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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8-01)


조용히 감찰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18장 1-7절


 

심판이 임하기 전에는 자신을 돌아보기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리석게도 우리는 작정된 심판을 다 거치고 나서야 하나님을 찾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무지가 아니라 우리의 회개를 위한 인내였고 인자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 여호와께서 유다의 노릇하는 구스(에티오피아)을 심판하기로 하셨기에 구스와 연합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처신이 됩니다. 유다가 멸망이 결정된 구스에 의지해서 앗수르에 맞선다면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유다는 앗수르와 구스의 운명을 결정하신 여호와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기다리면 됩니다.

 

구스에 대한 화의 선포(1-2)

고난의 순간에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도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합니다. 오늘 당신을 향해 다정히 손 내미는 구스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지우려는 매력적인 제안은 무엇입니까? 어서 돌려보내야 합니다. 미련을 갖지 말고 어서 쫓아버려야 합니다.

 

1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2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1-2)

 

본문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가운데서 바벨론(13:1-14:23), 앗수르(14:24-27), 블레셋(14:28-32), 모압(15:1-16:14), 아람과 북 이스라엘(17:1-14)에 이어 여섯 번째로 구스를 지목합니다. 구스를 자연 환경과 관련된 특징적인 표현으로 소개합니다.

 

(1) 구스에 대한 소개(1-2a)

 

민족들의 신탁에서 선포 대상은 일반적으로 이름만 소개되는데, 구스의 경유에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종적 특색이 특별히 언급됩니다. 당시 애굽 아래 있던 구스는 남쪽의 끝에 해당했습니다. 지금의 에티오피아에 속합니다.

‘구스의 강(들)’은 아트바라(atbara) 강과 청나일과 백나일을 가르키는 것 같습니다. 수단의 습지를 지나 그 수도인 하르툼까지를 백나일이라 부르고, 이 백나일은 에티오피아에서 흘러나오는 청나일과 하르툼에서 합류하여 나일강이 되어 흐르다가 중도에 에티오피아에서 흘러나오는 또 하나의 지류인 아트바라와 합류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구스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가 됩니다.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은 구스에 벌레들이 서식하기에 적합한 습지가 많아 생긴 표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애굽을 점령하고 주변 나라들을 두려움에 빠뜨린 구스에 대한 평가절하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대단하게 보이지만, 유다가 의지하려는 구스는 벌레가 우글거리는 나라일 뿐입니다.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도 1차적으로는 나일강을 분주하게 오가는 배들의 모습을 반영한 표현이지만, 이사야의 비관적 음성을 듣는 것도 가능합니다. 유다는 자기 유익을 위해 이웃 나라로 사절들을 열심히 파견하는 나라가 구스임을 알아야 합니다.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키가 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백성’)은 구스 사람의 외모를 특징짓는 표현입니다. 구스 사람들의 늘씬하고 훤칠한 몸때와 (기름을 발라)윤기 나는 검은 피부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구스인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어디에서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민족, (모든 것을) 내리 짓밟아버리는 백성’)은 이사야 시대 구스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2) 사신들에게 주는 명령(2b)

 

2절 후반은 이사야가 예루살렘에 온 구스의 ‘민첩한 사절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이들에게 갈대 배를 타고 민첩하게(빨리) 왔던 것처럼 민첩하게(빨리) 자기네 나라로 갈 것을 명합니다.

구스의 사절들이 어떤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왔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수가 추측하듯이 주전 705-701년 사이에 선포된 말씀이라면, 반앗수르 연합을 협의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들이 됩니다. 이사야 37:8-9에 의하면 앗수르 군대가 립나를 치고 있을 때 구스 왕 디르하가가 유다를 돕기 위해 출정합니다. 또 앗수르의 자료에 의하면 아스돗에서 북동쪽으로 16km 떨어진 엘드게에서 앗수르 군대가 애굽 군대와 싸워 승리합니다. 애굽이 앗수르에 맞서 원정군을 파견했음은 히스기야가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을 때 애굽의 지원 약속이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방 나라의 사절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사야가 말씀을 전하는 경우는 두 번 더 나옵니다. 14:28-32에서 블레셋의 사절들이 히스기야를 찾아왔을 때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32)고 전하게 합니다. 시온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위협에서 시온을 구해주시지, 동맹정치가 시온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39:1-8에서 이사야는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이 파견한 사절들과 반앗수르 연합을 모의한 히스기야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일관하여 여호와께 묻지 않는 동맹정치를 배교 행위로 고발했습니다. 구스가 사절들을 파견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협상을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온 구스의 사신들에게 그냥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은 반앗수르 동맹을 구축하려는 구스의 제안을 거절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은 시온 산의 여호와께서 결정하시기에 유다는 그들과의 동맹을 우선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역사 경륜(3-6)

하나님의 침묵은 방임이 아닌 무능에서 나온 외면도 아닙니다. 가장 강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만 하실 수 있는 기다림이고, 회개를 위한 기회입니다. 기고만장한 구스의 번성과 강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해고 있었습니다. 구스의 멸망이 분명하다면 그를 의지할 유다의 미래도 얼마든지 내다 볼 수 있습니다.

 

3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사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 4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5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 6산의 독수리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던져 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여름을 지내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겨울을 지내리라 하셨음이라(3-6)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직접적으로 선언하십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결정적인 순간에 앗수르를 멸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스와 사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1) 증인으로 부름 받는 세상 거민들(3)

 

구스의 사절들에게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한 이사야가 세상 모든 주민을 향해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보고 나팔을 불거든 들으라고 말합니다(3). 그는 구스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을 땅에 사는 자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공개합니다. 땅의 모든 사람이 여호와께서 구스에 행하실 일의 증인이 됩니다. 은밀하게 협상을 추진하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들과 구스의 사절들(29:15; 30:1)과 달리 여호와께서는 당신 계획을 미리 알려주시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산에 기치를 세우고 나팔을 부는 행위는 자주 임박한 전쟁을 위해 군대를 소집하는 표상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공적 선포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멀리서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기치를 세우고 나팔을 불어 세상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당신께서 하실 일을 이들에게 알려주십니다.

 

(2) 때를 기다리시는 하나님(4-5)

 

하나님의 침묵은 방임이나 무관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늘에 있는 당신 처소에서 모든 것을 조용히 바라보시고 개입할 때를 기다리십니다(4). 유다와 구스가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서 협상을 벌이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조용히 바라보며 때를 기다리시는 그분의 활동을 자연현상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더위 (열기)는 볼 수 없지만, 햇볕에 뜨거워진 공기의 반짝거림은 볼 수 있습니다. 저녁에 지중해에서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점차 빠르게 올라오는 운무는 다음 날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도 여전히 산 위에 머물러 있지만,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분의 역사 개입이 그러합니다. 때가 무르익으면 그분께서 계획을 실행에 옮기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포도 농사의 과정을 활용해 구스의 심판을 기술합니다(5). 포도원 농부가 아무 때나 전지용 칼로 가지와 덩굴을 잘라내지 않습니다. 꽃이 지고 포도가 여물어갈 때 열매가 잘 자라도록 전지합니다. 곡식을 수화하는 오월쯤에 꽃이 진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포도원 농부는 전지가위(낫)로 열매를 맺지 못한 싹과 잎사귀와 가지를 잘라내서 건실하게 여문 포도가 잘 자랄 수 있게 해줍니다. 여호와께서도 기다리시다가 때가 무르익어 남길 것과 잘라버릴 것이 분명해졌을 때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때가 되면 대적을 쳐서 그 가운데 일부를 잘라내실 것입니다.

 

(3) 맹수의 먹이가 되는 잘린 가지(6)

 

잘린 싹과 가지는 산에 사는 맹금들과 들의 맹수들에게 넘겨집니다(6). 때가 무르익으면 여호와께서 구스를 심판하여 사나운 적의 먹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유다와 주변 나라들을 끌어들여 반앗수르 연합을 획책하는 구스의 운명은 앗수르의 먹이로 정해졌습니다. 이 비유는 멸망이 결정된 구스와 손잡고 앗수르에 대항하려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심판이 결정된 구스와 연합한다면 유다도 구스와 함께 파멸적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반절은 심판의 철저성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잘린 가지에 생명력이 남아 있을지라도 맹금들과 맹수들이 그것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것이기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을 받는 구스에게는 미래가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구스(7)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자녀들에게 큰 그림을 보여주십니다. 구약 당시에는 허황된 꿈이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회개하고 돌아와 이스라엘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입니다. 복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스까지도 하나님께 돌아와 에물을 드릴 것입니다.

 

7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7)

 

이사야는 민족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세상 저 남쪽 끝에 있는 구스가 만군의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먼 미래를 내다봅니다(사 45:14; 습 3:10; 시 87:4).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사절들을 시온으로 파견한 구스가 언젠가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기 위해 시온을 찾을 것입니다. 심판을 통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시온 산에 계신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운명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 관대한 것과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용납하지 않지만 죄인에 대한 희망은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 복음이 우리를 예배로 이끕니다. 헛된 욕망을 거절하고, 거룩한 예배로 나아가게 합니다. 세상의 부러움이 아닌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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