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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4-02)


완전하신 하나님, 공의의 경영자

이사야 14장 24-32절


 

하나님께서는 잠언을 통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아무리 야무진 힘과 포구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아니하면 무산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본문은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경영은 아무도 폐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앗수르를 파괴하실 때에 이스라엘이 그의 멍에와 짐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블레셋에 경고가 임합니다. 즉, 하나님이 블레셋의 뿌리와 남은 자까지 다 소멸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짓밟힐 앗수르(24-27)

온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를 향한 뜻을 세밀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에 순복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가장 선하심을 믿고 따르는 삶이 바른 신앙입니다.

 

24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25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그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26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27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24-27)

 

이사야서를 통해서 역사를 주관자이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전 701년 앗수르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과 앗수르의 패배를 내다보는 24-27절의 말씀은 의도적으로 현재의 자리에 놓였습니다.

 

(1) 여호와 계획의 확실성(24)

 

겉으로는 앗수르의 심판을 선언하지만, 실제로는 예루살렘의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이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을 수집해놓은 1-12장 또는 28-39장의 어느 한 곳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바벨론의 멸망(13장)과 바벨론 왕의 죽음(14:3-23)을 선포하는 말씀과 함께 읽도록 그 다음에 놓인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사야가 예언 활동할 당시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현재 세력이고(1-39장), 바벨론은 앞으로 예루살렘을 위협할 미래 세력입니다(40-55장).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들이 수집됐을 때 앗수르의 위기는 이미 과거의 사건으로 그의 예언에 따라 극복됐습니다. 곧 여호와의 계획을 담고 있는 앗수르의 예언은 성취된 예언이 됐습니다. 앗수르의 예언이 온전하게 성취됐다면, 이사야가 선포한 바벨론의 예언도 때가 되면 그대로 성취될 것이 확실해집니다. 전체 이사야에서 보자면, 바벨론에 멸망하고 민족들 가운데 유배살이 하는 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앗수르를 징벌하시고 예루살렘을 구해주셨듯이, 당신 계획에 따라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흩어진 자들을 다시 이스라엘로 데려오실 것입니다(14:1-2).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 올라올 앗수르 군대의 멸망을 1인칭으로 맹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생각하신 것은 그대로 이뤄지고, 그분께서 결정하신 것은 그대로 성사됩니다(24). 민족들의 운명과 역사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땅의 모든 일은 그분의 계획과 결정에 따라 이뤄져갑니다. 민족들 간의 전쟁과 승패가 겉보기에는 패권을 추구하는 정치적 - 세속적 권력의 주도권 다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을 실행해나가시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민족들은 역사 무대의 배우이며 감독이신 여호와께서 쓰신 각본에 따라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할 뿐입니다.

 

(2) 앗수르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25-26)

 

예루살렘의 역할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역할도 그분께서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분의 계획은, 앗수르를 그분의 땅에서 쳐부수고 그분의 산들에서 짓밟아 이스라엘이 멍에에서 놓임을 받고 그들의 어깨에서 짐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25). 앗수르의 지배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려고 앗수르를 유다로 불러 치십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여호와의 계획에 따르면 그분께서는 앗수르를 불러올려 반역한 예루살렘을 징계하시고, 뒤이어 업적과 능력에 취해 교만해진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10:12). 예루살렘으로 원정 오는 앗수르에 이중적 역할이 맡겨집니다. 앗수르는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불순종한 다윗 왕조를 징계하시는 도구로서 올라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한계를 넘은 교만으로 인해 여호와께 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그분의 심판 계획에는 앗수르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포함됩니다(26). 그분께서 앗수르에 대한 당신 결정을 그대로 실현하시듯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을 이루실 것입니다. 전에 반역한 이스라엘 위로 펴졌던 그분 손(9:12,17, 21;10:4)이 이제는 민족들 위로 펴집니다. 13-23장에 포함된 민족들에 관한 예언은 그분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구체적인 예가 됩니다.

 

(3) 여호와 계획의 확실성(27)

 

세상 어떤 권력도 그분의 결정을 꺾거나 되돌릴 수 없습니다(27). 바벨론과 앗수르가 정치적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여호와께서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그러할 뿐입니다. 결국에는 여호와의 결정을 운명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권력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살아남기 위해 누구에게 의존해야 할지는 처음부터 자명합니다.

 

블레셋에 대한 신탁(28-32)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은 세상뿐만 아니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은 그분의 백성에 대한 구원 계획만큼이나 확고합니다. 켜켜이 쌓인 죄악이 하나님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렇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양심에 확인을 맞기 전에 돌아서야 합니다.

 

28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이 경고가 임하니라 29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의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 30가난한 자의 장자는 먹겠고 궁핍한 자는 평안히 누우려니와 내가 네 뿌리를 기근으로 죽일 것이요 네게 남은 자는 살륙을 당하리라 31성문이여 슬피 울지어다 성읍이여 부르짖을지어다 너 블레셋이여 다 소멸되리로다 대저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 그 대열에서 벗어난 자가 없느니라 32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28-32)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아하스가 죽자, 블레셋은 사신을 파견해 유다 와에게 반앗수르 동맹을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혹하는 블레셋을 심판하겠다고 경고하십니다. 블레셋과 연합한다면 유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말 것입니다.

 

(1) 블레셋에 대한 경고(28-29)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블레셋에 대한 신탁이 주어집니다(28). 에스겔과 학개의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예언이 주어진 시점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에서는 6:1과 20:1에 두 번 더 나옵니다. 예언의 정치적 배경으로 주어진 정보입니다. 7-8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유다 왕 아하스는 아람과 에브라임이 추진하던 반앗수르 연합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고 앗수르의 봉신이 됐습니다.

32절의 ‘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는 블레셋이 예루살렘 왕궁으로 사신들을 파견했음을 전제합니다. 이를 함께 읽으면, 아하스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계승하는 해에 블레셋이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블레셋이 사신들을 파견한 목적은 달리 언급되지 않지만, 단순히 새 왕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블레셋의 멸망을 선포하고 블레셋 사신들에게 답변할 말을 (예루살렘 정치가들에게) 주었음은 이들이 유다의 새 왕이 된 히스기야와 정치적 현상을 벌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음을 시사해줍니다. 최스기야가 통치할 때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에 따르면 최스기야는 앗수르에 의존했던 그의 아버지와 달리 탄앗수르 노선을 걸었습니다. 정리하자면, 블레셋은 아마도 앗수르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히스기야가 왕위를 계승하자 앗수르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협상단을 파견했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블레셋을 치던 압제자가 죽었다고 기뻐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냅니다(29). 전력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더 잔혹한 자가 그 자리를 이어 통치할 것입니다. ‘너를 치던 막대기’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시대적 배경과 본문의 해석에 의존적입니다. 일부는 28절에 근거해서 유다 왕 아하스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앗수르에 종속된 아하스가 블레셋에 그렇게 위협적이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또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블레셋을 더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 블레셋의 심판(30-31)

 

다수의 입장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또는 사르곤으로 해석합니다. 앗수르가 애굽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블레셋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정복해야 했습니다. 애굽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블레셋은 전통적으로 애굽에 우호적이었기에 거듭 앗수르의 위협과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블레셋을 치는 적들이 북방에서 온다는 31절의 언급도 유다의 침략보다는 앗수르의 침략에 더 잘 어울립니다. 억압하던 앗수르 왕의 죽음에서 다시 주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를 보며 환호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예언자는 더 혹독한 억압과 파괴가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날아다니는 불뱀’은 날듯이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 다니는 광야에 사는 독사를 가리킵니다. 31a절은 전쟁으로 기존 질서가 완전히 파괴될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어리석은 판단으로 국가를 멸망으로 이끈 블레셋의 통치 계급이 사라지고, 그들에게 억압을 당하던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자유롭게 살게 됩니다(?). 하반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기근과 칼로 블레셋을 치십니다. 블레셋이 자연재해를 간신히 극복합니다 할지라도 살아남지는 못합니다. 전쟁에 넘겨져 완전히 멸망을 당합니다. 이사야는 블레셋의 멸망을 이미 이뤄진 현실로 내다봅니다(31). 그는 성문과 성읍을 의인화해 애곡을 요청합니다. 블레셋은 멸망을 피할 수 없기에,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죽음을 애곡하는 것뿐입니다.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는 점령한 성들을 불태우며 오는 모습보다는 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오는 침략군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침략군은 대열에서 벗어난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정병들입니다.

 

(3)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주는 권면(32)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에게 블레셋의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32). 실질적으로는 예루살렘 왕궁의 정치가들에게 주는 권면이자 경고입니다. 주변 나라들과 맺은 정치적 동맹에서가 아니라, 시온 산에 계신 여호와에게서 피난처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에게 블레셋이 제안하는 반앗수르 정책에 어떻게 답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흔들리지 않고 시온의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방패와 피난처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정치와 자본의 힘에서 안전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지 않습니까? 안전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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