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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7-01)


아람과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이사야 17장 1-14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에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영광도 쇠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도 믿음으로 남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남는 자는 누구입니까?

 

  • 여호와의 의지에 거슬러 행동하는 아람의 다메섹과 북왕국 이스라엘에 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다메섹은 완전히 멸망하여 양 떼가 눕는 곳이 되고, 이스라엘은 멸망은 면하지만, 극히 적은 수만 남게 됩니다. 땅의 역사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홀로 결정하십니다. 그분 결정에 반하는 세력은, 이스라엘이건 이방 민족이건,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심판(1-6)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간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에 그들을 남겨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십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수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은 인생을 지키는 것이요,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1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2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3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5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6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반앗수르 동맹을 추진하며 생존을 도모하지만,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께 나온 계획이 아니기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군사의 많음과 정치적 능력에 의존하는 민족은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1) 폐허가 되는 다메섹(1-3)

 

‘다메섹에 관한 경고’는 18장까지 포함하는 머리글입니다. 신탁에는 이스라엘도 포함되지만, 다메섹만 언급합니다. 당시 시리아와 가나안의 작은 나라들이 반앗수르 연합을 결성할 때 다메섹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를 반영한 것 같습니다. 시리아 중북부 지방의 가장 큰 도성 다메섹이 허물어져 돌무더기가 되고, 아로엘의 성읍들은 버려져 짐승의 차지가 됩니다(1-2). 도성과 성읍들이 폐허가 되고 주민들이 모두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살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파괴됐기에 목자들이 다메섹과 주변 성읍에서 양 떼를 쳐도 쫓겨나지 않습니다. 아로엘은 아마 다메섹 근처의 성읍 이름인 듯합니다. 다메섹은 물론 함께 유다를 위협했던 에브라임도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에브라임에서 요새가, 다메섹에서 왕국이 없어지고, 아람의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영화와 같은 형편이 됩니다(3). ‘에브라임의 요새'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도 사마리아를 가리킵니다. 다메섹과 에브라임이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다메섹의 왕조가 몰락하고 에브라임의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당합니다. 아람의 남은 자들이나 이스라엘 자손이나 모두 옛 영화를 잃어버리고 지극히 초라한 존재가 됩니다.

 

(2) 사라지는 여곱의 영광(4-6)

 

4절부터는 시선이 다메섹에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떨어진 북왕국의 처참한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한때 유다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72) 야곱의 영광이 보잘것없어집니다. 살진 사람이 갑자기 병들어 몸이 파리해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몸에서 기름기가 다 빠집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병자처럼 이스라엘은 국력이 소진되어 볼품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733년 앗수르에 대략 영토 3분의 2를 빼앗기고 에브라임 산지와 사마리아만 남겨진 채 겨우 목숨만 부지하게 됩니다. 두 단계로 진행되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파국적 몰락을 기술합니다. 추수꾼이 먼저 낫으로 베어 곡식을 거둬들이고, 뒤이어 이삭을 줍는 자들이 남겨진 것들을 모아들이기에 들판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곡식으로 가득 찼던 넓은 들판이 추수와 이삭줍기가 끝나고 빈 들이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몰락이 그러합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 근교에 자리한 비교적 넓은 들판을 가리킵니다(수 15:8; 18:16; 삼하 5:18,22; 23:13). 이스라엘은 주전 733년의 추수와 주전 722년의 이삭줍기로 완전히 멸망합니다. 감람나무의 추수 비유도 동일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감람나무 열매를 수확할 때 손이 닿지 않거나 잘 안 보여서 가지 끝이나 꼭대기에 몇 알 남겨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운명도 그러합니다(6). 주민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 살아남아 소망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상숭배에서 떠나는 날(7-8)

인생의 벼랑 끝자락은 끝이 아니라 이전의 나약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끊을 수 없는 지점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고비에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유혹이 순간에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역경의 순간에 믿음의 도약할 때, 역경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7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8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7-8)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이사야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소망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여호와의 최종 답변은 아닙니다. ‘그 날에’ 사람들이 자기를 지으신 분을 바라보고, 자기 손의 작품인 제단을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눈을 들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쳐다보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아세라와 분향단을 쳐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보다’(샤아)와 ‘보다’(라아)는 “(성전 제의에 참여해) 예배드리다”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에서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옵니다. ‘사람(아담)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는 회개가 이스라엘에 한정하지 않고 아람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민족 가운데서 폭넓게 이뤄질 것을 시사해줍니다. 우상숭배의 종착역이 멸망임을 뒤늦게 깨달은 자들이 눈을 우상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로 돌립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우상이 헛것임을 볼 수 있게 눈을 열어줍니다. 심판을 통해 사람들은 산당의 풍요제의가 우상숭배였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네 손으로 만들어 세운 제단과 아세라와 분향제단은 모두 산당의 풍요제의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아세라는 풍요제의를 주관하는 여신 이름이 기도하지만, 여기서는 지방의 산당에 마련된 푸른 나무나 세워진 나무 기둥을 가리킵니다. ‘태양상’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함만’의 정확한 의미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요즘은 주로 ‘분향 제단’으로 번역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9-11)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심판의 때에 살게 하는 유일한 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의지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9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10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11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9-11)

 

구원이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긴 결과로 심판을 받지만, 소득이 없지만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다메섹은 멸망을 통해 제 손으로 만든 우상이 헛것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단락은 8절에 잠깐 언급한 멸망의 원인을 보충해줍니다. 이스라엘이 그처럼 완전한 멸망에 넘겨지는(4-6)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 고발(9-10a)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풍요제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가나안 원주민들의 운명과 비교하여 배교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백성의 특권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견고한 성읍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처럼 황폐해집니다(9).

가나안 원주민들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 당했던 것처럼 이들을 대신하여 가나안에 살게 된 이스라엘도 같은 전철을 밟다가 멸망합니다. 여호와를 떠나 이방 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다를 바가 없고, 더 이상 그분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국력이 약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피난처이신 반석)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0a). 이스라엘은 구원의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지 않고, 반석이신 하나님에게서 피난처를 찾지 않습니다. 이들은 도와줄 능력이 있고. 도와주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헛것인 우상에 의존합니다.

 

(2) 풍요의 상실(10b-11)

 

10b-11절은 아마도 지중해 연안에서 인기가 있었던 ‘아도니스 신의 정원’과 관련한 풍습을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접시와 같은 것에 빨리 자라 빨리 시들어 죽는 식물을 심어 아도니스 신에게 봉헌하였는데, 이스라엘도 생명과 풍요를 기대하며 이런 제의 풍습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방에서 들여온 식물과 나뭇가지(새순)를 심으며 풍요를 갈망합니다. 심은 날로 자라게 하고 씨앗을 뿌린 그 아침으로 싹이 트게 하여 신속한 결실을 기대합니다. 풍요에 눈먼 자들에게 풍요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소망하는 결실이 주어진다면 이교적인 것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 달리 풍성한 농작물 대신 ‘근심과 심한 슬픔’이 수확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이교적 풍요제의가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풍요의 박탈과 정치적 멸망뿐입니다.

 

침략자들의 멸망(12-14)

하나님의 음성에 천지가 진동하고 거대한 혼란이 잠잠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열방의 세력은 바람에 나는 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그 어떠한 파도도 잠잠케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공포와 재난에 갇혀 고통스러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십니다.

 

12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이 몰려옴 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 13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이 몰려옴과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 14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들의 몫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들의 보응이니라(12-14)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온 세상을 뒤흔들 것입니다. 마치 쓰나미가 땅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초토화시키듯, 하나님의 심판으로 많은 민족이 소동하고 열방이 충돌할 것입니다. 세상을 뒤흔드는 강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꾸짖으심으로 멀리 도망하고 폭풍 가운데 티끌처럼 흩어질 것입니다.

 

(1) 공격하는 민족들(12)

 

이사야는 민족들의 침략을 바다의 파도에 비유해 묘사합니다. 바다가 노호하듯, 거대한 물이 포효하듯 많은 민족이 함성을 지릅니다. 침략군의 압도적인 세력과 위용에만 관심을 집중합니다.

 

(2) 민족들을 꾸짖으시는 하나님(13-14)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는 거대한 침략군을 여호와께서 직접 상대하십니다. 그분께서 꾸짖으시자 적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납니다. 도망하는 침략군이 바람에 날리는 겨에 비유됩니다. 여호와의 개입으로 전세가 갑작스럽게 역전됩니다. 두려움 가운데 밤을 보냈는데, 아침이 되기 전에 침략군이 사라지고 없어집니다(29:7; 37:36). 14절의 ‘우리’는 민족들이 침략하는 상대가 예루살렘임을 시사합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자들은 갑작스러운 패배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보응’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고랄’은 원래 ‘주사위’를 뜻합니다. 민족들의 패배가 주사위를 던져 확정된 이들의 운명임을 암시해줍니다. 이 단락의 역사적 배경은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 공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군대가 일어나고 환난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번에 멈추게 하십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와 때를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와 때를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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