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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7-02)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아하스

이사야 7장 10-25절


 

같은 일, 같은 사람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과부가 드린 동전 두 개는 사람들이 보기에 적은 헌금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장 많은 헌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참된 신앙인이라고 여겼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세리가 더 바른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사야와 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하겠습니까?

 

 

  • 첫 번째 신탁을 거절한 아하스에게 여호와께서 다시 신탁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준 약속을 지키려고 쓰시고 아하스는 여호와를 왕궁의 정치에서 배제 시키려 애씁니다. 아하스는 어떠한 징조라도 구하면 주겠다는 여호와의 제안을 경건으로 포장해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여호와의 구원 의지가 아하스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만들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

 

아하스에게 주는 두 번째 예언(10-17)

 

하나님께서는 시험해야 할 대상은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모든 경우에 불경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시험을 명령하기도 합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라고 아하스 왕에게 말했습니다. 이 명령을 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10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대저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17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10-17)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징조를 구하게 하여 믿음의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하지만 왕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며 거절합니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거역이자 오만입니다. 경건을 가장하여 하나님을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1) 하나님의 제안과 아하스의 거절(10-11)

 

르신과 베가의 계획이 반드시 실패하리라는 예언(7-9)을 주셨지만, 앗수르에 의존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아하스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하스의 결정에서 다윗 왕조의 멸망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기를 보셨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구원 약속의 확실성을 확인할 수 있는 아무 징조라도 구하면 이를 들어주겠다고 제안하십니다(11).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는 다른 예를 찾을 수 없는 파격적 제안으로, 아하스와의 개인적 관계보다는 다윗 왕조와 유다가 직면한 사태의 심각성과 중요성에서 기인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징조를 통해 신뢰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을 아하스는 경건을 가장한 위선적 신앙으로 거절합니다(12). 그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군사적 위협과 관련해 여호와의 능력과 의지를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간접적이지만, 정치영역에서 여호와의 주권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2) 책망과 징조 (13-14)

 

‘다윗의 집’은 사람들을 괴롭힐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괴롭힙니다(13). 이들은 백성을 전쟁의 위험에 빠뜨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실 수 없게 만듭니다. 아하스의 거절로 여호와께서 어려운 처지에 빠지십니다. 그분의 약속과 다윗의 집의 불순종이 충돌합니다.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준 약속에 신실하셔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윗 왕조의 불순종에 대해 그분은 눈을 감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라는 제안을 거절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다윗의 집에 징조를 주십니다(14). 불순종을 책망한 다음에 주어진 임마누엘 징조의 해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3) 징조의 해석 (15-17)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으로, 불의한 자에게는 심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사야의 문맥에서도 임마누엘의 징조는 이중적입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을 선포하는 16절에 따르면 구원의 징조가 되고, 유다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파멸적 재앙을 선포하는 17절에 따르면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임마누엘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처녀’로 번역한 ‘알마’는 의미상 처녀를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처녀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너희’에게 징조로 주어졌기에 ‘처녀’와 ‘임마누엘’은 아하스가 알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아기 임마누엘은 악을 물리치고 선을 택할 줄 알 때까지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입니다(15). ‘엉긴 젖과 꿀’이 구원의 양식인지 고난의 양식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전자라면 짧은 평안의 시기가 끝나고 긴 고난의 시대가 오고, 후자라면 짧은 고난의 시기가 지난 후에 안정과 번영의 시대가 옵니다. 징조의 이중성은 여호와의 약속과 아하스의 불순종의 충돌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16)은 다윗에게 준 약속을 지키시려는 여호와의 결정이기에 아하스의 선택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7-9a). 그렇다고 여호와께 의지하기를 거절한 다윗 집안의 불순종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9b). 그분은 아하스가 구원자로 선택한 앗수르를 불러 유다를 심판하십니다(17).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은 자기 계획 따라 예루살렘을 침략하려는 북쪽의 두 나라뿐만 아니라, 구원 약속을 거절한 유다에도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아하스가 다윗 왕조의 신학적 초석이신 여호와 배반하고 앗수르를 택함으로써 구원의 징조가 될 수 있었던 임마누엘이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심판의 도구 앗수르와 애굽(18-25)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배신, 패역함, 불순종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순종하며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18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20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21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23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24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18-25)

 

왕이 의지했던 앗수르는 유다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황무지가 되고 유다는 큰 수치를 겪을 것입니다. 당장 어려움이 해결되었다고 축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배가 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징조와 은혜를 입었다면,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1) 심판의 도구 앗수르와 애굽(18-20)

 

18-25절의 ‘그 날에는’으로 시작하는 세 개의 말씀은 17절의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난 때부터 당하여보지 못한 날’의 구체적 설명입니다. 아하스의 불순종이 유다에 파국적 재앙을 가져옵니다. 이사야는 애굽과 앗수르 군대를 파리와 벌에 비유해 유다에 심판을 선언합니다. 벌을 치는 사람이 휘파람을 불어 벌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으듯, 여호와께서 애굽과 앗수르의 군대를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유다가 생존을 위해 조공을 바치고 머리를 숙였던 강대국들이 유다를 침략합니다. 다윗 왕조의 유일한 후원자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앗수르와 애굽에 도움을 구한 유다는 혹독한 수업료를 납부하고 서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깨달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브라데 건너편에서 앗수르를 용병으로 데려와 유다를 치십니다. 사람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머리 털’과 ‘수염’뿐만 아니라 ‘발 털’(음부의 털)마저 밀리는 수치와 모욕을 당합니다.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에서 아하스의 결정에 대한 이사야의 신랄한 풍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에 의존하여 다메섹과 에브라임의 위협을 벗어나려 하지만, 구원자로 불러드린 앗수르에 의해 도리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앗수르는 유다의 아하스를 징계하기 위해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삯으로 주고 불러온 용병이 됩니다.

 

(2) 심판 이후의 삶 (21-22)

 

두 번째 ‘그 날에는’ 말씀이 구원 시대의 축복과 관련된 말씀인지 심판과 관련된 말씀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심판으로 경작지가 황폐해져 농사도 짓지 못하고 최소한의 가축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됩니다.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에서 나오는 젖은 한 가정의 양식으로는 부족한 양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하며 살게 됩니다.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의 해석은 상이합니다. 심판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는 역설 또는 풍자가 됩니다.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어 어린 암소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서 나는 젖으로도 충분히 먹고 남습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진 소박한 구원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심판으로 생활 기반이 다 파괴됐지만, 소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서 온 가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의 젖이 나기 때문입니다. ‘엉긴 젖과 꿀’도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상입니다. 경작지와 가축의 소산과 함께 먹는다면 풍요로운 양식이 되고, 수확물이 부족해 야생의 젖과 꿀에 의존해 생존해야 한다면 심판 시대의 척박한 삶을 보여주는 양식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엉긴 젖과 꿀’은 임마누엘의 양식이기에(7:15) 구원에 대한 암시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절망적 환경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3) 폐허가 된 땅(23-25)

 

백성의 운명 다음에 땅의 운명이 언급됩니다. 땅도 같은 처지에 놓입니다. 5:1-7의 포도원 노래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표상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전쟁으로 거주지와 경작지가 완전히 파괴 됩니다. 은 천 세겔이나 나가는 천 그루의 포도나무가 있던 포도원이 완전히 황폐해져서 찔레와 가시가 자랍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은 한 개는 매우 높은 가격입니다. ‘은 천 냥 값이나 되는 천그루의 포도나무가 있던 곳’은 최고 품질의 포도나무가 심긴 비옥한 포도밭(5:1-2)을 시사하는 표현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풍요로운 결실이 보장된 기름진 포도밭이 찔레와 가시가 자라는 황무지가 됩니다. 야생 동물이나 살 수 있는 곳이 되었기에, 사람들이 거기로 가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해야 합니다. 가나안 ‘온 땅’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됩니다. 경작지로 개간한 산들이 폐허가 돼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소와 양이 풀을 뜯어 먹는 곳이 됩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가장 큰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징조를 통해 기회를 주기 원하시며,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길 바라십니다. 징조를 무시하면 수치와 심판을 당하겠지만 징조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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