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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2-01)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이사야 22장 1-14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는 우상의 나라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지대로 일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분깃으로 간직한 나라이기에 달라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난 언약 백성도 이방 나라처럼 간주하실 것이고, 배역한 예루살렘을 적군을 상대하듯 심판하실 것입니다.

 

  • 멸망을 눈앞에 두었던 예루살렘 주민들이 갑작스러운 국면 전환에 환호합니다. 다들 구원과 해방의 기쁨에 들떠 소란하게 떠듭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앗수르 군대가 왜 갑자기 철군하게 됐는지를 파악해보려 하지 않고 눈앞의 승리만 즐깁니다. 이들의 영적 무지와 무책임을 보며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필연임을 예감하고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의 환호와 예언자의 탄식(1-4)

왜 성도들이 대적들에게 쫓기고 굴욕을 당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순종하길 원하셨지만, 그 백성들이 순종히 아니함으로 대적들에게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순종치 않으면 분명히 패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대비하고 교만했지만,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1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2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3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4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1-4)

 

이사야는 환상의 골짜기, 즉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 예루살렘성 사람들은 외부 침략에 대비하여 무기를 만들고 저수지도 만들고 성도 수축하였습니다. 이제 스스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교만해진 예루살렘을 심판하십니다.

 

(1) 환호하는 성(1-2a)

 

예루살렘 거민들은 앗수르의 2차 공격 때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 앗수르 군대가 철수한 것을 보고 즐거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예루살렘을 향해 경고하도록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거민들을 넓고 평편한 지붕으로 올라가서 서로 즐겁게 전쟁에서 승리함에 대해 노래하였습니다. 적의 포위 공격 앞에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평편한 지붕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의 해방과 생존을 기뻐하며 환호합니다. 그곳에서 전쟁에 살육당한 앗수르 군사의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던 것입니다.

 

(2) 부패한 지도자들(2b-3)

 

이사야는 환호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지휘관들이 용감하고 유능해서 적들이 퇴했습니까? 이들은 수치스럽게 자기 살려는 궁리만 했습니다. 적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포위된 성을 빠져나갈 기회만 엿봤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도망치다가 죽었습니다. 도망치다가 적을 만나면 항복하거나 앗수르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하고 다 붙잡혔습니다.

위기관리를 책임진 자들의 도덕적 붕괴는 예루살렘의 총체적 무지와 무능력을 그대로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왕조 18:13).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사야는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통곡할 뿐입니다. 그의 탄식은 멸망할 동포에 대한 연민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내적 부패와 영적 무지 때문에 예루살렘이 멸망을 꾀할 수 없음을 알고 슬피 운 것입니다.

 

(3) 절망하는 예언자(4)

 

이사야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비록 앗수르 군대가 패했지만, 지금은 절대로 즐거워 할 때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고 말합니다. 해방을 환호하는 자들 가운데서 임박한 멸망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 이사야의 통곡은,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를 향한 풍자이기도 합니다.

기뻐할 때가 아니라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슬퍼해야 할 때임을 모르는 예루살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눈물을 흘릴 것임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무지와 깨달음 없음(불신앙)을 알기에 그는 이들에게서 위로받기를 거절합니다.

 

여호와의 날(5-8a)

전쟁을 하면서 완벽하게 준비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가 빠진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빠짐없이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전쟁에서는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는 하나님 없는 대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것들이 준비되었다고 기뻐하지만, 마지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준비가 없었습니다.

 

5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 6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 7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8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5-8a)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외세 침략에 의한 정복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전을 결정합니다.

 

(1) 혼란의 날(5)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그의 시선이 현재에서 앗수르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위기의 때로 되돌아갑니다. 여호와의 심판 날은 앗수르가 심판 받는 날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날이었습니다.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라고 예언합니다. 이 ‘소란과 밟힘과 혼란’에 떨어졌던 날입니다. 이 세 단어는 비슷한 발음들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셨던 날, 안전을 보장해주던 성벽이 무너졌던 날입니다(29:2-3). 성이 함락당할 위기에 빠지자 예루살렘 주민들은 시온 산을 향해 도움을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알았기에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시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여호와의 도구는 먼 곳에서 온 민족들입니다.

 

(2) 포위당한 예루살렘(6-7)

 

예루살렘을 공격할 앗수르 군사들의 위용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습니다. 활과 방패로 무장한 보병뿐 아니라 기마병과 병거까지도 철저하게 준비해서 예루살렘 공격에 모두 동원됐습니다.

‘엘람(Elam)’과 ‘기르(Kir)’의 병사들이 병거대와 기마대와 함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선봉에 섰습니다. ‘엘람’은 바벨론 동복쪽 자그로스 산맥과 타그리스 강의 하류에 이르는 고원 사는 부족인데, 예로부터 활을 잘 다루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은 통에서 화살을 꺼냈고 있었습니다(참조. 렘 49:34-39). 그리고 ‘기르’는 메대 근처에 있는 앗수르의 한 지방인데, 그 군사들은 전쟁 준비를 완전히 준비해서 방패집에서 방패를 꺼내 공격할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침략군이 예루살렘 주변의 모든 골짜기에 진을 치고 공격 부대를 성문 앞에 전진 배치했습니다.

 

(3) 벗겨진 유다의 덮개(8a)

 

여호와께서도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상태를 올바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께서 유다를 더 이상 지켜주지 않으시고 적의 공격에 넘겨주기로 하셨기에, 예루살렘의 함락은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군사적 대비(8b-11)

믿는 사람들은 위기를 만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다움과 같은 것들을 먼저 생각하고 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곤경에 빠져들게 됩니다.

 

8…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9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10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11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8b-1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에 승리가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앗수르의 재침략은 이스라엘에게 패닉 상태에 빠지게 했습니다. 엘람의 기병과 마병대 앞에서 예루살렘은 위태로웠고,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보호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1) 병기를 바라보는 자들(8b-9)

 

이 단락의 시점은 얼마간 불분명합니다. ① 먼저 예루살렘 포위공격(5-8a) 이전 단계, 곧 앗수르의 군대가 유다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묘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하려고 원정에 나섰을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군사시설을 점검하고 보강하면서 포위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② 다른 시각은 앞 단락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성을 포위한 적의 총공격에 대비하여 성벽을 점검하며 방어선을 보강하였습니다. 적의 계속된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본 예루살렘은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 파손된 방어 시설을 긴급하게 보완하거나 보충합니다. 두 시점 모두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두 번째 입장을 따라 읽습니다.

 

(2) 방어 시설 점검(10-11a)

 

원정에 나선 앗수르 군대는 유다의 모든 요새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예루살렘은 새장에 갇힌 새의 신세가 됐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앗수르의 총공격에 대비하여 가능한 모든 무장을 갖추고 방어 시설을 정비하고 보강했습니다. 이들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습니다. 레바논 나무 궁으로 불리는 ‘수풀 곳간’은 길이가 백 규빗, 너비가 오십 규빗, 높이가 삼십 규빗(왕상 7:2) 되는 건물로, 솔로몬은 여기에 큰 방패 이백 개와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두었습니다(왕상 10:16-17; 14:25-28).

‘수풀 곳간’이 병기고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다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역할은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다윗 성에 균열이 많음을 보고 성벽도 보강했습니다. 역대하 32:5과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 히스기야 시대에 성벽의 보강과 확대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물 확보는 성안에 지하 샘이 없었던 예루살렘 방어의 관건이었기에(7:3) ‘아랫못’에 물도 모아두었습니다. 또 예루살렘 주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전시 비축물을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고, 무엇보다도 일부 거주 지역을 군사시설로 활용하기 위해 가옥의 수를 세었습니다.

 

(3) 환호하는 성(11b)

 

다음 조치로 병력의 신속한 이동이나 공성에 방해가 되는 성벽 주변의 가옥을 허물었고, 또 다른 긴급조치로 두 성벽 사이에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웅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것 자체는 결코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옛 못’은 아마도 ‘윗못’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옛 못(윗못)과 아랫못은 기드론 계곡 아래 끝에 서로 인접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앗수르의 총공세에 대비해 예루살렘 사람들도 방어 태세를 갖췄습니다. 그러나 예언가 보기에 이들의 대비는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위기의 본질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 공격이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임을, 그분의 계획에 속한 일임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눈앞의 위기를 오직 정치적-군사적 시각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언자는 ‘보다’, ‘바라보다’를 의미하는 동사 ‘나바트’와 ‘라아’를 사용해 예루살렘의 불순종과 어리석음을 인상적으로 고발합니다. 예루살렘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아니하고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이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을 ‘보았습니다.’

 

절망을 확정 짓는 완악함(12-14)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사역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해주섰다면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송을 돌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높이지 않고 자신들이 해낸 일인 듯 자축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노여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만함에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12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13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14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14)

 

여호와를 앙망하지도 공경하지 않은 예루살렘을 앗수르의 마수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잘해서가 아니라, 자경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건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통곡하고 애곡해야 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잔치를 벌였던 것입니다.

 

(1)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12-13)

 

예언자는 국가적 재앙과 극적 구원을 경험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앗수르의 철군은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지금은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털을 깎고 통곡하며 애곡할 때입니다.

환호도 좋지만, 예루살렘은 먼저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죄악을 참회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외침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냉소적 반응만 불러옵니다. 이들은 내일이면 죽을 몸이니 먹고 마시기나 하자고 떠들며, 앗수르의 철군으로 위험에서 벗어난 오늘을 즐깁니다. 아무도 예루살렘의 위기와 구원에서 여호와의 의지를 읽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신학에 빠진 자들에게 여호와에 의한 예루살렘의 심판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앗수르의 위기와 해방은 철저하게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돌아오기를 거절하는 예루살렘의 완악함에 여호와께서 단호하게 마지막 판결을 내리십니다.

 

(2) 멸망을 피할 수 없게 하는 죄악(14)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내일이면 죽을 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죽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앗수르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은 이사야가 거듭 비판한 반 앗수르 정치의 필연적 결과였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은 여전히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세상에 포위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습니까? 그것이 혹시 내 죄와 영적인 방만함과 나태함이 불러온 결과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상황을 바꿔달라고 구하기 전에 내가 변하기를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손 놓으시는 상황이 되기 전에 자기 민족의 잔치를 치우고 어서 돌이켜야 합니다.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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