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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4-02)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이사야 24장 14-23절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의 날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맞이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자세로 심판의 날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그래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 현재 문맥에서 보자면, 땅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주적 재앙은 그분 왕권의 수립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마지막 전쟁에서 패한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은 옥에 갇혔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심판을 받고,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왕으로서 (민족들을) 통치하십니다.

 

찬양 받으시는 하나님(14-16a)

우리는 끝이 안 보이는 드넓은 바다나 높이 치솟은 산과 같은 거대한 자연 앞에 숙연해지고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인류에게는 역사적으로 자연숭배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노년에 접어든 자신을 압도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4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15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16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14-16a)

 

이사야는 남은 자들이 서쪽 바다와 땅끝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큰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동방과 모든 섬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현실로 돌아와 이 땅의 죄와 심판 때문에 애통해합니다.

 

(1) 바다에서(14)

 

신분이 모호한 ‘그들’이, 아마도 눈앞에 전개되는 역사적 격변에서 여호와의 구원사적 개입을 보면서, 그분의 위엄에 환호하고 기쁨의 환성을 터뜨립니다(14). 개역개정이 ‘무리’로 옮긴 ‘그들(헴마)’은 땅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세상 주민도 가능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세상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기쁨의 감격이 세 개의 동사 ‘(소리를) 높이다(나사), 부르다/환호하다(라난), 크게 외치다(차할)’를 통해 격정적으로 표출됩니다. 뒤의 두 동사는 12:6에서는 시온의 주민에게 적용됐습니다. 기쁨의 동기이자 내용은 ‘여호와의 위엄’입니다. ‘위엄’의 ‘가온’은 ‘높다’를 의미하는 동사 ‘가아’에서 파생한 명사로, 여호와만이 높으시고 또 높임을 받으실 분임을 보여줍니다(2:10,19,21). 그분의 위엄은 그분 능력 가운데 나타납니다(출 15:1,7; 미 5:4). 바다에서부터 울려나가는 환호가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2) 동방에서(15)

 

바다에서부터 환성을 지르는 자들이 ‘동방’과 ‘바다 모든 섬’에 사는 자들에게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라고 명합니다(15). 제의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를 대신하는 표현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행위와 업적, 명성과 명예를 내포하는 역동적 단위로, 여호와 이름의 위엄은 그분의 능력과 영광이 계시된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3) 땅끝에서(16a)

 

온 땅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예루살렘에까지 들립니다. 예언자를 포함하는 ‘우리’ 공동체는 ‘땅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라는 찬양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16). 땅 끝에 사는 자들이 세상을 심판하신 분, 곧 적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을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호와를 지칭하는 ‘의로우신 이’(차디크)는 구원자 또는 승리자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 단락에서는 방위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다’는 일반적으로 지중해를 의미하고 방위로는 서쪽을 가리킵니다. ‘동방의 우림’은 그 어원이 불분명하지만, 보통 ‘빛’과 관련지어 ‘빛이 밝아오는 지역’, 곧 동쪽으로 이해합니다. ‘바다 모든 섬’(‘바다의 섬들’)은 시리아 해변이나 소아시아 해변 또는 키프로스 해변을 의미하기에 방위로는 북쪽을 가리킵니다. ‘땅끝’의 ‘커나프 하아레츠’은 문자적으로는 ‘땅의 날개’로, 원래는 특정 방위를 가리키지 않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남쪽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복수의 ‘땅의 날개들’로 나오고, 땅의 사방을 가리킵니다. 서쪽에서 시작한 환호성이 동쪽과 북쪽을 거쳐 남쪽으로 해서 ‘우리’가 있는 예루살렘까지 도달합니다. 이사야를 제외하고 온 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여호와의 위엄과 영광과 승리를 찬양합니다.

 

예언자의 소리(16b-20)

하나님께서는 최후 심판을 통해 인간들의 죄악으로 오염된 이 땅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변화 받은 성도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은 두려움으로 피할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바라고 기다릴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이 모두 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16…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 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16b-20)

 

죄인들은 심판을 피해 도망가지만, 아무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도망가는 그곳에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고, 함정에서 빠져 나와도 또 다른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처럼 하늘 문이 열려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가 날 것이며, 강도 높은 지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될 것입니다.

 

(1) 예언자의 절망적 반응(16b)

 

온 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정적 반응이 이사야를 심각한 불안에 빠뜨립니다. 땅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즉각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환상에 전율하고 자신에게 화를 선언합니다(16b).

 

(2) 피할 수 없는 심판(17-18)

 

구원 시대가 동텄다고 환호하는 자들과 달리 그에게 이스라엘의 구원은 아직 감춰진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점점 더 짙게 땅을 뒤덮는 무시무시한 재앙만 보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급하고도 일방적인 환호에 제동을 겁니다. 땅의 심판은 곧 임할 우주적 파국적 사건으로, 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위험한 시간입니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민족들 간의 배신(21:2), 이스라엘이 의존하는 이방세력의 배신, 또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배신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마지막 때의 혼란과 무질서를 특징짓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것은 구원 시대가 아니라 악이 횡행하는 파렴치한 시대였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 위로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덮쳐옵니다(17).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길을 찾아 도망해보지만, 함정에 떨어져 사로잡힐 뿐입니다. 애써 함정에서 빠져나와도 기다리는 것은 올무뿐입니다.(18a; 암 5:19). 누구도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재앙의 범위가 우주로 확대됩니다.

18b절의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는 하늘의 창문을 열고 비를 내려 범죄한 인류를 진멸한 노아의 대홍수를 생각나게 해주고(창 7:11; 8:2),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와 19절은 지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흔들리는 땅(20)

 

태초에 하나님께서 흔들리지 않게 견고히 놓은 땅의 기초가 그분 심판 앞에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술에 취한 자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듯이, 임시로 만든 원두막이 비바람에 흔들리듯이 땅이 흔들립니다(20a).

땅이 그처럼 무서운 심판에 넘겨질 때는 물론 이유가 있었습니다. 죄악이 땅을 멸망으로 이끕니다. 땅의 죄악이 땅을 무겁게 짓눌러 땅이 쓰러지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합니다(20b). 술꾼과 원두막에 비유된 땅이 무거운 짐에 눌려 엎어진 짐꾼에 비유됩니다. ‘떨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가 아모스 5:2의 인용이라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 이미 성취된 것처럼 땅의 멸망에 관한 예언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승리와 통치(21-23)

공중의 악한 세력들과 죄인들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있어 그 날은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승리의 날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그 날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확신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최후 심판의 최종적인 결론을 보여줍니다.

 

21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22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니라 23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21-23)

 

하나님을 반역한 타락한 천사들과 이 땅의 왕권을 쥔 자들도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옥에 갇히고, 여러 날 후에 최후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해와 달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1) 군대와 왕들을 벌하시는 여호와(21)

 

‘그 날에’ 악한 세력과 결정적인 마지막 싸움이 하늘과 땅에서 벌어집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는 하늘의군대를 땅에서는 땅의 왕들을 벌하십니다(21). 종말론적 전쟁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우주적 싸움입니다.

18절의 ‘위에 있는’과 ‘높은 데’의 ‘마롬’은 ‘하늘’을 의미하고, ‘높은 군대’는 민족들의 수호천사들이나 신적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다니엘에서 이스라엘의 수호천사인 미가엘은 페르시아 왕국의 수호천사와 그리고 헬라의 수호천사와 싸웁니다(단 10:13, 20-21). 여기서는 다니엘과 달리 여호와께서 직접 적대적인 하늘의 군대는 물론 지상의 왕들도 모두 벌하십니다.

 

(2) 감옥에 갇혔다가 벌 받는 자들(22)

 

마지막 전쟁에서 패한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은 ‘깊은 옥’에 한데 갇혀 그곳에서 지내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습니다(22;계 20:1-3). ‘깊은 옥’의 ‘보르’는 때로는 지하세계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감옥으로 이용되는 구덩이를(참조. 창 37:20, 22; 40:15; 41:14; 렘 38:6), ‘벌하다’의 ‘파카드’는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묻다’를 의미합니다.

 

(3) 시온산에서 왕이 되시는 여호와(23)

 

종말론적 싸움의 최종 목표는 지상에 여호와의 왕권을 세우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23). ‘여호와의 왕 되심’은 물론 ‘새로이 보좌에 올라가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변함없는 왕이시고, 그분 왕권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통치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분의 왕권이 마지막 때에는 누구나 볼 수 있게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장로들 앞에서’는 출애굽기 24:9-11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울 때 모세와 아론과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칠십인 장로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여호와를 뵙고 먹고 마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먹고 살아가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 없이 높아지고 커지고 유명해지고 부유해지는 삶은 심판의 날에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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