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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3-01)


두로와 시돈의 몰락과 회복

이사야 23장 1-18절


 

‘돈’처럼 매력적인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돈’만큼 위력적인 것도,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한평생 쌓는 것이지만 한순간에 잃는 것도 돈입니다. 힘의 상징이던 바벨론 멸망에 이어 부의 상징인 두로의 멸망은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재조정하도록 도전합니다.

 

  • 민족들의 신탁(13-23장)의 마지막 장인 23장은 페니키아의 유명한 도시국가 두로와 시돈을 대상으로 주어진 말입니다. 이사야는 애가의 양식을 활용해 두로와 시돈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엄청난 영화 누리던 두로와 시돈이 갑자기 적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들이 자랑하던 원양선단도 멸망에서 구해내지 못합니다.

 

두로의 패망에 관한 예언(1-14)

의존도가 높을수록 희망도 높겠지만, 반대로 절망도 짙을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적이든 개인적이든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고, 믿고 그 누구도 자신을 책임져줄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은 여호와께서 만든 상황이 아니라도 그분이 허락하신 상황이요 통제하시는 상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2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3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6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주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8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9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1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의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12이르시되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13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 14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의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1-14)

 

13-23장에 언급된 열방들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중에서 두로에 관한 경고의 메시지가 끝부분에 나오고 있음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이는 세계적인 활동 범위 때문에 당시에 두로가 국제 정세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나 역할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1) 다시스의 배들(1)

 

이사야는 다시스의 배들에게 슬피 부르짖으라고 외칩니다(1). 두로가 황폐해져 집도 없고 들어갈 곳도 없게 됐습니다. 많은 물건을 싣고 깃딤 땅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로가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목적지인 두로가 파괴됐기에 다시스의 배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다시스 배들’은 지중해를 항해하면서 무역을 하는 원양선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두로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자랑거리였습니다. 다시스는 스페인 남서해안의 항구로 지중해 해상무역에서 서쪽 끝을 의미합니다. ‘깃딤 땅’은 지중해 중심에 있는 키프로스를 가리킵니다.

 

(2) 해변 주민들(2-3)

 

이사야의 시선이 바다의 배들에서 해변으로 옮겨집니다. 그는 이번에는 해변 주민들에게 잠잠하라고 외칩니다(2). 바닷가 주민들은 바다를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 때문에 부요하게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됐습니다.

‘해변 주민들’은 페니키아 사람들을 ‘시돈 상인들’은 시돈을 포함해서 페니키아 지방의 중개무역 상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잠잠하다’는 1절의 ‘슬피 부르짖다’와 내용상 동일합니다. 페니키아 지방은 원양선단을 이끌고 지중해를 항해하며 중개무역을 하는 두로와 시돈 상인들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3절은 중개무역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지중해를 통해 가져와 민족들에게 되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토지가 비옥했던 애굽은 근동의 곡식 창고였습니다. 시돈과 두로는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민족들의 특산품이 그리로 모였다가 사방으로 수출됐습니다.

 

(3) 바다(4-5)

 

이사야는 전적으로 바다 덕분에 살아가는 시돈과 두로에게 바다의 입을 통해 파국적 재앙을 선포하게 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 이들의 해상무역이 아무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4).

‘바다의 요새’는 해안에서 600-700미터 떨어진 두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들과 오래전부터 거래를 해왔던 애굽은 두로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5). 애굽은 많은 부를 가져다준 중개무역의 파트너를 잃어버립니다.

 

(4) 해변 주민들(6-9)

 

이사야는 해변 주민들에게 통곡하며 다시스로 건너가라고 권면합니다(6). 그의 권고는 풍자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스는 페니키아 사람들이 멸망을 피해 이주해가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다음과 같이 풀어볼 있습니다. ‘원양선단을 자랑하는 자들아, 세상 끝에 있는 다시스는 안전할지 모르니 능력이 있으면 거기로 가서 피난처를 찾아보아라.’

이사야는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켜 믿기지 않는 두로의 멸망을 언급합니다(7). 그처럼 기쁨이 넘치던 두로가 몰락하여 통곡의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였던 두로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일찍부터 스페인의 다시스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자신들의 교역권과 해상권을 보호하였습니다.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두로의 영화는 영원할 것 같았지만, 여호와의 결정으로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습니다(8-9). 만군의 여호와께서 두로의 운명을 멸망으로 정하셨기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영화를 누리던 자들을 욕되게 하시고 교만하던 자들을 멸시받게 하실 것입니다. 민족들의 운명은 경제력이나 군사력 또는 강대국의 욕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민족들이 서로 경쟁하고 싸우지만, 마지막 결정은 언제나 여호와의 몫입니다. 면류관을 씌우던 자는 식민지의 제후들이나 왕들이 두로에 정치적 경계적으로 의존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지중해 주변의 많은 도시와 나라들은 두로의 중개무역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에 두로의 영향력을 인정해주었습니다.

 

(5) 딸 다시스(10-13)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는 나라의 고위직이 상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두로의 상인들이 교역지에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도 이들이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인물로 명성을 누렸음을 시사해줍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나일의 범람으로 애굽에 수확물이 풍부하듯이 두로의 멸망으로 그 굴레에서 벗어난 다시스에는 부가 넘치게 됩니다.

11절의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는 바다를 무대로 부와 명성을 획득한 두로와 시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열방을 흔드시어’는 두로의 멸망에 직면한 민족들의 반응입니다. ‘가나안의 견고한 성읍들’을 파괴하시는 그분의 심판이 페니키아를 넘어 이들과 거래한 왕국들에도 영향을 미쳐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가나안’은 여기서는 페니키아 지방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페니키아 사람들은 특히 언어와 종교에서 매우 가까웠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 시돈에게는 앞으로 기뻐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11). 깃딤으로 피신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거기에서도 편안을 얻지 못합니다. 한때 지중해를 지배하였던 시돈이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시돈의 멸망은 바벨론의 멸망과 유사하게 이뤄질 것입니다. 앗수르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초토화시켜 들짐승들의 서식처로 만들어 버렸던 것처럼 시돈도 완전히 허물어져 폐허가 될 것입니다(13).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은 주전 722-710년과 704-703년에 두 번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다가 다 실패하고 쫓겨났습니다.

 

(6) 다시스의 배들(14)

 

14절은 다시 1절로 돌아갑니다. ‘다시스의 배들은 파괴된 견고한 성’ (두로)을 위해 슬피 부르짖어야 합니다.

 

두로의 장래에 관한 예언(15-18)

어려운 중에서 노력함으로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영화의 회복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양식과 의복을 위하여 주께서 자유자재로 쓰실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서는 모습입니다. 오늘 자신의 삶의 터전에 소유권 이전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16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17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18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15-18)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먼저 엄중한 심판의 예언을 선포하고 마지막에 가서 회복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로에 관해서도 그러한데, 선지자는 두로가 패망한 지 70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1) 칠십 년의 징계(15-16)

 

두로가 멸망의 심판에 떨어지지만, 멸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심판에 넘겨진 두로는 ‘한 왕의 연한같이 칠십 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힙니다(15). 왕의 재위 기간으로 ‘칠십 년’은 사실적 수보다는 완전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한 유다와 민족들의 칠십 년 지배를 선포했습니다(렘 25:11; 29:10; 단 9:2; 슥 1:12; 대하 36:21). 아마도 하나님의 심판이 온전하게 이뤄지는, 심판을 당한 세대가 회복에 참여하지 못하는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부와 지혜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두로는 늙은 창녀가 잊히듯이 일정 기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창녀의 노래는 한편으로는 두로의 참담한 몰락을 조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기억되기 위해서 두로가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16). 사람들이 더는 찾지 않는 늙은 창녀가 사람을 찾아 노래를 부르며, 항구를 돌아다니듯이 두로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직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버텨내야 합니다. 정한 기간이 다한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실 것입니다. 두로를 창기에 비교해 회복을 기술합니다.

 

(2) 여호와의 돌봄을 받는 두로(17)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는 두로가 다시 번영하여 민족들과 상거래를 재개할 것을 보여줍니다(17). 두로의 권리가 회복되어 이전의 무대로 복귀하게 됩니다. 두로의 상업 활동이 창녀 짓에 비교됩니다. 상거래 행위를 죄로 정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윤추구를 유일한 목표로 삼는, 돈벌이가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상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3) 여호와께 봉헌되는 두로의 수익(18)

 

마지막 18절은 두로에 대한 신탁뿐만 아니라 13장부터 시작된 민족들에 대한 신탁의 맺는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종말론적 시선으로 심판 이후를 내다봅니다.

두로와 시돈의 상인들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왕국에게 몸을 팔아 얻은 소득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 곧 제사장들의 양식과 의복을 마련하는 데 사용됩니다. 두로와 민족들의 부가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와 그분 백성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세상에서 잃어버린 것을 세상 살 동안 기어코 되찾겠다고 생각하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부와 영화는 한때뿐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바치고 목표로 삼을 만큼 가치 있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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