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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6-01)


영원한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사야 26장 1절-27장 1절


 

세상은 날마다 불안함의 연속입니다. 눈만 뜨면 터져 나오는 사고들과 끔찍한사건들, 기아와 테러의 지구촌 소식들, 불경기와 가뭄과 같은 팍팍한 현실들, 그야말로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사야가 말하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예언자가 대표하는 ‘우리’ 공동체는 종말에 있을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성벽과 외벽을 쌓아 예루살렘을 보호해주십니다. 성읍을 에워싼 골짜기에 의지하다가 패망한 예루살렘이 앞으로는 여호와께서 지켜주시는 ‘견고한 성읍’이 됩니다. 회복된 공동체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삽니다.

 

승리의 노래(1-6)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의를 지킨 의로운 사람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귀한 신분이나 권세를 가진 자가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실하게 신의를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선언하신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성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3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1-6)

 

여호와의 구원이 ‘성벽과 외벽’이 돼 예루살렘을 ‘견고한 성읍’으로 만들어줍니다(1). 전에는 골짜기와 성벽의 보호를 받던 예루살렘을 종말에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며 직접 지켜주십니다. ‘외벽’은 성벽 앞에 둘러쳐진 작은 방어벽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성문을 지키는 자들을 ‘너희’로 부르며 이들에게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라고 외칩니다(2). ‘의로운 나라’는 여호와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을, ‘문들’은 예루살렘 성문을 가리킵니다. ‘의로운’은 나라(백성)의 속성보다 윤리적 요청에 해당합니다.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의를 지키는’도 마찬가지로 ‘흔들림이 없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성벽과 보루가 되셔서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예루살렘 성에서 그분께 의존하고 그분 말씀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평강’이 주어집니다(3). 평강의 샬롬은 삶의 이상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자연과 사회의 조화로운 일치를 가리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의 윤리적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는 자들의 나라에는 정치적 불의와 사회적 억압이, 전쟁과 자연재해와 질병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구원과 구원받은 자들의 신뢰가 선순환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반석’이시기에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또 신뢰해야 합니다(4). 여호와가 환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이 도움과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반석이십니다. 다음 두 절은 여호와를 지속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높은 곳에 높은 성을 건설하고 자신의 안전을 자랑하며 사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징계하실 것입니다(5). 그분께서 허물어버리실 ‘솟은 성’은 그분 백성을 억압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종말에 여호와께서 보호하시는 ‘견고한 성읍’에 살게 될 ‘의로운 나라’가 ‘빈궁한 자’와 ‘곤핍한 자’로 표현됩니다(6). 현재 ‘우리’ 공동체가 ‘솟은 성’에 사는 자들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압제당하는 자들이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허물어버리신 성의 폐허를 발로 짓밟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의를 신뢰하는 의인(7-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편안한 길, 사건과 사고가 없는 삶은 아닙니다. 평강은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는 데 있습니다. 편안한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높낮이가 고른 길을 걷는 것이 평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른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평강과 평탄을 누릴 수 있습니다.

 

7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8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9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10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7-10)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 말씀은 바르고 옳은 길입니다. 이사야는 ‘의인의 길은 정직하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의인의 길(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7)는 하반절에 일치시켜 ‘의인을 위한 길은 올바르나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준수하며 사는 자를 위해 길을 닦아주시고, 의인은 그분께서 올바르게 만들어주신 길을 갑니다. 경험적 현실에서는 의인의 길이 평탄치 않게 보일 때도 있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2) 여호와의 심판을 기다리는 의인(8-9)

 

의로우신 분께서 의인을 위해 마련해주신 길은 곧 바르다는 신앙적 진술로부터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길의 올바름을 끌어냅니다(8). 심판의 정당성을 알기에 그 혹독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떠나지 않고 그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여호와의 ‘이름’과 ‘기억’은 여호와 자신을 의미합니다. 예배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멀리 계신 그분과 친교(교제)를 나눕니다. ‘영혼의 바람’(‘영혼이 사모하나이다’)은 고뇌에 찬 열심과 열정을 갖고 여호와께 매달림을 의미합니다.

화자가 ‘우리’에서 ‘나’로 바뀌면서, 예언자가 개인적으로 여호와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고백합니다(9). ‘나’는 ‘밤에’ 여호와를 간절히 찾습니다. 밤은 두려움과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시간으로,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고 그분을 만날 때이기도 합니다(시 6:6; 77:6). ‘나’가 심판의 시대를 살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분의 심판을 통해 ‘세상의 거민’이 의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세상 주민들도 의를 알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3) 의를 배우지 않는 악인(10)

 

9b-10절의 ‘의’는 민족들도 인식할 수 있기에 ‘사회와 삶에 내재한 창조의 기본 질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 여호와께서 땅에서 민족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질서를 세우시고 감독하시기에 의를 배우지 않고 곧은 것을 비뚤어지게 하는 악인은 결국 ‘여호와의 위엄’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루시는 분(11-19)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돌아보며 믿음과 인내를 북돋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이 은혜를 되새기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 악인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11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12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13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4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15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16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18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19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11-19)

 

하나님 나라는 의의 나라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요, 그 외에 의로움으로 화답하는 백성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백성이요, 주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주께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백성의 나라입니다.

 

(1) 대적을 사르는 여호와의 불(11)

 

여호와의 심판이 원래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손을 높이 들었지만, 세상의 거민은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11). 이들의 무지와 거절이 더 심한 심판을 초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셔서 진노의 불로 이들을 삼켜버리실 것입니다.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구원행위들로부터 미래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끌어냅니다.

 

(2) 평간의 간구와 그 근거(12-15)

 

하나님께서 적을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에 평강을 베푸실 것입니다(12). 원래 이스라엘이 해야 했을 일을 그분께서 대신 이루어 주셨습니다. 13-14절은 아마도 사사 시대를 회고하는 것 같습니다. 사사기의 신학적 틀에 따르면 여호와를 배신한 결과로 이방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떨어진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르짖자,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간구를 듣고 사사를 보내 ‘다른 주들’을 모두 벌하여 멸망시키셨습니다. 15절은 아마도 다윗 시대를 회고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 시대는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하였던,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시대였습니다. 후손의 번성과 전쟁의 승리는 신적 축복에 속하기에 여호와께서 당신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 보이신 시대가 됩니다.

 

(3) 탄식과 간구(16-18)

 

16절은 소망을 담고 있는 회고적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듭 고난에 떨어졌지만, 그때마다 새로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환난을 해산하는 여인의 곤경에 비유하는 17-18절에서 예언자의 시선은 현재로 돌아옵니다. 해산의 고통은 산모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지극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생산적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몸부림치며 해산했는데 태어난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세계의 거민’은 아마도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4) 권면(19)

 

세상에 너무 적은 수의 이스라엘 사람이 남겨진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깊이 탄식하는 예언자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을, 다시 회복될 것을 약속하십니다(19).

 

백성의 구원과 땅의 심판(20-27:1)

의로운 공동체의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깊은 신뢰와 소망이 있습니다. 심판 중에서도 이들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모랗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이시며, 심판을 통해 그의 의와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환난 중에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20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21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 27:1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20-27:1)

 

하나님의 초대를 악인들은 끝내 거절할 것입니다. 그분의 은총의 기회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심판과 자기 백성을 향한 열정을 확인할 날이 올 것입니다.

 

(1) ‘잠깐 숨을지어다’(20)

 

여호와께서 땅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날은 이스라엘에 기쁜 날임과 동시에 위험스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분노에 휩쓸려들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종말론적 심판에 넘겨질 때 이스라엘은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잠깐’ 숨어 있어야 합니다(20).

 

(2) 죄악의 징벌(21)

 

심판하려고 여호와께서 그분 거처에서 나오시면 땅은 그 피를 드러내고 살해당한 자들을 더 이상 덮지 않습니다(21). 부당하게 살해당한 자들의 피가 그분께 복수를 간구합니다. 그분의 인내로 지체됐던 그분의 의가 이제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3) 혼돈 세력의 정복(27:1)

 

1절은 신화적 표상을 사용하여 종말에 있을 마지막 전쟁을 기술합니다. 태초에 원시 괴물(chaos)을 정복하고 질서(cosmos)를 세우셨던 것처럼 여호와께서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혼돈의 세력을 벌하시고 다시 창조 질서를 바로 세우십니다. ‘날랜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 바다에 있는 용’은 세 종류의 원시 괴물보다는 강조를 위한 반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 하려면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곳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수시로 변하는 세상과 환경, 우리의 형편 위에 마음을 올려놓고, 날마다 전전긍긍하는 것은 애초에 시작이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리려면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바다 물결같이 요동치는 곳에 마음을 두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지 점검해 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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