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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1-02)


사죄를 위한 하나님의 변론에로의 초청

이사야 1장 21-31절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혼란스런 국제 정세와 시장 절대주의 시스템, 종교적인 부패와 사회적 관계의 파괴, 만연하는 격차와 차별 등에 처해 있습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고민이 깊습니다. 소명을 받은 우리가 세상의 희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우상숭배와 불의로 가득 찬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애가의 양식을 활용해 예루살렘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는 아직 살아 있지만, 윤리적-사회적으로는 속속들이 부패한 성읍입니다. 한때 정의와 공의가 충만했던 성읍이 이제는 살인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예루살렘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신실했던 처음 상태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시온을 정화하는 심판(21-26)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우리 삶에서 깨어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변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변질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으면 변절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신실하던 자들이 범죄자로 변합니다. 고위관료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기보다 이권을 따라 뇌물을 받고 힘없는 자들을 억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21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22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3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24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25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26내가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리라 하셨나니(21-26)

 

신실했던 예루살렘 성읍이 창녀가 되고, 공의 가득하던 도성에 살인자가 판칩니다. 온갖 비리와 부정, 뇌물이 성행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실낱같던 희망이 끊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기 민망한 지경입니다. 탈현실의 신앙시선을 돌이켜 역사 속 하나님 나라를 직시해야 합니다.

 

(1) 예언자의 고발(21-23)

 

이사야는 신실한 아내와 같이 남편의 뜻을 따르던 예루살렘이 그 사랑과 신의를 버리고 창기와 같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창기에 비유해 고발합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다윗 왕조를 통해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신 신실하던 성읍이었는데, ‘이제는’ 불법과 불의가 판치고 살인자들이 들끓는 더러운 성읍이 됐습니다(21). 그 안타까움을 이사야는 ‘어찌하여’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신실하던’의 네에만(נאמן)은 ‘토대가 견고한’, ‘신뢰할 만한’, ‘충실한’을 의미하고, 여기서는 ‘정의와 공의’에 신실했음을 의미합니다.

호세아는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의 성적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을 창기로 고발했는데, 이사야는 사회적 불법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을 창기로 부릅니다. 돈에 몸을 파는 창기가 신실하지 않은 것처럼, 예루살렘도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탄식의 대상이 된 원인으로 지도자들의 패악을 지적합니다. 그곳에서는 권력과 돈으로 정의와 공의를 살 수 있었습니다. 권력자들은 불의와 불법을 주저하지 않고 행했으며 만족을 모르는 탐욕의 굶주림을 채워갔습니다. ‘살인자’는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해 이웃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를 가리킵니다(출애굽기 20:13).

‘정의’(미슈파트משפט)는 사법적 행위의 구체적 실천을, 공의(체데크/צדק)는 공동체적 삶이 요청하는 타인에 대한 근본적 태도를 의미하기에 공의는 특히 재판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내적 부패를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21)라고 두 개의 비유를 통해서 고발합니다(22).

첫째 ‘찌꺼기가 된 은’ 비유는 세심한 노력의 부족을 보여줍니다. 은을 얻기 위해 용광로 작업을 할 때 충분한 노력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산화연이 섞인 은이 나와 쓸모없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지만, 사람들은 이를 제의적 영역에서 형식적으로만 준수했습니다. 그 결과 축복과 구원과 생명을 약속한 말씀이 저주와 심판과 죽음을 가져오는 말씀(찌꺼기)으로 변질됐습니다.

다음으로 ‘물이 섞인 포도주’ 비유는 의도적 거짓을 고발합니다. 술장사꾼이 술에 물을 넣어 팔면서 부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주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했습니다. 공동체의 연대성에 주목하여 삶의 전반적 영역에서 계명과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여호와종교를 제사 행위를 통한 자기 구원의 제의종교로 변질시켰습니다(1:10-17).

예루살렘의 타락에는 지도자들의 잘못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루살렘의 고관들은 다 패역하여 도둑과 한패였습니다(23). 뇌물과 사례금을 받고 약한 자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거나 무죄한 자를 죽음에 넘겨준다는 점에서, 이들은 도둑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공의보다 제 이익을 앞세우는 자들에게 가난한 고아와 과부의 송사는 차라리 성가신 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뇌물의 수령을 금지하는 율법(출애굽기 23:8; 신명기 16:19; 27:25)은 사문화된 지 오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 선언(24-26)

 

예루살렘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문제점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개입하시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대적에 대한 보응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대적은 이방인의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고 사회적인 불의를 일삼는 지도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심판 선언(24-26)은 예언자의 탄식 어린 고발(21-23)과 구조적으로 일치합니다. 양자 사이에서 24a절을 중심으로 하는 교차대구적 구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대적에게 보복을 선언하시는 24b절은 고관들을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도둑으로 고발하는 23절에, 찌꺼기와 혼잡물의 제거를 약속하시는 25절은 찌꺼기가 된 은과 물이 섞인 포도주로 고발하는 22절에, 재판관과 모사의 회복을 약속하는 26a절은 정의와 공의의 유린을 고발하는 21b절에, ‘신실한 고을’의 26b절은 ‘신실하던 성읍’의 21a절에 서로 상응합니다.

예언자의 책망에 이어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여호와의 위협적 말씀이 나와, 여호와의 심판이 언약 관계의 파기에서 나오는 필연적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께서 신실하던 성읍을 살인자와 도둑의 성읍으로 타락시킨 자들에게 보복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24).

정의와 공의에 따라 통치해야 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그분의 대적이며 원수였습니다. 신적 분노를 인간적으로 표현한 ‘보복’은 사법적 정의의 실천과 관련한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악인에게 보복하심으로써 훼손된 정의를 바로 세우십니다. 22절과 짝을 이루는 25절에서 여호와의 원수와 대적의 범위가 예루살렘 주민들로 확대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호자로 믿는 여호와께서 손을 들어 이들을 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창기와 같이 만든 지도자들을 더 이상 묵인하지 않으시고 보응하십니다. 물론 다시 살리기 위한 징벌입니다. 잿물로 더러운 때를 용해시켜 깨끗하게 만들듯이, 찌꺼기가 된 예루살렘을 이제 여호와께서 직접 다시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은으로 만드십니다.

이것은 심판의 목적이 이스라엘의 멸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에 있음을, 더불어 이스라엘의 구원사적 미래가 오직 여호와의 주도로 이루어질 것을 시사 합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여호와이시기에 개입하실 권리가 있으시며,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시기에 보응하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한 지도자들을 보응을 통해 그들의 문제를 제거하시고 정결케 하겠다고 하십니다. 정화를 통해 깨끗하게 된 예루살렘은 잃어버린 옛 모습을 되찾습니다(26). 여호와께서 은혜의 찌꺼기를 씻어내시고 포도주의 석인 혼합물을 제거시키시고 본래의 가치를 회복하게 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의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모사들(고문관들)을 ‘본래’와 같이 세우십니다. 재판관과 모사에 의해 정의와 공의가 회복되고, 예루살렘은 다시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로 불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치를 되찾고 본분과 의무를 감당하게 하십니다.

 

죄인의 멸망(27-31)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회복을 위해 심판하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참지 못하시고 오염을 견디지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순결하고 정결하게 만드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화의 과정을 통한 순수한 신앙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27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28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29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27-31)

 

이사야는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의로운 개입으로 시온이 불의와 패역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루살렘과 시온에 부족한 공의를 하나님께서 채우심으로 회복과 구속이 이루어집니다. 현재 문맥에서 27-28절은 심판을 통한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는 21-26절과 우상숭배자들의 멸망을 선포하는 29-31절을 잇는 역할을 합니다.

 

(1) 시온의 구원과 악인의 멸망(27-31)

 

미래에 있을 시온의 구속에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패역한 짓을 행한 자들은 정의로 구속받은 시온에 살지 못합니다. 그 돌아온 자들은 회개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시온과 거기에 사는 회개한 자들은 정의와 공의로 구속함을 받습니다. ‘구속함을 받다’의 (파다/פדה)는 원래 ‘값을 치르고 도로 찾다’를 의미합니다. 시온을 구속하는 정의와 공의의 주체는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정의와 공의가 가져다준 구원 시대에 참여하는 회개한 자들은 정의와 공의의 실천을 통해 그분의 구속을 경험하며 삽니다.

 

회개한 자들과 달리 패역한 자(반역자)와 죄인, 곧 여호와를 버린 자는 미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패역한 자’는 2절의 동사 ‘거역하다(파샤/עשׁפ)’의 현재분사이고, ‘죄인’은 4절의 ‘범죄한’과 어근(하타 kon)이 같으며, ‘여호와를 버린 자’는 4절의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에 그대로 일치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결케 하시고 회복을 이루시는 여호와께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심판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구속함을 받은 자와 멸망하는 자로 나뉩니다.

 

(2) 우상숭배자들의 종말(29-31)

 

이사야는 우상숭배자를 ‘여호와를 버린 자’의 구체적인 예로 제시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식들은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가나안의 풍습을 따라갔습니다. 동산을 찾아가 상수리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상을 섬긴 자들에게 안녕과 생명과 풍요 대신 부끄러움과 수치가 이들의 몫으로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시든 상수리나무처럼, 물 없는 동산처럼 됩니다.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힘과 권력을 자랑하며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불에 타는 것과 같이 소멸되고 맙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과 행위로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져 상수리나무(신목) 아래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의 거절로 응답하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무는 시들어버리고 물은 마른 것과 같이 우상숭배의 허무함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를 섬길지 분명해집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시편 36:10; 예레미야 2:13)를 떠난 자들에게는 죽음과 멸망뿐입니다. ‘강한 자’도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삼오라기’는 삼베를 만드는 데 적합하지 못한 찌꺼기로, 불이 잘 붙기 때문에 주로 불을 붙이는 데 사용됐습니다. 그의 행위는 상수리나무가 있는 동산에서의 처신을 가리킵니다. 우상숭배자의 행위가 불에 태워서 ‘불티’가 됩니다. 강한 자의 우상숭배가 불티가 되어 자신을 삼오라기 같이 태워버립니다. 멸망이 시작되면 그 누구도 그들의 멸망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끌 사람이 없으리라’는 관용구로(아모스 5:6; 예레미야 4:4; 21:12), 신적 분노의 파괴적 힘을 보여줍니다. 우상숭배의 결말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완전한 멸망입니다.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결정합니다.


우상의 사회는 비리와 부정, 부의 편중, 폭력과 힘의 숭배, 비인간화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공평과 인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는 외면을 받습니다. 종교의 성역에 안주할 것인지, 치열하게 불의한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며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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