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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3-02)

 


백성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이사야 3장 13절-4장 6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최고의 한수입니다. 바둑에 ‘자충수(自充手)’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길을 메우는 가장 좋지 않는 수입니다. 충분히 살 수 있는 돌이 자충수를 두게 되면 꼼짝없이 죽고 맙니다. 지금 유다 역시 자충수를 연달아 두고 있습니다. 유다의 자충수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합시다.

 

  • 여호와께서 재판관이 되셔서 당신의 백성을 열망의 길로 이끈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십니다. 그분은 이들이 포도원을 망쳐놓았다고 고발하십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는커녕 그들의 얼마 남지 않은 재산마저 강탈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돌볼 책임이 있는 자들이 자기 탐욕을 만족시키는 데만 열심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의 고발(13-15)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지도자들의 통치가 백성들을 혼란하게 하고, 또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게 한다고 탄식하십니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도자, 겁쟁이 여인 같은 지도자를 보내신 것은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버린 죄의 심판입니다. 그 시대의 불의한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문책하십니다.

 

13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14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15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도다(13-15)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공동체의 거룩함이 훼손된 데는 장로들, 고관들의 책임 큽니다. 권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므로 그것을 맡은 자들의 욕망과 편의를 위해 남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들의 권위와 권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1) 일어나시는 여호와(13)

 

여호와께서 재판정에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고발하시는(14-15) 현재의 문맥에서 ‘백성들’은 이해가 어렵습니다. 14절과 15절은 단수를 사용하여 ‘자기 백성’ 또는 ‘내 백성’으로 부릅니다. 재판이 이스라엘에 한정되기에 ‘민족들’은 아닙니다. 아마도 예루살렘과 유다를 독자적 단위로 간주한 표현 같습니다. 12절처럼 14절에서도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분리되고, 후자는 거듭 여호와의 백성으로 불립니다. 여호와의 소송 상대가 ‘백성들’에서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로 좁혀집니다. 백성은 이들에게 약탈당한 자들로, 여호와의 연민의 대상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돌보고 지킬 책임이 있는 자들을 심리하여 판결하기 위해 재판정에 서십니다.

 

(2) 포도원을 삼키는 자(14)

 

통치자들은 포도원을 삼킨 자들입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상입니다(5:1-7). 여호와께서 심은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을 포도원 농부인 장로들과 고관들이 제 탐욕을 위해 망쳐 놓았습니다.

 

(3) 폭력적 착취(15)

 

공정한 법 집행의 책임을 진 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기회를 이용해 가난한 자들의 재산마저 빼앗아 제 집을 약탈물로 가득 채웠습니다. 맷돌로 곡식을 갈듯,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착취하고 이들의 법적 권리를 짓밟았습니다. 여호와께서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가난한 자를 ‘내 백성’이라 부르시면서 이들을 위해 개입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폭력은 곧 이들의 보호자이신 여호와께 행해지는 불의와 폭력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을 짓밟으며 그들의 얼굴을 짓뭉개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짓밟는 행위와 같습니다.

 

시온의 딸들의 사치(16-24)

사람들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는 사람에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개혁을 위해 지도력을 발휘하라 요청하지만, 부탁받은 사람은 자신도 먹을 것이 없고 백성 앞에 나아갈 때 걸칠 마땅한 겉옷도 없다며 간절한 요청을 거절합니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유다의 모습이 이 시대의 사회상과 닮아 있습니다.

 

16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17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게 하시리라 18주께서 그 날에 그들이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19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20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21반지와 코 고리와 22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23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24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기를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 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할 것이며(16-24)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부유층 여인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본문은 그들의 화려한 치장과 오만한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만함에 하나님의 심판은 각 영역과 대상별로 구체적이며 강력하게 예고되고 있습니다.

 

(1) 고발(16)

 

예루살렘과 유다의 장로들과 고관들의 탐욕과 불법을 고발한 예언자는 이제 사치와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두는 ‘시온의 딸들’(지배계층의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려 이들을 고발합니다.

 

(2) 심판 선언(17-24)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며 교태를 부리는 시온의 여자들은 수치와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화려함과 사치를 자랑하며 즐길 때, 예기치 않게 여호와께서 이들을 치욕거리로 만들어 내치십니다. 그날에 그분은 이들이 자랑하던 패물과 장신구를 다 빼앗아버리십니다. 몸에서는 향수 냄새 대신 썩은 냄새가 나고, 허리에는 화려한 띠 대신 노끈이 둘리고, 아름답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 대신 대머리(수치의 상징)가 되고, 화사한 옷 대신 굵은 베옷이 걸쳐지고, 아름다움 대신 수치가 자리합니다. 전란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만 부지하고 길거리에 내몰린 여자의 더럽고 추한 모습입니다.

지배 계층의 남자들은 재물을 얻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고 약자를 착취하고, 이들의 아내와 딸은 불의한 재물로 몸치장과 사치를 즐겼습니다. 제 욕심만 차리고 이웃의 고난에 무관심했다는 점에서 남자나 여자나 차이가 없었습니다(아모스 4:1-3).

 

황폐해진 시온(3:25-4:1)

하나님의 심판은 참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죄악상을 계층별로 조목조목 언급하신 후에 전쟁을 선포하십니다. 전쟁 후의 사회상도 보여 주십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가차 없는 보응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역설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25너희의 장정은 칼에, 너희의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26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폐하여 땅에 앉으리라 4:1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 하리라(25-4:1)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 시온의 장정과 용사가 다 칼에 죽고, 시온의 성문이 이들의 죽음을 탄식하고 통곡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문 안쪽에 마련된 광장은 공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시온은 자식이 없는 과부처럼 혼자가 돼 땅바닥에 주저앉습니다. 자식이 없는 과부에게 미래가 없는 것처럼, 시온은 남편뿐만 아니라 자식도 칼에 죽었기에 절망만 남았습니다. ‘땅에 앉음’은 애도 행위에 속합니다. 예루살렘의 극단적 혼란으로 전통적인 관습마저 기능을 상실합니다.

 

전쟁의 참화로 남자가 없기에 ‘일곱 여자’가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한다는 조건으로 한 남자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혼자됨’과 ‘자식 없음’의 수치를 면하기 위해 결혼을 애원합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에게 남편과 자식이 없음은 그 자체로 수치를 의미했습니다.

 

시온의 구원(4:2-6)

혹독한 심판이 지난 뒤, 시온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회복의 나리 선포됩니다. 심판 이후에 임하는 회복의 날은 심판의 목적이 멸망이 아닌 회복임을 알려 줍니다. 회복의 날은 은헤의 날이며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봄날과 같은 기쁨과 감격의 시간입니다.

 

2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3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5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6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2-6)

 

성도에게 임하는 심판은 결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고 포기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심판이 지나간 뒤 임하는 회복의 풍경은 하나님께서 어그러진 모든 것을 바로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선물로 주신다는 교훈을 줍니다.

 

(1) 시온의 풍요(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는 날, 열매 맺지 못하는 황무지였던 예루살렘이 풍성하게 결실을 맺는 옥토로 변하고, 전쟁의 파국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축복으로 주어지는 땅의 열매를 자랑합니다. ‘땅의 소산’은 땅의 풍요로운 결실을, ‘여호와의 싹’은 ‘여호와께서 땅에서 돋아나게 하실 싹’을 의미합니다.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찬양하는 문맥에 자주 사용됩니다(예레미야 3:19; 에스겔 20:6,15). 구원 시대에 땅이 맺을 결실이 종말론적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주변 나라들로부터 구별해주는 ‘아름다움’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됩니다. 구원받은 시온에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 시온의 정화(3-4)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파국에서 보호받고 살아남은 자만 시온에 거주하게 됩니다(3). 거룩함이 이들의 특성이 됩니다. 옛 전통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거룩해야 합니다. 죄로 더러워진 이스라엘이 정화의 심판을 통해 깨끗해지기에, 이들의 거룩함에는 윤리적 성격이 주어집니다. 종말론적 공동체는 죄(더러움)에서 떠나야 합니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는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 다시는 죄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심판은 정화를 위한 심판이었습니다. 정화를 통해 종말론적 공동체가 준비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더러움과 피흘림을 제거하시고 예루살렘을 깨끗하게 하십니다(4). 심판하는 영(심판의 영)은 심판을 통해 찌꺼기를 씻어내고 불순물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1:25), 소멸하는 영(불의 영)도 죄를 태우고 단련하시는 그분의 능력입니다(6:6-7), ‘시온의 딸들’은 3:16의 ‘시온의 딸들’과 달리 예루살렘 주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배설물을 의미하는 ‘더러움’은 현재 문맥에서는 제의적 부정보다는 윤리적 잘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3) 시온의 보호(5-6)

 

‘예루살렘의 피’는 하나님의 질서와 의지를 거슬러 공동체를 파괴하는 폭력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을 ‘피 흘린 성읍’(피의 도성)으로 부릅니다(22:2; 24:6,9; 나훔 3:1). 광야에서 출애굽 세대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처럼(출애굽기 13:21-22; 33:9; 40:34,38) 하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현존하셔서 이들을 이끄시고 위험에서 보호하십니다(5). 그분은 예루살렘과 거기에 모인 회중을 보호하기 위해 낮에는 구름을, 밤에는 연기와 타오르는 불의 광채를 창조하십니다. 구름과 연기와 불은 원래 신현의 동반 현상에 속한 것으로, 여호와의 현존 자체가 시온을 밤낮으로 보호하실 것을 시사합니다. ‘만드시고’의 ‘바라’는 창조신학에 뿌리를 둔 단어로, 여호와께서 시온에 현존하시는 종말론적 사건이 과거의 갱신이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행위에 속함을 시사합니다. 구원받은 시온의 영광 위에 그분의 보호하시는 덮개 (지붕)가 덮임으로써, 여호와의 현존이 시온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미래의 시온은 여호와의 지속적인 보호 아래 어떤 위험이나 부족함도 없이 살게 됩니다. 초막의 비유를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보호를 약속합니다(6). 시온의 하늘 위에 지붕을 덮어서 그 영광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 피난처와 안식처를 마련하십니다. 한낮의 뜨거운 폭염과 갑작스럽게 내리는 폭우를 피하기 위해 지은 초막처럼 시온 산에 임재하시는 그분의 영광이 예루살렘과 그 주민을 위험에서 지켜 보호하십니다(25:4). 하나님께서 영속적으로 지키시기에 구원받은 예루살렘 공동체는 성의 안전을 위해 더 이상 경제력이나 군사력, 정치적 능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28:15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애굽에서 피난처와 은신처를 찾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멸망의 날인 동시에 구원과 회복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부정한 것을 제거하시고 백성들을 정결하게 만드십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에 임재 하셔서 눈물을 씻기시고 영광으로 덮으실 하나님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힘들더라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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