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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6-01)

 


그루터기를 위해 부름 받은 이사야

이사야 6장 1-13절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 확신은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약속을 알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알고 신뢰할 때만, 인간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여호와를 봅니다. 웃시야의 왕권이 그의 손자 아하스에게로 옮겨지는 정치적 혼란기에 여호와께서는 온 땅에 미치는 당신의 왕권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십니다. 지상의 왕이 죽었다고 왕이 부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왕궁의 왕이 아니라 하늘의 왕 여호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보좌의 환상(1-4)

세상은 점점 어두워져서 진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회복의 강을 건너버린 것 같습니다. 참으로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 그리고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영적인 기회입니다. 이사야는 어려운 시기에 부름을 받습니다.

 

1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1-4)

 

하나님께서는 배신한 북이스라엘이 간음하자 내쫓으며 이혼서까지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지켜본 자매 유다는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죄악을 답습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실패를 통해 경고해 주십니다.

 

(1) 보좌의 하나님(1)

 

남 유다 왕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 왕 요하스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약 15년간 북이스라엘에 잡혀 있다가 주전 782년 요하스가 죽고, 여호로함 2세가 직위하자 석방됩니다. 남 유다로 돌아온 아마샤는 15년간 섭정하다가 살해당합니다. 이후 웃시야는 독립적인 통치력을 발휘해 남 유다를 안정적으로 통치합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조공을 받친 목록에서 웃시야가 빠진 것을 보면, 유다는 웃시야 통치 기간 동안은 앗수르에게 대항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은 웃시야에게 많은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향력 있는 왕이 죽은 후에 이사야를 부르시며 인간 왕이 아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합니다.

 

본문주해 1-4절 보좌의 환상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환상 가운데 하늘보좌에 앉아계신 여호와를 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해’는 단순히 환상의 시점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왕권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52년간 강력한 왕권으로 남 유다를 통치했던 왕의 죽음은 나라를 혼란됩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왕궁에서 통치하던 왕이 죽던 해에 하늘 보좌에서 온 땅을 통치하시는 왕 여호와를 봅니다. 인간 왕에 대한 기대가 살라진 그 때에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왕궁에 왕이 부재할지라도 유다와 예루살렘에 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늘의 왕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왕임을 알아야 합니다. ‘높이 들린 보좌’는 왕이신 여호와의 무한한 능력과 우주적 통치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왕권을 상징합니다. 어떤 존재도, 어떤 사건도 그분의 드높은 보좌를 흔들 수 없습니다. ‘옷자락’은 왕의 겉옷 끝자락 장식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왕의 겉옷 끝자락만으로도 성전(왕궁)이 가득 찹니다. 성전이 그분의 왕적 영광과 권능의 작은 일부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높이 들린 보좌’는 수직적 차원에서, 그의 옷자락은 수평적 차원에서 여호와 왕권의 무한한 크기와 위엄을 보여줍니다.

 

(2) 스랍들의 모습(2)

 

이사야의 시선이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옷자락에서 그분 주변의 스랍들로 옮겨갑니다. ‘스랍’은 이곳에만 등장하는 천상적 존재로, 불꽃을 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있는 그룹과는 구별됩니다. 그들은 불꽃을 내는 존재이지만 여호와 앞에서는 자신들의 얼굴을 가린 채로 겸손하게 수종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거룩함과 영광의 빛을 결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모시고 서 있는 스랍들의 자세가 특별합니다. 세 쌍의 날개를 갖고 있지만, 이들은 두 쌍의 날개로는 얼굴과 발(하체)을 가리고 한 쌍의 날개로 만납니다. 세 쌍의 날개는 한 쌍의 날개를 세 배로 확장한 것인데, 여기서는 몸을 가리는 데 두 쌍이 사용됩니다. 여호와를 아주 가까이서 보좌하는 스랍이지만 그분의 거룩함에 생명을 잃지 않으려면 날개로 온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함은 천상적 존재인 스랍에게도 치명적입니다. 왕이신 여호와와 그분을 모시고 서있는 천상적 존재인 스랍 사이의 간격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절대 간격입니다. 그분의 권능과 거룩함 앞에 노출된 자는 누구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3) 스랍들의 찬양(3-4)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소리가 성전을 흔들며 그곳에 충만합니다. 스랍들에게는 찬양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외면하고 멸시하는 유다 백성들과는 달리, 그분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린 스랍들의 모습입니다.

찬양의 첫 번째 대상인 여호와의 거룩함은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신학이지만, 이를 표현한 ‘거룩 삼창’(trishagion)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거룩 삼창’은 여호와의 거룩함을 최상급으로 표현합니다. 여호와의 거룩함은 때로는 심판의 능력으로, 때로는 구원의 능력으로 계시됩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독점적 왕권을 배경으로 합니다.

찬양의 두 번째 대상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세 번이나 ‘충만하다’라는 동사가 나타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강조되어집니다(1,3,4).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는 이스라엘과 앗수르를 포함한 모든 나라가 그분의 왕권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절대자의 거룩함과 왕권을 찬양하는 스랍들의 소리에 성전의 문지방 터가 요동합니다. 성전건축 신학에 따르면 성전 입구의 흔들림은 성전 자체의 동요로 심판의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지만, 여기서는 성전에 충만한 연기와 함께 신현의 변형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환상에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동반하는 현상이 스랍들의 창화 소리에 적용되면서 흔들림의 강도가 약화됩니다(‘요동하며’). 또 이사야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기에 구름 대신 연기가 그분의 모습을 감추는 역할을 맡습니다.

 

부정의 고백과 죄사함(5-7)

정결케 된 입술만이 온전한 찬양을 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역자는 정결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입술로는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정함을 인식하고 주님의 은총에 맡기는 것입니다.

 

5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5-7)

 

유다의 죄가 심각해지자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배역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복에 필요한 것은 철저한 죄의 자복이다. 긍휼이 풍성하시고 한 없이 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1) 이사야의 반응(5)

 

만왕의 왕 여호와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출현 앞에 이사야는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입술이 부정한 자’는 만군의 여호와를 조롱하고 멸시한 죄를 상기시킵니다. 유다 백성들은 입과 행동으로 여호와를 경멸했기에 화(禍)의 대상으로 선언됩니다. 이들과 달리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기에 자신의 부정함을 부인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대로 들어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에 그에게는 멸망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입술의 부정’은 입에서 나오는 죄나 제의적 음식 규정의 위반을 시사 하는 언급이 아닙니다. ‘입술의 정화’(6)를 때로는 예언자 직무와 관련지어 이해하기도 하지만, ‘입술의 부정’이 백성에게도 적용되기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입술은 전체의 대표로, 10절에 나오는 신체 기관(마음, 귀, 눈)과 관련하여 선택된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뵈온 여호와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도 예언자의 입에서는 특별합니다. 심판의 문맥에서 여호와를 왕으로 부르는 경우가 없고, 언제나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한 문맥에 등장합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왕이신 여호와를 본 것은 그분 백성의 운명이 심판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암시합니다.

이사야의 부정함이 스랍들의 제의적 정화의식을 통해 이사야 입술에서 제거됩니다. 악과 죄가 사하여졌다는 선언과 함께 속죄에 대한 확증이 주어집니다. 스랍의 해석은 더러움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잘못임을 시사 합니다. 이러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도 하나님에 의해 사해짐을 시사합니다.

 

(2) 죄사함(6-7)

 

문제는 ‘예언자 이사야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범했는가?’입니다. 아마도 5절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는 그의 부정함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부정함에서 기인했음을 보여줍니다. 부정한 물건이나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도 부정해지는 것처럼, 이사야는 부정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았기에 부정해졌습니다. 부정함을 인정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백성에 일치시킵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죄사함은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전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부정함(죄)를 인정하고 고백한 이사야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진 사건은 죄로 심판받을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가 됩니다.

 

완악함과 그 결과(8-13)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전에 그분의 사역을 감당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 사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히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 때문에 감당하는 사역은 훨씬 더 즐겁고 복됩니다. 소명을 받은 이사야에게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8-13)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자신들을 시온으로 데려와 이루실 약속을 주십니다. 지식과 명철로 양육할 지도자와 언약궤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나라를 주실 것이며, 예루살렘이 예배의 중심지가 되고, 분열된 형제가 하나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참 회복의 소망이 되십니다.

 

(1) 이사야의 파견(8)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사야의 긍정적인 반응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사야의 책임 있는 결단에 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응답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속죄의 은혜에 근거한 자발적인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어전회의의 결정을 이스라엘에 전달할 메신저를 찾는 하나님께 이사야는 자신을 보내달라고 자천합니다. 그의 헌신은 하나님의 속량에 대한 그의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맡기신 사명은 예언자들의 통상적인 사명을 뒤집는 충격적인 것입니다.

 

(2) 이사야의 사명(9-10)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뜻밖에 명령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기름지게 하고 그 귀를 무겁게 하며 그 눈을 들러붙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9-10). 부조리해 보이는 여호와의 명령은 백성이 예언자의 선포를 거절하는 일이 그분의 의지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심판 결정과 이스라엘의 책임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오랜 기간 동안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거역하고 백성들의 패역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거절을 미리 아시고 이를 당신의 심판 계획에 반영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완고하게 이사야의 선포를 거절하면서 그분의 심판 결정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의 길로만 내달리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의 원인자이자 심판자가 되십니다. 이스라엘을 심판에서 구하려고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이 이스라엘의 완고한 거절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3) 완악함의 결말(11-13)

 

이해할 수 없는 완고함과 그분에 대한 맹목적 거절이 이스라엘을 멸망에 떨어뜨립니다. 많은 사람이 멀리 유배를 떠나고 땅은 황량하게 남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를 묻는 이사야의 질문(‘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 때까지니라’)은 완악함이 초래한 멸망 이후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역설적이지만, 나라의 멸망이 완악함의 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멸망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결과임을 인정할 때, 이사야의 경우처럼(5-7)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구원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마지막 절은 ‘까지’ 이후를 조심스럽게 전망합니다. 일부 남은 것마저 파괴돼 온 땅이 황무지가 되지만, 하나님 백성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아 거기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거룩한 씨’가 남아 다시 자랄 것입니다. 철저한 멸망 후에, 남은 자들에 의해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다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을 교훈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고,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우리 구원의 소망은 오로지 신실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믿는 자는 방종하거나 죄아래 머물지 말고, 순종의 종으로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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