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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1-01)


파수꾼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21장 1-17절


 

영원한 제국은 없습니다. 역사 속 제국들은 부와 힘이 강자(권력자)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차용해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들이 만든 그 ‘불변의 헤게모니’가 결국 제국이 몰락한 이유라고 일갈합니다.

 

  • 21장은 해변 광야(바벨론)의 두마와 아라비아의 드단과 게달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들 민족들이 심판에 떨어지는 이유는 달리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경우만 2절과 9절의 폭력과 우상숭배에 관한 언급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집니다. 또 엘람과 메대의 공격으로 멸망당하는 바벨론을 제외하면 두마와 드단과 게달을 위협하는 적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1-10)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 세상 나라는 아무리 강대할지라도 결국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강대한 바벨론 제국도 순식간에 멸망시키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불러일으킵니다.

 

1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네겝 회오리바람같이 몰려왔도다 2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3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해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나를 엄습하였으므로 내가 괴로워서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4내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나를 놀라게 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5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너희 고관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6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것을 보고하게 하되 7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낙타 떼를 보거든 귀 기울여 자세히 들으라 하셨더니 8파수꾼이 사자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서 있었고 밤이 새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9보소서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시되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10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1-10)

 

본문에서는 바벨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던 ‘해변 광야’ 곧 바벨론도 자신에게 급작스럽게 닥칠 재앙을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사야는 바벨론의 참혹한 멸망에 관한 묵시를 보고 심히 괴로워합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들을 속이고 약탈을 일삼음으로 부와 권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약탈을 당하고 다른 나라들에 행한 그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1) 묵시와 그에 대한 반응(1-4)

 

해변 광야에 있던 네겁을 휩쓸고 지나가는 뜨거운 회오리바람처럼 재앙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몰려옵니다(1). 사납고 무서운 적이 ‘해변 광야’(바벨론)로 질풍처럼 들이닥칩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본 묵시를 ‘혹독한 묵시’로 소개합니다(2).

묵시의 내용과 관련된 표현으로,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무섭게 심판하실 것을 시사해줍니다. 심판의 도구로는 엘람과 메대가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엘람과 메대에게 올라가서 바벨론을 포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들은 한때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던 민족들이었습니다. 속이고 약탈하였던 바벨론이 이제속임을 당하고 약탈을 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엘람과 메대를 보내 ‘모든 탄식’을 그치게 하십니다. 누가 탄식하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지만, 10절에 따르면 바벨론에 짓밟힌 이스라엘이 됩니다.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혹독한 묵시에 이사야가 격렬하게 반응합니다(3-4). 모압의 경우처럼(15:5; 16:9, 11) 바벨론의 멸망에 연민을 느꼈기 때문은 아닙니다. 엄중한 묵시가 초래한 심리적 충격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반응으로, 바벨론의 심판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시사해주기도 합니다. 그의 고통은 해산하는 여자의 진통과도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묵시의 충격에 그의 몸은 떨리며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집니다. 잠을 자며 안식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밤이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욥 7:13-14).

 

(2) 갑작스러운 적의 침략(5)

 

5절부터 이사야의 시선이 바벨론의 지배 계층을 향합니다. 고관들이 상을 차리고 자리를 펴고 먹고 마시며 즐기다가 갑자기 적의 공격을 받고 당황해 건투에 임합니다.

태평성대를 즐기던 바벨론에 멸망이 갑자기 찾아옵니다. 연회의 즐거움과 안일함에 빠져 살던 고관들은 뒤늦게 성을 방어하려고 전투에 임합니다.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행위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나무와 가죽으로 방패를 만들었고 때로는 장식이나 보강을 위해 금속을 덧대기도 했습니다. 화살이나 창에 방패가 망가지지 않도록 전투에 임하기 직전 무기고에 있던 방패를 꺼내 기름을 발랐던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의적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신에 대한 의무를 지고 거룩한 전쟁에 나서는 봉헌 행위를 함축합니다.

 

(3) 파수꾼의 보고(6-9)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파수꾼을 세우고 그에게 소상한 지침을 주어 전투 전개 상황을 보고하게 하십니다(6-7). 예언자가 세우는 파수꾼은 실질적으로는 예언자 자신일 수 있습니다. 하박국(2:1)과 에스겔(3:16-21)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파수꾼으로 불리기도 한다. 망루에 세워진 파수꾼은 원래 적의 침략과 같은 위험한 상황을 경고하여 재난에 대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본문의 파수꾼은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채 메대와 엘람의 침략군과 바벨론의 방어군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관찰해 보고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파수꾼에게 준 지침은 침략군의 병력 이동에 관한 세심한 관찰입니다. 밤낮 쉬지 않고 망루에 서서성 밖을 감시하던 파수꾼이 다급하게 전황을 보고합니다(8-9). 이 다급함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침략군의 병거 부대와 기마 부대가 진격해오자마자 성이 함락됩니다. 위용을 자랑하던 성이 적의 공격에 한순간 점령되고, 거대하고 화려한 바벨론의 신상들도 부서져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바벨론 함락과 함께 신들도 종말을 맞습니다. 신상 파괴는 바벨론의 신들이 헛 것임을 보여줍니다.

 

(4) 여호와께 들은 것(10)

 

10절의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의 원문은 직역하면 ‘나의 짓밟힌/타작된 것아, 나의 타작마당의 아들아’입니다. 1인칭 ‘나’가 하나님이라면 상대는 바벨론 또는 이스라엘이 될 수 있고, 이때는 이사야의 1인칭으로 기술된 하반절에서 독립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10절은 하나의 문장으로 상반절의 ‘나’도 이사야입니다. 이 경우 10절은 이사야가 바벨론에 짓밟히고 억압당하는 자기 백성에게 주는 말씀이 됩니다. 그는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신탁을 통해 제국주의적 세력에 짓밟힌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멸망을 확정하셨기에 짓밟힌 이스라엘은 인내를 갖고 기다리면 됩니다(14:1-2). 짓밟음/타작은 대개 심판을 의미하지만, ‘타작마당의 아들’은 타작의 수확물을 가리킬 수도 있기에 심판 이후 회복이 담긴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두마에 관한 경고(11-12)

성도들은 때를 잘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항상 깨어 근신하여 흠 없는 모습으로 심판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채지를 해야 합니다. 두마처럼 정적과 침묵의 상태에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세상 끝 날은 반드시 도래할 것입니다.

 

11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12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하더라(11-12)

 

파수꾼 예언자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합니다. ‘세일에서’ 누군가가 파수꾼에게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하고 거듭 외칩니다. ‘밤이 얼마나 남았느냐?’는 재앙의 기간이 언제 끝날지를 묻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묻는 자의 신분은 감춰져 있는데, 아라비아에서 피난 온 자나 그 지역의 긴박한 정세를 관찰하도록 임무를 맡은 자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라비아 사막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또는 군사적 사건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를 파수꾼 예언자에게 다급하게 묻습니다. 완료시제가 사용된 파수꾼의 답변은 거의 오리무중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현재의 밤(재앙)은 하룻밤에 끝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밤이 언제 끝날지를 알고 싶으면 나중에 다시 물어야 합니다. 두마의 재앙은 당분간 지속될 것입니다. 아침과 밤의 비유는 재앙의 기간이 제한적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너희는 돌아올지니라’는 파수꾼과 세일에서 외치는 자가 물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졌음을 보여주고, 앞으로의 새로운 질문에는 어떤 결단이 수반돼야 함을 시사합니다.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13-17)

잠시 찾아온 아침은 희망이 아닌 더 큰 절망만 안겨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한, 인생의 밤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짧은 인생동안 행하는 일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같이 드단의 대상들처럼 갑작스럽게 심판을 맞지 아니라고 그 심판의 날에 영광과 복을 얻는 참 비결이 될 것입니다.

 

13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드단 대상들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하리라 14데마 땅의 주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15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음이니라 16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17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17)

 

에돕에 대한 예언에이어서 이방 국가 10개국 중 아홉 번째인 아라비아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아라비아에 대한 예언에 있어서도 앞 단락의 에돔에 대한 예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멸망이 시기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1) 드단에 관한 말씀(13-14)

 

드단은 메디나와 데마를 잇는 ‘유향의 길’에 있는 오아시스로, 방어하기 좋게 붉은 사암으로 된 바위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드단의 대상들은 광야의 덤불(‘아라비아의 수풀’) 속에서 밤을 지내야 합니다.

대상들이 전쟁과 같은 위험한 환경을 피하여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상품과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편안한 통상로를 벗어나 험난한 길로 조심스럽게 움직입니다. 통상로를 벗어나면 약탈과 피습의 위험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부족한 물과 양식을 보충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칼과 화살 대신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의 부족이 이들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예언자는 굶주림과 목마름의 위험에 노출된 드단 대상들에게 물과 양식을 공급해주라고 ‘데마 땅의 주민들’에게 권면합니다. 데마는 직선거리로 드단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1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오아시스로, 풍부한 지하수에서 솟아나오는 분수로 유명했습니다. 드단의 대상들이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전란을 피하여 도망하는 피난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15:5-8; 16:1-5).

 

(2) 게달에 관한 말씀(16-17)

 

시리아-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유목민 게달족에게 멸망이 선포됩니다.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하여 궁수들이 얼마 남지 않을 것입니다. 궁수가 게달 족의 핵심 전투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 기습할 때 활은 매우 효과적인 무기였습니다.

본문은 게달족의 극적 쇠퇴에 관심을 집중하고 심판의 방법과 원인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두마와 드단에 관한 신탁과 달리 게달의 멸망을 선포하는 신탁은 서두의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와 결미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를 통해 이 신탁이 여호와에 의해 주어졌음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게달과 이스라엘 사이의 대립적 관계를 암시해줍니다. 시편 120:5-6에 의하면 게달은 메섹과 더불어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제국이 공들여 만든 신화에 속지 말고 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더 신뢰할 세력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영광보다 하나님 없는 오늘의 영광에 기대어 살고 있는 건 아닙니까? 그러고도 아침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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