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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5-01)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펼쳐진 잔치

이사야 25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대적을 꺾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며 왕좌에 앉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시기는 환난과 심판의 시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기쁨으로 찬양하게 하십니다.

 

  • 24장 21-23절은 여호와의 종말론적 잔치를 선포하는 25장 6-8절에 사건적으로 이어집니다.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을 멸하시고 시온 산에서 왕이 되신 여호와께서 친히 잔치를 배설하시고 민족들을 손님으로 초대하십니다. 민족들이 여호와의 왕권에 온전히 참여합니다. 문맥에 따르면, 땅의 심판이 역설적으로 민족들에게 여호와께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줍니다.

 

감사의 기도(1-5)

우리의 삶에는 가장 좋은 것이 선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산인 교회에서 그 잔치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름진 것과 가장 좋은 포도주를 먹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것만 찾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1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2주께서 성읍을 돌 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4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5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1-5)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상한 얼굴을 보이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분노의 얼굴을 보이십니다. 이사야는 모든 열방을 심판하시고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 찬양으로 부름(1)

 

시인(예언자)은 ‘여호와’를 부르며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가 사적으로 알고 있는 ‘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 견고한 성읍의 멸망(2-3)

 

물론 2-5절의 내용이 보여주듯이 시인은 공동체를 대신하여 기도합니다. ‘기사’는 원래 전쟁이나 억압에서 해방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한 여호와의 구원행위 또는 시인이 경험하는 구원사건을 가리킵니다. 현재의 종말론적인 문맥에서는 마지막 때의 환난에서 해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참조. 14:24; 22:11; 37:26)는 여호와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땅의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임의로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리 세우신 계획대로 신실한 자들에게 기사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성실함과 진실함’은 그분 구원행위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감사의 근거가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시인은 어떤 성의 멸망에 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폐허로 만든 성이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것입니다(2). 돌무더기가 된 성이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24:10에 언급된 ‘혼돈의 성’과 일치시키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멸망 당해 돌무더기가 된 성읍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성읍이라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불의한 성읍의 멸망은 시인에게 여호와의 계획 속에 확정된 포학한 민족들의 심판을 예고해주는 서막이었습니다. 성읍의 멸망은 그가 드리는 감사의 일부에 속했습니다. 그는 현재의 경험으로부터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기사’의 확실성을 깨닫습니다. 그는 그분의 개입에 의한 가난한 자들의 구원과 포학한 자들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며 그분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3) 피난처 여호와(4-5)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강한 민족’은 이스라엘보다는 2절과 관련해 성읍이 파괴된 이방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좀 더 일치합니다.

4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포학한 자들에 시달리는 ‘빈궁한 자’와 ‘환난 당한 가난한 자’로, 강한 민족이 아닙니다. ‘경외하리니’는 ‘두려워하리니’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정복당한 ‘강한 민족’은 자신을 정복한 여호와를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주변의 다른 ‘포학한 나라들’은 그분을 두려워하기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에 변함없는 신뢰를 내보이며 그분께 도움을 기대합니다(4-5). 그는 여호와께서 곤경에 빠진 자들의 요새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분만이 압도적인 폭력에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생명을 보호해주실 수있습니다. 그분만이 폭우에는 피난처가, 폭염에는 그늘이 되어주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뜨겁게 달궈진 폭염은 생명에 적대적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여호와는 포학한 자들을 억누르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방인의 소란’은 출정하는 병사들의 함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이스라엘)를 짓밟으려는 포학한 자들에게 승리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종말론적 잔치(6-8)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만드신 포도주가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것으로 내어놓으십니다. 최고의 음식은 정성의 결과요 상대방을 향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끝난 후 백성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6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8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6-8)

 

하나님의 잔치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왕노릇하던 사망은 더 이상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던 사망이 오히려 영원히 멸망 당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잔치를 베푸십니다. 내놓은 음식은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했던 포도주입니다.

 

(1) 민족들을 위한 잔치(6)

 

왕의 대관식에 뒤이어 축하 잔치가 열리듯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연회를 준비하시고 ‘만민’을 초대하십니다(6). 연회를 베푸시는 분은 ‘만군의 여호와’로, 이 이름은 24-27장에서 오직 이곳과 24:23에서만 등장합니다. 연회가 벌어지는 장소는 ‘이 산’으로, 여호와께서 왕이 되신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은 ‘만민’으로, 여호와의 종말론적 통치에 땅의 모든 민족이 참여합니다. 종말론적 전쟁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적대 세력을 물리치시고 시온 산에서 보좌에 오르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의 왕이 되십니다. 여호와께서 연회에 초대받은 민족들을 위해 최상의 음식과 포도주를 준비하십니다.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은 고기보다는 기름에 요리한 음식을 가리키고,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는 오래 저장하여 잘 숙성시킨 최고의 포도주로 잔치 자리의 기쁨을 더해줍니다. 시온 산에서 베풀어지는 연회는 단순한 축하연이 아닙니다. 연회에 참여한 모든 민족에게 여호와께서 놀라운 선물을 주십니다.

 

(2) 슬픔의 제거(7)

 

그분께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십니다(7). 민족들에게 씌워진 가리개와 덮개는 영적 무지(참조. 고후 3:13-18) 보다는 슬픔의 표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애도의 표시로 얼굴을 천으로 가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참조, 삼하 15:30; 19:5; 렘 14:3-4). 민족들은 죽은 자들, 특히 전쟁에서 쓰러진 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다시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3) 죽음의 폐지(8)

 

여호와의 종말론적 통치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약속해줍니다. 그분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민족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8). 죽음이 사라지기에 애도를 위해 얼굴을 가리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어집니다. 항구적인 기쁨과 구원이 주어집니다. 구약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죽음의 영원히 멸망’은 종말에는 모든 민족이 여호와의 통치와 보호 아래 안전하게 살아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재앙에서 해방시켜 영원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 아래 사는 자들에게는 전쟁도, 질병도, 기근도, 자연재해도, 사회적 불의나 불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땅에서 제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남은 자들의 구원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들을 위해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종말론적 연회를 준비하신다는 점에서 이 단락은 매우 독자적입니다. 시온을 찾는 민족들의 순례는 여러 곳에 등장하지만(2:2-4; 시 96:7-8; 슥 14:16 등), 이곳에서만 민족들은 여호와의 초대를 받아 시온 산으로 올라옵니다.

 

감사와 모압의 멸망(9-12)

성도들은 이 땅에서 겪는 고통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이 땅에서 겪는 고통 때문에 주님을 더 사랑하고, 천국잔치를 더욱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감사한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눈물이 있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9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10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의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11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 12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9-12)

 

세상에서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과 더불어 일생을 살게 됩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은 영생을 누리면서 얻을 영광과 비교할수 없고, 이 땅에서 겪었던 고통의 크기도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면서 누리는 기쁨의 크기와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고통 때문에 낙망하지 말아야합니다.

 

(1) 이스라엘의 응답(9-10a)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왕으로 통치하실 때(‘그 날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경험하고 이들의 적인 모압은 멸망을 당합니다. 아직은 수치 가운데 있지만, ‘우리’ 공동체는 임박한 구원을 기대하며 기뻐합니다. 곧 재앙의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소망을 두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고 미리 그분의 구원을 환호하며 즐거워합니다. 10a절의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여호와의 지속적이고도 완벽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2) 모압의 명망(10b-12)

 

시온 산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과 대조적으로 모압은 ‘자기 처소에서’, 곧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짓밟힐 것입니다. 모압의 절망적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타작마당을 거름 구덩이로 옮겨 놓습니다. 지푸라기가 거름 구덩이에서 짓밟히듯이 그렇게 모압이 짓밟힐 것입니다(10b). 11절에서도 비유를 사용해 모압의 헛된 노력을 조롱합니다. 헤엄치는 자가 손을 뻗어 헤엄치듯이 모압도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헤엄을 치지만, 모압이 빠진 구덩이는 거름 구덩이이기에 그의 능숙한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깊이 빠져들어 갈 뿐입니다. 그의 교만(자부심)이 목숨을 구해주지 못합니다. 모압은 교만과 함께 거름 구덩이에 빠져 죽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고 낮추어 진토에 미치게 하실 것입니다(12). 자신의 높음(교만)을 자랑하던 모압이 완전히 허물어져 땅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낮아집니다. 모압은 회복이 불가능하게 완전히 멸망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 수치를 가하는 모압과 같은 나라는 여호와의 종말론적 연회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잔치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풍성함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 땅에서의 모든 고통과 눈물을 하나님께서 제거하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며 그 잔치를 사모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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