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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7-01)


임마누엘을 믿기 원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7장 1-9절


 

사탄이 우리를 무너뜨리고자 할 때 전략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서 낙심하게 만듭니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낙심하도록 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어렸습니다. 성도들은 문제를 만나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다스릴 수 있는 주권자 하나님을 바라봐야할 것입니다.

 

  • 유다 왕 아하스가 통치할 때 아람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위협했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주도한 반 앗수르 연합에 가담하기를 거절한 아하스를 징계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도 반앗수르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외부와 내부의 적으로부터 위협을 당했습니다.

 

역사적 배경(1-2)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작은 위기에도 두려움에 빠집니다. 마음을 흔드는 위기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때, 상황은 완전히 역전될 수 있습니다. 남 유다 아하스 왕과 백성들이 흔들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1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1-2)

 

본문에서 언급된 전쟁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 연합군이 남 유다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앗수르가 제국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반 앗수르 동맹을 형성하고 친 앗수르 정책을 편 남 유다를 침입합니다.

 

(1) 아람과 이스라엘의 위협(1)

 

먼저 사건의 시작과 결말을 요약적으로 알려줍니다.

신흥 강국인 앗수르 압박 속에서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반 앗수르 동맹을 맺습니다. 그들은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을 침공해서 패하고 그들의 꼭두각시 왕은 세우려고 남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당시 아람 왕은 다메섹에서 통치하고 있었던 르신이며, 이스라엘 왕은 사마리아에서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들을 통치하고 있었던 베가 왕이었습니다. 그 왕은 이스라엘 시대에 부가하야 왕 시대에 장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한 자였습니다. 이렇게 이방 왕과 정통성을 가질 수 없는 북 이스라엘 왕은 남 유다왕 아하스가 자신들의 동맹에 참여하도록 압박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침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절에서 이 전쟁은 연합군의 실패로 끝이 납니다. 본문은 전쟁의 목적이나 실패로 끝난 배경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결말만 간단히 언급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략이 별다른 위협이 아니었던 것처럼 거리를 두고 보고합니다.

 

(2) 흔들리는 왕과 백성(2)

 

아람 왕(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베가)이 유다 왕(아하스)에게 동맹을 제안합니다. 이는 반앗수르 동맹을 맺어 남하해 내려오는 앗수르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해 친앗수르 정책을 폈기에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연합해 유다를 먼저 공격해 옵니다(주전 734-733). 두 나라가 예루살렘까지 공격해 들어오자 대항할 힘이 없던 아하스 왕과 백성의 마음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다윗의 집’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절의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베가 왕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인정한 다윗 왕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소문, 연합군의 침입이 전 유다에 알려졌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만으로도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남 유다가 당시에 얼마나 많이 동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남 유다의 두려움과 혼란은 나름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유다의 군사력은 이스라엘을 상대하기에도 버거웠기에,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은 유다에 치명적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따로 노는 듯한 1절과 2절을 함께 읽으면, 두려움에 빠진 왕과 백성의 반응은 부정적 전망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 배후를 보지 못하기에,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6:5)을 바라보지 못하며, 위협 같지 않은 위협에도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나무처럼 떱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격려와 경고의 말씀(3-6)

성도는 사람의 계획에 낙심하지 말고,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만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굳게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의 모든 도모와 계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그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3-6)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아하스 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는 유다를 침략해 아하스 왕을 끌어내리고, 대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계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계획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단언하십니다. 오히려 유다를 멸하려는 북 이스라엘이 65년 내에 패망할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1) 이사야와 스알야숩(3)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아하스를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만남에는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동행하도록 하십니다. ‘스알야숩’은 ‘만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며 반드시 심판이 올 것임을 알리는 역학을 했습니다. ‘스알야숩’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처럼, 이제 이름 자체로서 하나님의 예언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그이 아들 ‘스알야숩’이 군사적인 요충지인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에서 아하스 왕을 만납니다(3). 예언자가 말씀을 전하거나 선포할 때 자식이나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경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또 왕을 만나려면 왕궁을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두 지침은 특별한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남의 장소로 선택된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은 아하스에게 정치적 표징이, 여호와께는 신학적 표징이 됩니다. 아하스가 그곳에 간 목적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할 경우에 대비하여 수로 시설을 점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샘물이나 지하수가 없었기에 물의 확보는 수성의 결정적 요소였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윗못 수도’가 아닌 여호와가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생명수임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전쟁 위협은 다윗 왕조의 영원한 통치를 약속하신 여호와께 의존해 극복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아들 스알야숩의 동반과 관련해서는 이름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8:18에서 이사야는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라고 말함으로써, ‘이사야’와 ‘스알야숩’의 이름이 징조로 사용됐음을 시사합니다. ‘여호와께서 도움이시다’를 의미하는 이사야는 구원의 징조가 되고, ‘(전쟁에서 패하고) 남은 자가 돌아오다’를 의미하는 스알야숩은 심판 징조가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와 스알야숩을 아하스에게 보내 구원과 심판이 그의 결정에 달렸음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아하스는 구원하시는 이사야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정치적 선택을 하면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시는 스알야숩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2) 격려와 경고(4)

 

아람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하스에게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해 격려의 말씀을 전하십니다(4). 이사야는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고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 침착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하십니다. 아하스에게 분노해 전쟁으로 위협하는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의 르말리야의 아들(베가)은 다 타버리고 연기만 나는 장작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에 타버린 장작이 화로나 아궁이에서 꺼내 버려지는 것처럼, 르신과 베가도 이미 세력을 다 상실하고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이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 베가를 거듭 ‘르말리야의 아들’로 부르면서 그에 대한 경멸감을 표출합니다. 베가에 대한 경멸은 그의 왕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열왕기하 15:27-31)는 이스라엘 왕 브가히야(주전 737-736년)의 무관으로 있다가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입니다(열왕기하 15:25).

 

(3) 적들의 계획(5-6)

 

원문에서 접속사 ‘때문에’로 시작하는 5-6절은 문법적으로는 7절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꾸민 계획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획이 아니기에 악하며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들이 세운 악한 계획은 유다를 침략해 반 앗수르 연합에 참여하길 거절한 아하스를 제거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앉히는 것이었습니다(6). 르신과 베가가 아하스 대신 보좌에 앉히려 했던 다브엘의 아들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아람어 이름이기에 아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임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디글랏빌레셀의 조공 목록에 다메섹의 르신과 사마리아의 므나헴과 함께 언급된 두로 왕 투바일(Tubail)을 자주 다브엘과 일치시키지만, 이런 추측은 유다의 다윗 왕조 전통과 충돌합니다. 모계가 다브엘 집안 출신으로 반앗수르 정책에 동조하는 다윗 가문에 속한 인물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불확실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하스를 제거하려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협이 매우 구체적이고 심각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통치는 다윗의 후손에 의해 행해질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7-9)

삶의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두려워하며 마음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위태롭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강한 오른팔이 붙잡고 계심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신을 위해 우리와 함께하하시고 싸우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7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7-9)

 

인간적인 연합군의 계획은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유다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르신의 결정도 사마리아의 결정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생의 서고 넘어짐을 결정하십니다.

 

(1) 무조건적 구원 약속(7-9)

 

7절은 무조건적인 구원 약속입니다. 아하스를 제거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대신 왕으로 세우려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계획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8a절과 9절은 이들의 계획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람의 다메섹이 유다를 위협하지만, 이것은 르신의 머리에서 나온 결정일 뿐입니다. 에브라임의 사마리아도 아람의 다메섹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에브라임이 하나님 백성에 속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다윗 왕조와 유다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를 경영하시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적 약속이 9절에서 조건적 약속으로 옮겨갑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와 유다의 미래가 당신의 약속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위기의 한복판에 여호와께서 계심을, 그분만이 이 위기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하스와 그의 백성이 나단을 통해 다윗 집안에 주어진 약속(사무엘하 7:17)에 굳건히 선다면 다윗 왕조는 흔들리지 않겠지만, 다윗 왕조의 신학적 토대를 부정하고 정치적 선택에 의존한다면 다윗 왕조의 미래는 불투명해집니다.

 

(2) 조건적 구원 약속(9b)

 

무조건적 약속과 조건적 약속이 함께 주어져서 언뜻 충돌처럼 보이지만, 이 두 약속은 보충적 관계에 있습니다. 7절의 무조건적 약속은 시리아-에브라임의 위협이라는 특정 사건에 한정된, 아하스 개인에게 주는 구체적인 약속이고, 9b절의 조건적 약속은 지속적인 영향을 갖는 ‘너희’에게 주는 포괄적 약속입니다. 두 약속을 함께 읽으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는 르신과 베가의 계획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은 ‘그들만의 결정’이라 아하스의 태도와 상관없이 반드시 실패로 끝나지만, 시리아 에브라임 위기 때 주어진 무조건적인 구원 약속은 아하스의 태도에 따라 지속될 수도 일회적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아하스와 그의 백성이 여호와의 구원 약속에 전적으로 의존할 때만 다윗 왕조의 미래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해집니다. 뒤따르는 두 번째 말씀(10-17)은 9b절의 약속이 수반된 권면이 아하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일도, 사람도, 서거나 무너지는 것은 다 하나님이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일도, 열강이 만드는 역사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십니다. 그분의 주권을 온전히 믿을 때 비로소 평안할 수 있습니다. 주권을 믿는 것은 운명론적 체념이 아닌 약속에 근거한 신뢰요 사랑의 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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