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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3-01)

 


백성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이사야 3장 1-12절


 

믿음은 현재형입니다. 믿음은 과거에 집착하거나 불투명한 미래에 소망을 두지 않고 지금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유다 사회를 향해 심판을 선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들이 의회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해 버리십니다. 그것들을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했던 거짓 도움입니다. 심판은 거짓을 제거함으로 참과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 땅에 은금과 보화가 가득하고 마필과 병거가 무수하며 점쟁이와 우상이 가득할지라도(2:7-8) 여호와의 날에 아무 도움이 죄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는 것을 모두 제하여 버리심으로써, 이들이 의존하는 풍족한 물적 자원(양식과 물)과 인적 자원이 참된 지팡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정치·사회적 혼란(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요소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백성이 혼돈과 무질서와 연약함을 철저히 경험함으로 기존에 의지할 만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이 사실은 전혀 의지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음을 깨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의지하는 것은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1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2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3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4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5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6혹시 사람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자기의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너는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이 폐허를 네 손아래에 두라 할 것이면 7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를 백성의 통치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1-7)

 

2장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라는 권고로 결론이 났습니다. 계속해서 3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의지하는 것들을 제거하실 것이라는 예고로 시작합니다.

 

(1) 양식과 물의 제거(1)

 

1-5절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예루살렘과 유다가 겪게 될 극단적 혼란과 공황 상태에 관한 기술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존하는 것’(지팡이와 막대기)을 모두 제거해버리실 것입니다. 제거의 방식은 달리 언급하지 않고, 제거의 대상에 집중합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불러 당신에게 등 돌린 자들을 치십니다(10:6). 여호와께서 제하여버리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열거됩니다(1b-3). 양식과 물은 생존의 필수품으로, 특히 전시에 예루살렘 성의 방어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입니다. 열왕기하 25:13에 의하면,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양식이 떨어져 바벨론 군대에 함락 당했습니다.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은 문자적으로는 ‘모든 빵 막대기와 모든 물 막대기’로, 의지해야 할 지팡이인 여호와를 떠나 자신들의 경제력을 의지한(2:7) 예루살렘과 유다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2) 지도자들을 제거하심(2-4)

 

하나님께서는 양식과 물을 제거하실 뿐만 아니라 용사로부터 시작해 요술자에게 이르기까지 군사, 재판, 정치, 행정, 종교, 기술 등 각 분야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사회 지도자들을 제거하십니다.

‘용사’는 최고의 병사로, 왕의 친위부대를 구성하는(삼하 23:89) 용병을 가리킵니다. ‘전사’는 징집병(삿 20:17; 민 31:28,49; 신 2:14-16)이나 군사 훈련을 받은 자(삼상 16:18;17:33; 삼하 17:8)를 가리킵니다. 재판관은 통치 조직의 일원으로, 왕의 관료에 속합니다. 함께 언급된 ‘선지자(예언자)’가 직분에 속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언자가 황홀경 가운데 환상을 보는 자들이라면, ‘복술자(점쟁이)’는 신탁을 내리는 기술자에 속합니다. 기능상 예언자와 점쟁이는 서로 중첩됩니다. ‘장로’는 씨족의 우두머리로 사회적·정치적·사법적 영역에서 상당한 권위와 영향력을 인정받은 자들입니다. ‘오십부장’은 군 조직의 핵심에 속하는 장교 집단입니다(삼상 8:12), ‘귀인’은 왕과 밀접하게 연결된 집단으로, 9:15에서는 ‘장로’와, 욥기 22:8에서는 ‘권세 있는 자’와 함께 언급됩니다. ‘모사’(고문관)는 왕의 자문관을 가리킵니다. ‘마술사’(장인)와 ‘요술자’는 기능상 동의어로, 3절의 ‘복술자’와 함께 공적 종교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됐지만, 민간 신앙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2:6).

 

(3) 사회적인 혼란(4-5)

 

정치, 사회, 종교의 주요 집단이 거의 모두 열거됐는데, 특이하게 왕과 제사장은 빠졌습니다. 이사야의 고발은 왕보다 그의 배교적 정치에 집중합니다. 그에게 예루살렘의 다윗 왕조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약속이 주어진 왕조였습니다.

제사장의 타락도 이사야의 신학에 얼마간 일치합니다. 성전 제의(1:10-15)와 제사장(28:7)에 관한 고발이 없진 않지만, 이사야의 하나님은 ‘시온 산’(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여호와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복술자와 마술사와 요술자가 별다른 부정적 평가 없이 여호와 종교에서 인정받는 다른 집단들과 함께 언급된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아마도 유다와 예루살렘이 전통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해왔던 집단들도, 이교적 영향을 받은 점쟁이 집단처럼, 여호와를 떠난 자들임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4) 정치적인 혼란(6-7)

 

여호와께서 모든 분야의 권위를 제거하시자 예루살렘과 유다는 극단적인 혼란과 무질서에 빠집니다(4). ‘소년들’과 ‘아이들’이 고관이 되어 통치합니다. 정치와 사회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없는 자들이 무질서를 틈타 권력의 자리에 앉았기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됩니다. 공동체를 지탱하던 사회적 규범과 전통이 붕괴되고, 개인의 이익이 행동 규범이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권위자가 되어 힘으로 이웃을 괴롭히고 학대합니다(5).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도 존중되지 않기에 세대 간의 긴장이 힘 있는 젊은이들의 반역으로 폭발합니다. 아이가 노인의 권위와 지위를 존중하지 않고 대들며 괴롭힙니다. 당연히 계층 간의 질서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대듭니다. 예루살렘이 경험하게 될 혼란과 무질서는 6-7절의 풍자적 묘사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겉옷 한 벌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에 족합니다(6). 생존에 필요한 것을 다 빼앗긴 자들에게는 겨우 남은 겉옷 한 벌이 사회적 부와 권위로, 재앙 가운데 축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혼돈의 상황 속에서는 누구도 통치자가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7),

권위와 특권을 보장하던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자기 한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극도의 혼란기에는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혼돈의 시대에 군중이 통치자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며, 이를 채워주지 못할 때 통치자는 권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혼란의 신학적 배경(8-12)

무너지는 유다 공동체의 모습이,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의 모습들과 겹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눈을 범하지 않는 의인의 길을 걸읍시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그의 영광을 누리는 자녀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8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 9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10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11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12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8-12)

 

하나님께서 양식과 물, 지도자들을 제거해 버리시면 유다 백성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결국 또 다른 의지할 대상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하는 대상은 최악의 자충수가 될 것입니다.

 

(1) 멸망의 원인(8-9)

 

예루살렘과 유다의 유례없는 파국에는 물론 이유가 없지 않다. 이사야는 동사의 시제를 완료형으로 사용해(‘멸망하였고’, ‘엎드러졌음’) 6절에서 예고된 ‘폐허’의 심판을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선포합니다(8). ‘멸망하였고’의 카샬(לשׁכ)과 ‘폐허’의 마크셰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동사와 명사입니다. 범죄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할 심판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반드시 이루어질 사건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폐허의 심판에 떨어지는 이유는 이들의 언어(혀)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고 그분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거역한 혀는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의미하지만(예레미야 9:8; 미가 6:12; 스바냐 3:13),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여호와께 대한 신뢰를 저해하는 허튼소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눈’은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 표현으로, ‘눈’은 아마도 앞에 나온 ‘행위’와 관련해 사용된 것 같습니다. 시온 산에 계신 여호와께서 보시는데도 이들은 그분을 거역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행위를 보신 분의 심판이기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폐허는 정당합니다.

이사야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이들의 죄악을 고발합니다(9).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는 거리낌 없이 이웃을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뻔뻔스러운 태도를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는 ‘그들은 소돔처럼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며 감추려 하지 않는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부끄러움이나 주저함 없이 대놓고 죄를 범합니다. 죄에 너무 익숙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자들로, 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2)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10-11)

 

지혜의 가르침으로, 내용상 9절의 ‘화가 있을진저’에 연결됩니다. 의인에게는 복(구원)이 있어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고, 악인에게는 화(심판)가 있어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때로는 의인과 악인의 구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전쟁이나 자연재해)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의인의 운명과 악의의 운명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의 번창에도 불구하고 의를 행하며 살면, 그는 자신이 뿌린 의의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심판은 물론 ‘하나님의 의’에 근거합니다. 의인의 궁극적 승리와 구원을 고백할 수 있고 또 고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멸망에 관한 가르침은 단순한 교리적 고백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서 흔들리며 사는 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3) 백성을 오도하는 지도자들(12)

 

13-15절을 예비하는 12절은 아이들에 의한 통치를 여호와의 징벌로 선언하는 4절의 단어들을 반복함으로써 지도자들을 고발합니다. 유다 백성이 악한 길로 가서 심판을 받게 된 데는 지도자들의 핵임이 큽니다. ‘내 백성’에 연민을 느끼는 이사야(여호와)는 그들을 멸망의 길로 오도하는 지도자들을 ‘아이와 여자들’로 혹평합니다. 아이(젖먹이)가 여호와의 백성을 학대하고, 여자들이 그들을 다스립니다. 무능력하고 경험이 없는 자들이 통치자의 자리에 앉아 제 탐욕만 채웁니다. 백성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이들을 이끌어야 할 ‘인도자들’(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끌며 저들이 다닐 길을 혼란케 합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을 뿐 아니라 권력과 지위를 남용해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했습니다. 아내들에게 남편의 권력을 이용해 악에 가담했습니다. 하나님의 탄식은 심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보답을 받고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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