우를 범합니다. 모압에 대한 심판을 보며 꼭 기억해야 할 바는 무엇입니까?

 

  • 모압이 한밤중에 적의 기습을 받아 치명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모압 알과 모압 기르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은 국가적인 애도를 선포하고 통곡합니다. 백성들이 자신을 위해 임한 산의 노여움을 달래려고 모두 머리와 수염을 깎고, 허리에는 배를 동이고 산당으로 올라가서 슬피 울며 부르짖습니다.

모압의 북부 지방(1-4)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멸망은 한순간에 찾아오고 감당할 수 없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일지라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국가의 운명이나 한 조직이나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전과 보장은 오직 하나님 손에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2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는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카락을 밀고 각각 수염을 깎았으며 3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4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1-4)

 

이사야 15장은 모압에 관한 시로 시작합니다. 유다와 그 동쪽 이웃인 모압의 관계는, 유다와 블레셋만큼이나 우려스럽습니다. 유다는 모압과의 불화에 대한 오래된 기억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에 이어 네 번째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인 모압 족속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두 장(15,16장) 중 그 전반부레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1) 예언자의 탄식 : 모압의 멸망(1)

 

모압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문법적으로 똑같은 구조와 같은 단어로 된 두 개의 문장으로 모압의 멸망을 탄식합니다.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폐허가 됐고,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폐허가 됐습니다(1).

모압을 공격하는 적의 정체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고, 모압이 멸망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합니다. 멸망과 관련된 부가적 언급은 문장 서두에 두 번 등장하는 ‘하룻밤에’가 유일합니다. 침략의 시간으로 나오는 ‘밤’은 파국적 재앙의 ‘갑작스러움과 두려움’을 시사해줍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밤에는 군대가 이동하거나 전투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싸움은 보통 새벽이나 아침에 시작하는데 모압의 경우에는 한밤중에 적들이 침략하여 짓밟았습니다. 적군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는 캄캄한 밤에 성을 공격할 수 있는 적이라면 보통 군대가 아닙니다. 모압의 주요 성읍인 알과 기르의 위치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아르논강 남쪽에 있었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2) 백성의 탄식 묘사(2-4)

 

남쪽 성읍들이 함락됐다는 무서운 소식을 듣고 북쪽 지역 사람들은 집을 떠나 산당에 올라가 국가적 재난에 통곡합니다. 사람들이 디본 산당으로 올라가 성소에서 슬피 울고, 모압이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합니다(2). 이들은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인 채 슬피 울며 거리를 다니거나 지붕에서 애곡합니다(3). 국가적인 비상사태를 맞아 모압 사람들이 모두 공식적인 애도 행위에 참여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신을 향한 통곡은 어떻게 해서든 신을 움직여 재앙을 극복해보려는 시도에 속했습니다. 전쟁의 패배나 재앙이 신의 노여움에서 기인한다고 보았기에, 그 노여움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회개하고 통곡했습니다. 이들은 크게 부르짖을수록 신에게 더 잘 상달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신전과 산당을 찾아가는 행위를 우상숭배의 부정적 시각에서 고발하지 않고(참조. 16:12), 객관적으로 기술합니다. 절망적 형편에 처한 자들에 대한 인간적 연대감을 은연중에 보여줍니다.

 

언급된 장소는 대략 사해 동쪽 연안 가운데쯤으로 흘러 들어가는 아르논 강 북쪽에 위치했습니다. 갓 또는 르우벤 지파에 속했던 디본(민수기 21:30; 32:3,34; 여호수아 13:9,17)은 아르논 강에서 북쪽으로 4km, 사해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졌습니다. 주전 9세기 중엽 이스라엘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모압 왕 메사는 디본을 도성으로 삼았습니다. 느보는 사해 북단의 산지에 자리한 성읍으로, 디본에서 북쪽으로 30km, 메드바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5km 떨어졌습니다. 민수기 32:37-38에 의하면 4절에 나오는 헤스본, 엘르알레와 함께 르우벤 지파의 분깃에 속했습니다. 모세는 근처에 있는 느보 산에서 약속의 땅을 보고 생을 마쳤습니다(신명기 34:16). 메드바는 느보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이었습니다(민수기 21:30; 여호수아 13:9,16; 역대상 19:7).

디본과 느보와 메드바에서 시작된 통곡의 대열에 북쪽의 두 성읍 헤스본과 엘르알레가 동참합니다(4).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며 모압을 뒤덮습니다. 헤스본과 엘르알레에서 애곡하는 소리가 30km 이상 떨어진 야하스에서도 들립니다. 야하스는 아마도 군사 요새였던 것 같습니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절망적인 부르짖음에 야하스에 주둔한 병사들도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싸울 용기를 잃고 크게 부르짖습니다. 전투에 나서야 할 자들이 적을 대면하기도 전에 낙담하여 넋이 나간 듯 떱니다.

헤스본은 느보에서 북동쪽 6km, 메드바에서 북북동쪽으로 9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하기 전에 아모리 족의 왕 시혼의 도읍지였습니다(민수기 21:27). 민수기 32:37에 따르면 르우벤 지파에, 여호수아 13:26; 21:39에 따르면 갓 지파에 속했습니다. 엘르알레(민수기 32:3,37; 예레미야 48:34)는 헤스본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기름진 평지에 위치한 성읍이었습니다. 야하스(민수기 21:23; 신명기 2:32; 여호수아 13:18; 21:36//역대상 6:63; 사사기 11:20; 예레미야 48:21,34)의 위치는 아직 불분명합니다. 자주 헤스본에서 남쪽으로 25km, 디본에서 북동쪽으로 7km 떨어진 곳에서 찾습니다.

모압의 남부 지방(5-7)

세상을 만끽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것 하나만 사라져도 모든 삶이 주저앉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누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림 받을 때는 우리가 누렸던 것들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모압에게는 군사적인 시련만이 아니라 극심한 가뭄의 고통도 힘할 것입니다.

 

5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피난민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이르고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울부짖으니 6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7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5-7)

 

북부 지역이 접령 당한 모압 사람들은 남서쪽(소알, 에글랏 슬리시야, 루힛, 호로나임, 니므림)으로 피신합니다. 피난민들에게는 먹을 양식도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남부 경계 지역인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 에돕으로 피신합니다.

 

(1) 예언자의 1인칭 탄식(5a)

 

이사야가 1인칭을 사용하면서 모압의 비극 안으로 들어옵니다. 첫째 단락에서는 사건 밖에서 모압의 파국적 재앙을 전해주던 예언자가 저들의 애통과 부르짖음에 참여합니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5). 전란에 휩싸인 고향을 떠나 안전한 곳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헤매는 난민들을 (환상 가운데)보며 연민과 아픔의 마음으로 통곡합니다. 모압을 엄습한 재앙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그럼에도 모압 사람들의 절망적인 처지가 예언자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2) 피난민들의 곤경 묘사(5b-7)

 

모압의 피난민들이 살길을 찾아 소알까지,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도망하면서 루힛 비탈길을 통곡하며 올라가고, 호로나임으로 가는 길에서 패망을 울부짖습니다. 적이 호로나임을 친다는 소리를 듣고 루힛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는데, 루힛 고개에서 벌써 호로나임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마도 피난민들은 소알을 지나 사해 남단을 우회하여 유다 남부 지역으로, 또는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에돔 땅으로 가려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암송아지’를 의미하는 에글랏 슬리 시야의 위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48:34에서도 호로나임과 함께 등장합니다. ‘루힛 비탈길’의 위치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호로나임은 아르논 강과 제레드 시내 중간쯤, 모압의 남부 지방에 있었으리라 추측합니다.

 

6-7절에서는 재앙의 종류가 전쟁에서 극심한 가뭄으로 바뀝니다. 가뭄의 재앙이 앞에 기술된 전쟁의 재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대 세계에서 가뭄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쟁만큼 치명적인 재앙이었습니다.

현재 문맥에 따르면, 전쟁과 더불어 극심한 자연재해가 모압을 덮쳐 황폐하게 만듭니다. 물은 마르고 풀은 시들고 목초는 타버립니다. 푸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됩니다. 물이 없기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풀이 없기에 가축을 기를 수 없습니다. 그대로 앉아서 굶주려 죽거나, 살 곳을 찾아 아무 데로나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애써 얻은 재물과 귀중품을 짊어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갑니다. 위치가 불분명한 ‘니므림 물’은 사해 남단에서 북쪽으로 대략 13-16km 떨어진 고르엔누메이라(Goren-Numeirah)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엔누메이라(Wadi en-Numeirah)에서, ‘버드나무 시내’는 남동쪽에서 사해 남단으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엘헤사(Wadi el-Hesa)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압 전역을 휘도는 부르짖음(8-9)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서 진노를 쏟아내기 시작하면, 심판의 대상은 그 진노를 무서워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심판이 임하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압에게 심판하실 때, 도피한 자 위에, 남은 자 위에 심판의 사자를 보내서 더 철저하게 심판하게 하십니다.

 

8이는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렸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부르짖음이 브엘엘림에 미치며 9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8-9)

 

이사야의 시선이 피난민들에서 다시 모압의 애곡 행위(1-4)로 옮겨집니다. 내용상 4절에 연결됩니다.

북쪽에서 시작된 애곡 소리가 모압 전역을 뒤덮습니다. 울부짖음이 에글라임과 브엘엘림까지 이릅니다. 두 성읍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맥상 모압 국경 남서쪽 지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일강이 피로 붉게 물들었던 것처럼 디몬의 물이 피로 넘칩니다. 적의 칼에디몬의 수많은 주민이 살육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환상 가운데 보고 있는 재앙이 마지막 재앙이 아닙니다. 갑자기 화자가 하나님의 1인칭으로 바뀝니다. 모압에 임할 재앙은 하나님의 심판 의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압을 전쟁과 가뭄으로 징계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몬 위로 또 다른 재앙이 임하게 하십니다. 그분께서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사자는 사람도 공격하는 들짐승의 사실적 표현일 수도 있고, 또 사자처럼 무서운 적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모압이 왜 이처럼 혹독한 심판에 떨어지는지는 16장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됩니다.


모압의 백성들은 멸망 중에도 디본 산당을 찾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구언해줄 이는 없습니다. 우상은 더 큰 위험에 빠트릴 뿐 건져주지 못합니다. 돌이킬 수 없을 때가 이르기 전에 잘못된 행동을 버려야 합니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회개의 눈물을 쏟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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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4-02)


완전하신 하나님, 공의의 경영자

이사야 14장 24-32절


 

하나님께서는 잠언을 통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아무리 야무진 힘과 포구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아니하면 무산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본문은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경영은 아무도 폐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앗수르를 파괴하실 때에 이스라엘이 그의 멍에와 짐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블레셋에 경고가 임합니다. 즉, 하나님이 블레셋의 뿌리와 남은 자까지 다 소멸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짓밟힐 앗수르(24-27)

온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를 향한 뜻을 세밀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에 순복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가장 선하심을 믿고 따르는 삶이 바른 신앙입니다.

 

24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25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그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26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27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24-27)

 

이사야서를 통해서 역사를 주관자이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전 701년 앗수르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과 앗수르의 패배를 내다보는 24-27절의 말씀은 의도적으로 현재의 자리에 놓였습니다.

 

(1) 여호와 계획의 확실성(24)

 

겉으로는 앗수르의 심판을 선언하지만, 실제로는 예루살렘의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이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을 수집해놓은 1-12장 또는 28-39장의 어느 한 곳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바벨론의 멸망(13장)과 바벨론 왕의 죽음(14:3-23)을 선포하는 말씀과 함께 읽도록 그 다음에 놓인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사야가 예언 활동할 당시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현재 세력이고(1-39장), 바벨론은 앞으로 예루살렘을 위협할 미래 세력입니다(40-55장).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들이 수집됐을 때 앗수르의 위기는 이미 과거의 사건으로 그의 예언에 따라 극복됐습니다. 곧 여호와의 계획을 담고 있는 앗수르의 예언은 성취된 예언이 됐습니다. 앗수르의 예언이 온전하게 성취됐다면, 이사야가 선포한 바벨론의 예언도 때가 되면 그대로 성취될 것이 확실해집니다. 전체 이사야에서 보자면, 바벨론에 멸망하고 민족들 가운데 유배살이 하는 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앗수르를 징벌하시고 예루살렘을 구해주셨듯이, 당신 계획에 따라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흩어진 자들을 다시 이스라엘로 데려오실 것입니다(14:1-2).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 올라올 앗수르 군대의 멸망을 1인칭으로 맹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생각하신 것은 그대로 이뤄지고, 그분께서 결정하신 것은 그대로 성사됩니다(24). 민족들의 운명과 역사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땅의 모든 일은 그분의 계획과 결정에 따라 이뤄져갑니다. 민족들 간의 전쟁과 승패가 겉보기에는 패권을 추구하는 정치적 - 세속적 권력의 주도권 다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을 실행해나가시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민족들은 역사 무대의 배우이며 감독이신 여호와께서 쓰신 각본에 따라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할 뿐입니다.

 

(2) 앗수르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25-26)

 

예루살렘의 역할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역할도 그분께서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분의 계획은, 앗수르를 그분의 땅에서 쳐부수고 그분의 산들에서 짓밟아 이스라엘이 멍에에서 놓임을 받고 그들의 어깨에서 짐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25). 앗수르의 지배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려고 앗수르를 유다로 불러 치십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여호와의 계획에 따르면 그분께서는 앗수르를 불러올려 반역한 예루살렘을 징계하시고, 뒤이어 업적과 능력에 취해 교만해진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10:12). 예루살렘으로 원정 오는 앗수르에 이중적 역할이 맡겨집니다. 앗수르는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불순종한 다윗 왕조를 징계하시는 도구로서 올라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한계를 넘은 교만으로 인해 여호와께 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그분의 심판 계획에는 앗수르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포함됩니다(26). 그분께서 앗수르에 대한 당신 결정을 그대로 실현하시듯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을 이루실 것입니다. 전에 반역한 이스라엘 위로 펴졌던 그분 손(9:12,17, 21;10:4)이 이제는 민족들 위로 펴집니다. 13-23장에 포함된 민족들에 관한 예언은 그분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구체적인 예가 됩니다.

 

(3) 여호와 계획의 확실성(27)

 

세상 어떤 권력도 그분의 결정을 꺾거나 되돌릴 수 없습니다(27). 바벨론과 앗수르가 정치적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여호와께서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그러할 뿐입니다. 결국에는 여호와의 결정을 운명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권력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살아남기 위해 누구에게 의존해야 할지는 처음부터 자명합니다.

 

블레셋에 대한 신탁(28-32)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세상뿐만 아니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은 그분의 백성에 대한 구원 계획만큼이나 확고합니다. 켜켜이 쌓인 죄악이 하나님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렇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양심에 확인을 맞기 전에 돌아서야 합니다.

 

28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이 경고가 임하니라 29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의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 30가난한 자의 장자는 먹겠고 궁핍한 자는 평안히 누우려니와 내가 네 뿌리를 기근으로 죽일 것이요 네게 남은 자는 살륙을 당하리라 31성문이여 슬피 울지어다 성읍이여 부르짖을지어다 너 블레셋이여 다 소멸되리로다 대저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 그 대열에서 벗어난 자가 없느니라 32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28-32)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아하스가 죽자, 블레셋은 사신을 파견해 유다 와에게 반앗수르 동맹을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혹하는 블레셋을 심판하겠다고 경고하십니다. 블레셋과 연합한다면 유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말 것입니다.

 

(1) 블레셋에 대한 경고(28-29)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블레셋에 대한 신탁이 주어집니다(28). 에스겔과 학개의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예언이 주어진 시점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에서는 6:1과 20:1에 두 번 더 나옵니다. 예언의 정치적 배경으로 주어진 정보입니다. 7-8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유다 왕 아하스는 아람과 에브라임이 추진하던 반앗수르 연합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고 앗수르의 봉신이 됐습니다.

32절의 ‘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는 블레셋이 예루살렘 왕궁으로 사신들을 파견했음을 전제합니다. 이를 함께 읽으면, 아하스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계승하는 해에 블레셋이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블레셋이 사신들을 파견한 목적은 달리 언급되지 않지만, 단순히 새 왕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블레셋의 멸망을 선포하고 블레셋 사신들에게 답변할 말을 (예루살렘 정치가들에게) 주었음은 이들이 유다의 새 왕이 된 히스기야와 정치적 현상을 벌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음을 시사해줍니다. 최스기야가 통치할 때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에 따르면 최스기야는 앗수르에 의존했던 그의 아버지와 달리 탄앗수르 노선을 걸었습니다. 정리하자면, 블레셋은 아마도 앗수르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히스기야가 왕위를 계승하자 앗수르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협상단을 파견했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블레셋을 치던 압제자가 죽었다고 기뻐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냅니다(29). 전력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더 잔혹한 자가 그 자리를 이어 통치할 것입니다. ‘너를 치던 막대기’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시대적 배경과 본문의 해석에 의존적입니다. 일부는 28절에 근거해서 유다 왕 아하스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앗수르에 종속된 아하스가 블레셋에 그렇게 위협적이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또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블레셋을 더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 블레셋의 심판(30-31)

 

다수의 입장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또는 사르곤으로 해석합니다. 앗수르가 애굽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블레셋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정복해야 했습니다. 애굽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블레셋은 전통적으로 애굽에 우호적이었기에 거듭 앗수르의 위협과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블레셋을 치는 적들이 북방에서 온다는 31절의 언급도 유다의 침략보다는 앗수르의 침략에 더 잘 어울립니다. 억압하던 앗수르 왕의 죽음에서 다시 주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를 보며 환호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예언자는 더 혹독한 억압과 파괴가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날아다니는 불뱀’은 날듯이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 다니는 광야에 사는 독사를 가리킵니다. 31a절은 전쟁으로 기존 질서가 완전히 파괴될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어리석은 판단으로 국가를 멸망으로 이끈 블레셋의 통치 계급이 사라지고, 그들에게 억압을 당하던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자유롭게 살게 됩니다(?). 하반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기근과 칼로 블레셋을 치십니다. 블레셋이 자연재해를 간신히 극복합니다 할지라도 살아남지는 못합니다. 전쟁에 넘겨져 완전히 멸망을 당합니다. 이사야는 블레셋의 멸망을 이미 이뤄진 현실로 내다봅니다(31). 그는 성문과 성읍을 의인화해 애곡을 요청합니다. 블레셋은 멸망을 피할 수 없기에,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죽음을 애곡하는 것뿐입니다.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는 점령한 성들을 불태우며 오는 모습보다는 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오는 침략군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침략군은 대열에서 벗어난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정병들입니다.

 

(3)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주는 권면(32)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블레셋의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32). 실질적으로는 예루살렘 왕궁의 정치가들에게 주는 권면이자 경고입니다. 주변 나라들과 맺은 정치적 동맹에서가 아니라, 시온 산에 계신 여호와에게서 피난처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에게 블레셋이 제안하는 반앗수르 정책에 어떻게 답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흔들리지 않고 시온의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방패와 피난처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정치와 자본의 힘에서 안전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지 않습니까? 안전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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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4-01)


파멸에 처해질 바벨론의 운명

이사야 14장 1-23절


 

바벨론의 교만은 하늘 높은 줄을 모릅니다. 급기야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합니다. 세상의 뭇 영웅들을 스롤로 보낼만큼 거칠 것이 없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신이 온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하늘의 별들까지 주관한다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웃으시며 추락과 파멸을 예고하십니다.

 

  • 메대를 통한 바벨론의 심판(13장)이 이스라엘의 운명에 전환점을 마련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민족들 가운데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가나안에 돌아와 살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귀환은 아직 미래 사건이지만,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멸망을 확정하셨기에 소망 가운데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1-2)

하나님께서 높이시지 않는 자라면 스스로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도, 형제들도, 사회적 약자들도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아지는 것은 진정한 성공이 아닙니다. 언제 가는 이렇게 높아진 자들을 낮추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살 동안에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세상을 섬길 때, 언젠가는 세상으로부터 섬김을 받을 것입니다.

 

1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과 연합하여 그들에게 예속될 것이며 2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노비로 삼겠고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들을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들을 주관하리라(1-2)

 

여호와께서 열국을 심판하시는 날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신의 결과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도 합류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회복의 축복에 참여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귀환(1)

 

고집스럽게 반항하며 회개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게 구원과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겠습니까? 유배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의해 언약이 파괴되었기에 재결합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신학적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세상 악인들의 멸망 또는 바벨론의 멸망은 이스라엘에는 여호와의 긍휼이 드러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명사 ‘자궁’에서 파생된 동사 ‘긍휼히 여기다’는 자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을 표현합니다(54:8,10). 여호와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 고집 세게 반항하며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구원과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스라엘의 선택이 파탄에 직면했음을 전제합니다. 그분의 일방적인 사랑이 ‘새로운 선택’을 가능하게 합니다(예레미야 33:23-26). 전에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던 것처럼(신명기 4:37-38), 새로운 선택에서도 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2) 이스라엘의 해방(2)

 

이스라엘이 고토로 돌아와서 풍요롭게 살 때, 그들 가운데 사는 이방인들이 이들에게 합류하여 연합하게 됩니다. 나그네 된 자는 여러 이유에서 고향을 떠나 타향에 정착한 자들로, 대부분 타국인을 의미합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문호가 가나안 땅에 함께 사는 이방인들에게 개방됩니다. 세상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민족들의 인도를 받으며 고향으로 귀환합니다. 안내자 역할을 담당했던 이방인들이 귀환민을 섬기는 종이 된다. 민족들 가운데 객으로 살며, 이들을 섬겼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거 자신을 압제하던 자들을 이제는 종으로 부리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민족들의 운명이 완전히 역전됩니다. 부당하게 억압당하던 자들이 위로를 받아 지배자가 되고, 불법과 폭력으로 억압하던 자들이 피지배자의 신분에 떨어집니다.

 

바벨론 왕에 대한 애가(3-23)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평안과 안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들에게는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다시 긍휼이 여기시고 다시 택하시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나그네 된 자들이 한 나라가 되고 슬픔과 곤고한 노역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놀랍게도 자신들을 사로 잡았던 자들을 노예로 삼을 것입니다.

 

3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네가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4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네가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5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압제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6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도다 7그들이 분내어 여러 민족을 치되 치기를 마지아니하였고 노하여 열방을 억압하여도 그 억압을 막을 자 없었더니 8이제는 온 땅이 조용하고 평온하니 무리가 소리 높여 노래하는도다 9향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도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이르기를 네가 넘어져 있은즉 올라와서 우리를 베어 버릴 자 없다 하는도다 10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11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12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13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4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5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6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17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18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 19열방의 모든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 중에 자건마는 20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 가증한 나무 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떨어진 주검들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21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안장되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리로다 할지니라 22너희는 그들의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 도륙하기를 준비하여 그들이 일어나 땅을 차지하여 성읍들로 세상을 가득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23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일어나 그들을 쳐서 이름과 남은 자와 아들과 후손을 바벨론에서 끊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3-23)

 

바벨론은 기세등등했습니다. 아무도 그이 멸망을 예측 못할 만큼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가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여 그를 두려워하던 자들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1) 서술적 도입부(3-4a)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운명이 대조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안식을 주시는 날은 이스라엘을 폭력으로 억압하였던 바벨론 왕이 종말을 맞는 날입니다. 예언자는 바벨론의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내다보면서 억압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벨론 제국의 죽음을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2) 조롱의 노래(4b-20)

 

4b절부터 조롱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민족들을 두려움에 빠뜨리며 발아래 굴복시켰던 폭군이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습니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부수어버리셨습니다. ‘몽둥이와 규’는 왕의 손에 들린 홀(笏)로 압제자의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폭군이 사정없이 몽둥이와 막대기를 휘두르며 민족들을 위협하고 무자비하게 짓밟았지만, 누구도 감히 그에게 맞서지 못했습니다.

7-8절은 폭군의 압제에 시달리던 세상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내보인 감격적 반응을 기술합니다. 폭군의 죽음으로 ‘온 땅’이 쉼을 얻고 조용해집니다. 더 이상 전쟁의 아우성과 소란이, 강제노동의 고통과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쉼과 평화를 얻게 된 사람들이 기뻐 환호합니다. 폭력에 시달리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레바논의 향나무와 백향목도 폭군의 죽음을 반깁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고대 근동에서 최상품의 목재로 유명했습니다. 나무를 남벌하던 폭군이 죽자 레바논의 향나무와 백향목이 환성을 지릅니다. 세상과 자연이 모두 한마음으로 폭군의 죽음을 기뻐합니다.

 

이사야는 풍부한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 폭군의 죽음이 불러온 스올의 소란을 묘사합니다(9-11). 죽음의 침묵이 지배하던 스올이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소란에 빠집니다. 폭력과 억압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폭군의 갑작스러운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스올이 먼저 내려와 자고 있던 민족들의 왕들과 영웅호걸들을 깨워 그 보좌에서 일으켜 세웁니다. 폭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왕들이 자신들과 같은 처지로 떨어진 폭군을 보고 조롱합니다. ‘우리와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는 ‘우리처럼 죽었구나’를 의미합니다. 압도적인 세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은 절대 권력자의 몰락을 보고 기뻐합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영화를 누리던 폭군이지만, 그의 운명 또한 다른 자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막대기와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폭군에게는 스올도 세상 왕에 상응하는 예우를 거절합니다. 다른 왕들과 달리 세상을 호령하던 폭군에게는 영원한 거처로 왕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요로 구더기가, 이불로 지렁이(벌레)가 주어집니다. 폭군은 스올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영원히 저주받은 죽음에 떨어집니다.

 

폭군이 스올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때는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폭군을 ‘아침의 아들 계명성’(빛나는 별, 여명의 아들)으로 부르면서 가나안에 잘 알려진 신화적 표상을 사용해 그의 교만을 고발합니다(12-14). 폭군의 교만과 오만은 한계가 없었습니다. 온 땅을 자신의 발아래 둔 폭군은 신들마저 자신의 통치 아래 두려 했습니다. 그는 지상의 왕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의 자리에, 그것도 최고신의 자리에 오르려 했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가나안 신화에 의하면 만신전의 최고통치자이자 하늘과 땅을 창조한 엘(El)은 별들 위에 거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폭군은 최고신 엘의 자리를 탐냈습니다.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는 신들이 모임을 갖는 ‘신들의 산’에 관한 표상을 배경으로 하는 주장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북쪽에 있는 올림포스(Olympus) 산에서 모임을 갖는 것처럼, 가나안 신화에 의하면 신들은 북쪽 끝에 있는 산(Zaphon)에서 최고신 엘의 주재 아래 모임을 갖고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세상을 정복하여 민족들의 왕이 된 폭군은 북녘 끝에 있는 산에서 열리는 신들의 회의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폭군은 또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자리를 함께하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폭군은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도전했습니다. 교만이 폭군을 파멸에 떨어뜨립니다(15).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오만에 사로잡혀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자의 비참한 말로가 극적으로 기술됩니다. 하늘에 오르려던 폭군이 스올로, 북쪽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신들의 산에 오르려던 폭군이 구덩이의 가장 먼 곳으로 떨어집니다.

 

무대가 다시 지상으로 바뀝니다. 사람들이 매장되지 않은 채 버려진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놀랍니다(16-17). 세상을 두려움에 빠뜨리며 호령하던 자가 너무도 처참한 죽음을 맞았기에 경악합니다. 민족들을 발아래 놓고 지배하던 폭군의 저주받은 죽음은 권력의 교만이 어떤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그리고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른 왕들은 영광 중에 자기 무덤에서 자지만, 세상을 두려움과 폭력으로 정복했던 폭군에게는 무덤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18-19). 칼에 찔려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전쟁의 와중에 발에 짓밟히는 것처럼 폭군의 시체도 이들 가운데서 함께 능욕을 당합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온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던 폭군이 일반 백성보다도 더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폭군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고 제 백성을 죽였기에 왕의 신분에 어울리는 장례가 허락되지 않습니다(20). 왕은 백성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교만하게 굴며 악행을 일삼는 자에게는 후손마저 남겨지지 않습니다.

 

(3) 바벨론의 멸망(21-23)

 

하나님께서 멸망이 선고된 폭군의 처형을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너희’에게 명령하십니다(21-23). 고대 세계는 반역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왕뿐 아니라 그의 자녀도 죽여 보좌를 잇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벨론의 이름이 땅에서 끊어지고 그 후손들이 멸절합니다. 그 화려함과 위용을 자랑하던 바벨론이 폐허가 되어 고슴도치가 차지하게 됩니다.

‘성읍들로 세상을 가득하게’는 정복자들의 교만을 보여주는, 오래된 관행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정복자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널리 과시하기 위해 점령지에 성읍들을 건설하고 자기 이름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폭군의 죽음으로 인해 고토로 돌아온 백성은 나그네 된 이들에게 쉼을 제공하고 정의의 통치를 베풀 것입니다. 온 세상이 안식과 평화를 얻어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가는 곳에 공평과 정의가 흐르고 해방과 자유와 평화가 짓들 수 있도록 힘써 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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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3-01)


세상 나라의 영광의 쇠락

이사야 13장 1-22절


 

세상에 영원한 나라는 없습니다. 신흥 강대국 바벨론도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군대를 불러 바벨론의 오만과 탐욕을 심판힛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세상 나라를 세우시고 폐하시는 주관자 하나님께서는 역사에서 어떻게 일하시겠습니까?

 

 

  • 13장부터 선포의 대상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민족들로 바뀝니다. 변방에 속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십니다.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굽과 같은 강대국은 역사의 종속변수이지 역사를 결정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아들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만 땅의 패권을 주장할 뿐입니다.

 

여호와의 날 선포(1-16)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만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어떤 나라나 민족이나 어떤 세력도 영원한 통치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반복과 순환만을 읽는 사람들이 있고, 역사 배후에 또 다른 역사인 전정한 역사가 있고, 그 역사의 주관자가 있음을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 2너희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3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자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들을 불러 나의 노여움을 전하게 하였느니라 4산에서 무리의 소리가 남이여 많은 백성의 소리 같으니 곧 열국 민족이 함께 모여 떠드는 소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심이로다 5무리가 먼 나라에서, 하늘 끝에서 왔음이여 곧 여호와와 그의 진노의 병기라 온 땅을 멸하려 함이로다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7그러므로 모든 손의 힘이 풀리고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 8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해산이 임박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은 불꽃 같으리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이지 아니할 것이로다 11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4그들이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같이 각기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각기 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15만나는 자마다 창에 찔리겠고 잡히는 자마다 칼에 엎드러지겠고 16그들의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목전에서 메어침을 당하겠고 그들의 집은 노략을 당하겠고 그들의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1-16)

 

하나님께서는 깃발을 세우고 용사들을 소집하라 명하십니다. 군대를 사열하신 후에는 공격 신호를 보내라 하십니다. 민족들의 운명과 역사를 친히 주관하십니다. 통치권을 맡긴 채 방관하는 분이 아닙니다.

 

(1) 전쟁을 위한 군대 소집(1-5)

 

여호와께서 2인칭 복수의 청자 ‘너희’에게 점점 가까워져 오는 군대의 모습과 관련한 세 개의 명령을 내리십니다(2). ‘너희’는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산 위에 깃발을 높이 세우고, 소환 명령을 받고 신속하게 달려오는 군대에 성벽에서 소리를 높여 외치고, 손을 흔들며 먼 곳에서 온 군대를 성안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존귀한 자의 문’은 점령한 성보다는 소집되는 군대의 집합 장소를 가리킵니다. 여호와께 명령을 받는 ‘너희’와 소집되는 군대 ‘그들’과 소집 장소인 ‘존귀한 자의 문’은 모호하게 남고, 여호와의 심판 선포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집행할 자들에게 세 개의 칭호가 붙여집니다(3).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자들’은 이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임을, ‘나의 용사들’은 전쟁을 위해 특별히 훈련된 젊은이들임을,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전쟁에 나가는 자들임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법과 질서를 무시한 자들에 대한 사법적 징계를 의미하기에, ‘나의 노여움’은 그분 심판의 공의로움을 함축합니다. 민족들이 여호와의 부름에 응해 산에 모입니다. 수많은 군대가 도착하여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산을 가득 메웁니다. 민족들이 다 모이자 여호와께서 전쟁에 나갈 군대를 사열하십니다(4). 그분께서 총사령관이 되셔서 직접 지휘하며 전쟁에 나서십니다. ‘열국 민족’은 산에 모인 군대가 다국적 다민족 군대임을 시사합니다. 고대 제국의 군대는 보통 용병들과 자국민에서 징집한 군대와 봉신국에서 지원받은 군대로 이뤄졌습니다. 민족들이 여호와의 징집 명령에 응하여 '먼 나라에서, 하늘 끝에서 올라옵니다(5; 5:26).

‘하늘 끝’은 의미상 ‘땅 끝’과 동의어이지만, 여호와의 전쟁을 지상과 천상이 다 참여하는 우주적 전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여호수아 5:13-14; 사사기 5:20). 땅 끝에서 소환한 군대는 여호와의 ‘진노의 병기’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분노를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집행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온 땅을 멸하려 하심’은 문자 그대로 온 땅의 멸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땅에 사는 민족들을 불러온 땅을 멸하시기에, 여호와께 적대적인 땅의 세력이 멸망의 대상이 됩니다. 17-22절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메대를 불러 바벨론을 멸망시키십니다.

 

(2) 여호와의 날 ‘애곡할지어다(6-8)

 

예언자는 임박한 심판을 내다보며 복수의 청자 ‘너희’에게 닥쳐오는 재앙을 슬퍼하며 탄식하라고 권면합니다(6). 파멸적인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에스겔 30:3; 요엘 2:1; 3:14; 스바냐 1:7,14). 이날은 전능자가 죄인들을 멸망시키시는 날로, 사람들의 손에서는 맥이 풀리고 마음은 녹아내립니다. ‘손의 힘이 풀리고’는 심판 선포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로, 심리적으로는 용기를 잃고 낙담한 모습이며, ‘마음이 녹아내리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절망에 빠진 상태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사람들은 해산하는 여인이 경련과 고통에 몸부림치듯이 두려움과 고통에 사로잡혀 망연자실하게 됩니다. 무서운 현실 앞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서로를 바라볼 뿐입니다. ‘얼굴이 불꽃 같으리로다’는 두려움으로 얼굴이 새하얗게 되거나 놀라운 일로 흥분해서 얼굴이 빨갛게 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여호와의 날 묘사(9-16)

 

이날은 여호와께서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 곧 땅에서 죄인들을 진멸하시는 날로(9), 하늘의 별들과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립니다(10). 창조질서가 혼돈으로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세상과 악인들에게 그들의 악과 죄에 따라 보복하십니다(11). 그분께서 이들의 오만과 거만에 종지부를 찍게 하십니다. 이들의 죄악과 교만의 내용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청중이 알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악인이 목숨을 잃고 인구는 현격히 줄어듭니다. 사람이 순금보다도 드물게 됩니다. 극히 일부가 살아남아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날은 여호와의 분노가 타오르는 날로, 그분 진노로 하늘과 땅이 흔들립니다(13).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창조의 질서가 뒤흔들리고 혼돈에 떨어집니다. 악인들의 심판이 모든 창조세계를 포함하는 우주적 사건임을 시사해줍니다.

14-16절은 제국의 왕도가 적들에 함락당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 진술 같습니다. 각 사람이 쫓기는 노루처럼, 모으는 이 없는 양 떼처럼 도망합니다. 대제국의 수도에는 포로가 되거나 강제로 징집당하거나 용병으로 고용되거나 여러 경제적 활동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성이 함락되자 모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제 백성, 제 땅으로 도망칩니다. 싸움에 패한 자들은 몸을 숨기거나 도망하지만, 점령군의 피에 굶주린 창과 칼을 피하지 못합니다. 만나는 자마다 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칼로 쳐서 죽입니다. 점령군은 최소한의 동정도 베풀지 않습니다. 용사들뿐 아니라 어린아이들과 여자들도 이들의 잔혹함을 피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내동댕이쳐 죽이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집을 뒤져 약탈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그분의 심판에 떨어진 자들의 운명은 전쟁에서 패하고 함락당한 주민들이 당했던 처참한 운명과도 같습니다.

 

메대를 통한 바벨론의 심판(17-22)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는 일체의 자비가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냉정한 분이라는 사실에 놀랄 따릅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위해 일어서는 날, 기존의 모든 질서가 재편될 것이며, 자연이 질서까지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고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고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추실 것입니다.

 

17보라 은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금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메대 사람을 내가 충동하여 그들을 치게 하리니 18메대 사람이 활로 청년을 쏘아 죽이며 태의 열매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아이를 애석하게 보지 아니하리라 19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20그 곳에 거주할 자가 없겠고 거처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에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 곳에 그들의 양 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21오직 들짐승들이 거기에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들의 가옥에 가득하며 타조가 거기에 깃들이며 들양이 거기에서 뛸 것이요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17-22)

 

앞 단락에서 모호하게 언급된 심판의 도구와 심판의 대상이 분명해집니다.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이던 바벨론,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렸던 그 나라도 무너질 것입니다. 그들이 모은 은으로도 메대를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1) 메대(17-18)

 

여호와께서 직접 메대 사람들을 일으켜 바벨론을 멸망시키십니다(17-18). ‘은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금을 기뻐하지 아니하는’은 금은보화로 메대 사람들의 침략을 중단시킬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은 멸망의 위험을 점령지에서 약탈한 수많은 금과 은으로 모면할 수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경제적 약탈은 군사 원정의 중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때로는 뇌물이나 선물을 주어 군사작전을 중단시키고 침략군을 되돌아가게도 했습니다. 메대 전사들의 잔혹함은 비교할 데가 없을 정도로 무자비합니다. 이들은 달아나는 젊은이들을 활로 쏘아 죽이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마저 죽이고, 아이들의 가엾은 시선에도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않고 칼로 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주저 없이 죽여 버리는 살인 기계들입니다. 메대 사람들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뤄질지를 보여줍니다.

 

(2) 바벨론의 멸망(19-22)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 바벨론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19; 47:1-15; 예레미야 50:1-51:64). 소돔과 고모라(창세기 19:24-28; 이사야 1:10; 예레미야 49:18;50:40; 아모스 4:11)는 하나님의 징계에 의한 영원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바벨론이 심판에 떨어지는 이유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소돔과의 비교는 이들의 죄악이 하나님 인내의 한계를 훨씬 넘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20-22절은 바벨론이 경험하게 될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메대에 멸망한 바벨론은 다시 회복되지 못하고 무지로 남습니다. 유목민인 아라비아 사람들도 폐허가 된 옛 바벨론에는 천막을 치지 않고, 목자들도 꼴을 먹이기 위해 양 떼를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목초지로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황폐해집니다. 수많은 사람이 살며 화려함과 거대함을 자랑하던 바벨론이 들짐승의 거처가 됩니다. ‘들짐승’은 사막에 사는 짐승을 말하며, ‘부르짖는 짐승’은 부엉이로, ‘들양’은 염소 귀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대 사람들에게는 폐허에 사는 짐승들과 귀신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폐허는 저주받은 곳으로 불결하고 위험스러운 존재들의 거처였습니다. 바벨론에 대한 경고는 예언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언급으로 끝납니다.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바벨론의 운명을 결정할 때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 시점은 아직 감춰져 있지만, 바벨론의 멸망은 확정된 하나님의 계획으로 그분께서 정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주께서 임하시는 날은 무자비한 날이요,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이요, 땅에서 죄인들을 멸절하시는 날입니다. 해와 달의 빛이 소용없을 만큼 어둡고 참혹한 날입니다. 장차 하늘로부터 나타날 진노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의의 길을 걷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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