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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9-01)


흑암의 땅에 빛으로 오신 메시아

이사야 9장 1-7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던 죄를 사하시고, 빛의 백성으로 새롭게 지으셨습니다. 공평과 의로 다스리는 평강의 왕의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는 세상 중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까?

 

  •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구원의 빛이 비칩니다. 특별한 이름이 주어진 한 아이가 태어나 절망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구원 시대를 열 것입니다. 구원 시대의 통치자는 왕의 홀의 권위에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렸던 지금까지의 왕들과 달리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구현합니다. 흔들리던 다윗 왕조의 토대가 그를 통해 다시 굳건하게 세워집니다.

 

역사적 배경(1)

 

역사에는 역설과 아이러니가 가득합니다. 초라한 나라가 어느 순간 강대국이 되고, 패권을 쥐고 있던 나라도 한순간에 패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예측할 수 없는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예언하시고 때가 되면 성취하십니다. 역사는 방향 없이 표류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1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

 

짙은 어둠 속에서 고통 받던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흑암이 사라지고 구원의 빛이 동터 옵니다. 전에 이스라엘로 멸시를 당하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옛적에 멸시를 당한지역은 갈릴리 북쪽에 정착한 이스라엘 두 지파의 땅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에 용맹을 떨쳤던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사사기 4:6-10;5:18; 6:35)는 주전 9세기 이후 시리아 남쪽에 정착한 아람의 팽창과 더불어 세력이 급격히 약화했습니다. 하사엘과 벤하닷 시대에는 거의 다메섹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후에’ 영화롭게 되는 지역은 북왕국의 심장부에 속하는 에브라임 산지를 서쪽과 동쪽과 북쪽에서 에워싸고 있는 지역입니다. 해변 길은 애굽과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이어주는 통상로가 지나는 갈멜 산 남쪽에서 욥바까지의 해안 평야 지대를, ‘요단 저쪽’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지방을, ‘이방의 갈릴리’(이방 민족들의 지역)는 이방 민족들이 뒤섞여 사는 남부 갈릴리 지역을 가리킵니다. 열왕기하 15:29에 의하면 다메섹과 에브라임을 징계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이스라엘에서 ‘이윤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빼앗아 앗수르의 영토에 병합시켰는데, ‘후에’ 영화롭게 될 지역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북 왕국의 영토 가운데서 주전 733년 앗수르에 빼앗긴 지역의 회복을 내다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구원을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보을 보았고, 암흑의 땅에 사는 자들에게 빛이 비쳤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은 ‘흑암’의 동의어로 ‘짙은 어둠’올의 표상이고(욥 10:21-22), 빛은 행복과 구원의 상징입니다(암 5:20; 시 27:1). 환난과 고난 가운데 사는 자들이 생명의 빛을 봅니다. 어둠이 여호와의 부재(심판)라면, 빛은 그분의 현존(구원)을 의미합니다.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돌아오셔서 빛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구원의 기쁨(2-3)

하나님의 경륜은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습니다. 버려진 땅, 어둡고 소외된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빛을 비추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말씀하시고, 완료형으로 선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이 너무나도 확실해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는 화법입니다.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2-3)

 

이사야는 여호와의 구원을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보고 감사하며 노래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암흑의 땅에 사는 자들에게 빛이 비쳤습니다.

 

(1) 큰 빛을 보는 백성(2)

 

‘사망의 그늘진 땅’은 ‘흑암’의 동의어로 ‘짙은 어둠’을 의미합니다. 흑암과 짙은 어둠은 저주와 죽음과 스올의 표상이고(욥기 10:21-22), 빛은 행복과 구원의 상징입니다(아모스 5:20; 시편 27:1). 환난과 고난 가운데 사는 자들이 생명의 빛을 봅니다. 어둠이 여호와의 부재(심판)라면, 빛은 그분의 현존(구원)을 의미합니다.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돌아오셔서 빛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2) 주 앞에서의 기쁨(3)

 

그분의 빛이 어둠을 쫓아내고 환히 비추기에 나라가 번성하고 즐거움이 많아집니다. 이방 민족들에 짓밟혔던 지역이 다시 회복되고 삶이 생기와 즐거움을 되찾습니다. 빛 가운데 살게 된 자들은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처럼 그분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한 해 동안 애써 수고하고 땀 흘린 후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며 기뻐하듯이, 죽음의 위험을 이겨내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전리품을 나누며 기뻐하듯이 여호와의 구원을 기뻐합니다.

 

기쁨의 내용(4-7)

성경은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의 대상이며 경외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모호함과 아이러니를 타파하고 명징한 하나님의 계획이 설 것입니다. 성도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도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4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4-7)

 

아하스의 시대에 대안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펄쳐 보이실 당신의 방법은 ‘한 아이’의 출생입니다. 그가 지혜롭고 강하고 영원하고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나라를 기어이 이루실 것입니다.

 

(1) 압제에서 해방(4)

 

첫째는 이방 민족의 압제에서의 해방입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나무와 압제자의 막대기를 미디안의 날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4). 여호와께서 사사 시대에 기드온을 도와 미디안을 쳐서 진멸하셨던 것처럼(사사기 6-7장), 이방의 탄압과 폭력에 신음하며 고통당하는 백성을 해방하십니다. ‘무겁게 멘 멍에’는 외부 세력에 의해 강제된 자유의 상실을 상징합니다. ‘압제자’는 원래 부역 감독관을 의미합니다(출애굽기 3:7; 5:6,10,13,14). 애굽의 강제 노역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구해내신 여호와께서 다시 그 후손을 앗수르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되찾아 주십니다.

‘미디안의 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이방민족의 손에서 구출하시는 날로, 사람들의 눈에 불가능해 보이는 구원과 승리가 그분의 간섭과 도움으로 주어질 것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약소국 이스라엘이 초강대국 앗수르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정치적 시각에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민족들을 ‘통의 한 방울’ 같이, ‘저울의 작은 티끌’ 같이 여기시는(40:15) 분의 입장에서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2) 전쟁에서 해방(5)

 

둘째는 전쟁의 승리 또는 폐지입니다. 땅을 흔들 듯이 요란하게 내딛는 군화와 피로 뒤범벅이 된 겉옷이 모두 불꽃의 먹이가 되기 때문입니다(5). 이방 압제에서 해방된 백성이 다시는 전쟁에 휩쓸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고대 세계는 거듭 파멸적인 크고 작은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앗수르는 수시로 군사 원정을 떠났고, 이들의 출정 소식만 듣고도 주변 나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은 폐허가 됐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사로 잡혀갔습니다. 이사야는 2:4에서 싸울 일이 없어져 무기가 불필요해지는 평화의 시대를, 11:6-9에서는 사람과 동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를 내다봅니다.

 

(3) 한 아이의 출생(6)

 

셋째는 한 왕적 인물의 출생입니다. 통치권이 그의 어깨에 있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6). 여호와께서 주신 정치적 자유와 평화가 한 아기에 의해 지속적으로 보장됩니다. 왕위 계승권자의 출생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굳건한 왕권은 땅 위의 질서와 평화를 보장하는 전제 조건으로, 이를 보여주는 왕위 계승권자의 출생은 백성에게 복된 소식이 됩니다.

이사야는 특이하게 아이가 거듭 ‘우리에게’ 태어나고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면, 아이에 대한 이사야의 기대를 읽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앗수르를 선택한 아하스의 과오가 이 아이에 의해 극복될 것입니다. 아하스와 달리 이 아이는 여호와께 의지하는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아이의 신분은 그가 왕적 인물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호하게 남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네 개의 이름은 그의 통치권의 특별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이름 ‘놀라운 기획자’는 통치자의 자질과 능력이 담긴 이름입니다. 기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능력은 왕에게 필수적입니다. 물론 놀라운 일의 계획과 실행은 궁극적으로는 여호와께 속한 일입니다(이사야 29:14; 시편 77:14). 두 번째 이름 ‘전능하신 하나님’은 ‘용맹한 하나님’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왕은 최고의 용사로 백성 앞에서 적과 싸웁니다(사무엘상 8:20). ‘용사’는 하나님께 적용되기도 합니다(신명기 10:17; 이사야 10:21). 왕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경우는 시편 45:6이 유일합니다. 세 번째 이름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왕과 백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과 왕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하듯이(사무엘하 7:14; 시편 2:7; 89:26) 왕은 백성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합니다(이사야 22:21). 왕은 아버지로서 백성을 보호하고 이들의 안녕을 염려하고, 백성은 왕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시편 72:5, 17). 그러나 원칙상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하나님께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네 번째 이름 ‘평강의 왕’은 ‘평강의 통치자’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평강(샬롬)은 좁게는 전쟁의 대립 개념이고, 넓게는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실존을 가리킵니다. 현재 문맥에서는 정의와 공의에 따른 통치의 결실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통치자는 왕이신 여호와의 통치를 땅에서 대신합니다. 정리하자면, 처음 세 이름은 원칙상 여호와께 속한 것들이고, 네 번째는 땅의 통치자에게 사용되는 이름입니다. 이 네 이름은 구원 시대의 통치자로 태어난 아이와 여호와 사이에 내재하는 특별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아이를 통해 여호와의 통치가 구현됩니다.

 

(4) 영원한 통치(7)

 

특별한 이름이 주어진 아이는 다윗의 보좌에 앉아 그의 나라를 영원히 평화롭게 통치할 것입니다(7; 사무엘하 7:16).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기에 그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열어주신 구원 시대가 아이에 의해 결실을 봅니다.


빛은 비추었고, 우리는 어둠에서 해방되어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의 통치 아래 사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죄에 종노릇 한다면 영원한 사망이 있을 거라고 경고합니다. 의로우신 왕의 진리를 따라 의의 종이 되어 세상을 밝게 비추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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