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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7-01)

 


아름다운 포도원의 노래

이사야 27장 2-13절


 

삶은 아픔을 수반합니다. 성공과 승리를 얻기 위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의 백성에게는 최종적으로 승리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종적 승리는 무엇이며 승리의 과정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 여호와께서 땅의 죄악과 혼돈의 세력을 벌하시는 종말론적 심판(26:21-27:1)이 하나님 백성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야곱을 지섰던 분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흩어진 자들을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으실 것입니다. 당신 포도원을 훼파하셨던 분께서 구원자로서 포도원을 밤낮으로 안전하게 보살펴주실 것입니다.

 

포도원의 새 노래(2-6)

하나님께서 교회와 믿는 자들의 포도원지기가 되어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든든한 일이겠습니까? 사단의 세력이 믿는 자들을 실족시키지 못하고 교회를 이길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포도원지기가 되셔서 정성껏 돌보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최종적으로 번성하고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현재의 부족함과 결핍을 보고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2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3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 4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5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 6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2-6)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한 ‘포도원 노래’는 5:1-7 부분에서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포도원 노리와 본문의 노래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먼저 5장은 거대한 열매를 맺지 못한 포도원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말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포도원의 결실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1) 아름다운 포도원(2)

 

포도원의 비유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불의와 불법을 고발하고 심판을 선포했던(5:1-7) 이사야가 같은 비유로 구원 시대를 선포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땅의 거민의 죄악’과 혼돈의 세력을 벌하시는 때(26:21-27:1)를 가리킵니다. 땅을 심판하시는 목적이 하나님 백성의 구원에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예언자의 심판선언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전환됩니다. 포도원을 한정하는 ‘아름다운’(참조, 32:12; 암5:11)은 내용상 5:1의 포도원이 마련된 ‘산’을 한정하는 ‘기름진’에 상응합니다. 아름다움은 포도원에 내재한 속성이나 특징을 보여주는 표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속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포도원입니다.

 

(2) 포도원지기 여호와(3-5)

 

여호와께서 직접 포도원지기가 되어 포도나무에 물을 주시고 아무도 해하지 못하게 밤낮으로 지켜주십니다(3). 포도원에 원두막 대신 망대를 세우셨던(5:2) 여호와께서 밤낮으로 함께하시며 포도원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고 해가 되는 것부터 포도원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밤낮으로 간수 하여’는 내용상 4:5의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과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에 상합니다. 구름에 명하여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포도나무가 시들지 않게 그대그대 물을 주십니다. 기름진 산에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리다가 실망하셨던 여호와께서 포도나무가 잘 자라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도록 하나하나 직접 돌보십니다. 좋은 포도(정의와 공의)를 맺은 포도원에 진노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성내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4). 진노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과 축복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찔레와 가시’가 발견되면 여호와께서 맞서 싸워 그것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실 것입니다. 찔레와 가시가 5:6에서는 심판으로 황폐해진 포도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참조.7:23-24), 여기서는 여호와의 포도원을 해하려는 적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참조. 9:18; 10:17).

당신 포도원을 적에게 넘겨 먹힘을 당하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적의 침략에서 아름다운 포도원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포도원을 침략하려는 적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침략을 포기하고 여호와의 보호(‘힘’)에 매달려 그분과 화친하는 것뿐입니다(5).

‘내 힘을 의지하고’는 ‘내 보호에 매달리고’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의 제단 뿔에 매달려 생명을 구하는 것처럼(왕상 2:28) 그분의 보호에 매달려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불꽃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찔레와 가시이지만, 여호와의 보호를 찾아 그분께 매달린다면 평화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3) 야곱의 소생(6)

 

‘그 날에’로 시작하는 포도원의 표상이 후일에는 으로 시작하는 6절에서는 나무의 표상으로 바뀝니다. 포도원의 비유가 여호와의 보호에 초점을 맞췄다면, 나무의 비유는 번성의 축복에 집중합니다.

야곱은 뿌리를 내리고, 이스라엘은 싹이 트고 꽃이 피어 세상을 열매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밑동이 잘려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나무가 다시 싹이 트이고 자라는 것처럼 멸망한 이스라엘에 소망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흔들리지 않게 회복되고 크게 번성합니다. 야곱은 종말론적 회복에 북왕국의 이스라엘도 포함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는 이스라엘에 임한 복이 온 땅에 함께할 것을 시사해줍니다. 종말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과 축복은 세상에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세상도 이스라엘의 구원과 축복에 참여합니다. 여호와께서 족장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창 12:3)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견책(7-11)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고 구원을 얻는 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죄악이 가볍기 때문이거나 혹은 합당한 회개를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인간의 내세울 만한 어떤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이 큼에도 불구하고 ‘적당하게’ 치셨고 쉽게 회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셨습니다.

 

7주께서 그의 백성을 치셨던들 그의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8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9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숴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10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 받아 광야와 같은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11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7-11)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의 원수들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도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심하게 견책하십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자기 백성을 그들이 쓸모없이 되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견책은 ‘적당한’ 것과 다시 말해 자비로운 것입니다.

 

(1) 야곱의 용서(7-9)

 

선지자 이사야의 시선이 종말의 구원 시대에서 현재의 심판로 시대로 돌아옵니다. 교육적 성격을 갖는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7). ‘그를 친 자들을 치신 것처럼 그분께서 그를 치시겠느냐? 그를 죽인 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그분께서 그를 죽이시겠느냐?’ 전에 여호와께서 지상의 어떤 세력을 도구로 사용하여 야곱을 거의 죽을 정도로 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심판은 혹독하기는 했지만, 무제한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친 자들에게 임한 심판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집니다. 그분께서는 이들을 다 죽이셨지만, 이스라엘은 죽음에 넘기지 않으시고 내쫓기만 하셨습니다(8).

야곱을 친 적의 신분에 관해서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 문맥에서는 독자의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등) 읽을 수 있습니다. ‘적당하게 견책하사’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백성이 쫓겨났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야곱의 심판과 추방은 여호와의 일방적-임의적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불의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폭풍으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강한 바람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람, 곧 민족들을 보내 야곱을 쳐서 멀리 내쫓으셨습니다. 동풍은 요단 동편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메마른 바람으로 식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해가 됐습니다. 여호와께 거의 죽도록 맞고 내쫓긴 야곱이 죄사함을 받습니다. 불의의 용서는 조건적입니다. 용서받기 위해 야곱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은 우상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9).

야곱은 먼저 멸망으로 이끌었던 우상들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부끄러운 과거와 단절함이 없이는 새로운 출발도 없습니다. 제단과 아세라와 분향제단은 산당에 속한 제의 도구들이었습니다.

 

(2) 견고한 성읍의 멸망(10-11)

 

용서함을 받는 야곱과 달리 견고한 성읍은 파괴되고 영원히 황량하게 버려져 사람은 살지 못하고 가축의 차지가 됩니다(10). 풀도 제대로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서 송아지가 나무줄기까지 벗겨 먹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황량하게 버려진 성읍은 7절에서 이스라엘을 친 자들의 성읍으로 여호와께 적대적인 세력을 대표합니다(참조. 24:10; 25:2-3; 26:5).

11절은 다시금 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멸망할지를 보여줍니다. 줄기가 벗겨진 나무의 가지가 말라 꺾어지면 여자들이 와서 그것들을 모아 장작으로 사용합니다. 나무마저 사라진 황량한 곳이 됩니다. 폐허가 된 성읍에는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소망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읍의 주민들이 지각없는 백성이기에 멸망당한 성읍에 여호와의 긍휼과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의 파괴에서 여호와의 (보편적) 의지를 읽고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멸망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합니다. 이들의 지각없음이 그분 은총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 날에’(12-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의 다른 주인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만을 자신의 참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12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 13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12-13)

 

24-27장의 최종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치종적인 회복과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견책하실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회복시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할 것입니다. 심판으로 파멸당하는 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드에게는 위대한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1) 하나하나 모으시는 여호와(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이삭을 터십니다. 밭에 떨어진 이삭을 하나하나 줍듯이 여호와께서 이방인들과 뒤섞여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하여 불러내십니다. ‘하수에서부터 애굽시내에까지’는 원래 다윗 왕국의 영토를, 후에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국경선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다윗의 옛 영토에 사는 자들을 골라내어 모으실 뿐만 아니라, 앗수르 땅과 애굽 땅에 흩어진 자들도 고토로 불러 모으십니다.

 

(2) 흩어진 자들의 귀향(13)

 

이방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큰 나팔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예루살렘 성산에서 그분께 경배를 드립니다. 멸망하는 자들은 유배당한 자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동화될 위험에 처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주를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반면 주의 백성들은 제법 아픈 일을 겪겠지만 멸망하진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 고난과 아픔을 주시겠지만, 그건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쳐서 회복시키기 위한 견책입니다. 성도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예배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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