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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0-03)


남은 자들을 위한 희망

이사야 10장 20-34절


 

부모가 매를 드는 것은 자신이 그릇된 길에서 떠나 올바른 삶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매로는 부족해 몽둥이를 들어야 할 만큼 악행과 패역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을 어떻게 다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는 어떻게 들어나겠습니까?

 

  • 지상의 권력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고구로, 그분께서 맡긴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교만한 권력을 징계하시고, 누가 역사의 결정권자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남은 자와 시온의 구원(20-26)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을 심판하십니다. 택하신 백성일지라도 공의로 판단하시고 불순종을 심판하십니다. 전쟁의 참회뿐 아니라 포로로 잡혀 이방 땅에 끌려가게 하십니다. 열매 없이 안녕을 장담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모르고 근거 없이 미래를 낙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안일함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20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24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 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25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26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20-26)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와중에도 살아남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소수이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유질될 것입니다. 돌아온 자들은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남은 자(20-23)

 

이제 처음 두 절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관하여’ 말하고, 다음 두 절은 ‘남은 자에게’ 말합니다. 이 내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약속(21,22)으로 서로 연결됩니다.

이사야의 시선이 심판 이후를 내다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여호와께로 돌아옵니다.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은 일차적으로는 북왕국의 남은 자들을 가리키지만, 유다도 유사한 운명을 경험하기에 이차적으로 포함됩니다. 앗수르에 멸망당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회개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께로 돌아옵니다.

‘자기를 친 자’는 앗수르를 가리킵니다. ‘진실하게’는 이들의 신앙적 성실성을 보여줍니다. 과거와 달리 입술로만 여호와를 찾지 않고 전심으로 그분만 의지합니다.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기로 한 그분의 결정은 공의로운 결정으로 어떤 경우에도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심판 선포 가운데 특이하게 족장들에게 준 후손의 약속이 배경으로 언급됩니다.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들아오리라.’ 일부만 파멸을 모면할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소수만 돌아온다는 말이 족장들에게 준 약속, ‘내가 네게 큰 복음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창세기 22:17; 출애굽 32:13)의 파기를 뜻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이 씨가 됭 ㅓ다시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고 갱신됩니다.

 

(2) 시온의 구원(24-26)

 

앗수르는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기에 불과하기에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앗수르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래지 않아 예루살렘에 대한 진노를 그치시고, 당신의 의도를 무시한 채 절대 권력을 주장하며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행동하는 앗수르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앗수르에 의한 압제가 애굽 종살이에 비교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강제노역을 했던 것처럼(애굽이 한 것처럼) 유다가 앗수르에 주권을 빼앗기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합니다.

앗수르로부터의 해방이 제2의 출애굽 사건이 될 것입니다.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은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남다른 관계를 시사해준다.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서(8:18)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의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배반하고 당신을 떠난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당신과 함께하는 당신 백성으로 불러주십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그분의 분노가 ‘오래지 아니하여’ 그치고,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자들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앗수르가 휘두르는 몽둥이는 예루살렘에서 더러움을 씻어내는 정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합니다. 동이 트기 직전에 어둠이 가장 짙은 것처럼 구원의 도래도 그러합니다. 사사 시대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택하여 미디안을 진멸하고 그 방백 오렙을 오렙 바위에서 죽이신 것처럼(사사기 7:25), 추격하던 바로의 기병대를 홍해에서 몰살하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앗수르 군대를 진멸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진노하여 앗수르의 손에 붙이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와 그분 백성 이스라엘의 관계가 처음처럼 회복됩니다(이사야 1:24-27).

 

앗수르 군대의 진격과 패배(27-34)

하나님께서는 힘들 때 격려하십니다. 불순종에 대한 징계는 잠시일 뿐이고 인애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시련의 시간을 두려움 없이 견뎌가야 합니다. 공의를 넘어 인애를 원하시는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앗수르가 몽둥이를 들어 칠지라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미디안을 꺾었듯이 앗수르의 손에서 건지겠다고 약속하십니다.

 

27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28그가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그의 장비를 두고 29산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는 도망하도다 30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지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31맛메나는 피난하며 게빔 주민은 도망하도다 32아직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33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34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27-34)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치고 예루살렘까지 내려오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그 동안 주로 사용했던 침공 경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앗수르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내려와서 예루살렘을 위협할 것입니다.

 

(1) 벗겨지는 앗수르의 멍에(27)

 

‘그 날에’로 시작하는 27절은 앗수르 군대의 진격(28-32)에 관한 도입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앗수르의 예루살렘 진격과 더불어 예루살렘의 해방에 관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앗수르의 예루살렘 침략이 하나님을 배반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정점이자 구원의 출발점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무거운 짐과 멍에에서 예루살렘을 구해주기로 하셨기에, 앗수르의 위협은 겉보기와 달리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뿐이다.

‘무거운 짐’은 경제적 수탈을 포함한 잔혹한 억압을, ‘멍에’는 이방 통치자에 의한 자유의 박탈을 상징합니다(9:4). 아람과 에브라임이 예루살렘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때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지불한 정치적 종속과 막대한 조공의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2) 진격하는 앗수르 군대(28-32)

 

하나의 문장에 하나의 지명을 언급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는 침략군의 루트를 아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28-32). 북왕국에서 남왕국으로 가는 간선도로는 사마리아에서 벧엘과 미스바와 라마와 기브아를 지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입니다.

28-29절에 따르면 침략군은 간선도로가 아니라 벧엘에서 동쪽으로 우회해서 아이와 믹마스를 지나 남서쪽의 협곡을 거쳐 게바로 내려갑니다. 게바에서 어디로 향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침략군은 다시 북쪽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

29b-31절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 주민들의 반응을 묘사합니다. 기브아와 맛메나와 게빔의 주민들은 벌써 도망쳤고, 다른 지역의 주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공황에 빠집니다. 군사 원정은 3일을 전제합니다. 침략군의 계획에 따르면, 진군 첫째 날은 게바에서, 둘째 날은 예루살렘을 시야에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놉에서 야영하고, 셋째 날에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침략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할 만한 거리까지 왔지만,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37:33-34).

 

모두 열세 곳의 지명이 나옵니다. ‘아얏’은 아이의 여성형으로 벧엘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2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믹마스’는 예루살렘에서 12km 북동쪽에 위치했다. 북왕국이 멸망한 후에 믹마스는 앗수르 지방의 국경도시로 유다를 공격하기 위한 후방 기지로 활용됐습니다. ‘산’은 믹마스와 게바 사이에 있는 와디를 가로지르는 협곡의 통로로 사무엘상 13:23에는 ‘믹마스 어귀’로 나옵니다. ‘게바’는 협곡을 중심으로 믹마스 맞은편, 대략 2km 남서쪽에 위치했습니다. ‘라마’는 게바에서 서쪽으로 3km,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간선도로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했습니다. ‘사울의 기브아’는 라마에서 남쪽으로 4km,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5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5km 떨어진 곳으로 솔로몬에 의해 쫓겨난 제사장 아비아달이 추방된 곳(열왕기상 2:26)이자 예언자 예레미야의 고향(예레미야 1:1)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근교에 속하는 ‘놉’은 사울의 기브아에서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으로, 아마도 올리브 산의 북쪽 산봉우리 가운데 하나에 위치했던 것 같습니다.

 

(3) 대적의 패배(33-34)

 

갑자기 여호와께서 등장해 침략자에게 맞서십니다(33-34). 여호와께서 나무꾼이 되셔서 ‘혁혁한 위력으로’ 가지를 잘라내십니다. 드높이 솟은 나무들이 잘려나가 낮아집니다. 그분께서 쇠도끼를 들고 레바논의 화려한 아름드리나무들을 잘라내십니다. 레바논의 산림은 고대 근동에서 유명하였습니다. 특히 레바논 산지에서 자라는 백향목은 재질이 뛰어난 최고의 목재로 왕궁과 성전을 건축하는 데 사용됐습니다(열왕기상 6:15-32;7:2; 이사야 40:16).

여호와께서 잘라버리시는 가지와 레바논 백향목의 비유가 가리키는 대상은 문맥을 통해 결정할 수 있습니다. 10장의 문맥과 유사한 비유가 사용된 10:17-20에 따르면 앗수르일 수도 있고, 나무가 잘리고 그루터기만 남은 것을 전제하는 11:1의 문맥에 따르면 예루살렘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에 따르면, 하늘 왕께서 정해놓은 한계를 넘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는 앗수르의 교만이 심판을 받고, 후자에 따르면 여호와께 의존하기를 거절한 예루살렘 왕궁의 통치자들이 징벌을 받습니다. 양자의 해석은 모두 이사야의 선포와 일치합니다.


앗수르 군대가 코앞까지 몰려와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선지자는 우뚝 솟은 나무를 찍어 쓰러뜨리시는 하나님을 전하며 전능하신 분의 존재를 알립니다. 앗수르는 진군하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위기 상황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두려움이 없이 주를 의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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