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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2-02)


부패 관리 셉나를 대신 할 엘리아김

이사야 22장 15-25절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한 나라의 운명을 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지도자의 자리는 그만큼 무겁고 무섭습니다. 본문은 두 지도자를 소개합니다. 셉나는 심판 받을 유다의 운명을, 엘리아김은 회복될 유다의 미래를 상징합니다. 지도자들의 한계 속에 유다의 진정한 미래, 참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 주전 701년 전후의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 왕궁의 최고위직에 있었던 셉나와 엘리아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둘은 히스기야의 취측근으로, 그를 도와 앗수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한 핵심 인물들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흔들리는 다윗 왕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거듭 예루살렘의 정치에 개입하시지만, 왕궁 정치가들의 무책임과 무능력으로 인해 의도하셨던 결과를 내지 못하십니다.

 

월권한 셉나의 심판(15-19)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만 추구한 사람들은 그 백성이 심판을 받을 때, 운명을 같이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세상의 방법으로 동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셉나는 위기에 처한 나라보다 자기 명성에만 천착했습니다.

 

15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을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16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17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18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19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15-19)

 

예루살렘 백성들의 세속적인 삶과 불신앙의 죄를 지적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메시지의 초점을 한 정치인에게 집중합니다. 그는 히스기야 왕의 궁내대신 ‘셉나(Shebna)’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각 나라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였는데, 이곳에서는 개인의 죄를 향해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죄를 무르실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선택과 죄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습니다.

 

(1) 셉나에게 보내진 이사야(15)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셉나’를 찾아가서 그에게 신탁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15). ‘셉나’는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로 소개됩니다. ‘국고를 맡은 자’로 번역한 ‘소켄’은 아마도 ‘시종장’, ‘관리장’을, ‘왕궁 맡은 자’는 왕궁의 일을 책임진 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최고위직에 속하는 두 개의 지위가 셉나에게 맡겨졌다는 것은 그가 히스기야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그를 대신하여 전권을 행사했음을 시사합니다.

본문에 예루살렘의 위기가 나타나지 않기에 앗수르가 유다로 원정을 떠나기 전에 주어진 말씀처럼 보입니다. 앗수르의 왕좌가 사르곤에서 산헤립에게로 넘어가는 과도기(주전 705-701년)에 히스기야가 적극적으로 반앗수르 노선을 추구했는데, 이때 셉나는 왕의 최측근으로 왕궁의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셉나는 한 번 더 등장하는데,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으로 랍사게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을 때 히스기야가 유다의 협상단으로 파견한 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왕하 18:18,26,37; 사 36:3,11,22). 당시 그는 서기관의 직책을 갖고 협상단 대표인 엘리아김을 수행했습니다. 양자를 함께 읽으면, 전권을 갖고 히스기야의 반앗수르 정책을 추진하던 셉나가 예루살렘이 함락의 위험에 처했을 때 최고위직에서 서기관의 지위로 내려왔습니다.

 

(2) 고발(16)

 

이러한 셉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는데, 19절의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의 예언이 성취됐음을 볼 수 있습니다. 셉나를 찾아간 이사야가 그의 비리를 고발합니다. 고발의 내용은 얼마간 뜻밖입니다.

이사야는 셉나가 자신의 묘실을 만들기 위한 현장으로 찾아가서, 그 분수에 맞지 않는 묘실을 만든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를 탄핵한 것입니다(16). 세 번이나 사용된 ‘여기에’는 셉나가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 곳에다가 석실 고분을 만들었음을 알려줍니다. 고대 세계에서 무덤은 죽은 사람의 ‘처소’(거주지)로 간주하였기에 무덤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셉나에게 문제 된 것은 그가 자기 무덤을 마련한 장소였습니다. 처음 두 질문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에 묘지를 마련했느냐? 도대체 네 조상 가운데 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는 다음과 같이 풀어 옮길 수 있다. 네게 무슨 권한이나 자격이 있기에 여기 있기에 네가 여기에 묻힐 수 있단 말인가?’ 이사야는 셉나가 자격도 없으면서 왕의 최고위 관료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귀족이나 존귀한 자들만 묻힐 수 있는 곳에 자기 무덤을 마련했다고 고발합니다.

 

(3) 심판선언(17-19)

 

현대와 달리 고대 세계에서 신분 질서는 신이 정한 질서였고 이에 따라 매장지도 구분됐습니다. 셉나의 행위는 하나님의 질서에 속하는 신분 질서를 무시한 악행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 전통적인 사회질서를 파괴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의 높은 곳에 있는 반석에 화려한 묘실을 만들어 영원토록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던 ‘셉냐’에게 선지자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운명을 선포했습니다.

셉나는 낮은 집안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아김의 경우(20)와 달리 셉나를 소개할 때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도 이를 보여줍니다. 36:3에서 3인의 협상 대표단을 소개할 때도 엘리아김과 요아는 아버지 이름과 직분을 함께 말하고, 셉나는 직분만 언급합니다. 평민 출신이었다면 셉나는 기드론 계곡에 있는 서민의 묘지에 묻혀야 했습니다.

공권력을 남용한 ‘셉나’에게 심판이 선고됩니다. 여호와께서 ‘셉나’를 단단히 결박하여 내던지실 것입니다(17). 그는 공같이 넓은 곳에 던짐을 받고 거기서 죽을 것입니다(18). 광막한 곳은 아마도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한 앗수르를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암벽을 파내서 자신의 묘실을 만들었지만, 그는 앗수르로 끌려가 들판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네 영광의 수레’는 왕 다음가는 지위에 오른 셉나가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며 예루살렘 거리를 타고 다니던 마차를 가리킵니다. 그는 자기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친 자로 수치스러운 죽음에 넘겨집니다. 히스기야 왕이 인정하고 총애하는 관료였지만, 그는 왕에게 봉사하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에게 끼친 수치는 허락되지 않은 곳에 묘실을 판 것만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파국적 재앙을 가져온 히스기야 왕의 대외 정책에 셉나가 중추적 역할을 했으리라는 추측은 그의 직책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합니다. 셉나는 예루살렘 왕궁에서, 아마도 애굽의 지원을 기대하면서, 반앗수르 노선을 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앗수르 위기를 오로지 정치적 시각에서 파악하는 예루살렘 왕궁에는 다윗 왕조의 보존을 약속해주신 여호와를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배제한 예루살렘 정치의 세속화(불신앙)에 맞서 일관하여 역사를 경영하시는 분께 의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셉나가 포로로 잡혀 앗수르에서 죽게 될 것을 말하는 17-18절과 달리 19절은 그가 관직에서 쫓겨나고 그의 지위가 낮아질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36:3(왕하 18:18)은 셉나를 ‘서기관’으로 소개합니다.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사이에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셉나가 서기관으로 강등됐음을 보여줍니다. 사건적 순서로 보면, 19절의 심판이 17-18절의 심판에 선행합니다. 셉나는 최고위직에서 쫓겨나 낮은 자리로 밀려났다가 사로잡혀 앗수르로 끌려가게 됩니다.

 

엘리야김의 임명과 실패(20-25)

권세를 가진 자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엘리아김의 경우와 같이 일가친척들로 인한 폐단입니다. 이는 권세자는 자신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주의깊게 관리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이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권세를 부여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그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0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22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23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24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의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 25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의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20-25)

 

이사야의 예언이 열방에서 개인으로 이동합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정치하지 못한 셉나의 죄를 묻고, 엘리아김은 강등된 셉나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이사야의 탄핵 이후 지위는 낮추어졌는데, 이것은 그의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1) 셉나를 대신하는 엘리아김(20-21a)

 

엘리아김에 관한 신탁도 다윗 왕조의 보존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왕궁의 권력을 장악한 셉나가 다윗 왕조를 멸망의 수렁으로 빠뜨리자 여호와께서 다시 개입하십니다. 그분께서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불러 셉나를 대신하게 하십니다(20). 산헤립이 파견한 랍사게와 항복 조건을 협상할 때 엘리아김은 ‘왕궁을 맡은 자’로 협상단의 대표로 활동합니다(36:3). 엘리아김에게는 여호와의 기대가 담긴 명예로운 호칭도 주어집니다. 엘리아김이 모세(민 12:7; 수 1:2; 왕하 21:8)와 다윗(삼하 3:18; 7:5; 왕상 11:13)처럼 ‘내 종’으로 불립니다. 여호와와 엘리아김의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엘리아김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그 분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이름의 의미(‘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다’)에 걸맞게 엘리아김은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우시려는 여호와의 계획을 실행하는 자로 부름 받습니다. 왕이 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는 징표로 엘리아김에게 관복이 입혀지고 띠가 매어집니다(21).

 

(2) 엘리아김에게 주는 약속(21b-23)

 

그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의 아버지’가 됩니다. 원래 왕과 백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이 엘리아김에게 적용됩니다. 왕이 백성의 아버지인 것처럼 그를 임명한 왕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립니다. 또 그의 어깨에 다윗 집의 열쇠가 놓입니다(22). 옛날에는 왕궁과 성전의 문을 잠그는 열쇠가 무척 커서 어깨에 멜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서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엘리아김이 히스기야 왕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다윗 왕조를 굳게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습니다. 그의 어깨에 다윗 왕조의 미래가 달립니다. 그에게 앗수르 문제로 인해 흔들리는 다윗 왕조의 초석을 다시 굳건하게 할 임무가 맡겨집니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는 엘리아김의 절대 권위를 보여줍니다. 그의 결정은 최종적인 결정이 되고 누구도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아김에게 지속적인 번영과 성공을 약속해주십니다. 천막을 안전하게 고정하기 위해 단단한 땅바닥에 박는 못(말뚝)처럼 그를 박으실 것입니다(23). 못의 비유는 그의 지속적 성공과 다윗 왕조(천막)의 안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3) 엘리아김의 실패(24-25)

 

여호와께서 엘리아김을 도와 다윗 왕조에 주신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적극적 지원과 약속에도 불구하고 엘리아김은 실패합니다. 최고위직에 오른 엘리아김으로 인해 가문이 영광을 누리지만, 그의 권세와 성공이 족벌주의의 함정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의존하여 출세하려는 집안사람들이 그를 실족하게 만들었습니다(24). 23절과 달리 여기서는 못이 땅바닥이 아니라 벽에 박힌 것을 전제합니다. 걸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못이 부러져 떨어지듯이, 엘리아김도 집안사람들의 불의의 무게에 눌려 파멸합니다(25).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과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지도 합니다. 떠나고 싶은 지도자가 있고, 따르고 싶은 지도자가 있습니다. 시대의 위안이 되는 지도자가 있고, 시대의 위기를 더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지도자의 문제만이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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