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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0-01)


애굽과 구스의 수치에 대한 예언

이사야 20장 1-6절


 

‘말’만으로는 충분히 전할 수 없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모피 반대 등 동물 보호를 위해 길거리에서 ‘알몸 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뉴스에서 본 적 있을 것입니다. 그런 ‘낯선 방식’은 듣는 이들을 멈추게 하고 귀 기울이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 배후에서 반아수르 봉기를 부추긴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패하고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겉보기와 달리 애굽과 구스는 앗수르의 공격에서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허약한 존재입니다. 유다는 여호와께서 애굽과 구스의 패배와 앗수르의 승리를 결정하셨음을 알고 그분의 의지에 반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피해야 합니다.

 

시대적 배경(1)

현 시대를 일컬어 황금만능의 시대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자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심저이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할 것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재물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겠습니까?

 

1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1)

 

본문의 시대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6:1;14:28). 땅 위에서 민족들이 주도권을 놓고 싸우지만, 이를 결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시온 산에 계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물론 민족들의 역사에도 개입하십니다.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대해 남유다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 사르곤(주전 722-705년)이 파견한 다르단(군사령관)이 아스돗을 쳐서 점령하던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주어집니다. 블레셋의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인 아스돗은 히스기야 시대에 주도적인 반앗수르 세력이었습니다.

20장은 주전 714/713-711년의 팔레스티나를 배경으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주전 714년 또는 713년 애굽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티나에서 앗수르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발생했습니다. 봉기의 거점은 아스돗이었습니다. 아스돗의 통치자 아주리(Azuri)가 앗수르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블레셋과 유다와 에돔과 모압과 키프로스(?)를 끌어들여 반앗수르 연합을 시도했습니다.

반역의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주전 716년 애굽 국경 가까이에 있는 라피아(Raphia) 주변에 만들어진 앗수르의 식민지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이 통제됐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앗수르는 처음에는 아주리를 그의 형제 아히미티(Ahimiti)로 교체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아스돗의 지배 계층이 이를 수용하지 않고 야마니(Jamani)를 통치자로 세웠습니다. 야마니는 아주리의 반앗수르 노선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주전 712/711년 사르곤은 앗수르 군대를 팔레스티나 남부로 보내 아스돗을 점령하게 했습니다. 블레셋의 지배 계층을 유배시키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이주시켜 앗수르의 지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야마니는 애굽으로 도피했지만, 앗수르와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던 구스(애굽) 왕 사바카는 야마니를 앗수르에 넘겨줬습니다. 아스동의 봉기에 가담했던 유다의 히스기야는 너무 늦지 않게 발을 빼고 앗수르의 지배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아스돗의 봉기에 가담해 정치적 모험의 길로 나아가려 했을 때, 아스돗을 배후에서 부추긴 구스와 애굽이 앗수르에 패하고 백성이 포로로 사로잡혀갈 것을 선포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반앗수르 연합에 가담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유다는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승리와 애굽과 구스의 패배를 결정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치를 당할 애굽과 구스에 의지한다면 유다도 수치를 피할 수 없습니다.

 

표적행위(2-5)

사람이 세상 권력을 통해 안전과 평안을 보장받으려 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기대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있는 권력을 소유하려는 욕망의 이면에는 자신이 스스로 서서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내제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려는 남 유다에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멸망을 보여주십니다.

 

2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4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5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2-5)

 

하나님께서는 당시 강대국인 애굽과 구스에게도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이사야에게 3년 동안 옷과 신을 벗고 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 포로에게 수치심을 주고자 옷과 신을 벗게 하십니다. 이러한 행동은 애굽과 구스가 엇수르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징조와 예표가 되었습니다.

 

(1) 표적행위의 명령(2a)

 

그 때에, 곧 앗수르 군대가 아스돗으로 원정을 떠나기 전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매우 파격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2).

 

(2) 표적행위의 실행(2b)

 

예언자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스캔들에 노출시켜 메시지로 만드십니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허리에 두르는 베(자루옷)는 원래 슬픔이나 재앙을 당해 탄식할 때 입는 옷인데, 여기서는 예언자의 평상복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평상시에 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신을 벗고 맨발이 되는 것은 원래 애도 행위에 속했는데(삼하 15:30; 겔 24:17), 여기서는 맨몸이 됐음을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예루살렘을 다녔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담긴 의미는 3-5절에서 주어집니다. 벌거벗고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는 예언자의 모습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충격적입니다. 이사야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라는 명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행했는지는 알 수 없슨비다. 완전히 알몸으로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다수는 웃옷은 벗고 하의만 입고 맨발로 다녔으리라 추측합니다. ‘벗은 몸’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롬’은 불충분한 옷차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욥 22:6; 24:7; 사 58:7; 암 2:16), 고대 세계에서 알몸과 맨발은 전쟁 포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3) 표적행위의 해석(3-5)

 

여호와께서 파격적인 표적행위의 의미를 해석해 주십니다.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닌 것이 애굽과 구스에 대한 징조와 예표가 됩니다(3).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이사야는 사로잡혀 앗수르로 끌려가는 애굽과 구스 사람들의 상징적 모습입니다.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패하고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엉덩이까지 드러낸 채 알몸과 맨발로 끌려갈 것입니다(4).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며 고대 근동의 패권을 주장하였던 애굽이 앗수르에 의해 그 치부를 드러내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예언자를 ‘내 종’으로 부르는 경우는 예외적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여호와와 이사야에게 적용됩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이사야도 주인이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해서 맨몸과 맨발로 예루살렘 거리를 다녔습니다. ‘애굽과 구스’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구스왕 사바카는 주전 715년 애굽 전역을 장악하고 애굽 25왕조(주전 715-664년)를 창건했습니다.

이사야는 상징행위를 통해 애굽과 구스에 닥칠 파국적 운명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극적이고도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3년 동안 옷을 벗고 지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신탁의 의도를 벗어난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적게는 열네 달을 의미할 수 있는 삼 년은 상징적인 수보다는(16:14; 37:30) 아스돗이 앗수르에 봉기하였다가 멸망하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아스돗이 앗수르 군대에의해 함락당할 때까지 이사야는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봉기의 배후 세력인 애굽과 구스의 무능력을 고발하고, 이들에게 의지하려는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경고를 발하였습니다. 그의 벌거벗은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기에 아무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왕궁에서 통치자들이 은밀하게 논하던 앗수르 문제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의 도발적 행동이 왕궁의 정치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애굽과 구스가 지원하는 반앗수르 연합에 가담하였던 히스기야는 앗수르 군대가 원정을 떠나기 전후에 발을 빼고 앗수르에 굴복했습니다.

애굽과 구스의 수치가 유다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이 앗수르에 패하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은 놀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5). 애굽과 구스의 수치스러운 운명은 이들에게서 보호자를 찾던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좌절감과 낭패감을 안겨줍니다. 애굽과 구스의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자신들의 계획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전통적으로 애굽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애굽에 의존하여 메소포타미아에서 오는 위협을 피하려 했습니다. 북왕국은 애굽의 도움을 믿고 앗수르에 반역했다가 주전722년 멸망을 당했고, 유다의 히스기야도 주전 705701년 애굽의 지원을 기대하고 앗수르에 반역했다가 거의 멸망 직전에까지 내몰렸습니다.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할 때도 애굽은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시드기야 시대에 친애굽파가 왕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가 파국을 맞았습니다.

 

해변 주민의 깨달음(6)

하나님께서는 세계 모든 열방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나 강대국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만물과 만국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통치하실 계획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세상에게 고지(告知)하십니다. 세상의 영웅호걸도 죽고 살아져 갑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역사를 주관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6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6)

 

‘그 날에’로 시작하는 6절은 아스돗의 멸망을 넘어이들이 의지했던 애굽과 구스의 멸망을 내다봅니다. 이사야는 아스돗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을 인용해 거듭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이 오판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해변 주민’은 아스돗을 포함한 블레셋 주민들을 가리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애굽과 구스가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고 탄식합니다. 도움을 구했던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게 패했다면 아스돗의 운명은 멸망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앗수르가 아스돗을 침략했을 때 애굽이 군사적으로 도와주려 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앗수르 왕 사르곤은 아스돗을 점령한 후 앗수르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나라는 의지의 대상이 아닌 패망의 대상입니다. 유다는 어리석게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나라, 믿을 수 없는 나라, 의지해서는 안 되는 나라를 피난처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심판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세상에 대한 기대도 깨고, 남은 환상도 미련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역사를 주관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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